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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과학자 이휘소, 핵개발 의혹 사망설은 소설”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이란 제목이 인상적이다. 그동안 한국에 과학자가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이름이 떠오르는 과학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한국에도 감동을 주는 탁월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도 미지의 과학 세계에 도전하고 그 길을 개척한 과학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이 있다. 전북대 김근배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15년간의 연구를 통해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근현대 과학인들의 삶을 발굴해 냈다. 초창기 자연과학자 30명의 이야기, 어쩌면 그렇게도 영화 같은지 모르겠다.
이 책은 출생순에 따라 한국인 최초의 화학자 리용규부터 시작한다.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떠난 뒤 미국 본토로 건너가 주경야독의 만학 끝에 조선인 최초로 화학 전공 석사 학위를 받는다. 서당만 다닌 사람이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려면 대체 공부를 얼마나 했을까 싶다. 조선으로 돌아와 숭실전문 교수로 일하다 북한으로 올라간 뒤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김량하는 일제강점기 일본 최고의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에서 쌀 배아 성분과 비타민E 연구를 했다. 특히 비타민E 연구법을 가장 먼저 개발해 한국인으로서는 노벨상 후보로 처음 거론되기도 했다. 일본 유학 시절 그의 신혼집은 마치 조선인 학생 구락부 혹은 만남의 광장 같았다니 성격도 활달했던 모양이다. 1945년에는 부산수산전문학교(부경대 전신) 교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일제로부터 학교를 접수하고, 학교의 주요 자산이었던 실습용 배를 되찾았다. 학교를 위해 활발한 계획을 세웠지만 이듬해에 억울하게도 파면되고 만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으로 피난했지만 일이 있어 잠깐 서울로 올라갔다가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직후 남대문 시장 쓰레기 더미에서 <미국수학회보>를 발견하고, 거기 실린 미해결 문제를 풀어서 보내 그곳 논문에 게재된 영화보다 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있다. 대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천재 수학자 리림학이다. 그의 논문은 해방 후 한국 연구자가 국내에서 연구한 성과를 영어권 해외 학술지에 발표한 첫 사례였다. 그는 1953년 부산에서 화물선을 타고 캐나다로 건너가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삶은 수학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 정부와 불편한 관계였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그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나비 이름의 3분의 2 이상은 ‘나비 박사’ 석주명이 지은 것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75만 개체에 이르는 나비 표본을 수집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렀다. 하긴 목숨보다 귀한 그 많은 나비 표본을 두고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불에 탄 과학박물관 재건회의에 가는 길에 공산당으로 오인돼 총을 맞아 사망했다니, 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인가.
이휘소는 한국이 자랑하는 가장 저명한 이론물리학자다. 당대 물리학에서 가장 앞서갔던 그의 연구는 스티븐 와인버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휘소를 ‘노벨상 메이커’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불과 41세 때 대형 트럭과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뒤 한국의 원자폭탄 개발 비밀 프로젝트에 연루되었다는 허구를 담은 소설이 인기를 얻으며 이휘소는 잘못 신화화되고 말았다. 연구자들은 핵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그의 연구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책을 덮고 나니 우리가 한국의 과학자들을 잘 모르는 이유가 이해된다. 많은 과학자가 월북하거나 납북되었다. 한국전쟁과 이념 갈등은 여러 과학자의 목숨을 앗아갔고, 독재 정권의 통치는 해외에 체류하던 과학자들의 발을 붙들었다. 그나마 남은 과학자들조차 이념으로 재단되어 배제되고 지워졌다. 이제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마음에 새긴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그렇게 열심히 과학을 했는데, 지금 우리는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다. 김근배·이은경·선유정 지음/세로북스/752쪽/4만 9000원.
2024-04-2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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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청바지의 일생으로 살펴본 이 시대의 불공정
옷장을 열어보라. 당신은 청바지를 몇 벌이나 가지고 있나. 나는 세어보니 네 벌이었다. 누구나 몇 벌씩의 청바지는 가지고 있다. 가장 흔한 옷 중 하나. <지속 불가능한 패션 산업에 이의를 제기합니다>는 우리가 흔히 입고 버리는 청바지를 통해 현 패션 산업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부제가 거의 느와르급이다. ‘훼손, 오염, 유린과 착취로 뒤범벅된 청바지 잔혹사’다.
패션 기업가이자 연구자인 저자는 청바지의 탄생에서부터 소멸에 이르는 전 과정을 철저히 뒤쫓는다. 미국 텍사스의 목화밭에서 출발한 그의 여정은 곧바로 중국 샤오싱의 방직공장으로 옮겨간다. 그곳에서 그는 염료와 화학약품으로 뒤범벅된 강물에 압도당한다. (청바지가 될) 면화는 왜 굳이 텍사스에서 지구 반대편 중국으로 건너갈까. 고민은 방글라데시의 닭장 같은 옷 공장에 이르러 분노로 바뀐다. 2014년 방글라데시에선 서구 의류 브랜드의 대규모 하청업체인 라나 플라자의 공장이 기계 무게와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했는데, 밖에서 걸어 잠근 방화문 때문에 1134명이 죽고 250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어 저자가 찾아간 곳은 온라인 마켓 아마존 물류센터. 로봇처럼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곳을 거쳐야 비로소 우리는 한 벌의 청바지를 입을 수 있다.
저자의 여정은 여기(생산과 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소비자가 청바지를 구매한 이후의 과정에도 문제는 계속된다. 우리는 채 몇 번 입지도 않고 싫증난 청바기가 분리수거함에 들어간 이후 어떻게 되는지 관심이 없다. 아니, 비록 나에게는 쓸모가 없어졌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물건이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는 선한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의도와는 별개로 그렇게 버려지는 옷의 물량은 너무 많다. 처치불가. 결국 우리가 분리수거함에 헌 옷을 기부(?)하는 행위는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 엄청난 쓰레기를 떠넘기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길었던 저자의 여정은 아프리카 가나 크폰 매립지의 헌 옷 쓰레기산에서 비로소 끝이 난다. 수 년 전 이웃나라 르완다는 외국으로부터의 헌 옷 수입을 금지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이 당시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트럼프는 아프리카성장기회법(AGOA)에 따라 르완다에 부여하던 여러 혜택을 중단했고, 결국 르완다는 미국 쓰레기를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자국산 의류를 미국에 수출할 때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됐다.
전 세계에서 1년에 팔리는 청바지가 무려 12억 5000만 벌, 그중 미국에서만 4억 5000만 벌이 팔린다. 미국 여성들은 청바지를 평균 일곱 벌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미국산’은 없다. 왜일까. 저자는 몇 년에 걸친 ‘투어’ 끝에 마침내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옷은 평등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종, 젠더, 계급, 지역 등 각종 차별 위에서 한 벌의 옷은 탄생한다. 패션은 원료 생산부터 의류 제작, 제품 유통, 폐기물 처리까지 시종일관 바닥 찍기 경쟁이다. 생산성은 높이고 원가는 낮추기 위해 (이 책의 부제처럼) 훼손과 오염, 유린과 착취를 일삼는다.
지금 입고 있는, 마냥 편하기만 하던 청바지가 갑자기 한없이 불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책.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불편함을 새삼 깨달게 한 저자의 취재 열정(거의 세계일주 수준이다)과 날카로운 통찰에 경의를 표한다. 맥신 베다 지음/오애리·구태은 옮김/학고재/400쪽/2만 2000원.
2024-04-2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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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혼욕 안돼!” 송도에 여성 전용 해수욕장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부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과 공설운동장, 최고 수준의 골프장이 있었다. 그 시절에도 부산사람들은 부산체육회를 설립해 전국 규모의 축구대회를 지방에서 처음 개최하는 등 제2 도시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 같은 사실은 부산 출신으로 한국 근대스포츠사를 연구해 온 손환 중앙대 체육교육과 교수가 최근 발간한 <부산의 근대스포츠 산책>에서 밝혀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은 1913년 부산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송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해수욕장을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조선에는 원산해수욕장에만 다이빙대가 있었는데 1925년 송도에 2개가 설치되며 명물이 되었다. 여름철에는 매일 1시간마다 남빈(자갈치시장과 부산공동어시장) 도선장에서 배를 운항해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1927년에는 송도 남쪽 해안에 여성 전용 해수욕장을 신설했다. 당시 경성운동장 수영장에서의 남녀혼욕(?)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31년부터 송도해수욕장은 연간 15만 명이 넘게 이용했다고 한다. 1935년 부산 인구가 18만 3000명인 점을 고려하면 최초의 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은 조선 최고의 피서지였다.
1918년 지금의 서구청 자리에 최초의 공설운동장인 부산 대정공원 운동장이 들어섰다. 대정공원 운동장은 지금까지 최고(最古)라고 알려진 인천 웃터골운동장보다 2년 6개월 전에 건설되어 체육사적으로 의미가 매우 크다. 5000여 평의 대정공원 운동장에서는 야구, 정구, 스모, 자전거 경주 등 각종 경기가 열렸다. 바다사상의 함양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운동장 아래 해안에 수영장을 설치하고 소학교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기도 했다. 일본스모협회가 스모의 흥행을 위해 부산에 와서 경기를 열고 묘기를 보여 줬다는 기록도 이채롭다.
대정공원 운동장이 협소하게 느껴지자 1928년 야구장, 정구장, 육상경기장을 갖춘 부산공설운동장(구덕운동장)을 만든다. 부산공설운동장은 당시 경성운동장의 뒤를 잇는 최대, 최고 규모의 운동장이었다. 운동장 이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전차 노선 연장까지 이루어질 정도로 뜨거운 관심이 쏠렸다. 부산공설운동장은 경성 중심에서 벗어나 지방 근대스포츠의 활성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전체 한국 근대스포츠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1911년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해운대온천은 1934년 동해남부선 부산~해운대 철도 개통으로 빛을 본다. 여름철이면 송도해수욕장으로 쏠리던 피서객들이 철도 개통 이후 대거 해운대로 향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관문인 부산에 골프장이 없다며 부산의 대외적인 체면을 위해 골프장 건설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1933년 개장한 해운대골프장은 조선 제일의 잔디 상태와 코스로 한국 골프 발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부산 유지들은 1928년 조선인으로 구성된 부산체육회를 설립했다. 부산체육회는 조선의 제2도시 부산이 한 번도 전 조선적 경기대회를 개최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유감을 표시하며 1936년 제1회 조선축구대회를 개최했다. 경성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출전한 이 대회 당일에는 JBAK 부산방송국(KBS 부산방송총국의 전신)에서 중계방송을 했다. 대회 중계방송은 당시 조선에서 2번째였고, 지방에서 개최되는 대회에서는 처음이었다. 부산체육회는 1936년 초량정 봉래각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의 입상 축하회를 개최하는 등 부산 근대스포츠의 보급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지만 1938년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만다. 손 교수는 “부산은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최초·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 곳이 많다. 하지만 한국 근대스포츠사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부산 근대스포츠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 아쉽다”라고 말했다.
2024-04-2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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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좌파를 위한 이 시대의 '공산당 선언'
좌파란 무엇인가. ‘왼쪽에 선다’는 것의 의미를 망각한 시대에 원칙주의 좌파 사상가가 던진 강렬하고도 도발적인 메시지가 책으로 출간됐다. 철학자 수전 니먼이 쓴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는 ‘워크’에게 빼앗긴 ‘좌파’라는 이름을 되찾아 오기 위한 철학적 투쟁이다. ‘워크’는 ‘깨어 있다(woke)’라는 단어에서 비롯해 ‘불의에 맞서 깨어있는 상태 혹은 깨어있는 사람’을 뜻한다. 서구사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최근엔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을 조롱하는 단어로 의미가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책의 여러 곳에서 PC의 편협성을 공격한다. 여성주의자들은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여성 총리가 선출된 것을 두고 갈채를 보냈지만, 조르자 멜로니의 정치적 입장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떤 이탈리아 정치 지도자보다도 파시즘에 가깝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못했다. 저자는 묻는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게 된 우연적인 속성들, 그리고 여러 날 숙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원칙들, 당신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멜로니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전자이고, 정치적 성향은 후자이다. 물론 저자의 생각은 후자가 더 중요하다.
저자는 전 세계 인민의 단결을 외쳤던 좌파가 인종·성별·지역 등의 일부 정체성만을 내세우는 ‘부족주의’로 쪼그라들고 있음을 개탄한다. 이견은 있겠지만 일부에선 한국 정의당의 실패 원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찾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무릇 좌파가 추구해야 할 바는 부족주의가 아니라 ‘보편주의’다. 저자는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운동(2012년 미국에서 흑인 소년을 죽인 백인 방범요원이 무죄로 풀려나면서 시작된 흑인 민권 운동)을 지지하지만, 그것은 사망한 희생자가 다만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인간(그것도 어린 소년)이기 때문이다.
물론 워크 역시 억압·차별에 대한 분노를 공유한다. BLM 운동을 주도한 것도 워크였다. 그러나 부족주의에 갇혀 있는 한 워크는 보편적인 정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작은 목표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들의 관심은 주변화된 개인에 머무른다. 저자는 이런 워크에게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친 이가 미셸 푸코라 말한다. 푸코에 따르면 정의와 권력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의 말을 잠시 인용해보자. “전쟁을 벌이는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승리이다.” 결국 갈등의 양자는 각각의 정의로움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권력을 잡기 위한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다. 이는 나아가 좌파들이 이루려는 정의로운 노력(사회 변혁과 같은) 역시 단순한 권력투쟁으로 격하한다.
진보와 정의, 보편주의에 대한 저자의 신념은 너무 오래간만에 듣는 선명한 언어인지라 나를 달뜨게 한다. 그러나 늙어버린 나는 불행하게도 더이상 세상 모두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의의 존재를 마음 한 껏 믿지 못한다. 저자는 부족주의가 우파의 교묘한 공격에 이용당할 여지가 크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보편주의가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점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BLM 운동에 반발한 백인들의 ‘모든 이의 목숨이 소중하다(All Lives Matter)’ 운동은 그 수사만으론 오히려 BLM에 비해 더 보편적이지만, 정작 그 목적은 흑인 차별이라는 문제에서 초점을 돌리려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의 포기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투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거대 양당이 득점 아닌 실점 경쟁을 벌여도 특별한 대안이 없고, 정의당이 원외정당으로 전락한 현실 속에서 ‘좌파 바로 세우기’에 대한 노력은 여전히 유용해 보인다. 모처럼 머리와 가슴이 함께 뜨거워진 책. 수전 니먼 지음/홍기빈 옮김/생각의힘/296쪽/1만 9000원.
2024-04-1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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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읽기] 셀카 찍는 여자들은 나르시시스트일까?
이 시대의 ‘스윗’한 남친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 유튜브에 이런 검색어를 넣어봤을 거다. ‘여친 사진 잘 찍어주는 법.’ 검색 결과에는 ‘생존전략’이라는 무시무시한 부제가 붙기도 한다. 맞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여친의 다리 길이를 1.5배 이상 늘리고, 얼굴 크기는 절반으로 줄이는 절대신공을 익혀야 한다.
여성들은 왜 본인의 사진에 이토록 집착하는가. ‘젊은 여성’임에도 지극히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저자는 또래 여성들이 왜 그렇게 자신을 찍는지, 또 왜 그렇게 SNS에 공들여 업로드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당사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고 <빈틈없이 자연스럽게>를 썼다.
예전부터 여자(Beauty)는 아기(Baby)·동물(Beast)과 함께 사진의 가장 흔하고 중요한 피사체였다. 그래서 흔히들 ‘3B’로 셋을 묶는다. 지극히 수동적인 피사체 역할에서 스스로 사진을 찍는 능동적인 역할로 바뀐 것은 2000년대 초중반 무렵. 저자는 여성들이 셔터의 주도권을 갖게 된 계기로 ‘폰카’와 ‘싸이월드’를 꼽았다.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촬영이 가능해지자, 여자들은 적극적으로 ‘자기 사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세간의 편견은 젊은 여성들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하지만, 정작 저자가 만난 많은 여성들은 대답은 세간의 편견과는 다소 다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사진·인터넷 기술의 발달이 여성에게 더 많은 주체성을 줬지만, 또한 더 쉽게 ‘대상화’의 객체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SNS에 범람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사진은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처럼 상품화되어 남성 집단의 품평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왜 여성들은 왜 자신을 찍을까. 책에서는 정답은 아니더라도 여성이 말하는 스스로의 해답(누군가는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도는 찾을 수 있다. 황의진 지음/반비/276쪽/1만 8000원.
2024-04-1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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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서유 시인과 함께하는 문학 톡톡
(사)부산작가회의는 오는 18일 오후 6시 30분 부산 중구 남포문고 지하 홀에서 서유 시인과 함께 제113회 ‘시민과 함께하는 문학 톡톡’ 행사를 가진다.
‘시민과 함께하는 문학 톡톡’ 행사는 부산문화재단의 부산문화예술지원 사업으로 지역 작가와 독자들이 소통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올해에도 지난 3월부터 12월까지 매월 세 번째 목요일, 총 10회에 걸쳐 행사를 진행한다.
지난달 열린 올해 첫 행사에서는 연작소설집 <누구십니까>를 낸 전미홍 소설과를 초청해 진행됐다. 18일 열리는 올해 두 번째 행사에는 최근 첫 시집 <부당당 부당시>를 출간한 서유 시인이 신정민 시인 등과 함께 시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참가비는 무료이며, 시민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2024-04-1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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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오지윤,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참여
서양화가 오지윤이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공식 참가한다. 16일 미술업계에 따르면 오 작가는 베니스 비엔날레 해외국가관의 초대작가로 참여한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현지시각 기준으로 오는 18일부터 11월 24일까지 열린다.
앞서 오 작가는 지난해 10월 열린 로마아트엑스포에서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해가 지지 않는 바다' 시리즈를 전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 역시 당시 로마아트엑스포에 참석했던 베니스 비엔날레 관계자가 오 작가의 작품을 눈여겨 본 것이 인연이 됐다.
오 작가는 자신의 '바다' 시리즈에서 바다와 인간 삶과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바다 위, 바다 아래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시공간의 형이상학적 인연에 따라 소리도 빛깔도 결도 다 다르다고 본다. 바다의 생동을 인간 삶의 다양한 감정으로 재해석하여 금욕적인 단색화로 작업한다.
평소에도 겹겹이 쌓은 부조물과 색채의 중첩을 통해 삶의 번민을 수행하듯 작품을 만들어 간다. 그러면서도 보석을 재료로 활용해 절제된 화려함을 자아낸다. 이때문에 평단에서는 그의 작품을 두고 '시각적인 시처럼 은유와 성찰이 풍부하다'고 평한다.
한편 1895년 첫 선을 보인 이후 올해 60회를 맞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현재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큰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비엔날레로서 비엔날레의 어머니라 불린다. 당연히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 아티스트는 세계적으로도 최정상 작가의 하나로서 공인된다.
2024-04-1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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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년…진실을 인양하다
몇 해 전, 친구와 함께 제주도로 ‘뚜벅이 여행’을 떠난 적 있다. 운전면허가 없었던 때라 버스로 관광지를 돌아다닐 심산이었다. 친구도 재밌겠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설렘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긴 버스 배차 간격이었다. 제주도의 버스는 도시 곳곳을 누볐지만, 수가 적은 탓에 원하는 시각에 버스를 타기 쉽지 않았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우리 일행은 안내 표지판조차 없는 허름한 버스 정류장에서 하릴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하늘에서는 비까지 주륵주륵 내렸다.
그때, 지나가던 차 한 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자신을 제주도민이라고 밝힌 한 남성은 우리를 시내까지 태워주겠다고 제안했고, 감사한 마음으로 차에 탔다. 이어 그는 “제주도에 오면 꼭 가야 하는 곳을 소개해 주겠다”며 우리를 낯선 곳으로 이끌었다. 도착한 곳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기억 공간’이었다. 숙연한 마음으로 찬찬히 내부를 살펴본 뒤 밖으로 나왔다. 그는 “관광객에게 이곳을 추천하면 대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는데 그렇지 않아 다행”이라며 오히려 우리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세월호’는 언제부터 정치적인 단어가 됐을까. 정치의 언어로 오염된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와 유가족은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더욱 아파한다. 가족을 잃은 아픔은 현재진행형인데 “이제 그만해라”는 모진 말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온다. 권력을 향해서는 한없이 무뎠던 비판의 칼날은 피해자인 유가족에게만 날카롭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참사의 10주기를 맞아 세상에 나온 <책임을 묻다>는 세월호참사 유가족과 작가, 변호사 등이 모여 세월호 사건의 사실관계를 기록한 책이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과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자료 등을 바탕으로 3년간 정리한 흔적을 써 내려갔다. 세월호를 책임지는 선원과 선사의 사고 책임에서부터 해경의 구조 책임, 청와대의 지휘 책임 등을 시간 순서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세월호의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화물 과적, 편법 증개축 문제부터 박근혜 정부의 진상규명 방해 행위까지 사고 원인과 해결 과정을 총망라한 ‘세월호 백서’인 셈이다. <책임을 묻다>라는 책 제목답게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인물의 실명까지 ‘박제’했다.
읽기 쉬운 책이지만 쉽게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세월호 참사 당시 우리 사회의 재난안전 시스템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 이미 여러 차례 과적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과 해경의 구조과정이 몹시 어설펐다는 점 등이 세세하게 쓰여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세월호 선원과 선사,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 기관 등이 책임 소재를 두고 ‘핑퐁 게임’을 벌이는 동안 304명의 탑승객은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정부는 사고 수습은커녕 정보기관을 동원해 유가족의 동향을 파악했고, 물밑에서는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를 방해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그들의 외침은 ‘떼쓰기’로 치부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늘날 일부 시민들은 ‘애도’에도 이유를 묻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10.29 이태원 참사다.
시스템의 개선을 위해서는 지나온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보상 문제를 운운하고 이미 끝난 일이라며 덮어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 준형이를 잃은 아버지는 “내 자식은 잃었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더 안전하게 만들자는 요구가 잘못이냐”고 묻는다. 정치의 언어로 변질된 세월호의 진실을 이제는 인양해야 한다. 김광배, 김미나, 장훈 등 지음/굿플러스북/320쪽/2만 2000원
2024-04-1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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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읽기] 인류에 ‘사족보행’을 허하라
누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했나. 사실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기엔 생물학적으로 어설픈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인간은 두 다리로 걷기 시작하면서 넓은 시야와 자유로운 양 손을 얻었지만, 동시에 사족보행 동물에선 찾아보기 힘든 허리 통증과 관절염에 시달리게 된다. 갓 태어난 새끼는 십수 년 이상을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야 하는 번거로운 종이기도 하다. 이처럼 불완전해 보이는 생명체가 놀랍게도 자본주의를 만들고 달로 로켓을 발사하는 유일한 종이 됐다. 과연 무엇이 인간을 ‘선택 받은’ 동물로 만들었나.
<불완전한 존재들>은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와 생명체의 등장, 그리고 인류의 출현에 이르는 긴 과정을 빠르게 훑으며 인간이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고찰한다. 이탈리아의 진화생물학자인 저자는 진화를 ‘매우 우연적이며 불완전한 것’으로 설명한다. 단적인 예로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현 인류)의 서로 다른 선택(?)을 들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커진 두뇌를 지탱하기 위해 두껍고 짧은 목을 선택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반대로 긴 목을 선택한다. 이 덕분에 목 아래로 이동한 후두가 기도와 성대로 분리되면서 하나의 목구멍으로 동시에 숨 쉬고, 먹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긴 목을 선택한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를 갖고 살아남으며, 짧은 목을 선택한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한다.
하지만 긴 목이 완벽한 선택일까. 목디스크로 고생하는 나로서는 찬성할 수 없다. 휴일 내내 방구석에 누워 빈둥거리다 화장실에라도 가려 몸을 일으킬라치면, 일어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새삼 느낀다. 직립보행을 인류 불행의 시작이라 생각하는 동지(?)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책. 텔모 피에바니 지음/김숲 옮김/북인어박스/276쪽/1만 9800원.
2024-04-1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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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읽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1895년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타임머신> 이후, 시간여행은 인간 상상력의 단골 소재가 됐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후회막심이던 인생의 여러 순간들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의 물리학>은 웰스를 비롯해 아서 C. 클라크, 아지작 아시모프 등 유명 SF 작가의 소설 속 시간여행 가능성을 차근차근 살펴본다. 저자는 시간여행이라는 아이디어에 담긴 과학적 실체를 낱낱이 탐색하고 이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칼 세이건 등이 탐구해 온 상대성이론, 블랙홀 연구와 비교한다.
책 표지에 속아선 안된다. 표지만으로는 어린이용 서적인 듯 보이지만(표지 속 여성의 놀란 듯한 표정은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내용은 쉽지 않다. 최소한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이 뭔지는 알 정도의 물리학 지식은 있어야 이해가 빠르다.
다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시간여행의 종착지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여러 소설에서는 대충 넘어갈 수 있었던 ‘할아버지 패러독스’(과거로 이동해 젊은 할아버지를 살해할 경우, 미래의 자신은 태어날 수 없고, 결국 할아버지를 살해하는 상황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모순)를 과학은 무시하고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원 등판한 ‘멀티버스’ 세계관으로 접어드는 순간,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시간여행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다. 수많은 우주가 중첩되어 있는 멀티버스 중 고작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다른 세계에선 다른 결말이 진행되고 있기에. 물론 과학이 그러하다는 것일 뿐, 이 책 탓은 아니다. 존 그리빈 지음/김상훈 옮김/휴머니스트/216쪽/1만 6700원.
2024-04-0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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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해부했더니 ‘감정’이 보였다
‘감정(感情)’이란 무엇인가. ‘이성(理性)’과는 완전히 다르며, 또한 ‘생각’과도 다르다. 흔히들 ‘이성’이나 ‘생각’은 뇌의 활동으로 여기지만, ‘감정’은 마음의 문제라 말한다. 그러면, 마음은 우리 몸 중 어디에 속한 부분인가. 뇌인가, 심장인가, 아니면 가슴인가. 복잡해진다.
슬프게도 뇌과학의 발달은 “감정 역시 뇌의 활동”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뇌간이 시작되기 전 피질의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번연계에서 내 첫사랑의 애틋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슬프게도 이 세상이 너무 삭막해진다. 최근 들어 ‘(감정 활동은) 번연계보다 좀더 광범위한 뇌 영역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크지만, 어쨌든 같은 뇌 안의 활동이다. ‘감정이 뇌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슬프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뇌의 활동인 셈이다.
하지만 꼭 슬프지만은 않다.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이 감정이라는 게 사실 매우 거추장스럽더라는 거다. 감정이 뇌의 작용이라면, 즉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리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생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여러가지 조건을 조절함으로써 감정까지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감정을 조절·제어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더욱 멋진 신세계가 될 수 있다. 상사의 갑질로부터 분노를 참을 수 있는 약물이 있다면? 그것도 좋지만 실연으로부터 고통 받지 않은 약물이 더 유용해 보인다. 만일 누가 그런 약을 발명한다면, 그에게 노벨생리의학상은 물론 노벨평화상까지 준다고 해도, 나는 찬성이다. 굳이 하나의 상만 줘야 한다면 노벨평화상이 더 어울린다.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을 진화의 가장 윗 단계로 여기는 발상은 과거에도 많았다. 특히 공상과학 소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인간보다 진화한 외계의 생명체는 대체로 인간보다 감정이 부족하거나 혹은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그려졌다. ‘스타트랙’에 등장하는, 지적으로 우월한 종족 ‘벌컨족’이 그렇다. 평소 감정 자체를 거부하는 벌컨족의 감정 억제 능력은 7년에 한 번씩 ‘짝짓기’를 하는 동안에만 사라진다.
<감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뇌과학>은 감정이라는 기이하고 실체 없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코미디언이자 신경과학자인 저자는 코로나19로 아버지를 잃은 후 다스리기 어려운 감정의 파도를 맞닥뜨리면서, 이러한 감정을 현미경 아래에 두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추적한다. 불가해한 슬픔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한 여정은 뇌과학과 심리·사회 현상까지 뻗어 나가 종횡무진하며 감정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추적으로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 구체적인 실체로 드러나는 과정이 흥미롭다. 슬픔이나 기쁨 등 감정에 의해 생겨난 눈물은 눈의 자극(먼지가 들어간다든지)을 통해 생성되는 눈물과는 화학적으로 다르다. 감정적인 눈물에는 피부를 통해 흡수될 때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화학물질인 옥시토신과 엔도르핀이 들어있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의 신체 활동(눈물의 성분 등)을 변화시키고, 또한 특정 신체 자극(옥시토신을 피부로 흡수시키는 것 등)은 감정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책은 여전히 감정을 자유롭게 ‘컨트롤’하는 방법까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세계의 뇌과학자들은 인류를 위해 더욱 분발해주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벌컨족의 감정 억제 능력이다. 딘 버넷 지음/김아림 옮김/북트리거/500쪽/2만 2000원.
2024-04-0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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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과 동상에 깃든 부산 역사의 갈피
회화사를 전공한 부산시와 경남도 문화재위원인 이현주 범어사성보박물관 부관장이 <완상, 옛그림 속 부산을 거닐다>(두손컴)를 냈다. 10여 년 써온 46편의 글 한 데 묶었다. “부산 사람이 제작했거나, 부산을 그렸거나, 부산을 거쳐 갔거나, 부산에 남겨져 부산 역사를 말해주는 문화재와 문화재급 작품들에 대한 얘기를 모았어요.”
부산의 동상들에 대한 이 문화재위원의 글은, 매체 연재 당시 새로운 관심의 환기로 많이 알려졌었다. 부산의 동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이승만 정부 때인 1955년 건립된 용두산공원 이순신 동상(조각가 김경승)이다. 그다음은 박정희 정부 때 충렬사 성역화 사업에 맞춰 1977년 정발 동상이, 1978년 송상현 동상이 차례로 세워졌다. 부산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이들 사업에 참여했는데 소설가 김정한이 송상현 동상, 시인 허만하가 정발 동상 건립문을 썼으며, 그 글씨는 오제봉과 배재식이 각각 썼다(참고로 아동문학인 이주홍은 충렬사 정화기념비문, 시인 김규태는 윤흥신 동상 건립문을 썼고 그 글씨는 각각 배재식과 한형석이 썼다).
정발 동상을 만든 조각가는 한인성 부산대 교수였는데 송상현 동상을 만든 조각가 김정숙 당시 홍대 교수의 제자였다. 한인성은 부산의 동상 작업 다수를 했으며 1981년 사명당 동상(어린이대공원), 1998년 박재혁 동상(〃)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 부관장은 옛 부산이 담긴 문화재를 다수 소개한다. 18세기 겸재 정선파 화풍을 보여주는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 14장에는 부산 절경이 3장 포함돼 있는데 몰운대 영가대 태종대가 그것이다. 이 부관장은 “3장 모두가 빼어나며, 그중 몰운대 그림에서는 어떤 경이로움이 느껴진다”고 했다. 19세기 ‘농가월령도 12곡 병풍’도 ‘동래부 생산 예술품’으로 주목된다고 한다. “동래 한학자 박주연에 의해 주문 제작된 것인데 동래 무임(武任) 화가 이시눌이 그렸어요. 놀라운 것은 12폭 그림에 오륜대 일원이나 이섭교 등 동래부 실경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에요.”
이 병풍 그림을 그린 이시눌은 대단한 동래부 화가였다. 딱 1점밖에 없는 1834년 작 ‘임진전란도’를 그린 화가다. 널리 알려진 변박의 1760년 ‘동래부순절도’ ‘부산진순절도’, 변곤의 1834년 ‘동래부순절도’가 같은 반열의 작품이다. 그들은 모두 동래부 화가였다.
당대 동래부의 예술적 팽창은 진풍경이었다. 일례로 부산박물관 소장품인 이시눌의 ‘묵국도’ ‘묵포도도’ ‘월매도’는 거침없는 필치로 자유자재한 수묵의 농담을 구사했는데 이 그림들은 동래지역의 사적 교류 예술품으로 보인다고 한다. 또한 동래부는 조선통신사 사행의 거점이자 예술품 해외교류의 거점이었다. 동래부 무임 화가였던 변박 이시눌 변지한, 호(號)만 알려져 무명의 동래부 화가로 여겨지는 상현 괴원 노포 송수관 내산암 춘재 운암 하담 해옹 만취 석산, 붓으로 당대 조선을 석권한 김명국 최북 이성린 김유성 이의양 등의 작품이 동래부와 왜관을 중심으로 한·일을 오갔고, ‘조선시대의 한류’로 전해지고 있다.
다양한 인연으로 부산에 오게 된 문화재도 있다. 부산박물관 소장품 ‘채용신의 백납병’은 조선 후기 최고의 초상 화가 작품이다. 순종 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가 한국전쟁 때 부산에 피난 오면서 가져왔을 정도로 값진 작품인데 해운대에 있던 증조부 묘소를 잘 관리하는 집안에 준 것이 인연이 돼 현재 부산에 있다.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소장품 ‘의왕영왕책봉의궤’는 보물로 세계기록유산이다. 대한제국 선포 뒤인 1900년 고종 황제의 둘째 셋째 황자를 각각 의왕과 영왕으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인데 황실 유물이 부산의 순교자박물관에 오게 된 사연에서 역사적 곡절을 뛰어넘는 신앙의 섭리마저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문화재에 깃든 의미와 속 얘기, 그것을 둘러싼 비화가 다큐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처럼 고아하고 고소하게 깨알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 부관장은 “대한도기, 부산의 시어(市魚) 고등어에 대한 책도 쓰고 싶다”고 했다.
2024-04-0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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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점산은 사라졌으나 불사조처럼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소설가 요산 김정한(1908~1996)은 을숙도뿐만 아니라 낙동강 삼각주에 대한 관심도 컸다. 아니 삼랑진에서 을숙도에 이르는 낙동강 하류를 샅샅이 훑었다고 해야 한다. 그만큼 지역에 대한 그의 관심은 넓고 깊었다. 요산의 1970년 작품 ‘독메’ 배경과 관련해 주변의 부산 강서구 대저동 칠점산을 취재하면서 기록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낙동강 삼각주의 칠점산은 근현대사 시련의 산이자 신비의 산이다. 애초 그 산은 7개 섬이었다. 고려 말 정몽주의 노래도 있다. 밀려 내려온 토사가 퇴적되면서 조선 중기 이후 거대한 변화를 거쳐 일대는 평야로 변하고 섬은 산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7개 봉우리는 간데없이 1개만, 그것도 일부분만 봉두난발 같은 모습(높이 35m)으로 겨우 남아있다. 인근에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봉우리들을 깎아 활주로를 다졌는데, 섬이 산으로 변한 뒤 비행장 속으로 사라진 셈이다. 그 비행장이 오늘날 김해국제공항이 되었다.
▲봉우리, 3개인가 4개인가=봉우리들이 없어진 과정이 수수께끼처럼 신비롭다. 기록 미비가 한몫한다. 그 수수께끼 속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시련, 경제개발의 고난 등 한국 근현대사가 깃들어 있다. 맨 먼저 일제강점기인 1942~1943년 비행장을 만들면서 칠점산 봉우리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일제는 남북으로 점점이 놓인 칠점산 7개 봉우리 중 남쪽 봉우리들을 먼저 없앴다. 그런데 해방 후 남은 봉우리 수가 3개 혹은 4개로 오락가락한다. 현재 기록도, 주민들 증언도 그렇다.
그러나 일단 3개가 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외국 사이트(VMF 323, K1)에서 확인되는 1951년 1월 사진에서 칠점산은 3개 봉우리로 남아있는 모습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찍은 그 사진에서 남북으로 뻗은 활주로 옆에 전투기 17기 정도가 있고, 드문드문한 건물과 막사들 뒤쪽 멀리 북쪽에 서로 근접한 제법 큰 산 2개(‘큰산’ ‘작은산’)가 보이고, 500m 이상 뚝 떨어진 남쪽에 흙을 쌓아놓은 듯한 작은 봉우리 1개(‘낮은산’)가 보인다. 동아대 한국학연구소가 낸 <칠점산과 초현대>(2013)의 ‘특별기고’와 그 원본인 강서문화원의 <강서문화> 제9호(2003)에 실린 ‘칠점산을 찾아서’(최해준)도 해방 후 3개 봉우리가 남았던 것으로 기록했다. 3개 산 각각의 이름도 ‘큰산’ ‘작은산’ ‘낮은산’으로 밝혀놨다.
▲28년간 서서히 깎이다=그런데 왜 3개와 4개를 오락가락할까. 그것은 칠점산 3개 봉우리가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해 1978년까지 28년간에 걸쳐 서서히 깎여나갔기 때문이다. 현재 남은 사진(DBW FORGOTTENWAR 등)·기록과 주민들 증언을 종합할 때 칠점산 3개 봉우리는 ①한국전쟁 미공군기지(K1) 건설 때 ②1963년 전후 김해비행장 확장 때 ③1969~1970년 무렵 공군기지 확장 때 ④1970년대 중반 김해국제공항 건설 때 등의 단계를 거쳐 점차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때그때 남은 봉우리 수의 기억에 따라 3개와 4개를 오락가락했다.
착오를 낳은 중요한 요인 하나가 칠점산 7개 산 중에서 가장 큰, 아예 ‘큰산’으로 불린 산이다. 현재 봉두난발 모습으로 남은 것은 이 ‘큰산’의 동쪽 작은 모퉁이, 10분의 1도 채 안 되는 일부분이다. ‘큰산’은 그 정도로 컸다. 문제의 이 ‘큰산’은 허무는 과정에서, 중간을 잘랐을 때 사람들 기억 속에 2개가 되는 조화를 부렸다. 실제 1970년대 한 사진에서 ‘큰산’은 당시 평강국민학교 뒤편에 상당히 허물어진 2개의 커다란 덩어리 모습인데 그것을 2개 봉우리로 기억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또 다른 요인은 남쪽에 뚝 떨어진 ‘낮은산’이다. 이 산은 작은 데다가 1960년대 어느 빠른 시기에 없어져 기억하는 이들이 아주 적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10명 중 3명만이 이 낮은산을 기억했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해방 후 칠점산은 한참 동안 ‘3개’(큰산, 작은산, 낮은산)였다. 그러다가 큰산이 두 쪽으로 났을 때 ‘4개’가 됐다. 하지만 없어진 남쪽의 낮은산을 아예 모르는 이들에게 칠점산은 또 3개였다(두 쪽 난 큰산과 그 옆의 작은산을 합쳐 3개). 이것이 칠점산 남은 봉우리가 3개와 4개로 오락가락하는 내막이다. 이를테면 칠점산은 오륙도처럼 3개와 4개의 기억을 오가며 스러진 것이다.
요산이 ‘독메’라는 작품에서 칠점산을 직접 들고나온 것은 아니다. 널따란 평야에 홀로 서 있는 작은 산이 독메인데, 칠점산과 같은 위도 상에 덕도산 오봉산 송산 등이 있고 이중 덕도산이 ‘요산의 독메’로 보인다. 하지만 여러 독메들이 토사를 붙잡아 거대한 낙동강 삼각주를 신비롭게 빚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역할을 했다. 칠점산은 그중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독메의 무리였을 것이다.
부산은 바다 도시라고들 말하지만 또한 강의 도시이기도 하다. 요산은 그 점에 눈을 돌려 낙동강 삼각주와 그곳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환기했다. 현재 각종 개발로 뒤바뀌고 있는 삼각주…, 그 관심은 차라리 지금 더 필요하다. 요산의 독메는 기실 삼일운동의 상징이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높이로 있으나 이윽고 수많은 토사들을 모이게 해 거대한 역사의 평야를 만들면서 대하가 도도한 역사처럼 굽이쳐 흐르게 한 근거라는 것이다. 칠점산이 한 모퉁이로 남았어도 사람들 기억 속에 불사조처럼 계속 살아남아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2024-03-28 [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