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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과연 금투세를 낼 수 있을까?
북유럽 같이 흔히들 ‘복지국가’라고 부르는 곳에선 자신의 수입의 절반 가까이 혹은 절반 넘게 세금으로 낸다고 한다. 예를 들어 덴마크에선 수입이 원화로 1억 원 정도를 넘지 않으면 40% 가까이, 1억 원을 넘게 벌면 60% 정도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덴마크 사람이라고 다들 기쁜 마음으로 세금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국가가 그렇게 많은 돈을 개인에게 가져가더라도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 게 신기할 뿐이다.
북유럽 사람들은 많은 세금을 내는 걸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으니, 높은 세율에 저항감이 없을 것이다. 익숙해서 많은 세금을 당연히 생각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단지 익숙하다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지금의 덴마크 사람들도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 넣어두고 높은 세율로 소득세를 걷으면, 대부분 반발할 것이다. 반대로 덴마크로 이민을 떠나 살게 된다면 어떨까. 처음엔 높은 세율에 당황하겠지만, 점차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차이는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믿음 정도인 것 같다. 나라가 비교적 공정하게 세금을 걷고 있고, 그 돈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알뜰하고 효율적으로 쓸 것이라고 믿으면, 세금이 그리 아깝지는 않을 듯하다. 어떤 나라의 국민은 세금을 내면서 이 돈이 복지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어떤 곳에서는 운이 나빠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
요즘 주식 투자자들은 걱정이 많다. 지난 총선은 야당이 압승했다. 그 결과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는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여당 지지자든, 야당 지지자든 일단 주식 투자자라면 대다수가 일명 금투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일 것이다. 금투세는 그동안 사실상 세금 부담이 거의 없었던 주식·채권·펀드·파생상품 등 모든 금융투자상품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해 부과한다는 내용이다. 수익이 5000만 원이 넘으면 양도차익에 대해 20%를, 수익이 3억 원이 넘으면 25% 세율이 적용되는 게 골자다.
사실 주변에 주식 등으로 5000만 원 넘는 소득을 낸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다수 투자자가 금투세에 부정적인 것은 몇 가지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도 주식으로 5000만 원 넘게 벌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물론 현실은 금투세 대상이 되는 영광은 아무나 누리는 게 아니다.
대다수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건 투자시장의 위축이다. 높은 소득세가 부과되면 큰 손들이 주식 시장을 떠날 수 있고, 가뜩이나 심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거다. 시장이 위축되면 개인의 소득이 크든 작든 부정적 영향을 받고, 국가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금투세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들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일반 근로자의 소득세율보다 금융투자자들은 상대적으로 세금 부담이 적다. 경제 구조 자체가 너무 불균형적이기 때문에 금투세로 소득세 부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거다. 소득이 있는 곳엔 세금이 있어야 한다는 대원칙에 준해 생각하면, 금투세의 당위성은 충분하다.
그럼에도 금투세가 투자자들로부터 미운 털이 박힌 것은 국가와 정치권의 책임도 크다. 금투세는 문재인 정부에서 마련했고, 여야 합의를 거쳐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22년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 금투세 폐지로 방향을 잡았고, 총선을 거치면서 정치 쟁점화가 되기도 했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 투자자나 증권사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금투세를 준비하다가도 운이 좋으면 없던 일이 될 것 같기도 하니, 투자자들은 금투세 반대 논리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증권사들은 금투세 관련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다가, 폐지 논의에 작업을 멈췄다고 한다. 이제 또 작업을 재개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증권사들은 적잖은 비용을 허비했다.
금투세 논란은 세금 문제에 있어 국가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것은 국가가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금투세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이 세금의 필요성은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국민에게 세금을 취지를 알리는 것보다, 상대당과의 힘겨루기에 더 많은 에너지가 쓰였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니 정책도 뒤집혔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선뜻 세금을 낼 수 있겠는가.
정치권에서부터 금투세를 정치적 도구로 쓰기 않고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 납득이 되는 논리로 폐지 여부를 결정하고 세율 등도 유지하거나 수정하기를 바란다. 충분히 합리적인 세금이라고 판단이 되면 금투세에 대한 저항은 줄 것이다. 만일 금투세가 유지되면, 이왕이면 다들 투자를 잘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낸 뒤 영광스럽게 금투세를 내기를 바란다.
김백상 경제부 금융·블록체인팀장 k103@busan.com
2024-04-1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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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보수텃밭에서 진보 씨앗 키우는 경남
격렬했던 제22대 총선이 끝났다. 나라 곳곳에 게시됐던 선거 현수막도 철거되고,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총선 결과에 대한 해석이 연이어 나오는 가운데 경남 선거 결과를 놓고도 다양한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전국에선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하고 국민의힘은 참패했지만, 경남의 정치 지형은 외형상 ‘현상 유지’다. 여야의 숫자상 의석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13석, 민주당 3석’이던 경남도 내 여야 의석이 이번에도 유지됐다. 민주당이 내건 ‘정권 심판’ 슬로건이 수도권 유권자를 움직였지만, 경남에는 제한적인 영향밖에 미치지 못한 결과다. 오히려 직전 총선과 비슷한 범야권 압승 분위기가 대구·경북, 부산과 함께 ‘보수 텃밭’으로 분류되는 경남에서 유권자들이 국민의힘 지역구 후보를 더 지지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현상 유지’라는 표현처럼 여야 모두 승리했다고 장담하기에는 애매한 성과를 낸 상황이다.
우선, 국민의힘은 이번 총선에서 그나마 “선방했다”는 분위기다. 21대 총선 때 국민의힘 전신 미래통합당은 경남 16곳 중 ‘낙동강 벨트’ 3곳(김해갑·김해을·양산을)과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한 김태호 후보에게 내준 1곳(거창산청함양합천)을 제외한 12개 선거구에서 이겼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은 경남 16개 전 지역구를 석권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목표 달성은 못 했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가 있는 ‘낙동강 벨트’ 양산시 지역구 2곳에서 모두 승리했다. 양산을 김태호 당선인은 지역구가 생긴 2016년 20대 총선 이후 국민의힘 후보로는 처음 승리했다. 양산갑 윤영석 당선인은 유세 도중 문 전 대통령을 향한 “문재인 직이야(죽여야) 돼”란 막말에도, 내리 4선에 성공했다. 험지로 차출된 김태호 당선인은 부산·울산·경남의 진보 바람 확산을 막는 혁혁한 역할을 한 공로로 당내 위상이 강화될 전망이다. 이처럼 국민의힘 입장에서 양산을 탈환은 1석을 빼앗았다는 의미 외에도 ‘보수의 텃밭’을 굳건히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성과다.
반면, 민주당은 낙동강 벨트인 양산을에서 1석을 잃었지만, 대신 경남 수부도시인 창원시에서 귀중한 1석을 차지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민주당은 당초 낙동강 벨트를 발판으로 삼아 16곳 중 ‘8석+α’가 가능하리라 내심 기대했다. 김해갑·김해을·양산을 등 낙동강 벨트 교두보 3곳,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가 있는 양산갑, 5개 의석이 걸린 창원시 등 경남 중동부권에서 의석 추가를 기대했다. 그러나 김해갑·김해을 수성에는 성공했지만, 양산을은 국민의힘에 내줘 낙동강 벨트 확장에 실패했다.
하지만 한 번도 민주당 당선인을 배출하지 못한 창원시 5개 지역구 중 한 곳에서 승리한 점에는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직전 창원시장을 지낸 허성무 당선인이 야권단일화 결렬을 극복하고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허 당선인은 2016년 제20대 총선 때 처음으로 성산구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지만, 당시에는 정의당 후보(고 노회찬 의원)와의 야권 단일화로 후보직을 사퇴함으로써 미완의 도전에 그쳤다. 이후 민선 7기 창원시정을 이끈 그는 2022년 지방선거에서 창원시장 재선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다시금 국회 입성을 준비해왔다. 그는 이번 승리로 야권단일화 결렬을 극복하고 범진보 정당에 승리를 안긴 첫 주인공이 됐다. 경남 ‘정치 1번지’이자 ‘진보정치 1번지’로 불리는 창원 성산구에 민주당 씨앗을 심었다는 자체 평가다.
결과적으로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과 민주당 모두 경남에서 당초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자만보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총선 결과 평가 관점도 다르다. 국민의힘 경남도당은 성명서를 통해 “이번 선거에서 동남풍을 일으켜 경제 재도약과 정치 대혁신을 이끌고자 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면서 “낙동강벨트에서 개헌 저지선을 확보해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로써 소임을 했다”고 밝혔다.
반면 민주당 경남도당은 “도민 눈높이와 바닥 민심을 제대로 읽어내는 데 부족했다”면서 “당선자와 함께 윤석열 정권이 무너트린 민생·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 ‘분열을 넘어 갈등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정치’를 통해 정책정당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여소야대’로 기울어진 전국 정치 상황과 달리, 경남은 여전히 ‘여대야소’ 형국이다. 보수를 계속 지키겠다는 여당과 새로운 정치 씨앗을 심었다는 야당이 공존하는 상황이다. 여대야소로 협치가 화두가 된 상황에서 경남 상황에 맞는 협치 전략이 필요하다. 22대 국회가 개원하면 사천에 설립 예정인 우주항공청 후속 방안으로 ‘우주항공복합도시 건설지원 특별법’ 통과와 창원 의대 신설 등에 대한 도내 의원 16명의 협치를 기대해 본다.
2024-04-1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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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아름답게 '지는' 벚꽃처럼
올봄 뒤늦은 개화에 벌써 ‘벚꽃 엔딩’이다. 다행히 지난 주말 벚꽃 여행 막차를 탔다. 가족과 찾은 경북 구미시 금오산과 김천시 연화지에는 만개한 벚꽃과 인증샷을 찍으려는 상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다 서다 반복하는 거북이걸음에도 지난한 일상을 위로하는 듯한 생기에 기분이 썩 괜찮았다. 소음처럼 들릴 법한 노점상의 ‘손님 몰이’와 총선을 앞둔 여야 후보의 확성기 유세도 이날은 구수했다.
해와 벚꽃은 질 때가 더 아름답다고 했다. 주말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우수수 낙화했다. 출근길 강한 봄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벚꽃비’는 봄날의 피날레를 장식하듯 장관이었다.
봄기운 속 시작한 제22대 총선 레이스도 벚꽃 엔딩과 함께 막을 내렸다. 앞서 공천과 본 선거 과정 모두 화창한 봄날이 무색하게 혼탁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전투구가 잇따랐고, 공약도 직전 대선과 지방선거의 것을 재탕하거나 현실성 없는 것을 남발했다. 벚꽃이 ‘설렘 지수’를 끌어올렸다면, 구태를 되풀이한 총선은 ‘싫증 지수’를 높였다. 그런데도 국민은 32년 만에 최고 투표율로 다시 한번 새 정치에 기대를 걸었다.
어찌 됐든 민주주의의 축제인 선거가 끝이 났다. 벚꽃 엔딩처럼 아름답게 ‘지는’ 총선 엔딩이 가능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여론조사 때부터 워낙 접전지가 많았고, 상대 후보를 겨냥한 폭로전과 고소·고발이 난무했던 터라 총선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이미 총선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된 지난해 12월 12일부터 지난달 26일까지 검찰과 경찰이 적발한 선거 사범만 각각 474명, 895명에 달한다. 허위 사실 공표·흑색선전 사범이 이례적으로 40%대를 넘길 정도로 유언비어가 판친 셈이다. 사전투표 때도 조작, 부정선거 음모론이 또다시 제기되며 ‘피곤한 결말’을 예고했다. 최근 가짜뉴스 등으로 인해 자신의 기존 신념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확증 편향’도 심해져 유튜버나 일반 시민까지 시끄러운 결말을 부추기는 꼴이다.
지난 제21대 총선의 경우 대전의 낙선자들이 ‘4·15 국회의원 선거 실태 조사단’을 구성하는가 하면 한 낙선자는 중앙선관위 위원장을 선거방해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사전투표 조작, 부정선거 등을 이유로 126건의 소송이 제기됐지만, 모두 법원에서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물론 터무니없는 결과에 승복할 수는 없지만, 묻지마식 고소·고발이 남발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더 우려스러운 건 당내 후폭풍이다. 낙선자 스스로를 돌아보기보다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도부에 전가하며 격랑을 겪는 일이 매번 반복됐다. 이번 경선도 ‘비명(비이재명)·비윤(비윤석열) 횡사’ 등의 논란으로 계파 갈등이 컸던 만큼, 총선 직후 당내 주도권 싸움이 본격화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민생과 민심을 제쳐두고 말이다.
승자의 손을 들어주는 아름다운 퇴장은 위기의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고금리·고물가 장기화로 ‘먹거리 양극화’가 빚어질 정도로 체감 경기가 바닥이다. 최근 소득 하위 20%의 경우 가격이 고공행진 하는 신선 식품 대신 값싼 가공식품을 찾으면서 엥겔지수가 하락하는 역설적인 현상도 나타났다. 엥겔지수는 전체 소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통상 낮을수록 식비 이외 지출이 많아 가계에 여유가 생긴 것으로 해석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소멸 위기에 놓인 지역 상황은 더 심각하다. 제2의 도시 타이틀이 부끄럽게 부산은 청년 인구 이탈 가속화, 저출산 쇼크 등으로 ‘노인과 바다’ 도시라는 오명을 쓴 지 오래다. 그나마 ‘해양 수도’라는 명목 아래 항만·해양·수산업이 고도화하며 체면치레한다. 자연스럽게 수도권과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산업은행 이전, 부울경 메가시티·특별연합 구축과 같은 부산의 초대형 이슈가 정쟁으로 밀릴 때, 수도권은 지난달 말 GTX(수도권 광역급행철도)-A를 완공해 ‘30분대 출퇴근’ 시대를 자축했다. 최근 인천에서는 3기 신도시가 착공했고,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가 속도를 내며 수도권 일극체제가 견고해지는 모습이다.
박탈감에 빠진 이 시대에 맞서 제22대 국회가 곧 출범한다. 당선자들은 제 자리 지키기에 급급해 공약을 외면하는 모습을 더는 보이지 않길 바란다. 낙선자들도 그들이 하루빨리 민생과 지역 현안 해결에 집중하도록 패배의 아픔을 머금고 한발 물러서야 한다. 벼랑 끝에 몰린 지역을 살리기 위해 적절한 견제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초당적 협력도 불사해야 할 때다. 시민은 선거 과정에서 본 낙선자들의 열정과 진정성을 쉽게 잊지 않는다. 아름다운 벚꽃 엔딩은 끝이 아닌 다음 개화를 위한 또 다른 시작임을 알아야 한다.
이승훈 해양수산부장 lee88@busan.com
2024-04-10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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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당신의 선거를 관통하는 사자성어는?
학창 시절 한자 획까지 기억해 가며 고통스럽게 사자성어를 암기했던 기억이 있다. 한문 선생님의 손바닥 회초리는 맵기로 유명했다. 쪽지 시험에서 자주 틀린 사자성어는 볼 때마다 손가락 마디가 얼얼해지는 착각이 든다. 그래도 사회생활 해보니 빠지지 않는 게 사자성어다. 처한 상황을 두루 아우르되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그 압축미. 직장부터 가정, 자녀 이야기까지 호사가의 술자리 안주로 이만한 것도 드물다.
선거판만큼 사자성어가 만만한 곳도 없다. 캐치프레이즈란 게 압축적일수록 소구 효과가 좋다. 그러니 사자성어의 효능이야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선거판을 ‘이전투구’라 일컫는 건 진부하다 못해 식상한 수사다. 시스템공천이니, 클린공천이니 해도 선거 초반 팔자 좋던 시절 이야기였다. 서로가 승리를 장담하던 상황이니 누군들 점잖은 척 못했을까. 사람의 본바탕은 다급해져야 나온다. 투표일을 코앞에 두니 진흙탕에서 처참하게 싸우는 개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건 이번 22대 총선도 예외가 아니다. 식상하긴 해도 ‘이전투구’는 선거판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사자성어라는 타이틀을 당분간은 내려놓을 것 같진 않다.
지난해 급부상한 ‘양두구육’은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의 작품이다. 당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며 자격 없는 윤석열 후보를 포장해 대통령으로 팔았다는 뜻으로 비난한 이 넉 자가 제대로 히트를 쳤다. ‘표리부동’과 쓰임은 같지만 요즘은 더 빈번하게 쓰인다. ‘이전투구’처럼 개가 들어가서 듣는 상대에게 주는 모멸감이 아주 찰지다.
히트작이라면 조국혁신당으로 돌풍을 일으키는 조국 대표의 ‘내로남불’도 빠질 수 없다. 본인의 과거 발언과 배치되는 자녀의 입시비리 혐의가 드러나면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댓구가 절묘하게 완성됐다. 민주당을 궤멸 위기로 몰아넣었던 넉 자지만 2심 유죄 판결에서도 조 대표의 비례정당은 지지율 30%를 넘어선 상황이라 ‘기사회생’이라 바꿔 불러야 할 판이다.
‘내로남불’의 풍파에 휩쓸린 사람은 가까운 부산 수영에도 있다. 야당의 막말을 받아치며 전투력 좋은 여당 스피커로 활약했던 무소속 장예찬 후보도 20대 시절 본인의 막말에 발목이 잡혔다. 〈부산일보〉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달리다 공천장이 날아갔다.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장 후보의 공천을 취소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무소속 출마로 명예회복을 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여당의 ‘읍참마속’이 묘수가 됐을지, 악수가 됐을지 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이가 많다. 보수세가 높아 뻔한 선거구로 분류되던 수영이 단숨에 전국구 관심을 받게 된 까닭이다.
22대 총선의 종착역이 먼 발치에서 보이기 시작하며 공고하던 부산의 여당 지지세에는 금이 갔다. ‘비명횡사’ 외치며 표정 관리 해왔지만 전국적으로 범야권 200석이 언급될 정도로 풍향이 바뀌었다. ‘독야청청’ 원외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다 여당 선거를 총괄하게 된 한동훈 선대위원장도 용산에서는 연일 악재가 터지니 마음이 급해진 게 눈에 보인다. 급기야 ‘정치를 개같이’ ‘쓰레기 같은 말’이라는 수위 조절이 안되는 발언까지 내지른다. 초반 신선했던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다. 한동훈도 정치 발 담그니 어쩔 수 없다며 유권자의 정치혐오는 한층 더해진다. 다들 ‘근묵자흑’이라 혀를 차기 바쁘다.
여전히 접전 상황인 지역구의 후보는 단 하루가 아쉽지만 사전투표까지 마치며 전국 유권자의 31%가 권리 행사를 마쳤다. 전국별, 부산 선거구별 사전투표율이 나오니 이번엔 ‘아전인수’가 등장한다. 편한대로 물길을 돌려 제 논에 물을 대는 모습처럼 여당이고, 야당이고 사상 처음으로 30%를 돌파한 사전투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기대를 품는다. 전국구로 보자면 야당세가 강한 전남과 전북이 나란히 투표율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부산에서는 반대로 전통적으로 보수세가 짙은 금정구와 동구, 서구 등이 투표율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야당에서는 정권 심판론이 힘을 얻었다 하고, 여당에서는 선거 막판 보수세가 결집하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해석하니 나름이다.
그래도 미우나고우나 우리 동네를 4년간 대표할 선출직을 뽑는 날이 하루 앞이다. 내가 선택한 후보가 우리 동네를 위해 ‘분골쇄신’할 일꾼인지, 짧은 봄날 고개 숙였다가 유권자 위에 군림하려는 ‘안하무인’의 인사인지 꼼꼼히 살피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인의 설득에 기장 철마에 주말 농장이라 하기도 민망한 텃밭 한 귀퉁이를 얻었다. 주말이라도 성실한 가장인양 점수를 딸 참이었는데 이 좋은 봄날에 가족을 데리고 가 모종 한 번 심지를 못했다. 선거가 끝이 나야 봄이 올 모양이다. 정치부 기자에게 선거는 ‘춘래불사춘’이다.
권상국 정치부 차장 ksk@busan.com
2024-04-0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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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폐업 웅상중앙병원 현실적 대책 세워야
지난 2월 28일 오전 경남 양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한 주민이 찾아왔다. 주민은 “언론에서 웅상중앙병원 폐업 기사를 내면서 양산시 비상 의료대책은 알려주지 않아 관련 브리핑 소식에 무작정 프레스센터를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웅상중앙병원 전신인 조은현대병원이 문을 닫을 당시 아픈 아기를 안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던 생각이 났다”며 “당시 양산시의 비상 의료대책에도 1년 이상 의료 공백으로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불편을 겪었던 만큼 이번엔 확실한 후속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부양산(웅상출장소 4개 동)이 웅상중앙병원 폐업으로 엄청 시끄럽다. 웅상중앙병원 폐업은 때마침 전공의 집단행동으로 인해 인근 다른 병원 이용에도 지장을 줄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주민 불안감을 더 가중시킨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와도 맞물리면서 ‘총선 이슈’로 급부상했다.
웅상중앙병원은 지난해 12월 병원장이 숨진 후 누적 적자 등으로 2월 말 폐업했다. 동부양산에는 104곳의 병의원 등이 운영 중이다. 그러나 지역 유일한 종합병원이자 응급의료실을 갖춘 곳이 웅상중앙병원이어서 응급의료 공백을 우려한 주민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양산시는 비상 응급의료 체계 구축에 나섰다. 동부양산 응급환자 진료를 위해 서부양산 병원 2곳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응급 환자의 신속한 이송을 위해 119구급차는 3대로 늘렸다. 동부양산 일부 의원의 야간진료 시간도 연장했다. 동부양산과 인접한 부산, 울산지역 응급실 운영 의료기관과 야간 휴일 의료기관에 대한 정보도 홍보했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위급 상황 발생 시 골든타임을 못 지킬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동부양산 주민들 사이의 공공의료원 설립 열망이 서명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22대 총선 여야 후보들도 운영 주체가 다른 공공의료원 설립을 대책으로 발표했고, 녹색정의당은 1만 명 서명 운동을 제안해 공공의료원 설립에 불을 붙였다.
주민 열망대로 동부양산의 의료 공백 해결에는 공공의료원 설립이 정답이다. 그러나 완공 때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정부 승인도 쉽지 않다. 김해시는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후 공공의료원 설립에 나섰고, 지난해 6월 타당성 조사 용역에 착수해 오는 8월 결과가 나온다. 김해시는 내년 상반기 보건복지부 승인과 기획재정부 예타 조사 신청을 거쳐 2030년 300병상 규모의 공공의료원을 완공할 방침이다.
2017년 폐업한 부산 침례병원 공공화 사업도 2018년부터 7년째 추진 중이다. 침례병원 자리에 보험자병원을 설립하는 공공화 사업은 추진 초기 민간병원이 공공병원으로 변경되는 첫 사례여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공공의료원 설립은 사업계획 수립을 시작으로 부지 선정, 타당성 조사, 보건복지부 승인, 기획재정부의 예타 조사, 예산 확보, 인허가 절차, 건립으로 평균 9~10년 소요된다.
양산시가 검토 중인 공공의료원 역시 김해시 공공의료원(도립)과 같은 절차를 거친다. 양산시가 웅상중앙병원 인수를 통한 공공의료원 설립을 추진하면 사업계획·부지 선정을 제외한 공공의료원 설립 절차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산에 양산부산대병원이 운영 중이고, 김해에 공공의료원이 설립되면 양산시 공공의료원 설립은 상대적으로 더 힘들 전망이다. 양산시는 최근 여야 총선 후보들에게 ‘양산의료원 설립’을 공약으로 반영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로선 웅상중앙병원을 인수할 민간인 또는 업체를 찾는 편이 더 현실적이다. 웅상중앙병원을 개인이나 영세 의료법인보다 대학병원이나 대기업, 재력이 있는 의료법인에서 인수하도록 양산시는 물론 지역 정치권이 힘을 모으고 있지만, 성사 여부는 장담할 수 없다.
웅상중앙병원은 2014년 부도로 문을 닫은 조은현대병원을 인수·재개원했다. 2006년 개원한 조은현대병원은 운영 과정에 적자가 발생했고, 2014년 문을 닫았다. 웅상중앙병원의 하루 외래환자는 평균 465명, 입원환자는 186명이었지만, 연간 많은 적자가 났다. 개인이나 영세 의료법인이 인수하면 조은현대병원이나 웅상중앙병원처럼 일정 시간 내 부실과 폐업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양산시는 웅상중앙병원 조기 정상화를 위해 인수자를 물색하는 동시에 동부양산 공공의료원 설립 여부를 빠른 시일 내에 결정하고 로드맵도 제시해야 한다. 지역 정치권과도 손잡고 총력전을 펴야 한다. 365일 24시간 응급실 운영을 바라는 동부양산 주민들의 기대가 하루빨리 이뤄질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2024-04-0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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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맨발로 걷기 좋은 도시
다시 어김없이 봄이 왔다. 차디찼던 땅이 온기를 품고, 맨살만 드러냈던 숲도 기지개를 켠다. 사라졌던 곤충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새들도 곳곳에서 목을 놓아 자신을 뽐낸다. 산과 도시에 활짝 핀 꽃처럼, 겨우내 숨 돌렸던 맨발걷기 바람도 다시 분다.
서울과 대구, 대전 등 대도시는 물론 전국 각지의 시민들은 올봄에도 맨발걷기에 진심이다. 맨발로 땅을 딛고 오롯이 지구와 접촉하는 맨발걷기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 흙길을 뒤덮은 아스팔트 위에서 바닥 두꺼운 신발을 신고 살아가며 놓쳤던 소중한 자연의 가치를 맨발걷기가 다시 일깨운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아파트로 뒤덮인 ‘공중 주택’에 살게 되면서 본능적으로 흙과 땅을 갈망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 강남구 대모산과 대전 계족산 등 전국적인 맨발걷기 명소에 자연스럽게 사람이 몰리고, 사는 곳 주변에서 맨발로 걷는 시민들이 점점 늘어난다. 민간에서 맨발 열풍이 일자 지자체들의 경쟁이 시작됐다. 맨발걷기에 좋은 길과 세족장, 신발장 등 시설을 앞다퉈 만든다. 시민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이 소중한 세금으로 봉사해야 하는 그들의 임무여서다.
지자체가 맨발걷기 환경 조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예산을 집행하려면 근거가 필요하다. 지난해 3월 전북 전주시에서 처음으로 맨발걷기 활성화 지원 조례가 태어났다. 이후 지금까지 전국 140여 개 지자체가 조례를 제정했다고 한다. ‘맨발걷기에 좋은 환경’이 행복하고 살기 좋은 도시임을 가늠하는 새로운 기준이 된 것이다.
부산의 산과 바다, 동네 공원, 학교 운동장에서도 맨발걷기를 하며 건강하게 삶의 여유를 즐기는 시민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금정산과 장산, 황령산, 백양산 등 크고 작은 산들 사이에 삶터가 둥지를 틀었고, 낙동강과 수영강에다 해운대, 광안리, 송정, 다대포, 송도, 일광, 임랑 7개 해수욕장을 따라 긴 해안선까지 두른 도시 부산은 맨발걷기에 선물 같은 도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맨발걷기의 효용을 체험하고 전파에 나선 이들도 산과 강은 물론 촉촉한 바닷가에서 맨발로 걷는 ‘슈퍼 어싱’까지 가능한 부산이 가진 천혜의 환경에 찬사를 보낸다. 한데 안타깝게도 이들은 맨발걷기를 향한 시민 열망이 가장 늦게 반영되는 곳이 부산이라 입을 모은다.
부산에서는 지난해 9월 금정구가 조례 제정 신호탄을 쐈고, 지난달 해운대구도 가세했다. 16개 구군 가운데 부산시를 포함한 11개 지자체가 차례로 맨발걷기 조례를 공포했다. 이를 근거로 올해만 맨발걷기 보행로 18곳이 새로 열린다. 기존 맨발길을 합하면 25곳이나 되지만 생색내기에 그친다는 의견이 많다. 안타깝게도 지자체들이 제각각 그리 길지 않은 길을 만들고는 맨발걷기에 동참했노라 홍보하고 있어서다. 흙길, 황톳길이 많은 회동수원지 둘레길의 경우 땅뫼산 황톳길을 제외하고 야자매트를 많이 깔아 원성을 산다. 대한민국맨발학교 권택환 교장은 야자매트가 정 필요하면 흙길과 함께 ‘반반 맨발길’을 조성하는 것이 요즘 추세라고 전한다. 거액의 예산을 들여 조성한 해운대수목원에서도 맨발걷기 보행로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부산시민들은 여전히 맨발걷기에 목마르다. 부산 전체를 관통하는 계획을 세워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릴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온다. 특정한 장소를 골라 다양한 맨발걷기가 가능한 상징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대안도 필요하다. 실제 대전 계족산에는 14.5km에 달하는 황톳길이 만들어져 명성을 얻었고, 전국에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부산에서 금정산이나 다대포 해수욕장은 보물 같은 공간으로 평가된다. 다대포의 경우 해변길과 흙길을 동시에 걷도록 조성할 수 있어 더욱 특별하다.
부산일보는 이참에 맨발걷기를 향한 시민 열망을 제대로 엮어 보기로 했다. 부산시와 부산시의회, 부산시교육청, 부산상공회의소, BNK금융그룹 등과 함께 ‘부산맨발걷기좋은도시운동본부’를 결성한 것이다. 맨발걷기국민운동본부, 대한민국맨발학교, 부산걷는길연합, 레일코리아 등 민간 단체도 손을 맞잡았다. 맨발부산 운동본부는 우선 7개 해수욕장에서 맨발로 걷는 ‘세븐비치 어싱 챌린지’를 시작하기로 하고, 오는 21일 오후 5시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첫 행사의 문을 연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에다 어지러운 선거판, 예측할 수 없는 기후환경까지 시민의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팍팍하다. 시민이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민관이 뜻과 힘을 한데 모아야 한다.
2024-04-0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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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역 기업과 ESG 경영
전 세계적으로 ESG 경영이 대두되면서 국내 많은 민간기업과 공공기관들이 ESG 경영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유럽연합(EU)에서 ESG 수출 규제가 확대되고 있어 국내 기업들의 규제 인식과 대응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ESG란 환경(Envi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로, 기업 경영에서 지속 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한 3가지 핵심 요소를 말한다. 환경 보호와 사회적 책임, 건전한 지배 구조의 실현 등 기업의 비재무적 가치를 강조하는 트렌드다. 기후변화 등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투자자와 소비자들도 기업을 평가할 때 이러한 비재무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
부산 지역 기업들이 점점 ESG 경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ESG 경영 도입에는 소극적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부산상공회의소는 지난달 ‘부산지역 기업 2023년 ESG 등급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부산 상장 법인 39곳이 조사 대상이었는데, 이 중 74.4%가 C등급 이하의 취약한 수준에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ESG 등급 상승기업이 39곳 중 15곳에 달해 전년보다 크게 늘어 고무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일부 사례이긴 하지만, 최근 취재 현장에서 만난 기업들이 ESG 경영을 활발하게 펼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기업은 물티슈 제조 전문기업 (주)유승인네이처(부산 기장군 정관읍)이다. 이 회사 차승종 대표는 ESG 경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소비 트렌드가 친환경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서, 기업이 소비자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ESG경영을 도입하고 제품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차 대표의 지론이다.
그는 2019년 창업 이후부터 플라스틱 원단을 대체하는 친환경 종이 물티슈 개발에 집중했다고 한다. 종이 물티슈가 생분해성이 높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 대표는 지난해 12월 중소벤처기업부와 창업진흥원이 주최한 ‘2023 민관협력 오픈이노베이션 지원사업’ 성과공유회에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을 받았다. ‘민관협력 오픈이노베이션’ 사업은 자본·기술을 가진 대기업과 가능성을 지닌 스타트업 간 협업수요를 발굴·연결하고 정부의 후속 연계 지원을 통해 기업 간 개방형 혁신을 활성화하기 위한 상생협력 사업이다. 유승인네이처는 이 사업에서 ESG 환경분야 종이 물티슈 개발 과제에 참여했다. 파트너가 된 국내 펄프 제지 전문기업인 무림 P&P와 협업을 통해 100% 천연펄프로 만든 물티슈를 세상에 내놓았다. 차 대표의 친환경 제품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집념이 이뤄낸 결실이었다. ‘친환경 물티슈 업계 선두 주자로서 고객과 사회에 기여하는 가치 있는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차 대표의 각오가 깊은 울림을 줬다.
국내 최고 수준의 가스 전문 기업인 MS가스그룹(부산 사상구 학장동)도 친환경 에너지 기술 개발과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ESG 경영을 적극 실천하고 있었다. MS가스그룹은 일반 산업용 가스를 비롯해 특수 가스와 LPG 등 가스 전 품목을 취급하고 있다. 지난 1월 창립 50주년을 맞아 이 회사는 ‘50년의 역사를, 100년의 영광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앞으로 100년’의 방점은 ‘친환경 에너지기술 개발’이다. 현재 부산시와 암모니아 친환경 에너지 규제자유특구 연구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경상남도와 암모니아 연료추진시스템 선박 규제자유특구 연구개발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친환경 암모니아 연료 공급 시스템 신산업 분야 육성과 해양환경 규제 강화에 따라 발 빠른 대응을 하고 있었다.
MS가스그룹 전원태 회장은 사회공헌 사업도 꾸준하게 펼치고 있다. 2011년 비영리 공익 재단법인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을 설립해 사업에 실패한 중소기업 경영자를 대상으로 ‘재도전 힐링캠프’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13년간 총 29회에 걸쳐 460명이 수료했고 그중 60% 이상이 재기와 재창업에 성공했다고 한다. 재도전 힐링캠프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 죽도의 연수원에서 매년 2회 열리고 있으며 올해도 4월과 11월에 2주간 진행할 계획이다. 심리적 상처 치유, 에코힐링, 자신감 회복, 기업가 정신 회복, 재도전 성공을 위한 사례 학습과 전문가 개별 컨설팅을 한다.
ESG 경영을 잘하는 기업이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시대다. 지역 기업들이 ESG 경영을 도입해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컨설팅 지원을 비롯해 다양한 제도적·정책적 지원이 뒤따랐으면 한다. 또 기업 현장에서 실제 적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 제공도 필요하다.
김상훈 독자여론부 선임기자 neato@busan.com
2024-03-2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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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행복과 정치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은 무엇일까.
지난 20일은 ‘국제 행복의 날’이었다. 국제연합은 2012년 ‘행복은 인간의 목적이다’라고 규정하며 매년 3월 20일을 국제 행복의 날로 정했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는 이날을 맞아 각국의 국민 행복도를 조사한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한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자료를 기반으로 한 올해 세계행복보고서 1위를 차지한 나라는 핀란드이다. 7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된 핀란드의 점수는 7.741점이다. 한국은 행복도 점수 6.058점으로 52위이다. 2021년 62위, 2022년 57위로 조금씩 순위가 올라가는 상황이지만 현실로는 체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행복이라는 주관적 감정을 점수화하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행복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행복보고서는 삶의 만족도를 조사해 1인당 국내총생산, 사회적 지원, 기대수명, 선택의 자유, 관용, 부정부패 인식 등 항목을 기준으로 행복지수를 산출한다.
지난달 통계청 통계개발원은 국민 삶의 질 2023 보고서를 발표했다. 국민 삶의 질 보고서는 건강, 고용·임금, 주관적 웰빙, 소득·소비·자산, 시민 참여, 안전, 환경, 여가, 교육, 가족·공동체, 주거라는 11개 영역 71개 지표로 삶의 질적인 측면을 진단한다. 한국인이 현재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가를 보여주는 ‘삶의 만족도’는 2022년 기준 6.5점이다. 10년간 꾸준히 점수가 올랐다고 하지만 여전히 OECD 회원국 평균을 밑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한국 삶의 만족도 평균값이 5.95점으로, OECD 38개 국가 중 꼴찌에서 네 번째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회미래연구원에서도 한국인의 행복을 조사한다. 2023년 행복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은 ‘전반적 행복감’ 부문에서 10점 만점에 6.56점을 받았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행복도 조사를 진행하는 이유는 삶의 질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국회미래연구원은 행복조사 보고서에서 ‘한국은 높은 경제 수준에도 불구하고 낮은 행복 수준을 보이는 대표적인 나라일 뿐만 아니라 국가 내 행복 격차도 큰 나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인은 왜 행복하지 않을까. 올 초 미국 작가 마크 맨슨이 유튜브에 올린 한국 방문 영상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국가를 여행했다’가 화제를 모았다. 맨슨은 영상에서 유교 문화의 나쁜 점과 자본주의 단점을 극대화한 결과로 한국인들이 깊은 우울증과 외로움을 앓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동체의 붕괴, 경쟁적 사회 분위기, 양극화 심화에 경기 침체까지 더해지며 정신적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상황이다. 인생역전을 꿈꾸며 사람들이 지난해 복권 구입에 쓴 돈이 무려 6조 7507억 원에 달한다는 사실에서도 팍팍한 현실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하는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정당 간 적대적 대립으로 대화와 타협이 사라졌다. 건강한 정책 논쟁 대신 서로를 향한 비난이나 막말만 오간다. 국회미래연구원이 실시한 조사에 응한 국회의원 보좌진의 약 80%가 ‘정치 양극화로 인해 국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로 인해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더 커진다.
삶의 질 지표 중 시민 참여 영역에 ‘정치적 역량감’이라는 것이 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정부가 하는 일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정부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에 관심이 없다’ 항목을 통해 시민 정치 참여의 잠재적 수준을 판단한다. 스스로 정치적 역량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구 비율은 2022년 15.2%로 2013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시민이 정치와 정책 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건강한 시민사회의 작동은 민주주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올라가고 사회 발전에 동참하는 개인의 만족도도 높아진다.
25일 〈부산일보〉에 보도된 유권자가 제안하는 총선 공통 공약을 보면 정치권이 소리쳐 외치는 이념과는 거리가 멀다. 살기 좋은 동네, 지역 경제와 문화·예술 활성화, 조속한 현안 처리 등 정책 선거에 대한 요구가 많았다. 책 〈괜찮은 정치인 되는 법〉에 정치인은 자신을 찾는 주민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정치인은 국민이 준 권력을 좋은 목적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국민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며, 그런 정치인을 뽑는 것이 선거이다. 우리의 한 표가 더 많은 사람의 행복과 더 나은 내일을 일구는 씨앗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오금아 콘텐츠관리팀 선임기자 chris@busan.com
2024-03-2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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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현대차그룹 최대 실적에 대한 단상
현대차그룹은 2010년 글로벌 자동차 판매량 순위에서 5위로 입성한 뒤 성장 정체를 보였다. 하지만 2018년 정의선 회장이 경영권(당시 수석 부회장)을 맡은지 4년 뒤인 2022년 12년 만에 3위로 올라섰고 2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구 5000만 명을 갓 넘고 글로벌 내수 10위 규모의 나라에 있는 한 브랜드가 이 같은 순위를 낸다는 건 불가사의다. 현대차그룹은 내수만으로는 어렵다는 판단에 결국 ‘수출’에서 답을 찾았고 호실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 생산 물량의 80%가량을 수출하는데, 물량이 최근 3년새 배 가까이 늘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해(별도 재무제표 기준) 매출 78조 338억 원, 영업이익 6조 6710억 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실적을 냈다.
판매량에서 제네시스를 포함한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해 총 730만 대 이상을 기록했다. 1위인 토요타가 1100만여 대인 것과 비교하면 아직 격차가 있지만 920만여 대로 2위인 폭스바겐그룹은 추격 가시권이다.
현대차와 기아가 중국에서 판매량이 대폭 줄어든 상황에서 글로벌 3위를 지켜낸 것이다. 일부에선 “이제 1~2위도 해볼만하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2020년 코로나19의 세계적 위기에 GM과 포드 등 완성차 업체들은 자동차 수요 급감을 예상하고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등으로 생산량을 줄였다. 하지만 현대차는 미국 등에서 생산력을 유지해 오히려 글로벌 점유율이 올랐다. 또한 부진했던 중국을 대신해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과감히 눈을 돌린 것도 성과다.
자동차 업계에선 “토요타와 폭스바겐도 최근 중국 판매가 줄어들고 있고 현대차그룹은 신흥시장에서 판매량이 늘고 있어 글로벌 순위 변화가 더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코로나19와 중국시장 악재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톱3에 든 주요 원인으로는 단연 정의선 회장의 리더십과 품질, 디자인이 꼽힌다.
정 회장은 최근 미국 유력 자동차 전문지 모터트렌드가 발표한 ‘올해 자동차 업계 인물 50인’에서 5위에 올랐다. 지난해엔 영향력 1위를 뜻하는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자동차만이 아니라 로보틱스, 인공지능(AI), 수직이착륙항공기 등 광범위한 모빌리티 사업에 대한 비전을 그리며 미래 산업에 대한 발빠르게 대처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꼽혔다.
2022년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인해 전기차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게 됐을 때도 위기론이 나돌았다. 하지만 정 회장은 리스 등으로 눈을 돌려 오히려 미국에서의 전기차 판매 성장을 이뤄낸 것도 업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호실적으로 달러가 국내로 많이 들어오면 국가경제 입장에선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수 20%를 맡고 있는 국민 입장에선 신차 구매 때마다 부담이 적지않다.
현대차그룹 브랜드들이 국내에서 판매하는 평균 차값이 최근 3년새 배 가량 뛰었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경우 2020년 평균 차값이 2800만 원이었지만 지난해는 5270만 원으로 뛰었다. 현대차 측은 차값이 비싼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와 제네시스 판매량 확대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전체적으로 차값이 비싸진 것은 사실이다.
국민 입장에선 현대차와 기아, 제네시스가 내수 시장 점유율 80%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이들 차량이 아닌 브랜드를 구입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한국GM과 르노코리아, KG모빌리티(옛 쌍용차) 등 국산 완성차는 물론이고 일부 독일차를 제외한 수입차 브랜드들이 현대차그룹의 기술력과 디자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값이 이 같이 비싸진데 대해 국내에선 ‘노조의 고임금’ 때문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있다. 일부에선 “현대차 사느니 차값이 비슷한 수입차를 사겠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수입차의 경우 국내 100원에 들여오면 각종 세금 등으로 140원이 되는데, 동급 현대차가 차값이 비슷한 상황은 쉽게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지방에서 합판가공업을 하는 한 소상공인은 “1t 트럭을 주로 쓰는데 현대차와 기아가 이 시장을 독점한 때문인지 교체때마다 30~40%씩 차값이 올라있다”며 울상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4년 연속 1위로 ‘국민기업’이 된 유한양행의 ‘안티푸라민, 크리넥스 티슈를 사면 이 회사가 좋은 곳에 쓰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듯, 현대차를 사도 편한 마음이면 좋겠다. 이제 더이상 현대차가 ‘욕하면서 사는 차’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4-03-2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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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칼자루 쥔 사람 마음대로' 공천이라도…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국회의원들이 나뭇잎 굴러가는 소리에도 얼어붙는다는 여야 공천의 시간이 막바지다. 이번에도 여야 모두 ‘혁신’과 ‘시스템’을 표방했지만, 역시나 ‘학살’, ‘불패’ 등 한 쪽의 배제와 다른 한 쪽의 특권을 상징하는 말들이 횡행했고, 우리 정치권이 인재를 충원하는 과정의 비정상성이 고스란히 재연됐다. 사실 공천에는 정답이 없다. 권력 내부 소수가 좌우하는 공천은 ‘양날의 검’이다.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개혁 공천’과 ‘사천’으로 극명하게 평가가 갈린다. 그래서 일부 정치인들은 ‘상향식’을 정치 개혁의 요체인 것처럼 부르짖지만, 그 역시 사천 잡음은 없을지 몰라도 현역 기득권을 영구 보장하는 장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에 여야 공천은 전자, 즉 ‘칼자루 쥔 사람 마음대로’ 공천이었다. 여기서 ‘시스템’이란 권력 핵심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세밀하게 구현할 수 있는 구조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정도의 차이는 확연하지만, 여야 모두 주류에서 ‘내편’으로 안 쳐주는 현역들은 어김 없이 ‘컷오프‘ 되거나 ‘평가 하위권’으로 몰려 경선에서 대량 감점으로 탈락했다. 그 틈을 소위 친윤(친윤석열), 친명(친이재명)계가 파고 들었다. 아니, 좀 섬뜩하지만 그 반대 순서일지도 모르겠다. 공천 시즌만 되면 난다 긴다 하는 정치인들이 ‘용한 도사’들을 찾아다니는 건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로 속에서 한 가닥 위안을 찾으려는 몸부림일 테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지도부의 ‘비명횡사’ 공천이 워낙 전면적, 노골적이다 보니 국민의힘 공천은 ‘친윤(친윤석열) 불패’ 논란에도 어느 정도 합리성의 외피를 입는 데 성공하는 듯 보였다. 특히 부산의 경우, ‘찐윤’의 무혈입성이 없진 않았지만, 장제원의 불출마와 하태경의 험지 출마, 여기에 타 지역보다 훨씬 높은 현역 교체율(43%) 등 여당발 개혁 공천의 주무대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쌓은 공든 탑은 전날 마지막 남은 수영구 공천에서 무너졌다. 30년 서울에서 활동하다 총선 직전 출마 선언과 함께 낙향한 전직 언론인, 그것도 연고가 있는 부산진갑에서 부산진을로 밀려갔다가 경선에서 탈락한 인물을 바로 인접 지역인 수영구에 전략공천했다. 경쟁력도, 참신함도, 명분도, 기준도 찾기 어려운 그냥 칼자루 쥔 이들이 내리꽂은 ‘낙하산’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일각에서 의심하는 보수 유력 일간지에 대한 ‘배려’ 차원이라면 그야말로 수영을 ‘막대기만 꽂아도 되는 곳’이라고 인식했단 얘기 밖에 안 된다. 참담한 일이다.
공교롭게도 민주당이 부산에서 ‘친명 공천’ 논란을 일으킨 곳도 수영이었다. 음주운전 2회 경력에 해당 지역과는 별다른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인사가 4년 전 낙선 이후에도 꾸준히 바닥을 다져온 직전 지역위원장을 통보도 없이 제치고 내리꽂혔다. 국민의힘과 달리 ‘누가 해도 되기 힘든 지역이니 계파나 챙기자’는 심사였을까? 여야 공히 지역 유권자들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한 행태다. 그럼에도 총선을 통해 국민의힘의 친윤 색깔은 더 강해질 것이고, 민주당은 총선 이후 명실상부한 ‘이재명당’으로 탈바꿈할 것이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 정치사를 돌아보면 ‘친000’ 등 자신의 이름 앞에 ‘친(親)’자가 선명한 정치인들의 말로가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다. 정권과 권력은 유한하고, 그 권력의 주변에 있다는 이유로 패권을 휘두르던 인사들의 영광은 찰나에 불과했다. ‘친이’는 ‘친박’을 학살했고, ‘친박’은 ‘비박’을 탄압했다. ‘친문’은 ‘친명’을 무시했지만, 친명은 기어코 친문을 끌어내렸다. 이런 권력 교체 시기에 실세라는 이름으로 공천 칼날을 휘두르던 이들 중 현재까지 건재를 과시하는 정치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자연이 그러하듯 인간사 역시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고, 빛은 그 만큼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니 공천이라는 높디 높은 천장을 뚫고 국회 입성에 한 발자국 다가선 친윤, 친명 후보들은 부디 겸손하길 주문한다. 대통령 측근이라는 이유로, 권력 실세들과 연이 닿은 인재라는 이유로 비교적 손 쉽게 공천장을 받았다는 걸 겸허히 새겼으면 한다. 자신들이 밟고 올라선 경쟁자들이 스펙이나 정치적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저 권력자와의 거리가 가깝지 않아서 경선이라도 붙여 달라는 간절한 외침조차 거부 당한 사람이 태반이다. 지역을 지키며 당의 간난신고를 함께 했지만, 이번에도 소위 ‘직통 라인’이 없어 외롭게 물러서야 했던 낙천자들의 처연한 목소리가 귀에 남는다. 위로를 전한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부산 여야 후보들의 면면이 확정됐다. 바라기는 21대보다 진영 대결이 더 극심해질 것으로 보이는 22대 국회에서 부산 의원들이 ‘친0계’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보다, 지역민들의 삶을 바꾸는 ‘친00구’, ‘친부산’ 행보에 더 진력했으면 한다.
2024-03-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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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전세 사기라는 사회적 재난
재난.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을 뜻하는 말이다.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형태의 재난도 생겨난다. 최근에는 전세 사기라는 ‘사회적 재난’이 주로 사회 초년생인 20~30대 청년들을 덮쳤다. 주변에서 그 피해자를 찾기가 어렵지 않을 정도로, 신종 재난은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전세 사기·깡통 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측은 “전세 사기와 깡통 전세 피해는 세입자에게 불리한 주택임대차 제도와 잘못된 보증금 대출제도로 발생한 사회적 재난”이라고 정의한다. 그럼에도 모든 피해 책임은 세입자에게 전가되고 있는 불합리한 현실을 토로한다.
전문가들도 전세 사기가 정부가 집값 하락 리스크에 대비하지 못한 구조적 실패 탓이라고 지적한다. 부동산 시장이 금리나 대출 정책 등 정부 정책에 좌우되는 만큼 사태 발생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전세 사기 피해자가 되기를 바란 사람은 없다. ‘전세 사기를 당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세 계약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얼마 전 후배 기자가 〈전세지옥〉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했는데, 서점에서 발견한 해당 책의 띠지에서 이 문구를 만났다. 1991년생인 저자는 전세 사기 피해자로 보낸 820일을 기록해 책으로 펴냈다.
그는 전세 사기라는 범죄의 늪에서 벗어나 피 같은 대출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선배, 그 사람은 결국 원양상선을 탔대요.” 우리가 기대하는 해피 엔딩은 현실엔 없는 걸까. 그럼에도 저자 최지수 씨는 파일럿이라는 꿈을 잃지 않고, 원양선에 올라타 재기에 나섰다. 그는 ‘전세 사기를 완전히 극복하는 순간은 돈을 온전히 돌려받는 날이 아니라, 조종사 훈련을 시작하는 첫날일 것’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고통에 시달리는 모든 경제 범죄 피해자들에게 응원과 위로를 건네고 싶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피해자가 최 씨처럼 이 재난의 시대를 잘 건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 사기 사건에서처럼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정부와 지자체가 보다 적극적으로 피해자 구제와 지원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부산에서도 전세 사기 피해자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가장 최근 사례로 동래구, 연제구, 남구, 부산진구 등에 빌라를 소유한 50대 부부가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 사건(부산일보 1월 10일 자 10면 보도)의 여파가 커지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100여 명. 피해액도 100억 원 이상이라고 한다. 건물주 부부는 “부동산 사업 실패로 전세금을 돌려줄 돈을 잃었을 뿐 처음부터 사기를 칠 생각은 없었다”는 입장이다. 이들에게 결국 사기 혐의가 적용될지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전세 세입자들의 희망이자 동아줄처럼 여겨졌던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보험도 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임대사업자의 서류 조작을 이유로 HUG가 보증보험을 해지한 탓에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례도 있다. 피해자들은 지난달 21일부터 부산 남구 HUG 본사 앞에서 한 달간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80여 명의 세입자는 HUG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기도 했다. HUG가 허위 서류를 걸러내지 못한 책임을 세입자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기 피해를 당한 세입자들이 관리자 없이 임대 주택에 거주하며 이중고(부산일보 2월 29일 자 10면 보도)를 겪기도 한다. 잠적한 임대인 대신 피해자들이 건물의 소방관리를 떠맡거나 고장난 시설을 사비를 들여 보수하는 식이다. 집주인이 대여료를 내지 않아 방범 업체에서 CCTV를 떼어가는 등 안전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일도 생긴다.
일부 기초 의회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를 제정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동래구의회가 최근 통과시킨 ‘부산시 동래구 재난취약계층 주거환경 안전관리 및 지원에 관한 전부개정조례안’이 대표적이다. 재난 취약계층을 상위법에 맞게 안전 취약계층으로 변경하면서 지원 범위를 확대했는데, 전세 사기 피해자를 대상자로 명문화한 것은 동래구가 전국에서 처음이라고 한다.
부산시도 청년 근로자와 교육 희망자를 대상으로 ‘찾아가는 전세 사기 피해 예방·생활법률 교육’을 여는 등 피해 예방에 나서고 있다. 고등학생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전세 사기 예방 교육을 실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사회 초년생들이 주로 피해자가 되고 있는 만큼 청년 층을 대상으로 한 이 같은 교육은 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4·10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새로 뽑힐 제22대 국회의원들도 전세 사기 피해자를 구제하고 예방하기 위한 입법 활동에 각별히 신경 써 주기를 바란다.
2024-03-1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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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이재명 총선 때 부산에 올까?
더불어민주당의 4·10 총선 후보자 공천이 막바지에 달했다.
‘친명(친이재명) 공천’이라고 말들이 많다. 소장파 박용진 의원에 대한 ‘하위 10%’ 통보로 긴장감이 고조되더니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친문(친문재인) 핵심 홍영표 의원 공천 배제로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그 뒤로 ‘비명(비이재명) 횡사’가 줄을 이었다. 강병원·전혜숙·박광온·윤영찬·정춘숙·김한정·양기대 등 비명계 현역 의원들이 무더기로 경선에서 패배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복심인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도 고배를 마셨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경선 경쟁자가 ‘친명’ 인사였다는 점이다.
친명계는 주장한다. “경선 기회를 줬는데도 현역 의원이 자기 지역구에서 떨어진 걸 어떡하냐”고. 또 말한다. “1년 전부터 마련한 시스템에 의한 공천인데, 시스템이 어떻게 친명과 비명을 구분짓느냐”고.
이재명 대표도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맞추려면 생살을 도려내고 환골탈태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옥동자를 낳으려면 진통은 피할 수 없다”고 거들었다. ‘국민과 당원이 적극 참여한 혁신 공천’, ‘사상 최대 폭의 세대 교체, 인물 교체’, ‘국민의 기대와 눈높이에 맞춘 공천 혁명’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형식 논리로는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 경선 결과를 지켜 보면서 민주당에 대해 갖고 있던 오래된 의문 하나가 풀렸다. 바로 친명계 권리당원들의 실제 영향력이다. 그동안 민주당에서는 이른바 ‘개딸’로 불리는 친명 성향 강성 지지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거듭됐다. 개딸이 행동력이 빠르고, 목소리는 크지만 실제로는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과잉 대표론’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선을 통해 개딸은 민주당에서 다수의 정식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당헌·당규상 권리를 야무지게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말은 곧 ‘전통 진보야당 민주당’이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원내 제1당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민주당이 선명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는 후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개딸이 지역구에 와서 분위기를 잡아주면, 이를 기반 삼아 지지세를 확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수도권이나 호남에서 가능한 시나리오다.
선거 때마다 ‘스윙 보터’(특정 정당에 치우치지 않는 유권자) 역할을 해온 부산·울산·경남에서도 ‘이재명의 민주당’이 먹혀들 수 있을까. 언론들이 별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번 논란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주장이 공개적으로 나왔다. 민주당 후보로 경남 양산을에서 뛰고 있는 김두관 의원이 총대를 멨다. 그는 지난 8일 SNS에 “통합의 힘으로 윤석열 정권의 폭정 심판을 위한 깃발을 높이 높이 들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김 의원은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당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든 이들의 같은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김 의원의 진심은 끝부분에 나왔다. 김 의원은 “인재들을 전면에 배치해 통합 선대위를 구성하고, 이재명 대표는 대표 권한을 선대위에 넘기고, 계양 선거(인천 계양을)에 전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천에서 생긴 잡음을 최소화하고 통합의 길을 가는 것. 결국은 이재명 대표에게 달린 문제”라며 빠른 결단을 촉구했다.
한마디로 “이재명이 있으면 선거가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선뜻 말하지 못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부·울·경에 출마한 다른 민주당 후보들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민주당 부·울·경 경선에서 친명계 인사가 승리한 경우도 있지만 다른 지역구처럼 개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을 생각하면 이재명 대표의 등장이 그렇게 반갑고 든든한 선거 지원은 아니라고 한다. 부산에서 공천장을 받은 민주당의 한 후보는 “당 대표가 선거운동 하러 온다는데 뭐라고 이야기할 입장은 아니다”면서도 “우리끼리 조용히 유권자들을 만나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당의 간판(대표 또는 선거대책위원장)이 지원유세를 오면 지지층이 뭉치고, 외연이 확장돼 지역구의 분위기가 살아난다는 것이 역대 총선에서 정석이었다. 그런데 부·울·경에서도 이재명 대표를 목 빠지게 기다릴까. 민주당 후보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2024-03-1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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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두 도시 이야기
“난폭한 운전자와 나쁜 공기 질, 유서 깊은 동네들을 밀어 버리고 획일화된 고층 아파트들로 채운 못생긴 도시다. 모두가 싫어하지만 아무도 떠나지 않는 도시다.”
“바다와 산, 집, 사람, 다채로운 풍광과 분위기가 어느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게 없다. 무엇보다 여전히 살아 있는 정, 공동체 의식 같은 게 느껴지는 곳이다.”
최근 두 달 사이에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외국인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와 도시들을 평가한 책이 잇달아 출간됐다. 서두의 인용문은 이들의 국내 도시 평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인데,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앞의 도시는 서울이고, 뒤는 부산이다.
서울에서 10년 넘게 거주하며 미국 뉴요커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콜린 마샬은 저서 〈한국 요약 금지〉에서 서울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는 너무 경쟁적이고 불만투성이라고 짚었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게임’ 등에서 엿보이는 빈부 격차와 불만, 사회구조적 부조리가 ‘서울살이’의 부정할 수 없는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그는 서울의 역동성과 편리한 생활 인프라 등을 예찬하면서도 “한국은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나라이며, 매력적이지만 좌절과 실망을 안기는 대상”이라고 평가했다.
한국과 미국 일본 등 여러 도시에서 생활해 ‘도시 탐구자’라 불리는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는 〈도시독법〉이라는 책에서 부산을 두고, “런던과 도쿄 같은 대도시는 삭막한데, 부산은 정이 살아 있고, 도시 속 자연과 소통하는 부분이 흥이 난다”고 호평했다. 살고 싶은 도시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그의 대답은 “압도적으로 부산”이었다.
이방인이 제3자의 눈으로 본 우리 모습이 반드시 객관적이거나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 국가의 1·2위 도시의 색깔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청년들이 생활하면서 피부로 느끼는 두 도시 인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회미래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표한 ‘대도시 청년들의 삶의 만족도’란 보고서를 보면 7대 특별·광역시 중 부산 청년들의 행복감이 가장 높았다. 삶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 생활수준, 안전감, 대인관계, 공동체 소속감 등에서도 부산이 단연 1위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서울, 인천 등 수도권 청년들이 우울감, 외로움의 증상을 경험하는 빈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국회미래연구원은 “지역의 청년들이 미래의 삶을 위해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주거 여건, 교통 편의성, 외로움, 우울감 등 측면에서 녹록지 않고, 이들이 느끼는 삶의 질 역시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진단했다.
해마다 1만 명에 달하는 부산의 학생과 청년들이 좋은 대학과 번듯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난다. 이들을 기다리는 건 만만치 않은 서울살이의 고단함이다. 다섯 평짜리 원룸에서 높은 물가, 숨막히는 만원 지옥철, 그보다 더 숨막히는 낯선 사람들 사이의 부대낌 속에서 누군가는 순응하며 서울시민으로 거듭나지만, 많은 이들이 삭막한 도시의 주변을 겉돌면서 냄비 바닥에 까맣게 탄 누룽지처럼 눌어붙어 산다.
상당수 부산 청년은 적당한 일자리만 있다면 부산에 남아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들에게 부산에는 있지만 서울에는 없는 건 쾌적한 환경과 삶의 쉼표 같은 여유다. 반면 서울에는 있지만 부산에는 없는 것은 남부럽지 않은 직장과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지난달 부산일보와 시교육청 등이 주최한 ‘2024 부산인구 미래포럼’에서도 부산 인구소멸 위기 극복 해법으로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 마련을 첫손에 꼽았다. 부산시의 비전인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부산’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청년들이 사랑하는 고향을 등지지 않도록 좋은 일자리를 넉넉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희망적인 것은 가덕신공항 개항, 산업은행 이전,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등 움츠렸던 부산이 다시 한 번 용틀임할 수 있는 메가 프로젝트들이 차츰 궤도에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산시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부산은 청년과 기업, 외국인과 해외 자본이 몰려드는 매력 넘치는 국제도시로 변모할 수 있다. 이 기회를 날린다면 부산은 현실화된 도시 소멸과 맞닥뜨려야 한다. 부산은 앞으로 미래 100년을 좌우할 결정적인 분기점에 서 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엔진 구축, 국토 균형발전, 과밀화된 수도권의 고통 해소까지 명분은 차고 넘친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도시 탐구자’가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를 청년들이 제 발로 떠나는 아이러니를 더 이상 방치할 순 없다.
2024-03-0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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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손 편지가 쓰고픈 봄날이다
최근 일본 지인이 보낸 편지를 한 통 받았다. 18년 전 일본 후쿠오카 서일본신문 파견 시절 인터뷰했던 성악가였다. 당시 일본의 ‘욘사마’ 열풍을 취재하다 인연이 돼 지금까지 가끔 안부를 전하고 있다. 물론 간편하고 편리한 이메일로. 손편지는 처음이다. 손편지를 보니 마치 그 사람이 내 눈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왠지 좋은 소식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설레임에 한동안 뜯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뒤 개봉한 편지에는 그 성악가가 서툰 한글로 안부를 물었다. 요즘 인쇄된 글만 받아보았던 기자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손편지는 설레임을 넘어 큰 감동을 주었다.
기자가 중학생 시절 때만 해도 외국인과 펜팔을 하는 게 큰 유행이었다. 영어도 배우고 외국인 친구도 사귈 수 있는 ‘이중 혜택’ 때문이었다. 완벽하지 못한 영어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해 결국 수일만에 완성한 편지를 보내고 수개월 동안 답장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과 답장을 받았을 때의 설레임은 이루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짧은 영어 실력에 그 설레임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설레임이 일본 성악가의 손편지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휴대전화 문자, 카톡과 이메일이 교류 수단이 돼버린 요즘. 손편지는 귀한 선물로 와닿았다. 휴대전화 문자 등은 바쁜 현대 사회에 소통도구는 될 수 있지만, 사람의 따스한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를 메우기 위해 이모티콘을 사용해 보기도 하지만, 영 시원찮다.
직접 쓴 편지에는 편지지와 봉투를 고를 때의 정성, 글자를 쓸 때의 노력, 받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 등이 더해진다. 직접 쓴 편지는 단순한 소통을 넘어 마음을 전달해 감동을 준다. 전세계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부자 간, 부부 간의 편지는 깊은 정을 담고 있어 애틋한 감동을 전한다.
남녀 간의 편지는 사랑의 징표이자 상대를 그대로 투영하는 물건이다. 오가는 편지에서 사랑이 싹트고, 사랑하는 마음을 편지로 주고받는다. 그 편지 속에서 사랑이 자라고 결실을 맺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났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이 그 사람과 오고간 편지다. 편지를 보면서 추억을 그리워하고 웃고 울기를 반복하며 사랑을 기다린다.
이별에서도 편지는 큰 역할을 한다. 상대방이 나를 버리고 떠났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것도 편지다. 편지를 찾아서 불태우면서 눈물 속에서 사랑을 보낸다. 편지 속에는 사랑과 우정, 증오, 분노가 녹아져 있다. 편지는 단순한 글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이자 마음인 것이다.
1970년대 가수 어니언스가 부른 가요 ‘편지’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편지를 글로 쓰기도 하지만 눈물로 쓰기도 한다. 한 글자도 쓰여지지 않은 ‘눈물 젖은’ 편지가 이별을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편지는 쓴 사람을 울리기도 웃기기도, 받은 사람을 아프게도 따듯하게도 만든다. 부산의 한 음악가는 유학 시절 힘들 때 자신의 어머니가 써준 편지를 갖고 다니면서 읽었다. 편지 속에서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힘든 시절을 견뎠다.
사실 편지 쓰기는 쉽지 않다. 하얀 종이에 꾹꾹 눌러쓰는 정성이 필요하고 글자가 틀리면 다시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무엇보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상대를 계속 생각해야 한다. 또 읽는 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하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아니라면 가까운 누군가에게 편지 한통을 써보는 것은 어떨까. 요즘처럼 삭막한 세상살이 속에 친구나 가족에게 받은 격려와 응원의 편지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악필도 괜찮고, 맞춤법이 틀려도 괜찮다. 정성이 가득 담긴 편지라면 받는 사람에게 반드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친구에게 전하지 못한 사연이나 가족들에 서운한 마음이나, 선생님에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 등도 상관없다. 두세 장의 긴 글도 좋고, 심쿵할 짧은 몇 마디를 적은 쪽지도 좋다. 좋은 마음이 잘 전해지기만 하면 될 뿐이다.
이마저도 힘들다면 책의 좋은 구절이나 가슴에 담은 영화의 명대사를 소개하는 것도 좋겠다. 만년필의 잉크 향이 묻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볼펜으로, 연필로 쓴 편지이면 어떤가. 정성 담아 보내는 손 편지를 써보고 싶다. 왜냐면 봄이 왔다. 따듯하고 싶다.
2024-03-0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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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학부모의 봄방학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봄방학 동안 학교에서는 새로운 학기 준비합니다.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교과서에 이름은 적었는지, 가정통신문이 가방에 잘 들어가 있는지, 실내화가 작아지거나 더러워지지는 않았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과 후 시간표를 짜는 일입니다. ‘방과 후 시간표’라 쓰고 사실상 학원 시간표를 짜는 일이지요.
“무슨 학원 시간표를 짜냐, 돈을 주고 등록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동네에서 인기 있는 학원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동네를 벗어나 부산 학부모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한 학원에 등록하려면 ‘레벨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학원도 별도로 있을 정도이니 학원 일정 잡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여기에 주머니 사정까지 고려하면 시간표 짜기 난도는 더 높아집니다. 지난달 발표된 ‘2023년 부산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산지역 월평균 사교육비는 60만 9000원입니다. 부모 욕심에 피아노, 수영, 축구 등 예체능 과목까지 추가한다면 그 비용은 더 늘어납니다.
부모들이 왜 이렇게 기를 쓰고 학원을 보내려 할까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교육’을 믿을 수 없어서일 겁니다. 교육청에서는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방과후교실’을 활성화한다고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도 좁고 시간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더 솔직한 마음은 ‘성적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이 부족하다’일 겁니다. 방송댄스, 배드민턴, 축구와 같은 좋은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하지만 왠지 ‘이상적’으로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빡세게’ 공부시켜 주는 학원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을 보니 어쩔 수 없는 한국 부모인가 봅니다.
부영그룹이 최근 내놓은 출산장려금이 화제가 된 것도 같은 이유인 것 같습니다. 부영그룹은 2021년 이후 태어난 자녀 1인당 1억 원의 출산 장려금을, 셋째부터는 1억 원을 받거나 국민주택 규모의 영구임대주택에 무상으로 살 수 있게 했죠. 자녀 양육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 부담이기에 부영의 화끈한 장려금 정책이 인기를 얻은 것 같아 보입니다.
방과 후 시간표를 짜다 보면 여러 제약 사항에 부딪힙니다. 경제적인 부분도 부분이지만 학원차가 오지 않기도 하고, 인원이 빨리 차서 자리도 없기도 하죠. 부모들의 한숨이 늘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한숨은 이사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대부분 유명 학원, 대형 학원들은 학군이 좋다고 평가받는 곳에 몰려 있으니까요. 이 때문에 인기 학군지는 부모의 수요가 몰리기에 부동산 가격도 항상 높게 형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결국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이들만이 갈 수 있죠. 실제로 부산지역 고교생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지역별로 66만 원 이상 차이가 납니다. 집안의 경제력이 학업 성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셈이지요.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부산시교육청이 중1 학생을 대상으로 겨울방학 동안 처음 진행한 ‘인성 영어·수학 캠프’(영수캠프)와 ‘위캔두 계절학교’(계절학교)가 학생 교과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번 영수캠프와 계절학교에는 부산 중1 학생 380명과 132명의 학생이 각각 참가했는데요. 영수캠프는 국립부경대·동의대 등 5개 대학에서 기숙형으로, 계절학교는 영도구 영도제일중학교에서 통학형으로 진행됐습니다. 참가 학생들은 퇴소일에 실시한 진단평가에서 입소일 진단평가에 비해 영어와 수학 평균 점수가 각각 13.82점, 13.99점씩 올랐습니다. 영어와 수학 성적이 올랐는데 학부모의 만족도는 물을 필요가 없죠.
늘봄학교가 올해 1학기 부산 모든 초등학교에서 시행된다 하니 기대도 됩니다. 늘봄학교는 돌봄 공백과 공교육 강화를 위해 부산시교육청이 전국 최초로 시행하는 사업인데 지역 내 어린이 돌보기에 시교육청은 물론 지자체, 대학, 공공기관이 모두 힘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또 시교육청은 현재 예체능 중심인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다양화해 실질적인 도움이 될 ‘학습형 방과후학교’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학교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 계획대로라면 학부모의 봄방학이 조금은 평온해질 것 같기는 합니다. 사교육 인프라가 좋은 곳으로 굳이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니 좋은 학원에 못 보내는 미안한 마음도 줄어들 것 같고요. 지역별 사교육에 의한 격차가 줄어든다면 그것대로 좋을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여전히 이른 것 같습니다. 아직 현장은 교사를 어떻게 구하느냐, 프로그램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등 혼선이 가득합니다. 내년 봄방학은 좀 편안할 수 있을까요? 공교육을 맘 편히 믿어도 되는 날이 올까요?
2024-02-28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