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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황매산 철쭉제
매년 이맘때가 되면 지천으로 피는 꽃이 철쭉이다. 산자락에서부터 능선을 타고 선홍빛으로 흐드러지게 피는 철쭉은 그 색깔과 영롱함에 반할 수밖에 없다. 봄의 대표적인 꽃으로 분홍색, 빨간색, 흰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철쭉이란 어원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척촉(척촉)’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가던 길을 더 가지 못하고 걸음을 머뭇거린다’라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철쭉 하면 떠오르는 여인이 수로부인이다. 〈삼국유사〉 헌화가에는 신라 성덕왕 시절 천 길 벼랑 끝의 철쭉이 아름답다고 하여 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수로부인에게 꺾어서 바친 이야기가 나온다. 수로부인은 그 노인에게 “한 다발 꽃분홍 철쭉이 나를 부르네/ 아프고 괴로웠던 추운 시절 잊게 하네/ 암소 끌고 오신 이여/ 꽃 바친 그 정성으로 올해 농사 가물지 않도록/ 천지신명이여 굽어살피소서”라고 답가를 보냈다고 한다. 철쭉은 전통 결혼식에서 신부의 머리에 꽂는 꽃으로도 사용되었을 만큼 한민족과 오랫동안 함께했다.
꽃의 계절이다. 만개했던 벚꽃이 꽃비가 되어 흩날린 지 며칠 만에 계절의 여왕인 5월이 다가왔다.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축제도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먹고 마시는 축제부터 눈을 즐겁게 하는 꽃 축제까지. 영남에서 꽃과 관련한 대표적인 축제가 경남 산청 황매산 철쭉제다. 오는 27일부터 5월 12일까지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 황매산 일원에서 열린다. 태백산맥의 마지막 준봉으로 작은 금강산으로 불리는 황매산에는 5월 초부터 철쭉이 산상 화원을 이룬다. 황매산 해발 800~900m의 평원에 철쭉이 만개한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올해 철쭉제 주제는 ‘산청, 철쭉에 물들다’이다.
철쭉의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어느 가수가 “바람의 향기 불어와 철쭉 꽃비가 내리면/ 그 옛날의 사랑이 그리워지네/ 나 그곳에 가리라/ 옛사랑의 추억을 찾아서/ 이렇게 그리운 밤에는 철쭉 꽃비가 내린다”라고 열창했다. 철쭉은 향기가 없지만, 그 가수에게는 바람에 실린 사랑의 향기가 느껴졌나 보다. 철쭉이 피는 이 계절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 철쭉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기억을 통해 우리네 신산한 삶에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번 황매산 철쭉제에서 모처럼 사랑도 고백하고, 철쭉의 선홍빛에 물드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꽃처럼 잠시라도 해맑을 수 있다면….
2024-04-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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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퇴계, 향산, 양산
지난 총선 때 한 후보가 자신의 저서 중 퇴계 이황의 사생활 관련 표현이 문제가 돼 곤욕을 치렀다. “감히 퇴계를 모독하느냐”며 유림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공맹에 견줘 이자(李子)로 칭송되는 성인을 폄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실 퇴계가 대학자이자 민족의 사표라는 데 이론을 달 이는 별로 없다. 더구나 그는 매서운 절의(節義)를 가진 선비이기도 했다. 초야에서 정진하며 후진을 양성한 은인(隱忍)의 학자로 흔히 알지만, 이는 퇴계의 절반만 아는 것이다.
그의 본래면목이 잘 드러난 시가 ‘절죽(折竹·꺾인 대나무)’이다. ‘강항오조좌(强項誤遭挫·굳센 목덜미가 잘못 꺾어져도)/ 정심비소파(貞心非所破·곧은 마음이 깨지는 것은 아니어라)/ 늠연립불요(凜然立不撓·늠름히 서서 흔들리지 않으니)/ 유감격퇴나(猶堪激頹懦·오히려 무너지고 나약한 자를 격려한다네).’ 퇴계가 63세 때 지은 이 시에는 어떤 어려움에도 절의를 지킨다는 선비의 의연한 기상이 갈무리돼 있다.
퇴계의 절의는 대를 이어 전해졌고, 그 절정이 11세손 향산 이만도(1842~1910)다. 어려서 퇴계학을 전수받은 향산은 평소 선비로서 뜻 세움을 중히 여겼다. “뜻을 세우는 건 가슴에 대못 박는 것과 같아서 한 순간이라도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그의 부친도 마찬가지여서, 향산이 25세에 장원급제하자 “조정이 너를 죽을 자리에 두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선비의 책임을 다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향산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 퇴계가 그랬던 것처럼, 후학 양성과 학문에 몰두했다. 이후 일제의 침략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켰던 그는, 1910년 한일병탄이 발표되자 “죽음 말고 무엇이겠는가”라며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절했다. 안타깝게도 향산의 순절은 당시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향산이 선비로서 보여준 삶과 죽음은 망국지경에서 지식인의 선택과 결단이 어떠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만든다. 그의 자취를 좇아볼 법도 한데, 마침 양산시립박물관에 좋은 기회가 마련됐다.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열리는 ‘양산군수 특별전’이다. 조선시대 양산에 부임해 칭송받은 역대 군수들의 면모를 소개하는 전시인데, 대상에 향산이 포함됐다. 향산은 1876년 양산에 부임해 목민의 의무를 다했다. 전시를 찾는다면 향산의 절의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성싶다.
2024-04-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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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부산시 '금주 구역' 조례
미국 위스키 잭 다니엘의 본거지는 테네시주 무어 카운티(Moore County)인데, 정작 이 지역 식당이나 상점에서는 이 세계적인 토산주를 구입하거나 마실 수가 없다. 무어 카운티는 연방 금주법 폐지 뒤에도 주류 판매와 음주가 불법이어서다. 이런 지자체는 알코올이 증발해 버렸다는 비유로 ‘드라이(dry) 카운티’로 불린다. 그 반대는 ‘웨트(wet) 카운티’. 미국에서 500곳 이상의 지자체가 아직 ‘드라이’ 상태다.
유럽은 술에 너그러울 것 같지만 상당수 국가가 늦은 밤과 새벽에 주점에서 주류 판매를 금지한다. 영국 스코틀랜드는 과음을 막기 위해 주류 최저 가격제 MUP(Minimum Unit Pricing)까지 도입했다. 싼 맛에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는 취지다.
조선은 건국 때부터 금주가 ‘디폴트’(초기 설정)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술’ 키워드로 읽으면 금주령과 현실론의 투쟁사다. 임금들은 끊임없이 금주령을 내렸지만 결국 솜방망이였다. ‘거리에 술병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어명을 내렸다가 ‘술주정하는 것만 금한다’며 단속을 완화했다. 다시 금주론이 강경해지자 ‘고기와 생선 안주 금지’라는 웃지 못할 고육책으로 음주를 억제하려 했다.
실록에는 임금 앞에서 만취 신하가 궁녀를 희롱하거나, 심지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사를 부려 망신한 사례까지 나온다. 영의정 정인지는 술주정의 꼭짓점이다. 작취미성으로 어전에 나와 임금과 문답을 못하는 건 예사. 불콰해져 세조에게 ‘너’라고 하대하거나, 불교 심취를 비난해 술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파직과 귀양은 가볍고 목을 베야 한다고 신하들이 들끓었다. 세조는 요지부동으로 정인지를 두둔했다. “취중 실수여서 죄를 물을 것도 못 된다!” 주사에 관대한 내면 의식의 면면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부산의 어린이집·유치원, 공원, 정류장 등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하다 적발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부산시의회 이종진 의원이 발의한 ‘건전한 음주문화 환경조성에 관한 조례’ 개정안이 지난 2월 본회의를 통과해 금명 시행된다. 이 조례로 지자체는 ‘금주 구역’ 지정과 단속·과태료 부과 권한을 갖게 됐다. 그간 너그러운 음주 문화 탓에 잘못된 음주 행태에 대한 예방 시스템이 없었다. 그사이 부산 음주율은 전국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 조례를 계기로 ‘음주 TPO’, 즉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을 따지는 성숙된 음주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2024-04-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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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도시 입장료
“소음과 사생활 침해 때문에 도저히 창문을 열고 살 수가 없다.” “평일·주말 안 가리고 사람들이 몰려와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간다.”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세계 주요 관광지 주민들의 하소연이다. 특정 지역에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침해하는 과잉 관광(Overtourism)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부 관광지에선 주민들이 앞장서서 “이젠 제발 그만 좀 와 달라”고 할 정도다.
아프리카 서북부 해역에 위치한 카나리아제도는 스페인령 군도다. 화산 지형과 연중 내리쬐는 햇살로 유명해 전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이곳엔 주민 220만 명의 7배가 넘는 16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 그러자 수만 명의 주민들이 ‘관광 중단’이란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와 관광객들에게 항의하는 일이 최근 벌어졌다. 이러한 과잉 관광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그리스 산토리니, 일본 오사카, 필리핀 보라카이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제주도와 서울 북촌 한옥마을, 부산 감천문화마을 등이 비슷한 경우다. 과잉 관광이 문제가 되자 지난해 초 프랑스에서는 루브르박물관의 하루 방문객을 4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제한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최근 연간 방문객이 2000만 명을 넘자 새 숙박 시설을 건설하지 않기로 했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다. 한때 25만 명이 넘었던 인구는 쪼그라들어 지금은 5만 명에 불과하지만, 관광객은 매년 2500만~3000만 명이 찾고 있다. 이렇게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주민들의 생활이 힘들게 되자 베네치아는 오는 25일부터 당일치기 방문 관광객을 대상으로 도시 입장료 5유로(약 7000원)를 부과하기로 했다. 6월부터는 단체 관광객 수를 25명으로 제한한다. 도시 입장료 부과는 세계 도시 중 처음이다.
이제 과잉 관광은 전 지구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베네치아가 도시 입장료 부과까지 들고 나왔을까. 전문가들은 과잉 관광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칫 관광지로서 매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에서는 인간과 지구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관광의 책임 있는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마침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온실가스 발생을 줄이기 위해 탄소 배출 감축에 노력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 모두 이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2024-04-2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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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대마도 지진?
지난해 5월 15일 아침, 동해를 뒤흔드는 규모 4.5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지는 동해 북동쪽 52km 해역. 동해에서 일어난 지진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 지난해 한반도와 주변 해역을 통틀어도 가장 강력한 수준의 지진이었다. 또 저 무렵 한반도 인근에서 발생한 44회의 지진 중 3분의 1이 이곳에서 발생했다. 근년 들어 동해 지진이 부쩍 많아진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올해는 새해 벽두부터 동해안 지진해일 걱정에 밤잠을 설쳤다. 1월 2일 일본 서부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인근에서 규모 7.6 강진이 발생해 우리 해안으로 쓰나미가 밀려들었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쓰나미의 위협이 처음은 아니다. 1993년 일본 홋카이도 오쿠시리섬 북서쪽 해역에서 규모 7.8 강진이 발생해 동해안으로 최고 2.47m의 해일이 덮쳤다. 1983년엔 혼슈 서쪽 해역의 7.7 지진으로 쓰나미가 일었다. 각각 4억 원의 재산 피해와 3명의 사망·실종자를 냈다.
동해 지진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건 이곳에 밀집된 원전 때문이다. 원전이 있는 부산 기장, 울진, 영덕 등은 죄다 동해안에 위치한다. 국내 원전은 규모 6.5 기준의 2~3배 강도를 견디게 설계돼 문제가 없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하지만 큰 지진의 경험이 없다 보니 외국 자료를 토대로 내진설계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우리 환경에 잘 맞는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른다는 얘기다.
지난 주말인 19일 밤 11시 28분, 긴급재난문자의 다급한 경고음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일본 대마도 북동쪽 해역에서 발생한 3.9 규모의 지진을 알리는 정보였다. 동해와 남해를 잇는 이 일대는 과거에도 규모 5 이상의 강진이 발생한 곳이다. 부울경 지역에서 80여 건의 흔들림 신고가 접수됐다고 한다. 대만 강진 소식이 불과 3주 전의 일이라 국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진앙지인 대마도 북동쪽 95km 해역이라면 부산 남동쪽 대한해협이다. 부산에서 54km 거리라서 우리가 더 가깝다. 그런데도 ‘대마도 지진’으로 발표된 것은 발생 해역이 일본 영해라서다. ‘국외 지진’으로 분류되니 어쩐지 안심은 되겠으나 이는 착시일 수 있다. 재난 정보의 신속함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추가 전송을 통해서라도 우리나라 어느 지역과 얼마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세부 내용을 담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국내든 국외든 한반도에 영향을 주는 지진이라면 빈틈없는 경각심의 대상이 돼야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2024-04-2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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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비공개 대국민 사과
우리 속담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는 말이 있다. 자기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상대방에게 간절히 비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본능은 원래 ‘책임 회피’에 가깝게 설계돼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잘못을 인정해 평판이 하락하고, 법적·도덕적 책임을 지는 사과 행위는 큰 용기와 진정성이 필요하다. 미국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아론 라자르 교수는 저서 〈사과에 대하여〉에서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사과이며, 사과는 약자의 언어가 아니라 위대한 힘을 요구하는 리더의 언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제대로 사과하는 방법으로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고, 유감을 표시하고, 그 이유에 대해 진상을 규명한 뒤, 책임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개선 방향을 공표해야 한다”라고 제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얼버무림, “만약~ 했더라면”이라는 가정법, 누가 잘못했는지 주체조차 애매한 수동형, “나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까~”라는 부정형 등 잘못된 사과로 화를 키우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공개 대국민 사과’로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윤 대통령은 4·10총선 참패와 관련해 국무회의 13분 모두발언을 통해 “옳은 방향과 좋은 정책 아래 최선을 다했다”면서 “국민이 체감할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 세심한 영역에서 부족했다”라고 말했다. 국민에게는 국정 최고 지도자로서 책임과 혁신 의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변명으로 비쳤다. 비난이 빗발치자, 대통령실 측은 4시간 뒤에서야 “대통령이 비공개회의에선 ‘대통령부터 국민의 뜻을 잘 살피고 받들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라고 발표했다.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할 대상인 국민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비공개 대국민 사과’였다.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 된 셈이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당당하게 책임을 지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모습이다. 대통령에게 사과는 정치의 끝이 아니라, 위기를 벗어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성공적 사과는 국민과 손상된 관계를 회복시켜 지지자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실수보다 더 나쁜 게 사과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윤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사과의 방법을 배워야 할 듯하다. 고물가와 고환율 등 사과할 일이 집채만 한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2024-04-1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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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나는 솔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했다. 많은 해설이 가능하지만, ‘음과 양이 만나 어우름이 도(진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다. 여하튼 음과 양이 만나면 격렬하게 반응한다. 서로 어우르며 만물을 키워 낸다. 인간에서 음과 양은 곧 여와 남이다. 여와 남이 짝이 되면 격하게 사랑하고 역시 어울어 생명을 일궈 낸다. 여남의 짝짓기는 그래서 고결하고 신성하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 통계가 증명한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결혼은 19만 4000여 건. 2011년에는 32만 9000여 건이었다. 줄어드는 속도가 가히 무섭다.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꺼려한다. 실제로 전국 미혼 여남 중 “연애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24%에 불과하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연애는 손해’라는 생각이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런데 그런 세태에 맞춤하지 않은 현상이 있다. 연애와 결혼을 주제로한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이 여러 방송 채널을 통해 큰 인기를 끄는 현상이다. 현재 방영되는 짝짓기 프로그램은 5~6개 정도인데, 그중 하나가 ‘나는 솔로(SOLO)’다. 시즌을 이어가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여기서 소개된 사연을 모르면 항간의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다. 미혼 여남들이 일정한 공간에서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주고받으며 짝을 찾는 과정이 보는 이들까지 웃고 울린다.
이를 모방해 김해시가 만든 인구정책 프로그램이 ‘나는 김해 솔로’다. 김해 각지 명소에서 1박 2일간 미혼 여남에게 데이트할 기회와 환경을 제공한다. 이게 요즘 시쳇말로 대박을 치고 있다. 지원자가 몰려 남성은 못 해도 10 대 1, 여성은 3 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해야 한다.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높다. 지난 13~14일 한 캠핑장에서 진행된 행사에선 미혼 여남 각 10명이 참여해 무려 5쌍이 짝이 되는, 그러니까 50%의 성공률을 보였다.
연애와 결혼을 기피하는 요즘 젊은이라고 해서 이성을 향한 욕념까지 없는 건 아닐 터이다. 하기야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 격하게 사랑의 불꽃을 피우는 게 젊음의 진정 아니겠는가. 맘껏 연애하시라. 혼자 살기도 각박한 세상에 연애는 손해라고? 사람이 굳이 여남으로 구분돼 세상에 나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음양의 도리는 곧 어우러짐이고, 여남 역시 서로 어울러야 한다. 걱정일랑 접어 두고 당당히 “나는 솔로다” 외치며 짝을 찾으시라.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4-04-1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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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운동복 선정성 논란
윔블던 테니스 대회는 역사적 명성만큼이나 엄격한 드레스 코드로 유명하다.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색을 착용해야 한다. 상·하의와 신발, 모자, 양말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순수 흰색이어야 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왕과 귀족들이 옷에 밴 땀 얼룩을 예의에 어긋난 것으로 여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첨단 기술과 패션이 주도하는 현대에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다. 앤드리 애거시는 까다로운 드레스 코드를 비판하며 3년간 윔블던을 보이콧하기도 했다. 2023년에야 여자 선수들에게 어두운색의 속바지가 허용됐다.
스포츠 세계에서 복장 논란은 끊이지 않는 이슈다. 2021년 유럽 비치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는 노르웨이 여자 대표팀이 비키니 하의 대신 반바지를 입고 출전했다. 비키니가 불필요한 성적 시선을 유발하고 움직이기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주최 측이 복장 규정을 위반했다며 선수 한 명당 150유로씩 벌금을 물려 논란에 불을 붙였다. 이에 미국 가수 핑크는 “기꺼이 벌금을 대신 내겠다. 계속 뜻을 밀고 나가길 바란다”며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선수들이 규정된 복장을 갖춰야 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다. 문제는 스포츠 복장 논란이 많은 경우 상업적 이해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2011년 세계배드민턴연맹은 미니스커트 유니폼을 도입하면서 “관객들이 배드민턴 경기에 다시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발표해 구설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한국여자농구연맹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쫄쫄이’ 유니폼을 도입했다 2년 만에 철회했다. 연맹 관계자의 ‘눈요깃감’ 발언으로 여성 선수를 성적 대상화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2024년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공개된 미국 여성 육상팀 경기복이 다리를 따라 골반 위까지 깊게 파인 ‘하이컷 수영복’으로 드러나 성적 대상화를 부추긴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미국 육상연맹이 왁싱 비용을 지불하라’ ‘여성 선수 경기복이 남성보다 옷감이 적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 경기복은 절대 성능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등 비판이 쏟아졌다. 도쿄올림픽에서 원피스 수영복 대신 몸통에서 발목까지 가리는 ‘유니타드’를 입고 출전했던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의 사라 보시 선수는 “모두가 입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경기의 본질에서 벗어난 복장 논란이 스포츠 정신일 리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
2024-04-1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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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무효표'의 표심
“무효(無效)!” 일반적으로 아무런 효력이나 효과가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어떤 행위나 노력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기에 보통 무효는 부정적으로 취급될 때가 많다. 사람들도 대체로 의도적으로 한 자신의 행위가 무효로 처리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무효의 행위를 하는 경우가 영 없지는 않다. 선거에서 무효투표 행위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지난주 치러진 4·10 총선에서 역대 최다의 무효표가 속출해 이를 둘러싼 해석이 분분하다. 애써 투표장까지 가서 투표를 하면서도 유효한 의사표시로 인정받지 못하는 행위를 일부러 벌인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5일 공개한 비례대표 투표 결과를 보면 무효표가 130만 9931표로 전체 투표수의 4.4%를 기록했다.
숫자로 친다면 거대 양당의 비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와 더불어민주연합, 조국혁신당에 이어 4번째로 많은 것인데, 만일 ‘무효표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다면 3석 정도의 의석 확보가 가능한 수치라고 한다. 부산에서도 투표자 194만여 명 중 약 4.8%가 비례대표 선택에서 무효표를 던졌다고 하니, 무효표에 담은 표심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효표가 왜 이렇게 많은지에 대해 전문가들은 거대 정당의 꼼수 위성정당 등 비례대표 정당의 난립으로 유권자의 혼란과 반발이 극대화된 결과라고 대체로 설명한다. 성인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알려진 우리나라에서 글자를 몰라 무효표가 양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면, 어느 정당도 마음 둘 데가 없어 일부러 무효표를 만들었다는 해석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어떤 비례 정당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라는 것이다.
투표 포기와 달리 투표율 계산에 포함되는 무효표를 이처럼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표시로 본다면 정치인들의 분발과 각성을 촉구하는 ‘투표 밖의 투표’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무효표를 던지는 행위가 절반을 넘지 않는 한 정치인들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견해도 병존한다. 무효표의 정치적인 의미 부여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정치적 의사표시든 아니든 간에 어쨌든 갈수록 비례대표 무효표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닌 듯싶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한 표가 무효가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다고 투표를 포기하기도 마뜩잖으니 유권자들만 안쓰러울 따름이다.
2024-04-1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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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오래된 미래 '부부 각방'
부부가 따로 잔다고 하면 으레 “싸웠냐” 따위의 곱지 않은 반응이 돌아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부부 각방’이 ‘국룰’이었다. 태종실록에는 국정 과제로 ‘부부 별침(夫婦別寢)’을 논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들인 세종 시절 성리학자들은 한술 더 떠 남녀유별을 저자에까지 확대하려 시도했다. 신하들이 남녀가 섞여 앉지 않고, 물건을 직접 주고 받지 않는다는 등의 예기 규정을 들어 거리에서 남녀가 같이 걷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청했으나 세종은 현실에 맞지 않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의 행동을 규제하려는 사대부들은 끝내 주거 공간에서 내외를 구현했다. 원래 양반가 부부는 몸채에서 함께 지냈는데, 유교 격식과 법도를 주거에 구현하면서 남성은 사랑채, 여성은 안채와 부엌으로 분리됐다. 식사 때 모여도 남녀가 따로 앉아 식사를 했다.
일본에서는 세분화된 각방 조사가 실시되고 있어 추세를 알 수 있다. 세키스이하우스 주거생활연구소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고령화와 각방은 상관관계가 있다. 55~64세(54.8%), 65~69세 (62.7%)는 과반이 각방을 사용한 반면 25~34세(27.6%), 35~44세(35.1%)는 각방 비율이 낮다. 따로 자게 된 이유로는 ‘코골이·이갈이·잠꼬대’, ‘생활 리듬이 달라서’, ‘선호 온도 등 환경 차이’ 등 숙면 보장이 가장 많았다. 물론 ‘나 홀로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프라이버시 이유도 있었다.
최근 미국에서 숙면을 위해 따로 침실을 쓰는 ‘수면 이혼(sleep divorce)’이 확산된다는 외신이 전해졌다. 미국수면의학회(AASM) 조사에 따르면 부부 3분의 1 이상이 따로 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 9년 차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여배우 캐머런 디아즈도 CNN에 나와 “침실을 따로 쓰는 걸 정상으로 여겨야 한다”며 ‘수면 이혼’ 예찬론자로 나섰다. 굳이 ‘이혼’이라는 표현을 왜 썼나 싶지만, 건강한 수면 생활을 위한 각방론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년 퇴직 이후 부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갑자기 늘어나서 미묘한 스트레스가 생기는 사례를 주변에서 왕왕 접한다. 사실 부부가 함께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자고 있는 동안이다. 수면 시간까지 스트레스가 쌓이고 불면과 피로감이 누적된다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상황에 맞게 관계의 행복감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를 찾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중요한 건 부부 간의 정서적 거리감이다.
2024-04-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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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나의 피시앤드칩스
영국 하면 생각나는 음식이 그나마 ‘피시앤드칩스(Fish & Chips)’다. 대구와 감자 튀김으로 구성된 영국인의 소울푸드(soul food) 피시앤드칩스에는 난민의 역사가 있다. 1492년 스페인 국왕 칙령에 의해 포르투갈로 추방된 10만 명의 유대인이 다시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그들이 즐겨 먹던 ‘바칼라우(대구) 튀김’이 피시앤드칩스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박해와 가난, 내전을 피한 난민의 행렬에 끼여 대구 튀김도 도버해협을 건너게 된 셈이다.
피시앤드칩스 가게는 1860년께 산업혁명 이후 방직 공장이 몰려 도시 빈민 노동자가 많던 영국 런던과 맨체스터에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판 것이 시초였다. 파김치가 되도록 일에 시달리던 노동자에 한끼 힘을 주던 서민 음식이었다. 이후 영국 전역으로 번져 나가며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1950년대 피시앤드칩스에 들어가는 대구를 더 잡기 위해 영국 어선이 아이슬란드 해역까지 난입해 싹쓸이 조업을 벌이다가 국교 단절이란 진통까지 겪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식량이 부족한 영국 국민의 굶주림을 극복하게 한 덕분에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훌륭한 동반자(Good Companions)’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를 함께하고, 이겨낼 힘을 준 전우라는 뜻이었다. 전세를 뒤집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비공식 암호로 활용될 정도였다.
영국인의 소울푸드 피시앤드칩스가 때아닌 장수 음식으로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기네스세계기록(GWR)에 111세로 살아 있는 최고령 남성으로 이름을 올린 영국인 존 티니스우드 덕분이다.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1912년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난 그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특별한 식단은 없다”면서도 “피시앤드칩스를 가장 좋아해 금요일마다 먹는다. 다음에 언제 먹으러 갈까 기다리면서 젊음이 유지된 것 같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소울푸드는 인간의 슬픔과 기쁨,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효과가 있다. 그 음식맛과 함께 향유했던 가족, 친구, 연인과의 아름다운 대화와 식탁의 웃음소리 기억이 인간을 건강하고 젊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도 정구지찌짐, 김치고등어조림, 곰국, 갈비찜, 대구탕, 김칫국, 만두 등 어머니의 손맛만 생각해도 마음이 촉촉해지는 음식이 한둘이 아니다. 나의 피시앤드칩스는 무엇일까. 각박한 세상이지만, 각자 자신을 보듬어 주는 음식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24-04-1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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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1인 세대 1000만 시대
혼자 사는 사람이 10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에 따르면 3월 말 기준 전국 1인 세대 수가 1002만 1413개로 사상 처음으로 1000만 개를 돌파했다. 이는 전체 세대의 41.8%로 다섯 세대 중 두 세대 이상이 혼자 사는 세대라는 이야기다. 2인 세대(24.6%)와 3인 세대(16.8%), 4인 세대(13%)를 압도하는 수준이다.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은 이미 먼 옛날이야기고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을 넘어서 ‘1인 가족’이 대세로 자리 잡은 것이다.
1970년 3.7%에 불과했던 1인 세대가 반세기 만에 대표 세대로 부상한 것은 급격한 고령화와 비혼주의 확산 때문이다.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도시화,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디지털 혁명, 인간의 수명 연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싱글족’ ‘네오 싱글족’ ‘솔로족’ ‘코쿤족’ ‘홀로서기 족’ 등 세분화한 명칭도 특정 사회·경제적 영향을 반영한 결과다. 국회미래연구원의 ‘한국인 행복 조사’를 보면 1인 세대의 행복감은 평균에 비해 전체적으로 낮았지만 젊은 미혼 여성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중년 이혼 남성이 낮았다.
나 혼자 사는 인구의 증가는 주거와 일자리는 물론이고 소비와 여가 등 라이프스타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혼술’ ‘혼밥’ ‘혼쇼’(쇼핑)에 혼자 명절을 지내는 ‘혼명족’을 위한 선물이 인기고 ‘1코노미’ 제품과 서비스가 대세인 시대다. 미국에서는 외롭고 지친 1인 세대를 방문해 따뜻한 포옹(cuddle)과 함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커들리스트’ 회사까지 생겼다. 외로운 사람과 산책을 함께하며 대화를 나누는 ‘피플 워크’와 베이비 시터에 빗댄 ‘실버 시터’ ‘유품 정리인’ 같은 직업들이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즐기며 느끼는 만족감이 쏠쏠할 수 있다. 경제적 여유를 갖춘 화려한 솔로도 적지 않다. 그러나 1인 세대의 증가는 결국 저출산과 고령화의 그림자다. 전체 1인 세대에서 60대 이상 노년층과 30~40대 청년층 비중이 느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인과 청년 1인 세대의 빈곤과 취업난, 고독과 사회적 고립 등 경제·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영국은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했고 일본은 코로나19로 사회적 고립이 심각해지자 고독 문제를 담당할 장관직을 신설했다. 우리도 이제 1인 세대가 대세로 자리 잡은 이상 정책적 고민을 해야 할 때다.
2024-04-10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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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생명 구한 층간소음
‘띵동!/ 앗, 아래층 아줌마다./ 쿵쿵 뛸 때도/ 올라오지 않던 아줌마/ -우리 조용히 놀았는데/ -맞아, 살금살금 다녔잖아/ 이때 들리는 아줌마 목소리/ -쌍둥이들 어디 아파요?/ 너무 조용해서 올라왔어요/ 그 말 듣고/ -우리 안 아파요, 건강해요/ 쿵쾅거리며 뛰쳐나갔다.’
우승경 수필가가 지은 ‘아래층’이란 동시다. 한국동시문학회가 지난 2월 펴낸 우수 동시 선집 〈내가 있잖아!〉에 실려 있다. 윗집 아이들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픈지 걱정돼 와봤다는 아랫집 아줌마. 각박한 세상에서 정말 고맙고 정다운 어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2020년 기준 국내 전체 주택 중 아파트가 63%나 되고, 층간소음 분쟁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여서 더욱 훈훈하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동시의 감동적인 묘사와 달리 현실 속 층간소음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 발생한 소음 갈등은 크게 늘었다. 한국환경공단의 층간소음 상담 건수는 2019년 2만 6257건, 2020년 4만 2250건, 2022년 4만 393건, 지난해 3만 6435건 등이다. 층간소음에 취약하게 건립된 공동주택이 수두룩한 반면 천장에서 발걸음 소리 같은 게 조금만 들려도 신경이 곤두서는 사람과 아래층의 소음 고통에 무심한 이가 많기 때문일 테다.
이웃 간 층간소음 시비는 잦은 다툼을 낳기 일쑤다. 섬뜩한 범죄로 이어질 때도 있다. 층간소음 관련 살인, 폭력 등 5대 강력범죄는 2016년 11건에서 2021년 110건으로 10배 증가했다. 올 1월 28일 경남 사천시 한 빌라에서 50대 남성이 층간소음으로 말다툼을 벌이던 윗집 3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했다가 지난달 29일 재판에서 징역 30년을 구형받았다.
층간소음의 반전 사례가 최근 부산 기장군 기장읍에서 일어났다. 30년 전 지어진 T아파트에 사는 한 주민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도와주세요”란 소리를 들었다. 이어 윗집을 찾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고, 아랫집은 문을 계속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주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리사무소로 달려가 아랫집에 전화해도 받지를 않자 112와 119에 신고했다고 한다. 경찰과 소방이 출동해 아랫집 문을 뜯고 들어간 결과, 독거노인이 안방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장시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 구조 후 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골칫거리 층간소음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소중한 목숨을 살린 셈이다. 단절된 이웃에 대한 애정과 소통의 중요성, 이해와 배려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2024-04-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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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과잠 시위
한 번도 안 입은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입은 사람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우리’임을 확인시켜 주지만 그 무리에 속하지 못한 이에겐 ‘학벌 과시’로 다가오기도 한다. ‘과잠’ 얘기다. 학과 잠바(점퍼)의 줄임말로, 이젠 대학 생활을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가 됐다.
과잠은 1865년 미국 하버드대학 야구팀에서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미국 각 대학의 풋볼, 농구팀으로 확산했고, 1950년대 유행하기 시작해 1980~1990년대엔 하나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에 노래패나 동아리 등을 중심으로 티셔츠를 주문해 입었다. 1990년대부터 몇몇 학생들을 중심으로 과잠을 입다가 2000년대 후반 들어 상당수 학생이 입고 다니면서 과잠은 널리 퍼졌다.
과잠의 장점은 경제성이다. 매일 무슨 옷을 입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하의와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학과나 학부별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대학 새내기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와 반대로 너도나도 과잠을 입어 한때 고등학생들이 즐겨 입었던 노스페이스에 비교될 정도였다. 과잠이 학벌주의를 강화하고, 대학 서열화를 부추긴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게 문제가 되자 몇 년 전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에서는 교명이 들어갈 곳에 EQUALITY(평등)란 단어를 새긴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안티 과잠’ 판매와 펀딩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워낙 일반화돼 부정적 시각이 많이 줄어들었고, 과잠도 마치 대학 교복으로 인식될 정도다.
최근 대학가에서는 과잠이 종종 시위의 수단이 되고 있다. 4·10 총선 사전투표가 진행된 지난 5일 부산대에서는 총학생회장이 학교 배지를 단 채로 모 총선 후보와 사진을 촬영하는 등 부산대 이름 아래 정치 편향적인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과잠 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21일에는 부경대와 한국해양대 통합을 반대하는 부경대 학생들이 학교 대학본부 앞에서 과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진정성이 없다”며 과잠 시위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위의 본래 목적이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인 만큼 시대 변화에 따라 시위 전략과 전술의 변화로 읽힌다.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전통적 시위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측면에서 신선함도 있다. 시위 표출 방식은 시대와 세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시위라고 꼭 진중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론 부드러운 시위가 더 강렬할 수 있다.
2024-04-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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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댐퍼보이
대만 타이베이의 랜드마크 건축물이 2004년 세워진 타이베이101이다. 높이가 무려 509m다. 그런데 이 초고층 건물이 건축계에서 ‘내진 설계의 상징’으로 일컬어진다. 어지간한 지진은 이 건물에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바로 댐퍼라는 장치 덕분이다. 댐퍼는 건물이 흔들려도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일종의 진자 역할을 하는 거대한 추다. 타이베이101의 댐퍼는 윈드댐퍼 또는 댐퍼보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댐퍼보이 이후 세계 각국의 초고층 건물엔 댐퍼 장치가 속속 설치돼 왔다.
타이베이101에 댐퍼보이가 적용된 건 1999년 9월 21일 대만에 닥친 이른바 ‘921 대지진’ 때문이다. 규모 7.7의 당시 지진으로 사망자만 2400여 명에 이르는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지진의 규모도 규모지만, 결국은 인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980년대 이후 대만에 부동산 열풍이 불면서 부실공사가 만연했고, 그 뒷배로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가 있었다. 비난 여론에 드세지면서 결국 2000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 독주체제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대만 정부는 지진 관련 범국가적 대응체계를 수립했다. 컨트롤타워 부처를 신설하고 건축법규를 최대한 강화했다. 신축 건물은 물론 기존 건물의 내진 설계 기준도 지속적으로 높였다. 타이베이101의 댐퍼보이는 그런 배경 하에 도입된 것이고, 뼈를 깎는 노력 덕분에 현재 대만의 지진 대비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지난 3일 규모 7.2의 강진이 발생한 뒤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 대만에 세계가 새삼 놀라고 있다. 7.2는 대만 지진으로는 ‘921 대지진’ 이후 최대 규모로, 원자폭탄 32개가 한꺼번에 터질 때와 맞먹는 파괴력을 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속단하긴 이르지만, 사망자가 10여 명에 불과하다. 25년 전과는 천양지차다. 참고로, 단순 비교가 어렵다고는 하나, 2023년 9월 모로코에서 발생한 규모 6.8의 강진 때는 2100여 명이 숨졌다.
한반도에서도 최대 7.0 규모의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2015년 정부가 발간한 ‘지진 피해 예측 모델’에 이미 “규모 7.0 지진이 발생하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와 수천조 원의 경제 손실이 발생한다”고 언급돼 있다. 예측 후 9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정부가 충분히 대비했으리라. 우리 정부가 대만 정부보다 못한 게 없을 테니 그렇게 믿으려 한다.
2024-04-07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