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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청바지의 일생으로 살펴본 이 시대의 불공정
옷장을 열어보라. 당신은 청바지를 몇 벌이나 가지고 있나. 나는 세어보니 네 벌이었다. 누구나 몇 벌씩의 청바지는 가지고 있다. 가장 흔한 옷 중 하나. <지속 불가능한 패션 산업에 이의를 제기합니다>는 우리가 흔히 입고 버리는 청바지를 통해 현 패션 산업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부제가 거의 느와르급이다. ‘훼손, 오염, 유린과 착취로 뒤범벅된 청바지 잔혹사’다.
패션 기업가이자 연구자인 저자는 청바지의 탄생에서부터 소멸에 이르는 전 과정을 철저히 뒤쫓는다. 미국 텍사스의 목화밭에서 출발한 그의 여정은 곧바로 중국 샤오싱의 방직공장으로 옮겨간다. 그곳에서 그는 염료와 화학약품으로 뒤범벅된 강물에 압도당한다. (청바지가 될) 면화는 왜 굳이 텍사스에서 지구 반대편 중국으로 건너갈까. 고민은 방글라데시의 닭장 같은 옷 공장에 이르러 분노로 바뀐다. 2014년 방글라데시에선 서구 의류 브랜드의 대규모 하청업체인 라나 플라자의 공장이 기계 무게와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했는데, 밖에서 걸어 잠근 방화문 때문에 1134명이 죽고 250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어 저자가 찾아간 곳은 온라인 마켓 아마존 물류센터. 로봇처럼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곳을 거쳐야 비로소 우리는 한 벌의 청바지를 입을 수 있다.
저자의 여정은 여기(생산과 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소비자가 청바지를 구매한 이후의 과정에도 문제는 계속된다. 우리는 채 몇 번 입지도 않고 싫증난 청바기가 분리수거함에 들어간 이후 어떻게 되는지 관심이 없다. 아니, 비록 나에게는 쓸모가 없어졌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물건이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는 선한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의도와는 별개로 그렇게 버려지는 옷의 물량은 너무 많다. 처치불가. 결국 우리가 분리수거함에 헌 옷을 기부(?)하는 행위는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 엄청난 쓰레기를 떠넘기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길었던 저자의 여정은 아프리카 가나 크폰 매립지의 헌 옷 쓰레기산에서 비로소 끝이 난다. 수 년 전 이웃나라 르완다는 외국으로부터의 헌 옷 수입을 금지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이 당시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트럼프는 아프리카성장기회법(AGOA)에 따라 르완다에 부여하던 여러 혜택을 중단했고, 결국 르완다는 미국 쓰레기를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자국산 의류를 미국에 수출할 때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됐다.
전 세계에서 1년에 팔리는 청바지가 무려 12억 5000만 벌, 그중 미국에서만 4억 5000만 벌이 팔린다. 미국 여성들은 청바지를 평균 일곱 벌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미국산’은 없다. 왜일까. 저자는 몇 년에 걸친 ‘투어’ 끝에 마침내 결론에 도달한다. 모든 옷은 평등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종, 젠더, 계급, 지역 등 각종 차별 위에서 한 벌의 옷은 탄생한다. 패션은 원료 생산부터 의류 제작, 제품 유통, 폐기물 처리까지 시종일관 바닥 찍기 경쟁이다. 생산성은 높이고 원가는 낮추기 위해 (이 책의 부제처럼) 훼손과 오염, 유린과 착취를 일삼는다.
지금 입고 있는, 마냥 편하기만 하던 청바지가 갑자기 한없이 불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책.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불편함을 새삼 깨달게 한 저자의 취재 열정(거의 세계일주 수준이다)과 날카로운 통찰에 경의를 표한다. 맥신 베다 지음/오애리·구태은 옮김/학고재/400쪽/2만 2000원.
2024-04-2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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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좌파를 위한 이 시대의 '공산당 선언'
좌파란 무엇인가. ‘왼쪽에 선다’는 것의 의미를 망각한 시대에 원칙주의 좌파 사상가가 던진 강렬하고도 도발적인 메시지가 책으로 출간됐다. 철학자 수전 니먼이 쓴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는 ‘워크’에게 빼앗긴 ‘좌파’라는 이름을 되찾아 오기 위한 철학적 투쟁이다. ‘워크’는 ‘깨어 있다(woke)’라는 단어에서 비롯해 ‘불의에 맞서 깨어있는 상태 혹은 깨어있는 사람’을 뜻한다. 서구사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최근엔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을 조롱하는 단어로 의미가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책의 여러 곳에서 PC의 편협성을 공격한다. 여성주의자들은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여성 총리가 선출된 것을 두고 갈채를 보냈지만, 조르자 멜로니의 정치적 입장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떤 이탈리아 정치 지도자보다도 파시즘에 가깝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못했다. 저자는 묻는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게 된 우연적인 속성들, 그리고 여러 날 숙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원칙들, 당신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멜로니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전자이고, 정치적 성향은 후자이다. 물론 저자의 생각은 후자가 더 중요하다.
저자는 전 세계 인민의 단결을 외쳤던 좌파가 인종·성별·지역 등의 일부 정체성만을 내세우는 ‘부족주의’로 쪼그라들고 있음을 개탄한다. 이견은 있겠지만 일부에선 한국 정의당의 실패 원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찾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무릇 좌파가 추구해야 할 바는 부족주의가 아니라 ‘보편주의’다. 저자는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운동(2012년 미국에서 흑인 소년을 죽인 백인 방범요원이 무죄로 풀려나면서 시작된 흑인 민권 운동)을 지지하지만, 그것은 사망한 희생자가 다만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인간(그것도 어린 소년)이기 때문이다.
물론 워크 역시 억압·차별에 대한 분노를 공유한다. BLM 운동을 주도한 것도 워크였다. 그러나 부족주의에 갇혀 있는 한 워크는 보편적인 정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작은 목표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들의 관심은 주변화된 개인에 머무른다. 저자는 이런 워크에게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친 이가 미셸 푸코라 말한다. 푸코에 따르면 정의와 권력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의 말을 잠시 인용해보자. “전쟁을 벌이는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승리이다.” 결국 갈등의 양자는 각각의 정의로움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권력을 잡기 위한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다. 이는 나아가 좌파들이 이루려는 정의로운 노력(사회 변혁과 같은) 역시 단순한 권력투쟁으로 격하한다.
진보와 정의, 보편주의에 대한 저자의 신념은 너무 오래간만에 듣는 선명한 언어인지라 나를 달뜨게 한다. 그러나 늙어버린 나는 불행하게도 더이상 세상 모두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의의 존재를 마음 한 껏 믿지 못한다. 저자는 부족주의가 우파의 교묘한 공격에 이용당할 여지가 크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보편주의가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점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BLM 운동에 반발한 백인들의 ‘모든 이의 목숨이 소중하다(All Lives Matter)’ 운동은 그 수사만으론 오히려 BLM에 비해 더 보편적이지만, 정작 그 목적은 흑인 차별이라는 문제에서 초점을 돌리려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의 포기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투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거대 양당이 득점 아닌 실점 경쟁을 벌여도 특별한 대안이 없고, 정의당이 원외정당으로 전락한 현실 속에서 ‘좌파 바로 세우기’에 대한 노력은 여전히 유용해 보인다. 모처럼 머리와 가슴이 함께 뜨거워진 책. 수전 니먼 지음/홍기빈 옮김/생각의힘/296쪽/1만 9000원.
2024-04-1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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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읽기] 셀카 찍는 여자들은 나르시시스트일까?
이 시대의 ‘스윗’한 남친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 유튜브에 이런 검색어를 넣어봤을 거다. ‘여친 사진 잘 찍어주는 법.’ 검색 결과에는 ‘생존전략’이라는 무시무시한 부제가 붙기도 한다. 맞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여친의 다리 길이를 1.5배 이상 늘리고, 얼굴 크기는 절반으로 줄이는 절대신공을 익혀야 한다.
여성들은 왜 본인의 사진에 이토록 집착하는가. ‘젊은 여성’임에도 지극히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저자는 또래 여성들이 왜 그렇게 자신을 찍는지, 또 왜 그렇게 SNS에 공들여 업로드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당사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고 <빈틈없이 자연스럽게>를 썼다.
예전부터 여자(Beauty)는 아기(Baby)·동물(Beast)과 함께 사진의 가장 흔하고 중요한 피사체였다. 그래서 흔히들 ‘3B’로 셋을 묶는다. 지극히 수동적인 피사체 역할에서 스스로 사진을 찍는 능동적인 역할로 바뀐 것은 2000년대 초중반 무렵. 저자는 여성들이 셔터의 주도권을 갖게 된 계기로 ‘폰카’와 ‘싸이월드’를 꼽았다.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촬영이 가능해지자, 여자들은 적극적으로 ‘자기 사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세간의 편견은 젊은 여성들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하지만, 정작 저자가 만난 많은 여성들은 대답은 세간의 편견과는 다소 다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사진·인터넷 기술의 발달이 여성에게 더 많은 주체성을 줬지만, 또한 더 쉽게 ‘대상화’의 객체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SNS에 범람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사진은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처럼 상품화되어 남성 집단의 품평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왜 여성들은 왜 자신을 찍을까. 책에서는 정답은 아니더라도 여성이 말하는 스스로의 해답(누군가는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도는 찾을 수 있다. 황의진 지음/반비/276쪽/1만 8000원.
2024-04-1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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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서유 시인과 함께하는 문학 톡톡
(사)부산작가회의는 오는 18일 오후 6시 30분 부산 중구 남포문고 지하 홀에서 서유 시인과 함께 제113회 ‘시민과 함께하는 문학 톡톡’ 행사를 가진다.
‘시민과 함께하는 문학 톡톡’ 행사는 부산문화재단의 부산문화예술지원 사업으로 지역 작가와 독자들이 소통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올해에도 지난 3월부터 12월까지 매월 세 번째 목요일, 총 10회에 걸쳐 행사를 진행한다.
지난달 열린 올해 첫 행사에서는 연작소설집 <누구십니까>를 낸 전미홍 소설과를 초청해 진행됐다. 18일 열리는 올해 두 번째 행사에는 최근 첫 시집 <부당당 부당시>를 출간한 서유 시인이 신정민 시인 등과 함께 시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참가비는 무료이며, 시민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2024-04-1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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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오지윤,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참여
서양화가 오지윤이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공식 참가한다. 16일 미술업계에 따르면 오 작가는 베니스 비엔날레 해외국가관의 초대작가로 참여한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현지시각 기준으로 오는 18일부터 11월 24일까지 열린다.
앞서 오 작가는 지난해 10월 열린 로마아트엑스포에서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해가 지지 않는 바다' 시리즈를 전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 역시 당시 로마아트엑스포에 참석했던 베니스 비엔날레 관계자가 오 작가의 작품을 눈여겨 본 것이 인연이 됐다.
오 작가는 자신의 '바다' 시리즈에서 바다와 인간 삶과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바다 위, 바다 아래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시공간의 형이상학적 인연에 따라 소리도 빛깔도 결도 다 다르다고 본다. 바다의 생동을 인간 삶의 다양한 감정으로 재해석하여 금욕적인 단색화로 작업한다.
평소에도 겹겹이 쌓은 부조물과 색채의 중첩을 통해 삶의 번민을 수행하듯 작품을 만들어 간다. 그러면서도 보석을 재료로 활용해 절제된 화려함을 자아낸다. 이때문에 평단에서는 그의 작품을 두고 '시각적인 시처럼 은유와 성찰이 풍부하다'고 평한다.
한편 1895년 첫 선을 보인 이후 올해 60회를 맞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현재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큰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비엔날레로서 비엔날레의 어머니라 불린다. 당연히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한 아티스트는 세계적으로도 최정상 작가의 하나로서 공인된다.
2024-04-1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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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읽기] 인류에 ‘사족보행’을 허하라
누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했나. 사실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기엔 생물학적으로 어설픈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인간은 두 다리로 걷기 시작하면서 넓은 시야와 자유로운 양 손을 얻었지만, 동시에 사족보행 동물에선 찾아보기 힘든 허리 통증과 관절염에 시달리게 된다. 갓 태어난 새끼는 십수 년 이상을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야 하는 번거로운 종이기도 하다. 이처럼 불완전해 보이는 생명체가 놀랍게도 자본주의를 만들고 달로 로켓을 발사하는 유일한 종이 됐다. 과연 무엇이 인간을 ‘선택 받은’ 동물로 만들었나.
<불완전한 존재들>은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와 생명체의 등장, 그리고 인류의 출현에 이르는 긴 과정을 빠르게 훑으며 인간이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고찰한다. 이탈리아의 진화생물학자인 저자는 진화를 ‘매우 우연적이며 불완전한 것’으로 설명한다. 단적인 예로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현 인류)의 서로 다른 선택(?)을 들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커진 두뇌를 지탱하기 위해 두껍고 짧은 목을 선택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반대로 긴 목을 선택한다. 이 덕분에 목 아래로 이동한 후두가 기도와 성대로 분리되면서 하나의 목구멍으로 동시에 숨 쉬고, 먹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긴 목을 선택한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를 갖고 살아남으며, 짧은 목을 선택한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한다.
하지만 긴 목이 완벽한 선택일까. 목디스크로 고생하는 나로서는 찬성할 수 없다. 휴일 내내 방구석에 누워 빈둥거리다 화장실에라도 가려 몸을 일으킬라치면, 일어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새삼 느낀다. 직립보행을 인류 불행의 시작이라 생각하는 동지(?)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책. 텔모 피에바니 지음/김숲 옮김/북인어박스/276쪽/1만 9800원.
2024-04-1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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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읽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1895년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타임머신> 이후, 시간여행은 인간 상상력의 단골 소재가 됐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후회막심이던 인생의 여러 순간들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의 물리학>은 웰스를 비롯해 아서 C. 클라크, 아지작 아시모프 등 유명 SF 작가의 소설 속 시간여행 가능성을 차근차근 살펴본다. 저자는 시간여행이라는 아이디어에 담긴 과학적 실체를 낱낱이 탐색하고 이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칼 세이건 등이 탐구해 온 상대성이론, 블랙홀 연구와 비교한다.
책 표지에 속아선 안된다. 표지만으로는 어린이용 서적인 듯 보이지만(표지 속 여성의 놀란 듯한 표정은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내용은 쉽지 않다. 최소한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이 뭔지는 알 정도의 물리학 지식은 있어야 이해가 빠르다.
다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시간여행의 종착지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여러 소설에서는 대충 넘어갈 수 있었던 ‘할아버지 패러독스’(과거로 이동해 젊은 할아버지를 살해할 경우, 미래의 자신은 태어날 수 없고, 결국 할아버지를 살해하는 상황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모순)를 과학은 무시하고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원 등판한 ‘멀티버스’ 세계관으로 접어드는 순간,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시간여행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다. 수많은 우주가 중첩되어 있는 멀티버스 중 고작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다른 세계에선 다른 결말이 진행되고 있기에. 물론 과학이 그러하다는 것일 뿐, 이 책 탓은 아니다. 존 그리빈 지음/김상훈 옮김/휴머니스트/216쪽/1만 6700원.
2024-04-0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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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해부했더니 ‘감정’이 보였다
‘감정(感情)’이란 무엇인가. ‘이성(理性)’과는 완전히 다르며, 또한 ‘생각’과도 다르다. 흔히들 ‘이성’이나 ‘생각’은 뇌의 활동으로 여기지만, ‘감정’은 마음의 문제라 말한다. 그러면, 마음은 우리 몸 중 어디에 속한 부분인가. 뇌인가, 심장인가, 아니면 가슴인가. 복잡해진다.
슬프게도 뇌과학의 발달은 “감정 역시 뇌의 활동”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뇌간이 시작되기 전 피질의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번연계에서 내 첫사랑의 애틋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슬프게도 이 세상이 너무 삭막해진다. 최근 들어 ‘(감정 활동은) 번연계보다 좀더 광범위한 뇌 영역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크지만, 어쨌든 같은 뇌 안의 활동이다. ‘감정이 뇌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슬프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뇌의 활동인 셈이다.
하지만 꼭 슬프지만은 않다.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이 감정이라는 게 사실 매우 거추장스럽더라는 거다. 감정이 뇌의 작용이라면, 즉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리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생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여러가지 조건을 조절함으로써 감정까지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감정을 조절·제어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더욱 멋진 신세계가 될 수 있다. 상사의 갑질로부터 분노를 참을 수 있는 약물이 있다면? 그것도 좋지만 실연으로부터 고통 받지 않은 약물이 더 유용해 보인다. 만일 누가 그런 약을 발명한다면, 그에게 노벨생리의학상은 물론 노벨평화상까지 준다고 해도, 나는 찬성이다. 굳이 하나의 상만 줘야 한다면 노벨평화상이 더 어울린다.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을 진화의 가장 윗 단계로 여기는 발상은 과거에도 많았다. 특히 공상과학 소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인간보다 진화한 외계의 생명체는 대체로 인간보다 감정이 부족하거나 혹은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그려졌다. ‘스타트랙’에 등장하는, 지적으로 우월한 종족 ‘벌컨족’이 그렇다. 평소 감정 자체를 거부하는 벌컨족의 감정 억제 능력은 7년에 한 번씩 ‘짝짓기’를 하는 동안에만 사라진다.
<감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뇌과학>은 감정이라는 기이하고 실체 없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코미디언이자 신경과학자인 저자는 코로나19로 아버지를 잃은 후 다스리기 어려운 감정의 파도를 맞닥뜨리면서, 이러한 감정을 현미경 아래에 두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추적한다. 불가해한 슬픔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한 여정은 뇌과학과 심리·사회 현상까지 뻗어 나가 종횡무진하며 감정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추적으로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 구체적인 실체로 드러나는 과정이 흥미롭다. 슬픔이나 기쁨 등 감정에 의해 생겨난 눈물은 눈의 자극(먼지가 들어간다든지)을 통해 생성되는 눈물과는 화학적으로 다르다. 감정적인 눈물에는 피부를 통해 흡수될 때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화학물질인 옥시토신과 엔도르핀이 들어있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의 신체 활동(눈물의 성분 등)을 변화시키고, 또한 특정 신체 자극(옥시토신을 피부로 흡수시키는 것 등)은 감정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책은 여전히 감정을 자유롭게 ‘컨트롤’하는 방법까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세계의 뇌과학자들은 인류를 위해 더욱 분발해주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벌컨족의 감정 억제 능력이다. 딘 버넷 지음/김아림 옮김/북트리거/500쪽/2만 2000원.
2024-04-04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