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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다시 지역균형발전이다
이번 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야권이 역대 최대 격차로 압승한 데서 보듯 정권 심판론이 판세를 갈랐다. 민주당 공천 파동이나 개별 후보들의 막말과 자질 논란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모든 이슈를 덮었다. 좌파나 우파가 아닌 대파가 선거의 향방을 정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치솟는 물가와 팍팍해진 살림살이에 성난 국민들이 현 정권에 등을 돌렸다.
정권 중간에 이뤄지는 선거이기에 심판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역 이슈가 주인공인 총선에서도 지역균형발전 의제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이번 총선에도 어김없이 지역구마다 다양한 개발 공약이 앞다투어 제시됐다. 이런 개발 공약이 지역균형발전으로 바로 이어진다고 보긴 어렵다. 지역균형발전은 단순히 지역에 필요한 시설을 짓는 차원을 넘어, 인구 소멸이라는 국가적 재앙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지역 일자리 부족과 인구 소멸, 그리고 결국 국가 전체의 경쟁력 약화라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지역균형발전 공약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아쉽게도 여야의 이번 총선 공약에는 국가적 절박함보다 득표를 위한 절박함이 더 커 보였다. 지역 공약에는 예산이나 법 개정 등 구체적인 실천 방안에 의구심이 드는 장밋빛 개발 약속이 난무했다.
심지어 여야는 지역균형발전에 역행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말 수도권 표심을 위해 정부의 주된 정책 기조인 국가균형발전과 배치되는 ‘메가시티 서울’ 공약을 내세웠다. 김포를 비롯해 서울 인접 경기도 지역을 서울에 편입시켜 서울과 오가는 지역민의 편의를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 중 수도권에 인구 절반 이상 사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수도권 과밀이 심각하다는 일본도 인구 35%가량, 영국과 프랑스도 20%대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압도적인 수도권 과밀화가 국가 존치를 위협하는 인구 소멸로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메가시티 서울’ 공약으로 선거의 포문을 연 것은 집권 여당의 책임을 외면한 행태였다.
부산을 찾은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산업은행 이전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산업은행 본점이 위치한 서울 영등포구가 지역구인 김민석 의원은 지난해 민주당 지도부가 되자마자 ‘산은 이전은 불법’이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산업은행 이전은 단순히 공공기관 하나가 지역에 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동남권에 해양과 물류, 금융을 연계한 산업을 키워 새로운 국가 성장 축으로 만들겠다는 지역균형발전의 핵심 전략 중 하나다.
민주당 지도부가 공공기관 이전에 소극적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공공기관 지방이전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기본 구상을 밝히면서 시작됐다. 수도권 표심을 잃는 위험을 무릅쓰고 노 전 대통령은 대선 공약이었던 행정수도와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추진했다. 지역불균형의 폐해가 수도권과 지방의 공멸을 부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공공기관 이전은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따른 의무 사항이지만, 2019년 완료된 1차 공공기관 이전 이후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민주당이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외면하는 것은 당 정체성과 배치된다.
총선 때도 주목받지 못했던 지역균형발전 의제는 선거 이후 더욱 찬밥 신세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부산에서는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과 산은 이전, 에어부산 분리 매각 등 지역의 중요 이슈가 중앙 정치의 힘겨루기 식 정쟁에 파묻힐 것이라는 비관론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민주당이 총선 압승에 도취되어 위력 과시에 치중한다면 이번 총선 결과는 오히려 독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정부 실정을 비판하는 민심을 민주당 인기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압승으로 얻은 동력을 지역균형발전 난제 해결에 써야 한다. 수도권 블랙홀을 막기 위한 첫 걸음인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외면해선 안 된다. 국가 존망이 걸린 문제를 수도권 표심에만 매몰되어 느슨하게 생각해선 안될 일이다.
전국에서 완패하고 ‘영남당’ 수준으로 쪼그라든 여당이 ‘메가시티 서울’과 같이 지역균형발전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수도권 표심을 구걸한다면, 지역 민심마저 외면할 것이란 것 또한 자명하다. 부산에서 민주당은 1석밖에 차지하지 못했지만, 후보 평균 득표율은 45%가 넘는다는 점은 부산 민심이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심판의 시간은 또 돌아온다.
송지연 기획취재부장 sjy@busan.com
2024-04-2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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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롯데 자이언츠, 초반 몰락 이유는
2017년 리그 3위 이후 7년 만의 ‘가을야구 진출’을 노리는 롯데 자이언츠가 시즌 초반 최하위로 추락하며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시즌 개막 전 올해 KBO리그는 ‘5강 4중 1약’ 구도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LG와 한화를 비롯해 KT, KIA, 두산이 ‘5강’으로 분류돼 올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또 중위권에서는 롯데와 SSG, NC, 삼성이 각축을 벌일 것으로 전망됐고, 키움은 ‘약팀’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롯데와 KT, 두산이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하위권으로 처져있다. 특히 롯데는 ‘우승 청부사’ 김태형 감독이 올 시즌 새 사령탑을 맡았다. 김 감독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두산을 7년 연속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던 명장이다. 김 감독은 “시즌 초반부터 기선 제압을 하는 게 중요하다”며 “선수단이 한마음이 되면 7년 만의 가을야구 진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김 감독의 당찬 각오와는 달리 롯데는 투타와 수비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시즌 초반 슬럼프에 빠져있다. 롯데가 이처럼 부진에 빠져있는 이유는 뭘까.
먼저 투수력을 살펴보면, ‘선발 야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데다 불펜진이 너무 자주 무너진다는 점이다. 5선발인 이인복은 아직 제 역할을 못 해주고 있고, 구승민과 최준용, 박진형, 김상수, 김원중 등 중간·마무리 투수들이 상대 타선을 틀어막지 못하고 경기 때마다 실점을 허용하고 있다.
팽팽한 접전 상황에서 불펜진의 실점은 경기 흐름을 상대에게 내주게 된다. 따라서 롯데의 핵심 불펜 투수인 구승민과 김원중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두 투수는 모두 올 시즌 후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는다. 그만큼 올 시즌에 임하는 동기부여가 잘 돼 있어 팬들도 맹활약을 기대하고 있다.
타선의 집중력 부족과 장타력 부재도 팀 성적 부진의 주원인이 되고 있다. 타선의 문제는 올 시즌 내내 롯데의 가장 큰 고심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롯데는 연패를 하는 동안 타선의 집중력 부재 현상이 지속됐다. 특히 득점권 기회에서 연속 안타가 터지지 않아 역전패를 하거나 경기의 주도권을 내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홈런 등 장타력이 부족하고 ‘확실한 해결사’가 없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홈런은 그날 경기의 분위기를 한꺼번에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홈런 ‘한 방’이 경기의 흐름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롯데는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가 은퇴한 이후 상대팀에 위압감을 주는 거포형 타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빅터 레이예스와 이학주만이 팀에서 유일하게 3할대 타율을 유지하고 있고, 주장 전준우은 최근 방망이가 침묵하고 있다. 여기에다 올 시즌 큰 기대를 모았던 유강남과 노진혁은 ‘거액의 FA 몸값’에 걸맞지 않는 1할대 타율에 허덕이고 있다.
또 롯데의 ‘차세대 거포’로 주목받았던 한동희는 지난 시즌부터 깊은 부진에 빠졌고, 올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부상 재활을 해도 그는 6월에 상무에 입대할 예정이어서 사실상 팀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하위 타선에서 역할을 해야 할 김민성과 나승엽도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매 시즌 겪어온 수비 불안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올 시즌을 앞두고 FA 2루수 안치홍이 한화로 이적했다. 안치홍은 롯데에서 지난 4년간 꾸준히 중심 타선에서 활약하며 타선의 무게감을 더해주는 선수였다. 롯데는 안치홍의 전력 이탈을 메우기 위해 2차 드래프트에서 오선진과 최항, 두 베테랑을 영입했고 FA 내야수 김민성을 사인 앤 트레이드로 영입했지만, 공수에서 안치홍의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다.
김태형 감독은 내야진의 수비 보강과 공격력 강화를 위해 시즌 중 LG에서 손호영을 데려왔고, 2021년 롯데 육성 선수로 입단한 이주찬을 백업 자원으로 자주 경기에 투입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학주, 박승욱, 최항, 손호영, 이주찬 등이 돌아가며 내야 수비를 맡는 불안한 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팀이 몰락의 상황까지 맞으면서 지난달 23일 개막전에 등록됐던 28명의 1군 엔트리 가운데 구승민, 박진, 오선진, 노진혁, 고승민 등 10명의 선수들이 2군으로 내려갔다.
롯데는 시즌 개막 전 김 감독의 카리스마와 용병술이 팀 전력 상승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과 비교해 아직은 눈에 띄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김 감독의 야구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두산을 7년 연속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던 명장의 리더십이 언제 빛을 발할지 롯데 팬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024-04-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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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일상이 된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
살다보면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자신이 불리해서 말을 못할 수도 있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기가 막혀 입을 닫는 경우가 많다. 요즘 대한민국이 그렇다. 정치 지도자들부터 일반 국민들까지 뭐에 홀린듯 나라 전체가 비이상적이다. “이게 나라냐”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야말로 ‘요지경 대한민국’이다.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이다. 그의 선택에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모든 의사결정은 신중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두 달 가까이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린 ‘의대 증원’ 이슈는 상당히 문제가 많다.
윤석열 정부는 ‘의대 2000명 증원’을 밀어붙이면서 “우리 국민 다수가 찬성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런 식이라면 국회가 통과시킨 ‘김건희 여사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 김 여사 특검법도 찬성 여론이 훨씬 높았다. 김 여사 문제는 막대한 혈세를 투입해 특검을 실시할 사안이 아니라고 본다.
‘민심이 천심’인 것은 분명하지만 여론조사가 국민 전체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다.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할 거면 정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공론화 조사’를 무기로 탈원전 정책을 강행해 우리의 산업 경쟁력을 현저히 저하시킨 문재인 정권의 뼈아픈 실수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가.
의대 증원과 같은 민감한 문제는 졸속으로 추진할 사안이 아니다. 정부가 주도할 사안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협의기구에서 진행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의대 증원 문제를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로 몰아가선 안 된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현실과 AI(인공지능) 확대에 따른 의료분야 축소, 출생률 저하, 산업계 부작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점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이 중국에도 뒤떨어졌다는 최근 정부 보고서가 발표된 상황에서 의대 증원은 우리의 기술력 저하에 기름을 붓는 꼴이다.
정치 지도자들의 수준은 낙제점에 가깝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검사 출신인 한동훈과 판사를 지낸 정영환을 데리고 와서 비대위원장과 공천관리위원장으로 각각 앉혔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정치를 잘 모르면서 법조인 특유의 선민의식을 앞세워 국민들의 정서와 동떨어진 공천을 강행했다. 부산·울산·경남(PK) 유권자들 사이에서 부울경 국회의원 교체 요구가 높았지만 국민의힘은 현역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국민의힘은 “교체율 높은 정당이 승리한다”는 역대 총선의 ‘승리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했다. 심지어 다른 지역 경선에서 떨어진 인물을 부산 수영에 전략공천하는 ‘막가파식 공천’까지 감행했다. 지금까지 이런 안하무인식 공천은 없었다. 국민의힘이 PK를 포함해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자업자득인지도 모른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표와 가까운 인물은 능력이나 자질과 무관하게 마구잡이로 공천했고, 이 대표 반대편에 섰던 인물은 무자비하게 내쳤다. 이른바 ‘비명 횡사, 친명 횡재’가 진행됐다. 적잖은 민주당 후보에게 부동산 투기, 불법 대출, 아빠 찬스, 막말 등 심각한 하자가 드러난 것이 당연할 결과인지 모른다. 그래도 민주당은 후보 사퇴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국민을 완전히 우습게 아는 것이다.
조국혁신당은 더욱 심각하다. 본인과 딸 문제로 우리 사회에서 매장되다시피 했던 조국 전 법무장관은 비례정당을 만들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지극히 비정상적인 대한민국 사회를 정상화 시켜야 한다. 단언컨대 일상화된 비정상의 정상화 없인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윤 대통령은 국정운영 기조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 본인은 다소 억울하겠지만 지극히 낮은 국정 지지도의 원인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 각분야의 사람들을 두루 만나야 하고, 정부와 대통령실에 대한 대대적인 인적쇄신도 필요하다. 존재감이 없는 총리부터 당장 바꿔야 한다. 조각 수준의 개각과 대통령실 참모진 전면 교체가 필요하다.
정치권은 총선 결과와 상관없이 실행력이 담보된 협의체를 만들어 대한민국 성장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국민들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총선은 인기 투표가 아니다. 4년간 대한민국 정치를 책임질 선량을 뽑는 것이다. 정당도 중요하지만 후보자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허투루 행사하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진짜 3, 4류 국가로 전락할 것이다.
2024-04-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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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개장 10주년, 부산시민공원을 걸으며
다음 달이면 부산시민공원이 딱 열 살이 된다. 허남식 부산시장 시절이던 2014년 5월 1일 문을 열었다. 일제시대 경마장으로,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로 쓰인 역사를 뒤로하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전체 넓이가 14만 평(47만 3911㎡)으로, 부산진구 범전동과 연지동 도심에 걸쳐 있다. 억눌렸던 시간의 반작용인지 주변으로 ‘숲세권’을 내건 개발이 한창이다.
초읍에서 내려온 부전천과 전포천이 나란히 공원을 흐른다. 나중에 동천과 합류해 바다로 간다. 사람들이 풀어준 관상어를 비롯해 잉어, 고둥, 물새, 오리, 청거북 따위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공원의 생태계는 북동쪽 화지산을 통해 성지곡어린이대공원, 백양산, 금정산으로 이어진다. 다만 초읍고개에서 단절된 것이 흠이다. 생태통로 같은 걸 만들면 좋겠다.
철따라 달라지는 나무를 보는 것이 시민공원의 큰 즐거움이다. 110만 그루가 있고 큰 나무(교목)만 보면 1만 4000그루에 달한다. 사람 구경도 재미있다. 잔디밭에서 도시락 먹는 연인, 도심백사장에서 쉬는 가족, 유채꽃밭에서 사진 찍는 중년, 맨발걷기하는 어르신…. 이곳이 없었다면 다들 어디로 갔을까. 공원이 얼마나 중요한 인프라인지 매일 절감한다.
연지동에 사는 필자는 시민공원을 걸어서 출퇴근한다. 주말에도 산책을 간다. 지난 10년간 이곳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흐뭇한 심정이다. 갈수록 나무가 풍성해지고, 아쉬운 대로 볼거리도 늘었다. 하지만 ‘옥에 티’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 있어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앞으로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지길 바라며.
공원을 다니면서 불편한 점은 길을 막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공사를 한다거나, 잔디를 깎는다거나, 페인트칠을 한다거나, 덱 바닥이 미끄럽다는 등의 이유로 동선을 왜곡하는 일이 잦다. 최근에도 부전천 옆에 황톳길을 조성한다고 며칠째 메인 산책로를 막아버렸다. 공사할 때나 잔디 깎을 때 길을 꼭 전부 막아야 하는지, 바닥이 미끄러울 때 길을 막는 것 말고 대안은 없는지 궁금하다. 공간에 제약을 두지 않는 것이 공원의 최우선 조건이다.
공원에서 또 거슬리는 것은 계속되는 안내방송이다. 쓰레기, 흡연, 음주, 반려견, 코로나, 주차 등 각종 금지·주의사항을 알리는 방송이 수시로 나와 평화로운 산책을 방해한다. 압권은 ‘청렴송’. 청렴하자는 캠페인성 노래를 왜 일반 시민들이 공원까지 와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공원은 국민계몽의 장이 아니다. 상식에 맡기든가, 필요하면 다른 방법을 찾자.
시민공원은 부산시 산하 부산시설공단에서 관리한다. 필자가 지켜본 느낌으로는 질서정연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듯하다. 어린이대공원도 마찬가지다. 새로 생긴 북항친수공원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물론 ‘관리’는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시민적 욕구를 지나치게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공원 개장 때 운영 주체를 놓고 이미 논란이 있었다. 단순한 ‘시설관리’를 넘어 창의적인 프로그램 개발·운영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다. 대안으로 민·관 협치 방식이 제시됐지만 결국 시설공단이 맡았다. “공원 운영의 핵심 가치는 개방이다. 시민들이 즐기지 못하는 공원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2014년 4월 시설공단 고위 관계자의 인터뷰다. 개장 10주년을 맞는 동안 시설공단은 그 약속을 잘 지켜왔는가.
공원이 ‘도화지’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민들이 자기 방식대로 그림을 그리듯 자유롭게 즐기게 하자는 것이다. 그 위에 공연, 전시, 이벤트도 가미될 수 있다. 관리자 편의적으로 운영돼선 곤란하다. 본말전도다.
그래서 좀 더 근본적으로 공원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인공적 요소를 줄여보는 건 어떨까 싶다. 관리는 최소화하고 일정 기간 ‘휴식제’ 같은 것을 도입해 변화를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금은 가지치기나 풀 깎기 등이 계속돼 자연스러움이 덜하고, 작업하느라 트럭과 중장비가 오가는 통에 늘 어수선하다. 부전천이 전포천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도 인위적인 ‘관리’의 손길이 덜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는 10일 총선을 앞두고 〈부산일보〉는 최근 시민들에게 ‘공통공약’을 받아봤다. 흔히들 떠올리는 거대 현안 말고도 생활의 변화를 바라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늘을 갖춘 산책길 조성, 학교 신설, 병원 확충 같은 것이다. 정치와 행정의 궁극적 지향이 어디여야 하는지, 선거라는 절차가 왜 필요한지 생각하게 했다.
마침 지난달 18일 박형준 부산시장이 북구 화명수목원에서 공무원들과 간담회를 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부산 전역에 생활밀착형 공원녹지를 대대적으로 확충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주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러기에 앞서 이미 있는 공원을 잘 가꾸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다. 집행이 곧 정책이다.
2024-03-3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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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결함
얼마 전 전시 때문에 한국을 방문한 유명 작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갤러리를 비롯해 뮤지엄급 미술관에서 모셔갈 정도인 이 작가는 수십 년째 정치 사회 경제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를 만나 처음으로 한 질문이 “당신의 작품은 항상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부담스럽지 않냐?“였다. 작가는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당황스러웠다.
작가는 “한국에선 정치적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나?”라고 반문했다. 결국 한국에서 그 표현은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과거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은 후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칭찬으로 느껴진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관심, 시대의 요구에 즉각 반응하고 그걸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찬사인 거 아닌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한국에서 ‘정치’ 혹은 ‘정치적’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심지어 청소년인 아들조차 협동 플레이 게임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이간질하는 플레이어를 “정치질한다”라고 비난하는 걸 들은 적 있다. 한국에서 확실히 ‘정치’라는 표현은 혐오스럽거나 대화 주제로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4월 10일 열리는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문과 방송에선 한참 전부터 예비후보와 경선·공천 결과를 주요 뉴스로 올리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22일 22대 총선 후보 등록을 마감했다. 전국 254개 지역구에 699명의 후보가 등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후보 등록 결과를 바탕으로 각 언론에선 최고 경쟁률의 지역구, 연령별 분포, 지역별 경쟁률, 최연소와 최고령 후보 등 화제가 되는 정보들을 속속 전했다.
관련 뉴스 중 나의 눈길을 끈 정보는 후보자 성별 분포였다. 22대 총선 699명의 등록 후보 중 남성 후보가 600명으로 85.84%에 달했고 여성 후보는 99명으로 14.16%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여성 후보 30% 공천 할당제’를 지키기는커녕 여성 후보는 20%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1995년 부산일보에 입사한 후 나의 첫 출입처인 여성 분야의 주요 요구가 ‘여성 후보 30% 공천 할당제’였던 것이 떠올렸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 모습은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을 허락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지난해 5월 전·현직 여성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정은 국회를 비롯해 모든 영역에 성별 균형 원칙 도입을 촉구하는 ‘남녀동수의 날’을 제정·발표했다. 매년 5월 25일은 ‘남녀동수의 날’이며 5월 23일부터 27일까지는 ‘남녀동수 주간’으로 정했다.
18, 19,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혜훈 한국여성의정 대표는 “남녀동수 실현은 단순히 여성의 권익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기본 가치를 구현해 내는 중요한 일이다. 남녀가 동등하게 대표돼야만 민주주의 본질인 그 가치가 지켜진다”고 밝혔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입법부인 국회뿐만 아니라 사법, 행정부까지 모든 지표에서 여성 비율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형편없이 저조하다. 21대 국회에서 여성의원은 19%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평균인 33.8%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순위로 따지면 37개국 중 34위다. 각국 여성의 정치참여 정도를 나타낸 국제의원연맹(IPU) 자료(2023년 기준)에 따르면, 180여 개국 중 한국의 순위는 120위이다. 우리나라 여성장관 비율은 공동 111위이며 조금 더 범위를 넓혀 대통령실을 비롯해 정부 부처 4개 기관 190명 핵심 고위공직자 중 여성은 7~8퍼센트에 불과하다. 사법부의 법원장 중 여성 법관 역시 한 자리수 비율에 그칠 뿐이다.
이 같은 현실을 고려하면, 남녀동수제는 헛구호처럼 들릴 수도 있다. 여성들이 권리나 특혜를 조금 더 받겠다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평등한 대의제가 구성되지 않고 한쪽(남성)은 과잉 대표, 또 다른 한쪽(여성)은 과소 대표 됐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함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남녀동수제는 실제로 30여 나라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의미 있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제 선거 운동의 막이 올랐지만, 22대 국회의 얼굴이 벌써 예상된다. 아마도 50대 이상의 고학력 남성이 대부분일 것이다. 국민의 얼굴을 닮지 않은 국회를 언제까지 봐야 할까. 한국 민주주의의 결함을 고치기 위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2024-03-2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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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MY WAY'를 들으며…
20대 후반의 어느 심야 라디오 방송으로 기억한다. 입담이 좋아 예능 프로에 자주 출연하던 가수 A가 취향저격 올디즈를 소개하는 코너.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좋고, 10년 후엔 더 좋아질 곡”이라고 했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 젊은 나로서도(다시 말하지만 고작 20대 후반이었다)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때로는 앨범 속 시내트라의 목소리로, 때로는 하늘 같은 선배 세대의 혀 꼬인 목소리로, ‘My Way’를 들었고, 그때마다 그날의 방송을 떠올렸다. 한두 번쯤 술김에 객기가 충만해 1080번(금영 노래방 기계의 ‘My Way’ 곡 번호)을 누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진 내게 어울리지 않는 곡. 시내트라가 이 곡을 처음 불렀을 때의 나이는 54세였다.
흥건히 취해 노래를 부르는 대선배들은 으레 한 손을 양복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사 정도는 외워야지, 모니터 가사 따라읽기에 바쁘면 곡의 멋스러움이 반감한다. 그 모습을 보며 30대의 나 역시 50대의 어느 날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며 멋스럽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랐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I’ve lived a life that’s full, I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해야 할 일을 비겁하게 피하지 않았다(I did what I had to do,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tion)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중년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쉰을 목전에 둔 지금, 나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기에도 벅차다. 어디 나뿐일까. 2024년 한국의 많은 50대들에게 지난 인생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다. 눈 앞에 헤쳐 나가야 할 숙제가 한둘이 아니다. 아파트 대출은 아직 수 년이 남았고, 학비며 용돈이며 입 벌리는 자식놈의 대학 졸업 또한 그 이상으로 남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여전히 바쁘고 여전히 부족하다.
나이에 걸맞은 사회적 삶, 역할이라는 게 있다. 흔히들 ‘사회적 나이’라 부른다. 과거에 비해 사회적 나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수년 전, 현재와 과거의 나이를 비교하는 계산법이 소개되기도 했다. 자신의 나이에 0.8을 곱한 수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적 나이’라는 셈법이다. 2024년 현재 60세인 누군가는, 과거 48세 상당의 누군가와 사회적으로 비슷한 위치라는 의미다. 결국 예전 50대 후반에 어울릴 법한 ‘My Way’가 이제는 6, 70대는 되어야 어울리는 노래가 된 셈이다.
최근 정년연장에 대한 논의가 다시 뜨겁다. 아파트 대출도, 자식놈 학비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50대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논의에 불을 붙인 것은 국민연금이었다. 지난 12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는 2개의 개혁안을 발표했다. 1, 2안의 내용은 달라도 2개의 개혁안 모두 의무가입 상한연령, 즉 국민연금을 납부해야 하는 나이는 현행 59세에서 64세로 상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64세까지 연금을 내려면 그때까지 일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정년연장 이야기로 이어졌다.
앞서 말한 ‘사회적 나이’를 고려할 때 정년연장 논의는 결코 이르지 않다. 여기에 0.65명이라는 충격적인 합계출산율까지 더해, 앞으로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더이상 60세는 노동시장에서 은퇴할 나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당장 정년연장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노사 의견도 갈린다. 노조 측은 정년연장을 주장하지만, 사용자 측은 퇴직 후 재고용과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다른 방안을 내놓는다. 정년연장이 단기적으로 청년 취업난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모로 어려운 사안이다.
어쨌든 논의는 다시 시작됐다. “정년연장이든 재고용이든 더 일할 수 있게만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50대 형님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논의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지난해 프랑스에서는 62세 정년을 64세로 연장하는 내용의 연금개혁안이 통과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노조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며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노조가 앞장서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우리와는 상황이 뒤바뀌었다. 그들은 왜 정년연장을 반대했을까. 이유는 여유로운 노후에 있다. 지금도 프랑스는 퇴직 후 바로 풍족한 연금 생활에 들어간다. 반면 우리는 정년 3~5년 뒤에나 빠듯한 연금을 받는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가계를 꾸리기조차 어려운 사회, 60세까지 일하고도 생계가 빠듯해 더 일하라고 스스로를 재촉해야 하는 이 사회가 씁쓸하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당연한 보상으로 안정된 노후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라면, 정년연장 따위는 반갑지 않을 수도 있다. 예의 프랑스 노동자들처럼. 무던히 씁쓸한 이 마음은 퇴근 후 소주나 한 잔 걸치고 노래방에나 가서 달래야겠다.
김종열 문화부장 bell10@busan.com
2024-03-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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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총선 D-30, 소멸이 소멸되다
남자아이 넷, 여자아이 셋. 모두 일곱 명이 입학했다. 전교 1학년생을 몽땅 합쳐 7명이다. 시골 어느 마을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입학철 부산 변두리 지역 한 초등학교 풍경이다. ‘지역 소멸’은 무슨 촌구석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 구·군에서도 소멸 징후가 뚜렷하다.
올해 세계 최고 병원 순위에 부산지역 병원은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최근 꼽은 ‘2024년 세계 최고 병원’ 250위에 국내 병원 17곳이 포함됐다. 서울의 이른바 ‘빅5’ 병원을 비롯해 수도권 병원 16곳이 순위에 들었다.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수도권 큰 병원은 순위권에 다 포함됐다는 말이다. 수도권 이외 지역에선 대구가톨릭대병원 단 한 곳이 겨우 이름 올렸다. 그것도 국내 병원 17곳 가운데 맨 마지막 순위로 전체 235위를 기록했다. 근근이 250위에 턱걸이한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지역 병원 수준은 이것밖에 안 되나.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기막히고 답답한 마음에 궁금증이 커졌다. 뉴스위크가 홈페이지에 따로 공개한 국가별 순위 자료를 살펴보니 지역에서 가장 이름난 병원들은 국내 병원들 가운데 20~30위권을 형성했다. 도토리 키 재기 하는 듯하다. 부산·울산·경남에서 순위가 가장 높은 부산대병원은 국내 29위에 머물렀다. 부울경에선 동아대병원(34위), 인제대해운대백병원(37위), 양산부산대병원(40위), 울산대병원(44위), 인제대백병원(48위), 국립경상대병원(54위), 국립경상대창원병원(55위), 고신대병원(62위) 등이 뒤를 잇는다. 미국 언론의 평가가 절대적이진 않다. 그러나 객관화된 평가 지표로 점수를 산출해 순위를 매겼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형편없진 않을 것이다. 신뢰도를 떠나 해외 언론 평가에서도 어김없이 대한민국 지방과 수도권 격차가 극명하게 확인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020년 7월 수도권 인구가 비수도권 전체 인구를 처음으로 추월했다. 국토 면적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26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빽빽이 뒤엉켜 사는 서울공화국이다. 서울과 주변은 ‘초집중’ ‘초과밀’로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공간으로 치닫고, 지방 또는 지역은 사람이 점점 사라지는 ‘소멸’의 구렁텅이가 돼 간다. 나라가 극도로 상반된 두 쪽으로 쪼개져 비정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꼴인데도 위정자들은 태연하다. 그다지 위기 의식이 없어 보인다.
4·10 국회의원 선거가 30일 앞으로 다가왔다. 소멸의 길로 빠져든 지역의 박탈감과 불안을 떠안아야 할 정치판은 지역에 무관심한 듯하다. 총선에서 지역 소멸이라는 의제가 소멸됐다. 요동치는 공천 정국에서 ‘검찰 독재 심판’ ‘운동권 청산’ ‘용산 특권’ ‘비명횡사’ 등의 온갖 공방이 난무한다. 정치적 공방 틈바구니에서 지역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 지방을 대표하는 도시인 부산은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교육 붕괴’ 현상이 짙어지고 있다. 대입 재수도 서울서 해야 한다는 세상이다. 지역 대학 위상은 말이 아니다. 지역 인재를 길러내는 지역 교육 시스템이 소멸될 위기다. 지역의 문화 여건은 좋았던 적이 없다. 많은 지역민들이 자신이 사는 곳을 문화 불모지로 비하한다.
‘의료 소멸’도 눈앞에 맞닥뜨린 현실이다. 부산에서 사고를 당한 현역 야당 대표가 부산 응급의료 시스템을 외면한 채 곧장 서울로 향하는 게 이 나라 현실이다.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 최고 병원을 보면 수도권에만 최우수 병원이 쏠린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가까운 일본은 세계 250위 이내 병원 15곳 가운데 8곳만이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있다. 나머지 7곳은 지역 병원들이다. 규슈대병원 나고야대병원 교토대병원 오사카대병원 등 주요 지역 국립대 병원 등이 당당히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유럽 등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함부르크, 스위스 로잔, 덴마크 오르후스, 프랑스 릴 보르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로테르담,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이탈리아 볼로냐 등 각국의 수도가 아닌 지역에서도 세계 250위권 안의 베스트 병원들이 가동되고 있다. 지역 교육과 문화 의료 경제가 장기적 소멸 위기로 나아가면서 지역민의 자존감도 시나브로 옅어진다.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총선판에서 지역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출범 당시 주요 국정과제의 하나로 지역균형발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지역과 균형발전을 위해 아직 이뤄진 건 아무것도 없다. 지역 소멸에 대한 관심이 소멸된 총선. 어느 후보, 어느 정당이 지역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 선택의 순간까지 유심히 관찰해야 할 포인트다.
2024-03-10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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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글로벌 허브도시 추진, 속도가 중요해졌다
전국적으로 미래 전략 찾기가 한창이지만 지역 전략에서도 수도권과 비수도권 처지가 극명하게 갈린다. 수도권은 경계 안에서 나눠 붙이는 작업에 골몰한다. 사람과 자본이 끝 모르는 듯 밀려들어 벌어지는 일로 보인다.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서울은 인구를 분산하고, 도시 기능도 나누기 위해 경기 일부 도시를 떼와 편입시키려 한다.
경기도는 아예 두 개 지역으로 ‘분도’를 꾀한다. 어느덧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광역지자체가 되면서 경기 동북부를 떼내 경기특별자치도를 따로 두려 한다.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디다는 게 이유다. ‘수도권 규제’를 벗어나겠다는 속셈도 엿보인다. 아무튼 ‘행복한 고민’이다.
반면 비수도권에선 뭉쳐서 위기를 극복하려는 전략을 내세운다. 22대 총선 후보들이 내세운 공약 키워드만 살펴봐도 이런 상황은 잘 드러난다. ‘부울경 메가시티’ ‘충청 메가시티’ ‘메가시티 청주’ ‘새만금 메가시티’ ‘중소복합형 메가시티’ 울산·포항·경주의 ‘해오름 동맹’…. 도시 영역을 키워 ‘규모의 효과’라도 꾀하자는 취지다.
비수도권의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과밀·과대 상황을 ‘관리’하려는 수도권 처지와는 출발부터가 다르다. 인위적으로라도 변화를 줘 생존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찬물을 끼얹으려는 의도는 없지만 초광역경제권, 메가시티 등 다양한 시도에서 쓴맛만 본 부산 사례를 보면 이런 통합 노력이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지자체마다 한꺼번에 비슷한 전략을 쏟아낸 탓에 경쟁 구도가 형성된 점은 우려스럽다. 부산과 인천 간에 새로운 경쟁이 대표적이다.
윤석열 정부가 천명한 ‘지방시대’의 골자는 서울과 부산을 두 축으로 균형발전을 이끌겠다는 것이다. 부산을 새로운 성장 축으로 키우려는 첫 시도였던 2030세계박람회 유치가 좌절되자 정부는 곧바로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만들겠다는 ‘플랜B’를 제시했다. 대한민국이 부산의 가능성, 부산의 중요성을 살리겠다는 의지를 다시 밝힌 점은 다행스럽다.
대통령과 정부, 부산시가 뜻을 맞춰 글로벌 허브도시 준비에 착수했고, 부산 여야 의원 18명과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1월 25일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정부와 지자체가 특별법의 21대 국회 통과 노력을 펼치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인천이 부산의 새 경쟁자로 등장한 점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인천은 부산에 뒤질 수 없다는 듯이 지난달 23일 김교흥 의원을 비롯한 인천 국회의원 등이 ‘인천 글로벌 경제거점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을 국회에 냈다.
두 법안은 주요 내용이 흡사한 ‘쌍둥이 법안’이다. 전체 47쪽인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처럼 인천 글로벌 경제거점도시 특별법은 45쪽 분량이다.
물류, 외부 투자 등을 강조한 법안 골자도 유사하다.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은 물류, 금융, 첨단산업 등 세 분야를 앞세워 국제물류특구, 부산금융특구, 부산투자진흥지구를 설립하는 내용이 담겼다.
인천 글로벌경제거점도시 특별법 역시 항공 여객 물류, 공항경제권 신산업, 첨단 산업·문화관광 산업 등 세 분야 특화를 내걸었다. 해당 분야 육성을 위해 각각 국제물류특구, 인천투자진흥지구, 문화산업진흥지구 등을 지정토록 하고 있다. 두 법안은 나란히 국무총리 소속의 위원회를 두고, 지자체가 종합계획·시행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있다.
제2도시 위상을 놓고 부산을 바싹 뒤쫓는 인천이 유사한 미래 성장 전략을 내민 상황은 불편하기만 하다. 김교흥 의원은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특별법 통과의 키를 쥐고 있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이어서 항변하기도 어렵다.
경쟁 대열에는 부산과 인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지자체가 잠재적 경쟁자다. 각 지자체들의 전략은 특구나 지구, 단지를 지정해 국가가 지원해 달라는 게 핵심이다. 규제를 해제해 좀체 지방으로 옮길 생각이 없는 기업을 하나라도 유인하려는 게 목적이며, 인구를 늘릴 수 있다는 바람도 담겼다. 한정된 국가 지원을 선점하겠다고 전국이 각축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약자끼리 경쟁을 펼치게 된 상황이 영 마뜩지 않다. 배 부른 수도권까지 슬쩍 발을 걸치는 상황에는 울화통이 치민다. 그나마 부산이 정부 지지를 등에 업고 경쟁의 선두에 서 있다는 점은 위안이다. 지금은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의 21대 국회 통과가 최우선 과제라 할 수 있다. 민관 따로 없이 부산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속도가 관건이다.
2024-03-0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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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부산상의, 화합보다는 변화다
지난 16일 장인화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 차기 부산상의 회장 출마에 나선 양재생 은산해운항공 회장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날 부산상의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장 회장은 “현직 회장으로서 부산 상공계의 화합과 발전에 힘을 보태고자 연임을 포기했다”면서 “양 회장이 25대 상의를 잘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장 회장과 양 회장은 이날 의원총회에서 부산 상공계 화합을 약속하며 포옹하고 손을 맞잡기도 했다.
이로써 다음 달 중순 임기를 시작하는 25대 부산상의 회장은 사실상 양 회장의 단독 추대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렇게 마무리되기까지는 드라마틱한 과정들의 연속이었다.
지난달 4일 24대 부산상의 회장단은 부산롯데호텔에서 열린 신년 오찬 간담회에서 장 회장을 25대 회장으로 다시 추대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어 같은달 17일 장 회장은 부산상의 회장 연임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상공계 일부에서는 회장단의 추대를 두고 ‘밀실 추대’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2030세계박람회 부산 유치 실패, 지역 경제 침체, 상공계 파열음, 부산시체육회장 겸직 등 장 회장의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새로운 리더십을 원하는 목소리는 양 회장의 부산상의 회장 선거 출마로 이어졌다. 지난달 23일 양 회장이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부산상의 회장 선거는 3년 만에 다시 경선으로 치러지게 되면서 열기는 뜨거워졌다. 장 회장과 양 회장은 각각 선거 캠프를 가동하며 지지세를 끌어모으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 와중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있었다. 지난달 25일 24대 초선 의원들이 장 회장의 연임을 지지하고 차기 회장 합의 추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는 ‘세력 과시용’ ‘줄 세우기’라는 비판을 받으며 과열 선거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선으로 갈 것 같던 선거는 이즈음 분위기가 급변했다. 과열 선거로 상공계의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상의 회장 등을 역임했던 상공계 원로들이 물밑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로들과 후보 간 회동은 잦아졌고 입장 차도 좁혀졌다. 결국 지난 5일 장 회장이 전격적으로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양 회장의 단독 추대가 이뤄졌다. 지역 상공계의 화합을 위한 대승적인 차원이라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4일 회장단의 장 회장 합의 추대로 불거진 25대 부산상의 회장 선거는 지난 5일 장 회장의 선거 불출마 선언으로, 한 달만에 일단락됐다. 이제 남은 것은 향후 3년간 부산 상공계를 이끌어나갈 양 회장이 어떻게, 얼마나 잘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지역 상공계와 시민들은 양 회장이 과연 어떤 리더십을 보이면서 침체된 지역 경제와 지역 현안 등을 견인해 나갈지 지켜보고 있다.
그는 상의회장 선거 출사표를 던지면서 △대기업 부산 유치 △부산 상공인 화합 △권익 보호·지역경제 대변 △부산 발전·지역사회 공헌 △지속가능한 상공회의소 등 5대 공약을 발표했다. 양 회장은 “부산을 떠났던 인재들이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고 부산이 전 세계에서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바뀌는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현재 지역의 문제점을 총망라했다. 하지만 ‘부산을 떠났던 인재들이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고, 부산이 전 세계에서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바뀌는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변화를 넘어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화합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변화가 우선이다. 수동적인 관리보다는 역동성이 필요하다.
부산상의 회장 자리는 명예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봉사의 자리다. 부산 경제가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화합형’의 회장단 구성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일을 하기 위한 회장단 구성이 우선돼야 한다. 조직의 안정을 위한 사무처 조직 개편이 아니라, 혁신을 추동하기 위한 사무처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
임기 3년이라는 시간은 어찌보면 변화의 완성을 이루기엔 짧을 수도 있다. 여러 현안을 처리하다보면 어영부영 시간이 가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상의 본연의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의는 단순히 상공계의 친목단체가 아니다. 상공회의소법에 따른 엄연한 법정 단체다. ‘상의는 지역의 상공업계를 대표해 상공업의 발전을 꾀함을 목적으로 한다’를 설립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산상의가 하는 일이 뭐 있냐’라는 비아냥마저 있는 현 상황에서, 실추된 부산상의의 위상을 높이는 초석만이라도 쌓는 게 상의회장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양 회장으로 대변되는 ‘된다 된다 잘 된다 더 잘 된다’는 초긍정적 행복 에너지. 그를 부산 상공계의 수장으로까지 오르게 했다. 이 같은 긍정 에너지가 지역 경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2024-02-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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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MZ의 연애와 결혼
사랑하는 연인에게 달콤한 초콜릿을 선물하며 마음을 고백한다는 밸런타인데이 분위기가 많이 시들해졌다. 한때는 2월 14일에 이어 3월 14일(화이트데이), 심지어 4월 14일(블랙데이)까지 초콜릿과 사탕, 짜장면 같은 관련 제품들이 줄줄이 인기를 끌며 시끌벅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다.
지난 14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밸런타인데이에 ‘셀프 선물(self-gifting)’을 하는 것이 트렌드로 부상 중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역시 싱글족이 늘어나고 있고,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자신에게 선물하는 ‘셀프 선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미국 성인 인구의 약 절반이 싱글이고, 많은 젊은이들이 더이상 낭만적인 로맨스를 일상의 최우선에 두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이보다 며칠 앞선 지난 6일에는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이 연애보다는 비디오 게임이나 드라마를 더 선호한다고 답한 영국과 프랑스 20대들의 인식조사 결과를 전하기도 했다.
지난 15일 본보 2면에 실린 〈“예능으로 대리만족” 밸런타인데이도 못 깨운 연애세포〉라는 제목의 트렌드 기사도 어딘가 씁쓸함을 남겼다. 요즘 2030, 이른바 MZ세대로 대표되는 90년대생 청춘들은 어째서 가장 본능적이고 기본적인 이성과의 관계 맺기에 심드렁한 걸까. 기사에는 이런 표현들이 등장한다. “연애는 손해” “연애하지 않는 것은 드는 노력만큼 행복이 느껴지지 않아서…” “연애 대신 취미생활” “연애 대신 자기계발” “연애는 그저 비싼 취미”. 미혼남녀에게 물었다는 설문조사에서도, 10명 중 7명은 ‘지금 연애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기자가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요즘 MZ세대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잠깐 빙의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대한민국 2030 여성 직장인이라면 연애와 결혼, 출산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그림이 너무나도 버겁고 부담스럽게 와닿았다. 연애가 주는 즐거움과 행복감은 있겠지만, 결혼은 또다른 문제이며, 여성으로서 출산은 더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내려앉을 줄 모르는 집값의 무게는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결혼으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소소한 나만의 일상, 시간, 돈, 취미 같은 ‘기회비용’을 뛰어넘을 만큼 가치있는 선택인가에 대한 확신도 들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이자니 앞으로의 미래가 불안하고 걱정스럽고, 제대로 헤쳐나갈 자신도 뚝 떨어졌다. 연애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아서 외로울지 모른다는 막연한 심란함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예측가능한 암울함이, 연애-결혼-출산이라는 길에 켜켜이 놓여있을 게 뻔하게 그려졌다.
심리적 무게감 외에 현실적 비용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객관적으로 소득 수준이 중하위층인 2030세대의 결혼 의향이 낮은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더라도 주관적으로 자신의 소득 수준을 낮게 인식해 아직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지금의 나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인식하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나 하나도 건사하기 어려운데 연애-결혼-출산이 가당키나 하겠느냐’는 열패감이 번져 있다.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과시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수많은 비교 대상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경쟁으로 내몰리며,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신경 쓰다보니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해 열등감과 우울감만 더 커지게 되는 ‘지위 불안’ 현상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보니, 그들은 연애와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비혼이 디폴트값이 된 데다 어느새 ‘결혼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라는 자조 섞인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90년대생 청춘들이 마음껏 연애하고, 까짓것 결혼해보길 권한다. 연애-결혼-출산의 과정에서 일어날 불안과 걱정은 이미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니까, 진정한 반쪽과 한 팀이 되어 꽉찬 애정과 탄탄한 신뢰를 방패 삼아 인생의 여정을 탐구하다 보면, 가능성이 열리고 행복이 함께할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더구나 부모로서 자녀가 주는 커다란 즐거움 또한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지 않는가. 지나치게 낭만적인 권유일까. 물론 국가와 기성세대가 사회경제적 여건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지원이 빠르게 실행돼야 한다. 2030세대가 그들 인생의 어느 측면을 걱정하고 있는지, 어떤 부분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국가와 기성세대가 면밀하게 살펴보고, 다가올 미래에 겁 먹지 않아도 된다고, 조금은 맘 편히 사랑을 시작해도 된다고 다독이며 안전망을 세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연애-결혼-출산이라는 일련의 과정은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예쁘고 달콤한 청춘들의 밸런타인데이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2024-02-1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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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2년 허송세월한 산업은행 이전
21대 국회가 곧 막을 내린다. 민생은 팽개치고 정쟁으로만 얼룩졌다는 평가를 면하긴 어렵다. 근근이 명맥만 이어오던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이번 국회에서 아예 사라진 모습이다. 각종 쟁점 법안들은 국회 입법권과 대통령 거부권의 강 대 강 충돌로만 끝났다. 국회의 첨예한 대립 속에 부산도 아쉬움만 가득 남았다. 20년 숙원사업이던 가덕신공항 건립은 2029년 조기 개항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지역 최대 현안인 산업은행법 개정과 고준위 방폐물 관리 특별법 제정이 이번 국회에선 사실상 물 건너갔다. 2030월드엑스포 추진이 좌절된 이후 부산 대도약을 견인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 특별법’ 통과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가 최근 박형준 부산시장과 만난 자리에서 국토균형발전을 강조하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과 관련해 “관련 상임위와 협의해 (특별법에)힘을 보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이야기했다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을 위한 필수 절차인 산은법 개정에 대해 그간 노골적으로 제동을 걸었던 민주당의 총선을 눈앞에 둔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 나온다.
산은 부산 이전에 대해 민주당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부산을 찾았던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산업은행법 개정안과 관련해 침묵으로 일관했고, 지역 상공계의 건의문에도 “잘 살펴보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지난 대선 때 이 대표는 당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경쟁하듯이 부산 발전을 위한 공약을 쏟아냈다. 이 대표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고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부울경 메가시티의 중심으로 부산을 다시 세우겠다”며 쇠락하는 부산 재건을 위해 적극 나서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현 대통령의 공약이라는 이유로 지역의 바람을 외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민주당 부산시당도 중앙당 눈치만 볼 뿐 부산의 목소리를 중앙에 전달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부산의 산업 구조 재편을 위해 추진돼 왔다. 기존 제조 산업 위주로는 돌파구를 못 찾는 부산 경제 부흥을 위해 산업과 물류 금융 기능을 결합하자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노무현 정부 때 부산을 국제금융도시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고, 이후 일부 금융기관들이 이전됐다. 그러나 기존의 예탁결제원, 주택금융공사, 자산관리공사 등 이전 금융기관들이 지역 경제와 연계해 금융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부산을 비롯한 부울경에선 지역개발에 앞장설 수 있는 대형 정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 유치가 꼭 필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수도권에 대응하는 또 다른 성장 축인 남부권 성장을 위한 필수 기관이라는 것이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민주당에 발목이 잡힌 꼴이지만, 여당도 무기력했다. 산업은행 이전을 국정 주요 현안 과제로 올리는 데 실패했다. 이에 지역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에 대한 쓴소리도 터져 나온다. 지역 여권 관계자는 “만약 산업은행 이슈가 부산이 아니라, 광주나 대구였으면 어떻게 진행됐을까”라며 “민주당은 호남의 이슈를 전국화해서 이미 법이 통과됐을 것이고, 대구도 부산보다는 쉽게 사업이 추진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대구경북신공항과 달빛고속철도 등 대구와 광주의 대규모 교통 인프라 사업은 순식간에 탄력을 받아 가시화되고 있다. 그는 “부산 의원들이 호남과 대구 의원들보다 정치력이 떨어지면 국회에서 단체 삭발을 하는 식이라도 부산의 간절함을 보여줘야 하는데, 총선을 앞두고 제 살길 찾기에만 급급하다”고 꼬집었다.
지방 소멸 위기에 따른 국토균형발전이 대한민국의 피할 수 없는 당면 과제가 된 것도 오래 전이지만, 여전히 수도권 비대화는 멈출 줄 모른다. 반도체 산업 육성에 수십 조원을 쏟아붓고, 수도권을 거미줄같이 연결하는 광역급행철도 공약도 쏟아진다. 국가 경쟁력 확보와 과밀화된 수도권 주민들의 교통 인프라 확충 차원이니, 지방 주민들도 충분히 이해는 한다. 그러나 지방은 ‘이제 답이 있나’ 할 정도로 갈수록 암울해지고 있다. 제동이 걸리는 부산 현안 과제들을 보며 ‘수도권에 대응하는 제2의 경제 축 육성’이란 구호는 공허하기만 하다.
2022년 대선 공약 이후 2년을 허송세월한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안타깝게도 22대 총선 이후를 기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더 늦어지지 않으려면 양당의 공약화로 못 박아야 한다. 산은 부산 이전과 관련해 이번 국회에서 별 역할을 못했던 민주당 부산시당이 총선 1차 공약으로 다소 황당하게도 ‘제22대 국회 임기 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을 내걸었다. 구호에만 그칠지, 중앙당의 공약으로 반영될지 궁금하다.
강희경 정치부장 himang@busan.com
2024-02-0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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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더 나은 돌봄을 위해
지난 23일 부산시교육청과 부산시, 16개 구·군과 지역 대학이 손을 잡고 영유아와 초등학생 돌봄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올해 2학기부터 돌봄과 방과후 프로그램을 결합해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돌봄을 제공하는 ‘늘봄 학교’ 도입을 선언한 것에 발맞춰 ‘부산형 통합 늘봄’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다.
영유아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보육 시간을 늘리고, 초등학생 1~3학년 학생 중 돌봄을 원하는 모든 학생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유치원이나 지역 대학 등 지역 연계 돌봄 시설을 확충하고, 양질의 방과후 프로그램을 늘리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돌봄 공백으로 아이 맡길 데를 찾느라 진땀을 흘린 부모라면 돌봄 시스템 강화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지난해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가 학교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할까 봐 몇 날을 노심초사했다. 방과후 수업을 듣고 학원을 여러 군데 다녀도 오후 8시 퇴근 전까지 돌봄 공백을 메울 수 없어 막막했다. 다행스럽게도 학교 돌봄 교실을 이용할 수 있었고, 최악의 경우 퇴사냐 육아냐 갈림길에 서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학교 돌봄 프로그램은 만족스러웠다. 오후에 간식을 챙겨주고, 그림 그리기나 체육 등 다양한 활동도 이뤄졌다. 맞벌이 부부의 가장 큰 고비인 방학 때도 오전에 문을 열어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2학년이 되면 1학년 우선 배정 원칙 때문에 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이야길 듣고 또 불면의 밤이 시작됐다. 운이 좋게 아파트 안에 지자체가 지원하는 지역 돌봄 센터가 생겨서 걱정을 덜었다.
이용자 편의와는 별개로 교육계 내부에서는 학교 돌봄 서비스 확대에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학교 행정 업무가 늘어나고, 과밀 학교는 돌봄 교실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학교 돌봄 교실을 이용하면서 돌봄 전담 교사의 어려움을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돌봄 교실에 직접 아이를 데리러 간 일이 있었다. 간 김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돌봄 교사는 학원 차량이나 부모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20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수시로 불러 대는 통에 정신이 없어서 황급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간식이나 도시락 신청, 아이 스케줄 변동과 결석에 따른 환불 처리 등 돌봄 교사가 꼼꼼하게 챙겨야 하는 업무가 한둘이 아니었다.
돌봄 이용 아이들이 늘어나면 돌봄 교사 업무도 늘어난다. 돌봄 서비스 확대가 내실 있게 정착되기 위해서는 돌봄 인력 확충 등 지원 시스템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이번 기회에 돌봄 공간에 대한 고민이 함께 이뤄졌으면 한다. 돌봄 전담 교실은 일반 교실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수업 시간에 4~5시간 의자 생활을 한 아이들은 대개 돌봄 교실에서도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집처럼 바닥이나 소파에서 뒹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돌봄이 ‘보살핀다’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이들 심리에 영향을 끼치는 공간의 구성은 돌봄의 중요한 요소이다.
수년 전 핀란드 헬싱키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공간의 아늑함이 한국의 학교와 확연하게 달랐던 기억이 또렷하다. 긴 복도에 교실이 일렬로 늘어선 천편일률적인 한국 학교와 달리, 교실들이 거실에 딸린 방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거실과 같은 공유 공간 곳곳에는 소파가 놓여있었고 바닥에는 아이들이 편하게 앉거나 누울 수 있는 패브릭 소재 바닥재가 깔려 있었다. 교실 사물함 위에는 아이들이 집에서 가져온 인형이나 아끼는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고, 복도에는 좁은 공간을 좋아하는 저학년을 위해 인디언 텐트가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OECD 국가 중 학업성취도가 최상위권인 핀란드 교육의 저력은 집처럼 편안하게 조성된 학교 공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학교 전체를 아늑한 공간으로 만들기 어렵다면 돌봄 교실만이라도 아이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 오랫동안 돌봄 교실에 머물 아이들 입장에서 공간이 꾸며지면 좋겠다.
돌봄 시스템으로 출생률을 높이려는 사회적 노력은 장기적 관점에서는 일자리 고민과 병행되어야 한다. 아이를 일정 시점까지 키우는 데에는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든다. 그 시간을 일과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를 기업과 정부가 함께 모색해야 한다. 요즘 부모들은 예전보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육아 중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근무 환경과 급여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일자리가 많아야 아이 키우는 환경이 좋아질 것이다.
송지연 기획취재부장 sjy@busan.com
2024-01-2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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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잊을 수 없는 아시안컵 8강 이란전
64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에 도전하는 한국 축구 대표팀은 아시아 국가로는 최다인 월드컵 본선 11회 진출 기록을 갖고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아시안게임 역대 최다인 6회 우승 등 국제 무대에서 빛나는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아시안컵 우승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한국이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것은 역대 두 차례(1956·1960년)로 참가팀이 4개국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숙적’ 일본이 4차례 우승(1992·2000·2004·2011년)한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운 성적이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이번 카타르 대회 16강전에서 승리한다면 8강에서 아시아 최대 라이벌인 이란을 만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과 이란은 아시안컵 8강전에서만 5번 연속으로 마주친 ‘질긴 악연’을 갖고 있다. 5차례 맞대결 결과는 한국이 3승 2패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두 팀 간 8강전에서 승리한 팀이 단 한 번도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도 기이한 사실이다.
두 팀이 아시안컵 8강에서 처음 맞붙은 것은 1996년 아랍에미리트 대회다. 한국은 전반 김도훈과 신태용의 골로 2-1로 앞섰다. 하지만 후반 호다디드 아지지의 골을 시작으로 알리 다에이에게 무려 4골을 허용하며 2-6으로 대패했다. 한국 대표팀이 아시아 팀을 상대로 가장 큰 점수 차로 패한 경기였다. 이 경기 후 당시 사령탑이었던 박종환 감독은 바로 경질됐고, 국내 한 방송사는 ‘한국 축구 대참사’를 주제로 원인과 대책을 진단하는 특별 토론회를 편성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과 이란이 아시안컵 8강에서 두 번째로 만난 것은 2000년 레바논 대회다. 양 팀은 전반을 0-0으로 마쳤고, 한국은 후반 카림 바게리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경기 막판 김상식이 귀중한 동점골을 터뜨렸다. 한국은 연장전에서 이동국이 극적으로 골든골을 뽑아내 2-1로 승리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1-2로 져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이동국은 이 대회 사우디전과 3~4위 중국전에서도 한 골씩을 터뜨리는 등 모두 6골을 기록해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
양 팀이 아시안컵 8강에서 세 번째로 맞붙은 2004년 중국 대회에서는 모두 7골이 터지는 난타전이 벌어졌다. 이란이 전반 알리 카리미의 선취골로 앞서나가자 한국의 설기현이 곧바로 1-1 동점골을 쏘아 올렸다. 이란의 카리미가 다시 추가골을 터뜨리자 이번엔 이동국이 2-2 동점골을 넣었다. 전반을 2-2로 마친 양 팀은 후반에도 피를 말리는 혈투를 벌였다. 이란이 한국 수비수 박진섭의 자책골로 다시 앞서나가자 김남일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동점골을 뽑아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경기 종료 10분여를 남기고 카리미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내줘 결국 3-4로 분패했다. 이날 이란이 앞서가면 한국이 바로 따라가는 팽팽한 명승부가 펼쳐졌다. 이 대회에서 이란의 카리미와 한국의 이동국은 아시아 최고의 기량을 과시했지만 팀은 불운하게도 우승하지 못했다. 카리미와 이동국은 이 대회에서 각각 5골과 4골을 넣으며 득점 1, 2위를 차지했다. 이란은 당시 다에이, 바게리, 카리미, 아지지를 비롯해 자바드 네쿠남, 메흐드 마다비키아 등 유럽과 중동 리그에서 뛰는 호화 멤버가 대표팀을 이끌었다.
2007년 아시안컵 대회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4개국에서 개최됐다. 아시안컵 역사상 최초로 2개 이상의 나라에서 공동으로 열린 이 대회 8강에서도 두 팀이 또 다시 만났다. 연장까지 가는 0-0 접전 끝에 한국이 승부차기로 승리해 4강에 올랐다. 그러나 한국은 이라크와의 준결승에서 0-0 혈투 끝에 승부차기에서 석패해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이라크가 사상 최초로 정상에 오르는 이변이 연출됐다.
2011년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아컵 8강에서도 한국과 이란은 전후반 90분 동안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에서 한국의 윤빛가람이 그림 같은 결승골을 터뜨려 한국의 4강 진출을 견인했다. 그러나 한국은 준결승에서 일본에 승부차기로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하지만 구자철은 5골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은 박지성과 손흥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함께한 대회였다. 박지성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태극전사 26명 중 중동 무대를 포함한 해외파 선수가 14명이나 된다. ‘역대 최고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는 클린스만호가 한국 축구 팬들의 오랜 염원인 64년 만에 아시안컵을 다시 들어 올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4-01-2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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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생각을 바꿔야 부산이 바뀐다
2030월드엑스포 유치가 불발된 지 50일 가까이 지났다. 상상도 못한 참패였기에 후유증이 오래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충격과 악몽에서 빨리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백번을 양보한다고 해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니다. 이제는 유치 과정의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해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그런 처참한 패배를 당하지 않게 된다. 물론 월드엑스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 주는 것도 아니고, 유치에 성공한다고 해서 부산이 단번에 세계 최고의 도시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엑스포 없이도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도시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번 실패를 계기로 발상의 대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우리가 ‘우물안 개구리’나 ‘끼리끼리 문화’에 젖어 경쟁력 저하를 자초하지 않았는지 냉정하게 반성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부산대병원을 포기하고 서울대병원으로 전원했을 때 “지역 홀대”라고 비난만 하기 전에 “우리에겐 잘못이 없었을까”하고 반성해야 하듯이 말이다. 부산대병원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역외상센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전체가 알고 있었다면 민주당이 그런 ‘오판’을 했을까 하고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까지 부산은 “가만히 있어도 전 세계가 알아주고, 국가가 챙겨주겠지” 하는 안일한 사고에 젖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토박이 중심주의’가 심각할 정도로 만연해 있다. 우리는 사업을 해도 출신 지역을 먼저 따지고, 사람을 쓸 때도 ‘부산사람’을 제일 우선시한다. 어쩌면 ‘그들만의 리그’에 갇혀 세상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갈라파고스’로 전락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부산시를 봐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시 산하에 7곳의 지방공기업과 16개의 출연·출자기관이 있지만 벡스코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부산 출신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 관광이나 문화 분야의 기관장을 굳이 부산 출신이 맡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고, 부산 경제 발전의 첨병 역할을 하는 부산시 경제부시장 자리에 외부 전문가나 유력 기업인 출신을 영입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하물며 세계 최고 수준의 명문 골프장인 아시아드CC 사장을 줄곧 부산 출신에게 맡길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뼛속까지 변해야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부산이 바뀐다. 350만 시민의 수장인 박형준 부산시장이 먼저 모범을 보여달라. 그는 더 이상 ‘부산만의 시장’이 아니다. 엑스포 유치 활동 과정에서 그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인물이 됐다. 취임 1000일이 넘는 박 시장은 역대 민선 부산시장 중 최고로 평가 받는다. 그는 한국갤럽이 실시한 광역단체장 직무수행 평가에서 특·광역시장 중 긍정 평가 1위를 기록할 만큼 부산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이미 차기 대권 주자 반열에도 올라 있다.
그런 만큼 ‘부산’이란 틀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인재 등용의 루트를 다양화해야 한다. 시와 산하기관 요직에 ‘내 사람’을 앉힐 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아니면 세계 속에서 적임자를 찾아야 한다. 정치의 영역에선 기존 판을 완전히 뒤엎는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18명의 부산 국회의원 중 ‘부산 출신’이 아닌 사람은 1명도 없다. 대부분 부산에서 대학이나 고교를 졸업했다. 그런 부산 정치인의 수준은 어떤가? 일반 시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면서 중앙 무대에서 제 역할을 하는 국회의원은 별로 없다. 엑스포 유치 활동 과정에서 부산 정치인들의 무능과 무기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는 시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부산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오는 4월 22대 총선에서부터 시작하자. 부산시민의 위대한 힘을 보여 주자. 무기력하거나 존재감 없는 정치인들을 과감히 퇴출시키고 능력 있는 새 인물을 뽑아야 한다. 소속 정당도 중요하지만 인물도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 부산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인물을 공천하는 정당을 적극 밀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철퇴를 가하자. 정치인 출신을 가급적 배제하고 경제, 문화예술, 외교, 소상공인, 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숨은 인재를 적극 발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학연이나 지연을 따지지 말자. 최소한 이번 총선에서만큼은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을 부산에 집결시키자.
세계가 인정할 정도로 부산시민들의 능력은 탁월하다. 그런 만큼 넓은 아량과 열린 마음으로 부산의 문호를 대폭 개방하자. ‘내 자리’를 최대한 외부인에게 양보하자. 그래야 우리 앞에 닥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 ‘내 사람’만 고집하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세계 최고 도시에 오르지 못하고 3류, 4류 도시로 전락하게 된다.
권기택 서울지사장 ktk@busan.com
2024-01-1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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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기적’ 헌혈
지난달 20일 점심시간에 짬을 내 부산 남포동 헌혈의집에 들렀다. 직원을 통해 안 사실인데, 2001년을 마지막으로 무려 22년 만의 헌혈이었다. 그동안 대체 뭘 하고 살았던가. 헌혈대에 누워 반성과 함께 잡다한 생각을 좀 했다.
컴퓨터로 문진 받고, 혈압 재고, 실제 피 뽑는 데 30분 남짓 걸렸다. 마치고 나오는 나의 손에 문화상품권 2장(선택), 과자, 음료수가 쥐어졌다. 근무자들의 밝은 모습과, 뭔가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은 덤이었다. 며칠 뒤 헌혈 앱 ‘레드커넥트’에서 건강에 별 이상이 없다는 ‘의외’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헌혈은 수혈자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숭고한 행위이며, 수혈이 필요한 환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혈액제제를 얻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의 헌혈 독려 글이다.
솔직히 22년 만의 헌혈은 이런 숭고한 취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를테면 ‘이기적 동기’랄까. 지난해 11월 병원에서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약 대신 생활습관을 바꾸는 중에 헌혈을 하면 혈압이 좀 떨어지지 않을까 얄팍하게 머리를 굴린 것이었다. 마침 인터넷 검색 결과도 등을 떠밀었다. 지속적인 헌혈이 10~20mmHg 정도의 혈압을 낮춘다는 게 아닌가.
물론 그 전에 헌혈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텅 빈 헌혈의집 혈액보관고나 헌혈 하는 사진을 신문에서 볼 때면 그랬다.
대한적십자사 부산혈액원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부산에서 약 20만 명이 헌혈을 했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6일치를 보유 중인데 보통 5일치 미만으로 떨어지면 비상이다. 혈액형별로 보면 수요가 많은 O형과 A형의 경우 3.5일과 4.5일치에 그쳐 부족한 상황이란다.
저출생·고령화는 헌혈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헌혈은 16~69세에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10~20대가 가장 많이 한다. 이들이 전체의 60%를 차지한다. 또 처음 헌혈을 하는 이의 절반이 고교생이다. 주로 학교를 방문한 헌혈버스를 통해서다. 부산은 합계출산율이 전국 꼴찌 수준인 데다 청년 유출까지 심각하다.
피는 인공적으로 만들거나 다른 물질로 대체할 수 없다. 대한적십자사가 응급상황에 대비해 노심초사하는 이유다. 헌혈된 피는 혈액정보공유시스템을 통해 의료기관에 공급된다. 수혈 비용 일부는 건강보험에서 지원하고 나머지는 본인이 부담하는데, 헌혈증서 1장이면 본인 부담 없이 1팩을 수혈받을 수 있다.
혈액관리법상 매혈(賣血)은 금지돼 있다. 그런데 피가 부족하다는 뉴스를 볼 때면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개인이 피를 팔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지 않던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피 공급은 늘겠지만 온갖 사회적 병리현상이 빚어질 게 뻔하다. 헌혈을 ‘이타적’ 영역으로 두는 것은 어쩌면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설정이 아닐까 싶다.
몇 년 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을 때 생명의 이치에 대한 경이로움과 씁쓸함이 교차했다. 오로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애쓰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인간을 ‘숙주’로 삼고 있다는 것이 요지다. 인간의 이기심에 기초한 ‘시장’이라는 것도 실은 유전자가 ‘보이지 않은 손’으로 조작하는 것이려나?
정반대로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인간의 이타성에 주목했다. 한 학생이 인류 문명의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1만 5000년 전 인간 대퇴골을 꼽았다. 이 뼈가 다시 붙으려면 약 6주가 걸리는데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 굶어 죽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본질적으로 생명은 이기적이고, 사회는 ‘자기 향상’의 유인 체계로써 그 이기심을 장려한다. 하지만 사회는 또 주위 눈치, 도덕, 법 등을 통해 이기심을 제어하면서 공생을 도모한다. 인간 행동은 이기심과 이타심이 혼재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利害)가 ‘너와 나’로 딱 구별되지도 않는다.
새해가 밝았다. 무심한 자연에 인위적으로 마디 지은 게 시간일 테지만 반성과 희망의 계기로 삼기에 좋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삶이 팍팍할 것 같다. 행여 ‘뼈가 부러진’ 이웃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자. 인공지능(AI)과 인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시대, ‘인간 연대’의 경건한 의식으로써 헌혈 동참도 의미 있겠다. 그게 여러모로 각자에게도 이로울 테고.
그나저나 헌혈을 하면 과연 혈압이 떨어질까. 아쉽게도 대한적십자사 부산혈액원 설명은 좀 달랐다. “헌혈이 혈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는 공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기분은 상쾌했다.
2024-01-07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