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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마더와 머더 사이
능력 있는 남편, 착하고 귀여운 아들, 아름다운 엄마까지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모습의 두 가족이 등장한다. 게다가 완벽한 이웃까지 두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셀린’과 ‘앨리스’는 동갑내기 아들을 둔 엄마라는 점에서 통하는 게 많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남편들과도 자주 시간을 보내고, 자식들도 절친이니 서로의 가정사에 비밀이 없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고 싶지만 아들 ‘테오’의 양육 때문에 고민하는 앨리스를 위해 셀린은 서슴지 않고 테오를 돌봐주겠다고 할 정도로 둘은 서로를 진심으로 대한다. 이 모습은 이웃을 넘어 자매처럼 보일 정도다.
언제나 행복할 것만 같던 그들에게 사건이 발생한다. 셀린의 아들 ‘맥스’가 새 둥지를 고치기 위해 2층 난간에 올라서던 중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불행한 사고가 벌어진다. 그런데 맥스의 죽음은 셀린의 가족뿐 아니라 앨리스 가족의 일상도 무너뜨린다. 셀린은 자식을 돌보지 못했다는 데서 깊은 죄책감을, 앨리스는 맥스가 발코니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아이를 구하지 못했기에 복잡한 심경이다. 서로를 애틋하게 챙기던 둘 사이엔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생긴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이 지점부터 달라진다. 따뜻하고 행복한 가족극인 줄 알았더니, 상상치도 못한 잔혹극으로 흘러간다. 그 중심엔 ‘마더스’가 있다.
셀린과 앨리스를 강하게 결속시켰던 존재가 자식이었기에 아이를 잃은 엄마 셀린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는 존재가 바로 엄마가 아니던가. 이는 마더(mother)가 순식간에 머더(murder)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영화는 아이를 잃고 불안정한 심리를 보이는 셀린이 아니라, 앨리스로 초점을 이동하며 어떤 일이 발생할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맥스의 죽음 이후 실의에 빠져있던 셀린은 안정을 취하려 집을 떠났다가 한 달 만에 돌아온다. 그런데 반갑게 맞아줄 줄 알았던 앨리스는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특히 셀린이 테오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앨리스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고 보니 앨리스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셀린이 돌아온 후부터다. 앨리스는 셀린이 복수를 한다고 주장하고, 앨리스의 남편은 그녀가 과대망상에 빠졌다고 다그친다. 아이를 잃은 건 셀린인데, 매일밤 잠들지 못하는 건 앨리스다.
‘마더스’의 색다른 부분은 자식을 잃은 엄마의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절친했던 이웃의 불행이 가깝게 지내던 또 다른 엄마에게 전이된다는 점에 있다. 물론 전이된 죄책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만들고, 신뢰했던 셀린을 경계하고 의심하다 결국 무엇이 현실이고 망상인지 헷갈리는 지경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앨리스와 셀린 두 가족을 조명하며 가족영화처럼 연출했다면, 맥스의 사고 이후 앨리스의 시선으로만 상황을 볼 수 있게 카메라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관객이 전체 상황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불안함을 야기하려는 의도이다.
‘마더스’는 ‘사랑에 대한 모든 것’ ‘채털리 부인의 연인’ 등의 촬영감독이었던 브누아 들롬 감독의 데뷔작이다. 자식을 잃은 셀린과 가족을 지키려는 앨리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감독의 연출은 새로운 게 없지만 영상미는 탁월하다. 스릴러 영화라고 한다면 어두운 조명이 쓰일 거라 예상하지만, 감독은 예상을 깨고 아름다운 영상미로 공포를 자극한다. 한낮의 풍경 속에 스며드는 파스텔톤의 색감들은 눈을 자극하는데 그것이 기이하고 이질적인 공포를 만든다. 더불어 셀린을 연기한 앤 헤서웨이의 엄마 연기는 슬픔과 혼란, 균열과 뒤틀림 등 미묘한 감정들을 잘 표현해내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2024-04-1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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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
무성영화처럼 대사 한마디 없는 데도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영화는 실사 같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3D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주인공인 ‘개’와 ‘로봇’의 모습을 선의 연결로만 완성하는 그림체는 단순하고 어쩐지 무심해 보일 정도다. 그럼에도 캐릭터의 눈빛만으로도 수많은 감정을 전달하고, 국제 무역센터의 두 건물과 브루클린 다리 등을 배경으로 한 뉴욕시 전경을 쨍한 색채로 전달하는 건 실사보다 더 감성적인 느낌을 자아낸다고 확신한다. 또한 개와 로봇이 주인공이지만 만남과 이별, 외로움,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는 데서 이들을 인간으로 바꿔보아도 어색하지 않다는 점도 영화의 특징이다.
스페인 출신의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로봇 드림’은 ‘도그’가 ‘로봇’을 구매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1980년대 뉴욕 맨해튼에서 혼자 사는 도그는 나름 안정적인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매 순간이 외롭다. 창문 밖에는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모여 다들 행복한데 자신만 혼자이기 때문이다. 무료한 얼굴로 TV 채널을 돌리던 때, 도그는 반려 로봇 광고를 보게 되고 홀린 듯 로봇을 주문한다. 기다리던 로봇이 도착하고 이제 도그의 삶도 달라진다. 혼자 했던 모든 것을 로봇과 함께 나누며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간다.
파블로 베르헤르 영화 '로봇 드림'
뉴요커 개와 반려로봇의 우정 담아
만남과 이별로 성장하는 과정 조명
하지만 영화는 도그와 로봇의 행복한 시간은 길게 보여주지 않는다. 물놀이를 하러 간 해수욕장에서 로봇이 고장 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둘은 원치 않은 이별을 하기 때문이다. 도그는 해수욕장에 홀로 남게 된 로봇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쓰지만, 겨울을 맞아 폐장된 해수욕장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감독은 홀로 남은 도그와 로봇의 상황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로봇 드림’이 단순히 우정을 논하는 작품이 아님을 알린다.
도그는 외로워서 로봇을 구매했고 이내 로봇과 친구가 되었지만 그 로봇을 잃어버리면서 다시 외로워진다. 다른 친구를 사귀어 보려고도 하지만 쉽지 않아 도그는 새로운 로봇을 구매하기에 이른다. 함께 하는 행복을 몰랐다면 모르지만 그 기억을 안고 평생 홀로 살 수 없었던 것이다. 폐쇄된 해수욕장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누워있는 로봇은 언제 올지 모르는 도그를 기다리는 중이다. 사실 로봇은 도그보다 훨씬 절망스러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로봇은 외롭다고 말하는 대신 자신에게 찾아오는 새들과 우정을 나누고, 도그와 만나는 날을 꿈꾸며 외로움을 이겨낸다. 로봇의 다리가 잘려 나가고, 고물상에 팔려 온몸의 부품이 분해돼 소멸 직전까지 이르는 고통스러운 순간까지도 말이다.
‘로봇 드림’은 도그와 로봇이 이별한 후 오는 그리움이나 상실감에 매몰되지 않고 다시 사회에 적응해 가는 과정, 그리고 지나간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를 밀도 있게 그려낸다. 분해된 채 고물상에 널브러져 있던 로봇을 발견하고 살린 건 너구리 ‘라스칼’이다. 라스칼의 도움으로 로봇도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하고, 도그도 새 로봇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제 둘은 서로를 잊은 듯 보인다. 하지만 로봇은 도그를 잊지 않았다. 여전히 도그와 닮은 누군가를 만나면 물끄러미 바라보고, 둘이 좋아했던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슬픈 표정을 짓는다.
영화는 누군가와 이별했다고 해서 사랑했던 기억마저 단번에 지워지지 않음을 로봇을 통해 말한다. 로봇은 도그와 행복했기에 가슴 속에 묻어둔 기억을 가끔 꺼내어 본다. 또한 도그와 보낸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의 삶이 충만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물론 도그와의 이별은 아팠지만 그 시간 때문에 현재 라스칼과의 관계도 성숙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도그와 우연히 만난 로봇은 원망과 슬픔을 말하는 대신 진짜 이별을 선택한다. 만남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지만 헤어짐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키며 성숙한 사랑과 관계가 무엇인지 알린다.
2024-03-2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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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나는 어디든 떠날 수 있어!
스크린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서사도 그러하며 정교한 연출, 독특한 미장센, 기괴한 사운드는 영화가 끝나고도 움직일 수 없게 한다. 아마도 주인공 ‘벨라’가 둥지를 떠나 낯선 세상과 만나며 느끼는 감정을 관객들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디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통해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개성적인 영화로 말미암아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논란이 뒤따르기도 한데, 이번 영화 ‘가여운 것들’도 그렇다. 냉소와 풍자, 그로테스크하고 파격적인 영화 세계는 여전하지만 전작들과 다르게 밝고 어딘지 동화적인 느낌도 물씬 풍긴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상하지만 놀라운 영화로 시선을 끈다.
한 여인이 강바닥을 향해 몸을 던지는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가 지나면 천재 과학자 ‘갓윈 벡스터’와 함께 사는 의문의 여인 벨라가 등장한다. 갓윈은 자신의 제자 맥스에게 여성의 몸을 가졌지만 신생아처럼 행동하는 벨라를 연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성실한 청년 맥스는 벨라의 일상을 기록하면서 갓윈이 숨기고 있던 진실을 알게 된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치 하느님인 것처럼는 갓윈과 어쩌다 보니 벨라를 사랑하게 된 맥스, 어른의 몸을 가졌지만 아이처럼 행동하는 벨라의 기이한 동거가 이어진다.
몸만 어른이었던 벨라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세상이 궁금하고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갓윈과 맥스의 보호 속에서 살기를 거부하며,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과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벨라는 생애 첫 선택을 한다. 리스본과 알렉산드리아, 파리로 떠나는 여정 속에서 벨라는 여러 사람과 만나며 사회를 알게 되고 다양한 감정들을 배운다. 호기심과 성적 쾌락에서 오는 즐거움만 알았던 그녀는 이제 에머슨의 시집과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며 고통, 분노와 슬픔, 보수적인 남성 사회의 모순도 알게 된다. 하물며 자신의 몸이 생산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벨라가 자살하려고 했던 이유와 갓윈과 덩컨이 벨라를 대하는 방식은 그녀를 소유물로 여기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이는 19세기 영국이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그로 인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규칙이나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벨라는 이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벨라의 여정이나 모험 그녀의 기이함을 말하는 데 의도가 있지 않다. 영화에는 걷는 법을 몰라 뒤뚱뒤뚱 걷던 벨라가 신체를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팔과 다리를 멋대로 흔들며 춤추는 벨라의 모습은 그녀의 옆에서 틀에 박힌 춤을 추는 사람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관습과 계급이 무너지는 순간이며 영화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장면이다.
벨라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변화도 흥미롭다. 벨라를 소유물로 여겼던 갓윈은 그녀를 그리워하다 병을 얻고, 사랑에 빠질 리 없다고 단언하던 덩컨은 벨라를 끔찍이 사랑하게 되면서 관계가 역전된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다시 갓윈의 저택으로 돌아온 벨라는 자신을 가두고 구속했던 모든 것들에서 스스로 벗어난다. 사실 여성의 성장이나 자유가 섹스나 성매매와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가여운 것들’의 논란은 남아있다. 그럼에도 영화가 주는 매력은 충분하다. 벨라의 여정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모든 것들은 우아하고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저택에 갇혀 있던 벨라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초광각 렌즈를 활용한 장면이나, 흑백 화면이 벨라의 여행을 기점으로 다양한 색채를 띠는 연출은 환상적이면서도 한편의 동화를 연상시킨다. 영화 초반 불협화음의 음악은 거슬리지만 이 역시 벨라의 성장에 따라 점차 안정적인 음악으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2024-03-1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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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
사람들은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세계를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의심하며 머리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는 거부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겐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것에 안심이나 위로를 얻고자 한다. 망자를 달래고 후손에게 좋은 영향을 전하기 위해 굿판을 여는 무당이나 땅의 기운을 찾아다니는 지관, 유골을 수습해 그 넋을 기리는 장의사야말로 음과 양, 과학과 미신 사이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 ‘파묘’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신념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영화는 무당 ‘화림’과 그를 따르는 ‘봉길’이 거액의 돈을 약속받고 미국에 사는 의뢰인을 만나러가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갓난아이가 이유 모를 병을 앓고 있으니 원인을 찾아달라는 것이다. 화림은 자신을 바라보는 의심의 눈초리 속에서 의뢰인이 알려주지 않았던 또 다른 정보를 알아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건 갓난아이뿐 아니었다. 집안 장손들이 모두 겪고 있는 병으로 그들은 환청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화림은 장손들에게 전해지는 이 병이 묫바람 때문임을 전한다. 잘못 쓴 무덤으로 후손들이 해를 입고 있으니 당장 파묘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화림과 봉길은 40여 년간 땅을 파먹고 살았다는 지관 ‘상덕’과 유골을 수습하는 장의사 ‘영근’을 만난다.
상덕과 영근은 거액을 준다고 하니 흔쾌히 파묘에 응한다. 하지만 이내 조상을 모신 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음산한 기운으로 감도는 묘지를 본 상덕은 파묘를 거절한다. 그곳이 절대 사람이 묻힐 수 없는 악지(惡地)임을 눈치챈 것이다. 악지의 묘를 함부로 팠다가 줄초상이 난다는 속설이 불안하다. 하지만 갓난아이의 생사가 걸린 일이라는 화림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상덕은 파묘에 응한다. 이제 상덕, 화림, 영근, 봉림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을 해결해 나가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굿판과 파묘를 동시에 진행한다.
파묘 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네 사람은 의뢰를 마무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이때 상덕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파묘에 참여했던 인부 중 한 명이 동티에 걸린 것이다. 금기를 범한 짓의 대가로 치르게 되는 초자연적 재앙이라고 일컫는 동티. 상덕은 그를 구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음산하고 스산한 땅을 파헤친다. 이 지점에서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고, 관객은 상덕이 땅을 팔 때마다 이야기가 확장되는 것을 본다.
6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무덤에 묻혀 있던 단서들을 따라가며 숨겨져 있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이는 한 편의 잘 짜인 추리물을 연상시키며 공포심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무덤의 가장 밑바닥에는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진실이 묻혀 있다. 진실과 맞닿을수록 공포와 불안이 엄습하지만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성덕과 화림은 무의식적으로 안다. 무속과 풍수, 금기와 미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무덤의 제일 밑바닥에 꼭꼭 숨겨두었던 우리의 아픈 역사가 불려온다. 그리고 너무 오래 파묻혀 있던 그것이 땅에서 나와 도깨비불이 되어 하늘을 떠돌 때 진짜 공포는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과거였음을 깨닫는다. 바로 그 순간 서늘한 공포도 함께 스친다.
장재현 감독은 전작 ‘검은 사제들’에서 한국의 무속 신앙과 서양의 엑소시즘을 결합해 눈길을 끌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한국인이라면 공감할 풍수지리와 무속 신앙, 장례 문화를 매끄럽게 연결해 한국형 오컬트 영화를 완성한다. 영화는 서사뿐 아니라 스산한 분위기의 영상과 기괴한 느낌의 사운드로 생생한 공포감을 갖춘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이름과 차량 번호를 눈여겨본다면 영화의 메시지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24-02-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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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
지금껏 믿어온 신념이나 의지는 쉽게 바꿀 수 없다. 누구나 평생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정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타인과 대화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세상과 두꺼운 벽을 쌓아간다. 점점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못한 채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970년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사립고등학교 바튼 아카데미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폴’이 그렇다.
폴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상사는 낙제를 받은 학생의 점수를 올려주자고 폴을 회유하지만, 폴은 자신이 배운 방식과 신념을 굳히지 않는다. 올곧은 그의 모습에서 폴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바른말을 하지만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학생들에게 고대 로마 격언을 인용해 면박을 주거나 동료들과 말 섞기를 거부하고, 휴가를 몇 시간 앞두고 수업 진도를 나가는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모두가 그를 싫어하지만 폴은 마치 그가 세상을 따돌리는 듯 여유롭게 행동한다.
‘바튼 아카데미’는 1970년 크리스마스에서 새해로 이어지는 연휴를 맞아 학생과 교사들이 휴가를 떠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모두 들떠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학생 앵거스와 아들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급식 담당자 메리, 그리고 학생을 지도하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남게 된 폴까지 평소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3명이 2주간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나이대도 성별도 살아온 생활도 전혀 다른 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접점이라고는 없어 보였던 그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가 외롭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물론 폴은 외로움마저 선택인 척 말하지만 그것이 곧 거짓임이 들통나며, 메리는 아들의 죽고 난 후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것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가족의 곁에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힘든 앵거스까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올수록 외로움은 더 커진다. 결국 학교에서의 생활을 답답해하던 앵거스가 작은 소동을 일으키면서 어색했던 폴과의 관계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앵거스가 그토록 원하던 보스턴으로의 여행을 승낙하고 만다. 이제 영화는 눈으로 뒤덮인 바튼 아카데미를 벗어나 보스턴으로 이동한다.
폴과 앵거스는 함께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스케이트를 타고, 박물관에 들러 현장학습을 하는 등 마치 아버지와 아들로 보인다. 또한 영화 후반부 폴과 메리, 앵거스가 체리 주빌레를 만들거나, 새해를 맞아 폭죽을 터뜨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여느 가족의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서로에게 조용히 스며들어 가는 장면들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히 가족극이나 성장영화로만 설명할 수 없다. 돈 많은 학생들이 대부분인 바튼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학비가 없어 대학에 가지 못하고 군에 입대한 메리의 아들 커티스, 폴의 논문을 표절한 부자 친구, 학교에 기부금을 준다는 이유로 낙제점수를 바꿔 달라고 당당히 요청하는 모습은 불편하지만 눈 돌릴 수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특유의 유머를 가미하면서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한다.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시선으로 인물을 따라간다. 또한 영화는 70년대 감성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메사추세츠에서의 로케이션 촬영, 색감을 통해 완성된 화면의 질감, 인물들의 의상까지 70년대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느껴진다. 60-70년대 주로 들었던 음악도 스토리를 풍부하게 풀어내는 데 힘을 싣는다. 마지막으로 고집스러운 중년 남성 폴을 연기한 폴 지아마티의 연기는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2024-02-1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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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파업과 폭격
영국 북동부의 한 폐광촌. 한때는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활력이 넘쳤지만, 이제는 낡고 허름한 건물들만 남은 이곳에 시리아 난민들이 도착한다. 난민들 때문에 집값이 떨어질 거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자국민의 가난도 구제 못 하는 판에 난민들을 챙겨주는 정부의 태도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난민들과 함께 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한 그들은 서슴지 않고 난민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켄 로치 감독은 적대와 분노, 혐오와 차별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가장 지위가 낮고 힘없는 사람들에서 찾는다. 하지만 그것을 선악이나 약자와 강자의 이분법적인 구도로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TJ’는 ‘올드 오크’라는 펍을 운영하는 남자다. 한때는 폐광을 막기 위해 지역주민들과 연대해 싸웠지만 시위가 길어지면서 생계가 막막해지자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아들은 떠났다. 자살을 결심한 순간 기적처럼 찾아온 강아지 ‘마라’로 삶의 의지를 되찾지만, 그는 예전처럼 마을을 보살피는 일이나 사람들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 적당히 모른 척 눈감고 살아가던 그때, 사진작가를 꿈꾸는 난민 여성 ‘야라’를 만난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탄광 폐쇄로 직장을 잃었던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집과 가족을 잃은 난민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TJ와 야라의 우정을 통해 풀어나간다.
켄 로치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원주민과 난민의 공존 과정 다뤄
쉬운 혐오 대신 어려운 연대 추구
영화에는 두 번의 죽음이 등장한다. 죽음은 견뎌내기 힘든 슬픔이지만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죽음은 큰 개에게 물려 마라가 죽는 사건이다. 실의에 빠진 TJ를 위로하기 위해 야라가 찾아온다. 언제나 자신이 도움을 주었던 야라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음식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천천히 음식을 먹는 TJ의 얼굴이 점차 평온해지는 것이 보인다. 사실 TJ는 난민을 비난하는 친구들의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펍을 찾는 유일한 단골이었기 때문이다. 생활을 위해 참아왔던 그가 마라의 죽음 이후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탄광촌을 지키기 위해 시위했던 그때처럼 난민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할 방법을 찾기 위해 나선다. 연대를 위한 첫 행동은 올드 오크의 폐쇄된 문을 개방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영화에서 여러 번 강조되는 “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를 실천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난민들에게만 물건을 주냐고 원망의 눈길을 보내던 아이들이, 내 것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장담하던 어른들이 함께 밥을 먹으며 일상을 공유하고, 아픔을 나눈다. 원주민과 난민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알아간다. 하지만 차별과 혐오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결국 연대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사고를 치고 만다. 이제 많은 사람이 연대가 불가능하다고 떠올릴 때, 야라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거장 켄 로치는 불평등과 노동계급의 현실,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다루어 온 감독이다. 이번에도 날카로운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던진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거나 감상적 또는 교훈적이라고 말한다. 조금은 느린 전개와 영화의 엔딩이 상투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켄 로치는 현실적인 순간을 그리면서도 영화적 이미지를 놓치지 않는다. 현실을 재현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굳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는 듯 말이다.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는 실제 폐광을 막으려 시위를 벌였던 광부들의 사용한 구호다. 켄 로치는 실존했던 과거와 현재 상황을 오가며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영화적으로 전한다. 그리고 TJ의 말을 빌려 “어려움 속에서 약자를 비난하는 선택은 가장 손쉬운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정답이 없는 싸움을 그만두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이다. 이를 불편하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희망으로 읽을지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판단할 몫이다.
2024-01-3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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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만남과 어긋남
만나다. 잊다, 잊히다. 버려지다, 버리다. 그립다. 어긋나다. 그가 지금 찾고 있는 건 무엇일까? 미련일까, 후회일까. 우리가 지금 만나는 건 절망일까, 희망일까.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상실감. 부재(不在)를 확인하고야 몰려오는 감정들. 여운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지박령처럼 한 자리에서 떠돌다가 그곳에서 길을 잃고만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조희영 감독의 ‘이어지는 땅’은 낯선 땅에서 만나는 사람들,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런던과 밀라노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이국적인 풍경을 통해 서정적인 면을 한층 부각시킨다. 먼저 런던에 살고 있는 ‘호림’은 길을 걷다 우연히 버려진 캠코더를 줍는다. 캠코더를 켜자 영상 속에서 한 여성이 나타난다. 행복해 보이는 여성을 지켜보던 호림은 캠코더를 끄고 다시 길을 걷는다. 호림은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옛 연인 ‘동환’을 만난다. 한국도 아닌 런던에서 옛 연인과 우연히 재회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호림은 어제 만난 사이인 듯 아무렇지 않게 동환에게 말을 건다.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며 지인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게 전화를 빌려 달라는 호림. 동환은 여자친구 ‘경서’를 기다리고 있다며 빨리 가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호림은 동환을 만나기 위해 런던까지 왔기에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 갈 수 없다. 망설이는 호림과 곤혹스러운 동환 앞에 경서가 나타난다. 자신을 동환의 후배라고 소개하는 호림에게 경서는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한다. 호림, 동환과 경서는 그렇게 경서의 선배인 ‘이원’을 만난다.
이원. 그녀는 호림이 주운 캠코더 속에 있던 바로 그 여성이다. 이원의 집으로 향하는 세 사람은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관계를 지켜보는 건 아슬아슬하다. 호림은 결국 동환을 아직 사랑한다며 미련을 보이고 만다. 동환은 그런 호림을 단호하게 밀어낸다. 조금은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을 한 호림이 떠난다고 하자 이원이 배웅을 나선다. 함께 길을 걷던 호림은 버려진 캠코더 속에서 이원을 보았다고 전하고, 영화는 호림에서 이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원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공간도 런던에서 밀라노로 이동한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지만 호림과 이원이라는 인물의 감정은 그대로 연결되고 있어 하나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영화는 이원이 집 근처에서 우연히 여행객 ‘화진’을 만나고, 그와 연인이 되는 과정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섞어가며 풀어내고 있다. 사실 색다를 게 없는 내용이지만 영화의 연출은 이 지점부터 돋보이기 시작한다. 인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걷고 또 걷는다. 도심의 주변부나 공원 혹은 어느 여행지를 끊임없이 걷다 길을 잃기도 한다.
걷는 영화답게 세트촬영보다는 야외씬이 많지만 이는 런던과 밀라노의 아름다운 도시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는 아니다. 장면 장면마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지만, 이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국적인 듯 익숙한 풍경은 사소한 서사에 얽매이지 않게 만들며, 이미지 자체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린다. 이때 영화는 낯선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그곳에 스며들어 감을 포착한다. 그리고 롱테이크와 롱숏으로 완성되는 풍경 속으로 인물들이 천천히 걸어들어올 때 영화의 매력은 한층 더 빛난다.
여유롭고 한가로운 모습으로 밀라노를 걷는 인물들은 그곳에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며 누군가와 헤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잃고, 잊어버리고, 그리워하는지 모르겠다. 어쩔 땐 무얼 잃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흘러가다 우연히 이어지고 있음을 ‘이어지는 땅’을 통해 배운다.
2024-01-1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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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사랑의 여러 모양
굳이 영화의 장르를 따진다면 ‘로맨틱 코미디’다. 그런데 이 영화를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겠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는 아름답고 멋진 배우도 없고, 그 흔한 ‘사랑해’라는 대사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다. 로맨틱 코미디와 어울리는 낭만적인 풍경이 아닌 쓸쓸하고 황량한 도시 헬싱키를 배경으로 외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달달한 사랑 영화는 아니지만, ‘안사’와 ‘홀라파’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리를 보며 사랑이란 이런 모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화의 첫 부분은 ‘안사’와 ‘홀라파’ 두 사람이 놓인 상황을 각각 보여준다. 먼저 마트에서 일하는 여자 안사가 표정 없는 얼굴로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물건들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한 남자가 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안사를 감시하고 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안사가 라디오를 켠다. 대사가 없던 영화에서 처음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군의 전쟁을 보도하는 뉴스 소리이다. 그리고 다음날 안사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물을 가져가는 것을 들켜 마트에서 해고당한다.
다음으로 카메라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노동자 ‘홀라파’의 뒤를 따른다. 홀라파의 일상도 안사처럼 무료하기 짝이 없다. 그는 담배와 술, 노동의 반복 끝에 침대 하나 놓인 공동숙소로 돌아와 몸을 눕힌다. 홀라파 또한 전쟁 뉴스가 보도되는 라디오를 배경음 삼아 잡지를 읽는다. 두 사람은 타국의 전쟁을 끊임없이 듣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반복되는 뉴스는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여전히 끝나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롭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또한 전쟁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안사는 해고를 당하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몇 군데의 일자리를 전전하다 여자가 하기엔 힘든 일자리를 얻게 되고, 홀라파는 술 문제로 일자리를 잃고 힘든 상황에 빠진다. 세계의 바깥에서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도 전쟁 같은 일상이 이어지고 있음을 영화는 말한다.
친구와 함께 간 클럽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나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헤어진다. 이후 우연히 다시 만나면서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 함께 보는 영화가 짐 자무쉬의 좀비영화 ‘데드 돈 다이’라니 묘하다. 좀비물을 집중해서 보는 모습에선 실소가 터진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누는 짧은 대사들은 너무나 진지해서 유머러스하다. 1980년대가 배경일 것 같은데 벽에는 2024년 달력이 떡하니 걸려 있는 것도 그렇다. 핸드폰이 없어서 집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주는 아날로그적 방식은 낯설지만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말도 안되는 상황을 수긍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부리는 마법이 아닐까.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2017년 ‘희망의 건너편’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가 2023년 복귀했다. 감독은 이 영화에 관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전쟁에 시달리던 중,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주제에 관해 쓰기로 결심했다고 말하며 사랑에 대한 갈망과 연대, 희망, 타인에 대한 존중, 죽음 등이 담긴 영화라고 했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마음이며, 위로를 건네는 말 한마디임을 영화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뿐만 아니라, 안사가 해고될 때 그 곁에서 그녀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하던 동료들과 홀라파가 데이트를 나갈 때 자신의 옷을 선뜻 내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낙엽이 지고 이제 날은 더 추워지겠지만 진정 필요한 것은 사랑과 공동체임을 전한다. 그래서 안사와 홀라파가 낙엽이 휘날리는 길을 걷는 마지막 장면은 외롭고 쓸쓸하지 않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더없이 감동적이다.
2024-01-0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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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괴물은 누구인가?
‘괴물’은 슬프고도 무서운 영화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혹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몰랐다’는 말로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니 실은 영원히 모른 채 끝나버릴 것만 같기에 더 무섭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는지,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는지,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끝끝내 돌아보게 만드는 이 영화는, 결국 나도 누군가에게 괴물이었음을 실토하게 만든다.
영화 ‘괴물’은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와 건물을 집어삼킨 불길을 보여주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때 무언가를 빙빙 돌리며 걷던 한 아이가 멀찍이 떨어져서 무심히 화재 현장을 바라본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화재는 모두를 소란스럽게 만들지만, 왠지 아이는 홀로 태연해 보인다. 그리고 곧 알게 된다. 걷잡을 수 없는 이 화재가 누군가의 일상을 불태우는 동시에 하나의 사건 속으로 진입시키는 장치임을 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괴물'
엄마, 선생님, 아이 시선으로
하나의 사건 다르게 풀어내
'누가 진짜 괴물인가' 질문 던져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미나토’를 키우는 ‘사오리’는 아들이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미나토의 몸에 생긴 상처를 발견한 사오리는 그 상처가 담임 선생 ‘호리’의 폭력으로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오리는 곧장 학교로 가 항의를 해보지만 교장은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적인 사과만 반복하고, 담임 호리는 억울한 누명이라고 항변할 뿐 문제를 해결하려 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이후 엄마의 노력으로 호리는 학교에서 해고되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선 화재 장면을 한 번 더 보여주며, 화재가 있던 날 호리가 연인과 집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때 반 아이들을 만났으며, 바로 그 날부터 일상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호리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앞서 사오리가 보고 들은 것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정말 호리가 미나토에게 폭력을 가했는지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영화는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엄마의 시선과 선생의 시선에 이어서 아이들의 세계, 아이들이 감추고 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프닝에서 화재 현장을 바라보던 아이는 ‘요리’였다. 놀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가 있는 집. 집도 학교도 요리를 보호하지 못한다. 그런 요리를 이해하고 위로를 건네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미나토다. 숲속 막다른 길에 멈춰선 오래된 기차를 아지트 삼아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비로소 웃는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토록 되뇌었던 “괴물은 누구게?”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무너지고 만다.
바로 여기서 영화 속 인물들이 조금씩은 괴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고통으로 밀어 넣는 엄마, 소문을 진실인 양 내뱉는 사람들, 제 안위를 위해 연인을 버리는 여자,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들, 폭력을 저지르는 아버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음을 그들을 통해 확인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괴물의 얼굴을 지녔다고 생각했던 학교 교장이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 손녀의 죽음까지 이용하던 교장은 미나토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를 건네는 유일한 존재로 등장한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적당히 거리를 두며 어떤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연출을 선보인다. 결정과 선택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뒤로 아이들이 숲속을 자유롭게 달린다. 유독 반짝거리는 이 엔딩은 보는 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허나 확실한 건 아이들이 웃고 있지만, 괴물들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우리는 웃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슬프고도 무섭다.
2023-12-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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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정의가 무능이 되는 순간
우리는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언젠가는 12.12 사태로 불렸던 이 역사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반란’으로 기록된다. 어떤 이에겐 혁명이었지만, 지금은 반역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역사는 누가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확인한다. 역사에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군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군사 반란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단 몇 줄로 요약된 역사 속 시간을 암기했지만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다시 우리 앞으로 불려 왔다. 책에서 배운 내용보다 더 실감 나고 입체적으로 말이다.
‘비트’, ‘무사’, ‘아수라’ 등의 선이 굵은 영화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의 신작 ‘서울의 봄’은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린 영화다. 이미 영화를 본 관객들은 지나간 역사에 분노를 느끼고 또 누군가는 신랄하게 조소하였다. 그러니까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스펙터클도 정교한 기술력도 아닌 바로 우리의 ‘역사’였다. 역사 자체가 스포일러이기에 영화는 예상가능한 수순으로 흐른다. 그런데 ‘서울의 봄’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루는 데도 분노가 들끓어 오른다. 관객들도 스트레스를 상승시키는 영화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분노 게이지를 상승시키는 이 영화가 모처럼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놓고 있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직후를 오프닝으로 잡는다.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 분)은 계엄법에 따라 수사 책임자인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면서 권력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를 견제하려는 계엄사령관 정상호(이성민 분)는 책임과 사명감이 있는 군인 이태신(정우성 분)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한다한다.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잡은 전두광과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여러 번의 거절 끝에 보직을 맡은 이태신의 신념이 서로 대치되면서, 영화가 두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흘러갈 것임을 예상케 한다.
그리고 반란의 주범 전두광에게는 막강한 사조직 ‘하나회’가 버티고 있다. 육사 출신으로 구성된 조직은 전두광이 반란을 모의하고 돌진하는 동력이 되어준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역사를 전면에 배치하고 있지만 어떤 에피소드는 허구에 기대어 있기도 하다. 또한 누가 봐도 전두환과 노태우이지만 감독은 이들 인물을 역사라는 한정된 틀 속에 가두지 않기 위해 가명을 쓴다. 그런데 하나회는 실제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하나회 구성원들의 반란 과정을 공들여 보여주는 이유도 조직의 실체를 파헤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 보인다.
더불어 영화는 진압군 이태신과 반란군 전두광의 대립각을 그리지만 선과 악이라는 단순구도로 배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원칙과 신념, 권력욕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움직인다. 또 대부분의 영화에서 한쪽이 악랄하다면 다른 한쪽은 신념이나 정의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서울의 봄’은 하나회의 비열함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대립각을 세우는 진압군을 나약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게 그린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자기 안위를 지키는 일뿐이다. 권력욕과 찌질함으로 똘똘 뭉친 이들 무리에서 이태신이라는 존재는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별을 몇 개씩 단 그들이 최후의 보루 육군본부를 버리는 순간, 관객은 반란군보다 진압군에 더 분노한다. 진압군의 결정은 서울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던 이태신의 신념도 무너뜨린다. 결국 반란군을 제압하지 못한 이태신은 부하들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능한 지휘관 밑에서 고생하느라 수고 많았다”는 말을 남긴다. 유일한 정의가 무능이 되는 순간, 한국의 긴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2023-12-0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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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하나의 모습일 수 없는 우리도 '괴인'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두려워 내가 먼저 선수를 친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하대하고, 당장 일거리가 없어 걱정이지만 친구에게 돈 좀 버는 척 온갖 허세를 떨어본다. 딱 보아도 별로 다가서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다. 그런데 또 이 사람 임산부에게는 먼저 계산하라고 양보할 줄 알며, 자신의 차를 망가뜨린 범인의 딱한 사정을 안 후 수리비를 받지 않는 선의도 베푼다. 남자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때쯤 생각한다. 나에게도 내가 모르는 얼굴이 있는 것을 말이다. 어느 때는 친절하지만, 마음이 뒤틀리는 때는 한없이 심사가 꼬여 모든 일에 무관심해지는 등의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런데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그와 나만의 이야기이겠는가.
이정홍 감독의 ‘괴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다. ‘괴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영화 속 인물도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영화 자체도 정의를 내릴 수 없을 만큼 독특한 연출을 자랑한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으며, 의도적으로 서사를 뚝뚝 끊는 편집까지 꽤 긴 러닝타임임에도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알 것 같은데 모르겠는 이상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기홍은 목수다. 자기 말로 하면 노가다 중 그나마 엘리트인 인테리어 목수지만 지금 하는 피아노학원 공사가 끝나면 백수로 돌아가 일감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다. 그런데도 그는 선불을 요구하는 나이 많은 선배에게 쌍욕을 하고, 싼 자재로 대충 공사를 마감해도 아무도 모른다며 함께 일하는 친구에게 되레 큰소리친다. 노가다 판은 다 그렇게 일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사를 의뢰한 피아노학원 선생에게 반말에 무례한 부탁까지 하더니, 지분거리는 문자까지 보낸다. 이런 진상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기홍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생각만큼 일감은 늘지 않고 그 사이 처세술만 배운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기홍은 자신의 자동차 지붕이 찌그러진 것을 발견한다. 기억을 곱씹다가 공사 현장이었던 학원 근처에 주차해 놓았을 때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기홍은 자신이 세 들어 사는 집주인 남자 ‘정환’과 함께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서 기홍만 괴인(怪人)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환은 집주인이라는 이유로 기홍의 사적인 공간에 불쑥 등장하며 술을 권하거나 밥을 같이 먹자는 둥 친절을 베풀지만 과해서 불편하다. 정환의 아내인 ‘현정’은 기홍에게 무심한 듯 굴지만 동생처럼 챙겨주는 게 영 이상하다. 게다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하나’는 누군가의 공간에 무단침입해 잠을 청하는 인물로 역시나 특이하다. 기홍을 포함한 이들은 모두 친숙한 얼굴로 누군가의 삶에 불쑥 침범하는 것이 묘하게 닮아있다. 영어 제목을 ‘a Wild Roomer’라고 정한 이유가 이해 간다.
‘괴인’은 어떤 사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인물들과 얽히고설킨 관계를 그린다. 또한 우리는 어떤 사람과 만나고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일 수 있음을 밀도 있게 추적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와 상황에 따라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행동과 태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가족과 있을 때 기홍은 무뚝뚝한 아들이다. 친구들과 있을 때, 일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기홍은 모두 다른 모습이다. 괴인처럼 보였던 기홍이 왠지 익숙해 보이는 순간이다.
‘괴인’에서 놀라운 점은 기홍의 친구인 ‘경준’ 역할을 제외하고 연기 경험이 전무한 비전문 배우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기홍은 감독의 삼십년지기인데 영화 속 설정처럼 진짜 목수로 감독을 위해 연기에 도전했다고 한다.
2023-11-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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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정의는 어디 있는가?
사회 부조리와 공권력 횡포. 우리가 언제든 겪을 수 있지만, 쉽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영화로 만든 정지영 감독이 ‘소년들’로 돌아왔다. 24년 전 삼례 나라슈퍼 할머니 살인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2007년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을 소재로 한 ‘부러진 화살’과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다룬 ‘블랙머니’를 잇는 실화 3부작 중 하나다.
1999년 일어난 사건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답답함을 다루고 있기에 이 소재로 ‘소년들’을 만든 건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언론에서는 연일 예상치 못한 끔찍한 사건이 보도되고, 물가는 무섭게 올라가는 현실이다. 영화마저 진지하고 무겁다면 관객들은 어떤 선택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999년, 비 내리는 어느 밤 지방 소읍 작은 슈퍼마켓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한다. 약간의 패물과 현금을 훔쳐 가는 절도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었다. 청테이프로 입이 막힌 할머니가 질식사한 살인사건이 되고, 조용했던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그런데 흉악한 범인이 누구일지 궁금해하기도 전에 용의자들이 검거되면서 사건은 종결된다. 하지만 사건은 예사롭지 않다. 경찰이 밝힌 3인조 강도 살인자들이 아직 앳된 소년들이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소년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전에 그들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사건은 더 이상 사람들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후 소년들을 용의자로 검거했던 최우성 형사는 승진하고, 이 경찰서에 베테랑 형사 황준철이 반장으로 부임한다. 바로 그날 준철은 소년들이 범인으로 종결된 사건의 진범이 있다는 수상한 전화 한 통을 받으며 재수사에 돌입한다.
수사를 시작하자마자 준철은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된다. 소년들이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때문임을 밝혀낸다. 준철은 진실을 알리고자 하지만, 이 사건은 무려 17년 동안 공론화되지 못한다. 권력을 등에 업은 최우성이 준철을 좌천시키면서 그의 입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소년들과 형사 준철을 중심으로 1999년과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16년을 긴장감 있게 오간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헤치는 동시에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려는 의도다. 그로 인해 영화의 전반부는 수사물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후반부는 재심 과정들을 세밀하게 풀어낸다.
자신의 실적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밝히길 두려워하는 권력, 진실이 따로 있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년들 말을 들어주지 않는 이웃, 권력에 힘없이 무너지는 개인들. 영화 ‘소년들’을 보고 있으면 현실이 더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기사만 검색해도 결론을 알 수 있는 실화라 새롭진 않아도 정지영 감독의 힘 있는 연출, 억지 감동이 아닌 담백한 연출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에 빠져들게 만든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소년들이 진실을 찾을 수 있도록 응원하고 싶어진다.
영화는 실화가 바탕이지만, 어느 정도 픽션이 존재한다. 설경구가 연기한 황준철 반장은 실제로는 없던 인물이지만,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수사했던 황상만 형사가 모티브가 됐다고 한다. 감독은 사건의 양상이 비슷하고, 사건을 풀어갈 인물이 필요하니 영화에 투입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밝히려는 형사가 실제로는 없었지만, 다른 살인사건 현장에는 있었음이 다행스러운 건지 분노해야 할 일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아직도 이런 일들이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답답할 노릇이다.
2023-11-0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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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소년은 자라야 한다
방문을 여는 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벌벌 떨리는 소년. 가정폭력에 시달려 온몸이 멍투성이인 소년. 새아버지가 데려온 여동생이 있을 땐 그나마 덜 맞아서 좋다는 소년. 남편의 폭력에 침묵하는 엄마를 원망할 법도 한데, 소년은 끔찍한 집에서 엄마를 빼내는 게 유일한 꿈이라고 한다. 그러나 돈 벌기는 쉽지 않고, 꿈은 점점 멀어질 뿐이다. 연규는 슬프고 화도 나지만 그것마저도 사치라는 듯 감정을 잃어 간다. 그의 나이 겨우 18살이다.
김창훈 감독의 ‘화란’은 누아르 영화답게 어둡고 우울하다. 마치 불행의 끝으로 인물들을 몰아가고 있는 듯 폭주한다. 그 끝에 바로 ‘연규’가 있다. 연규는 희망도 미래도 가질 수 없는 동네인 명안시에서 태어나 한 번도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열성인 것은 돈을 버는 일이다. 새아버지 눈을 피해 돈을 모으는 이유는 엄마와 함께 네덜란드로 떠나기 위해서다. 연규가 알아본 네덜란드는 모두가 똑같이 평등한 나라,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화란은 네덜란드를 뜻하는 한자어(和蘭)이자 재앙과 난리라는 뜻(禍亂)도 지니고 있다. 이중의 의미를 지닌 이름은 연규가 희망이 아닌 난리와 재앙을 맞게 될 것임을 예상케 해서 씁쓸하다.
김창훈 감독 누아르 영화 ‘화란’
폭력에 노출된 소년이 주인공
굴레에서 벗어나 떠나는 이야기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
영화 오프닝은 연규가 학교 운동장에서 누군가의 머리를 돌로 내리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폭력이 의붓 여동생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음에도 연규는 합의금을 구해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가만 보니 연규는 집에서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학교에서는 보호해 주는 이가 없다. 이때 ‘치건’이 아무런 조건 없이 합의금을 건네주자 연규는 의심부터 한다. 그 누구도 그에게 선뜻 호의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건은 폭력조직 중간 보스로 오토바이를 훔쳐 되파는 사채업을 하고 있다. 평소에 일말의 양심도 없어 보이는 그이지만 연규에게는 다르다. 연규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형이라고 부르라며 미소 짓는다.
치건은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연규에게서 확인한다. 치건도 줄곧 명안시에서 자랐으며 가정폭력으로 범죄의 길로 들어섰고, 이제는 벗어날 생각조차 못 하는 남자다. 그러고 보니 치건도 연규처럼 희망 따위 가질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치건이 연규와 다른 게 있다면 현실의 끔찍함을 잘 알기에 양심도 아픔도 없어졌단 점이다. 그런 그가 연규를 만나며 잃어버렸던 시절을 기억하게 된다. 치건이 연규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봤다면, 연규는 치건에게 아버지의 정을 느끼며 보호받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뒤틀리고 폭력적인 환경에 놓였던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치건을 만났음에도 연규의 불행한 사연들은 덕지덕지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가정폭력, 학교폭력, 사채 사기, 살인과 배신 등 비정한 세계와 폭력은 여전하다. 소년은 그곳에서 혼자다. 누군가를 믿었지만, 누군가는 지켜주고 싶었지만 잔혹한 세계는 소년이 무언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짓눌리기 바쁘다. 감정을 잃은 소년은 이제 ‘악’만 남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든다. 소년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자라지 못한다. 그를 둘러싼 세계는 그를 자랄 수 없게 만든다.
영화는 벗어날 수 없는 치건과 떠나는 연규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 결말은 주어진 상황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택한 수동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연규의 마지막은 의미 있다. 복수할 수 있었던 순간에 폭력으로 응징하지 않고, 명안시를 떠나는 그의 선택은 어딘가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영화 ‘화란’은 희망을 꿈꾸는 소년의 성장을 방해하는 건 도대체 누구인지 아프게 묻는다.
2023-10-2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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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눈길을 끄는 한국 영화들
긴 연휴가 끝나자마자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열렸다. 영화제는 개최 직전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영화제 소식에 귀 기울이며 실망과 기대감으로 10월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영화제는 역시 영화로 말한다.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아키 카우리스마키,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여전히 현역에서 뛰며 이름만으로 눈부신 켄 로치, 이탈리아 근현대사·정치·사회를 소재로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는 거장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까지 모두 주목받는 작품으로 돌아왔다. 영화제에서 이들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건 삭막한 현실에서 발견한 오아시스다. 영화제가 개최되는 도시에 산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다. 세계 각국의 영화들을 언제 또 이렇게 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개인적인 일로 올해 BIFF에서는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 출품된 영화 10편을 관람했다. 뛰어난 작품성과 독창적 비전을 지닌 한국 독립영화 최신작을 선보이는 섹션이다. 한국 영화의 미래를 확인하는 장이라 놓칠 수 없는데 전반적으로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 골고루 배치됐다. 딸의 동성 연인과 함께 살게 된 엄마가 겪는 감정을 그리는 ‘딸에 대하여’, 농촌 마을에 살고 있는 청년 민우와 가족의 이야기를 한 편의 시(詩)처럼 아름답고 유려하게 풀어내는 ‘지난 여름’, 지방 중소기업 4년 차 대리가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만드는 일에 투입되면서 발생하는 갈등을 무게 있게 다루는 ‘해야 할 일’ 등의 한국 영화는 현실을 깊게 살피면서도 묵직한 화두까지 던지고 있었다.
그중 정범, 허장 감독 영화 ‘한 채’도 눈길을 끌었다. 영화는 말없이 캐리어를 끄는 남녀가 어느 허름한 모텔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프닝부터 궁금증이 일게 된다. 그들의 관계를 미처 파악하기 전, 방금 만난 여성이 지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부녀 관계임을 알게 된다. 그러다 딸 ‘고은’과 아버지 ‘문호’가 이혼하고 딸을 키우는 ‘도경’을 만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흘러간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기 위해 고은과 도경이 문서상으로 결혼을 하면서 그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면 도경과 문호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픈 고은을 이용하는 고약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단순한 방식을 차용하지 않는다.
문호는 욱하는 성질로 손해를 보는 타입이지만, 딸과 살기 위한 방법들을 강구한다. 처음엔 고은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과 태도를 보였던 문호는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닫혔던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 자식에게 느끼는 감정 또는 연민처럼 보인다. 어느 때는 문호와 도경이 더 교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채’는 무언가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생략과 공백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도리어 이 생략과 공백은 영화의 리듬과 미학을 만들며 인물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하게 만드는 영화적 긴장감을 발생시킨다.
아파트 청약으로 맺어진 그들의 관계는 쉽게 깨질 수 있다. 특히 청약에 걸려도 아파트의 분양가를 해결하지 못하는 그들이기에 아파트를 가진다는 건 꿈 같은 일이다. 그런데 문호와 고은은 집 없이 떠도는 상태고, 도경은 반지하 방이 있지만 배달기사와 대리기사 일로 밤낮을 쉬지 못하는 플랫폼 노동자로 집 밖을 떠도는 인물이다. 그들이 집을 가진다고 해도 집 안에서 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진정으로 필요한 건 집이 아니라 집 속에 살고 있는 가족처럼 보인다. 밥을 함께 먹고 걱정을 나누는 관계의 가족 말이다. 영화의 결말은 비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서로를 염려하며 함께 있는 모습은 해피엔딩처럼 느껴진다.
2023-10-1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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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다양한 장르의 혼종, '천박사 퇴마 연구소'
아무리 미신이라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해도, 어머니는 한 귀로 듣고 또 한 귀로 흘렸다. 힘든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어머니는 그곳으로 향했다. 새해에는 신년이라고, 가족 중 누가 아프면 괜히 일이 생길까 노파심에 찾았다. 그곳에서 받아온 부적을 지갑에 넣어두라는 어머니에게 구시렁거리면서도 나는 해마다 그걸 고이 접어 보관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역사는 오래전부터 의학이나 과학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샤머니즘에 기대어 온 건 아닌가 싶다. 그게 어디 우리뿐인가. 이탈리아 감독인 비토리아 데 시카의 영화 ‘자전거 도둑’에서도 주인공이 생계를 위해 꼭 필요한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결국 점집을 찾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추석을 앞두고 개봉한 ‘천박사 퇴마연구소:설경의 비밀’도 한국인이라면 낯설지 않은 무속신앙과 결합해 한 편의 판타지 영화를 완성한다. 영화는 무속을 믿지 않는 ‘천박사’가 가짜 퇴마의식을 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귀신을 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딱히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닌 천박사. 그는 귀신을 부르는 건 인간의 약한 마음과 머리라고 생각하며, 파트너 ‘인배’의 기술빨과 자신의 현란한 입담, 사람을 꿰뚫어 보는 분석력과 통찰력으로 퇴마의식을 해결해 왔다. 하지만 현재 퇴마 연구소의 재정 상태는 엉망으로 당장 사무실 관리비도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바로 그때 돈다발을 들고 ‘유경’이 찾아온다.
유경은 자기 집에 가서 문제를 해결해 주면 수임료를 더 주겠다는 기묘한 제안을 하고, 천박사는 바로 그 길로 인배와 유경의 집으로 향한다. 영화는 유경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일들을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유경의 사건을 쫓을수록 천박사는 이 일이 자신과 별개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밝고 유쾌해 보였던 그에게 슬픈 가족사가 숨겨져 있었으니, 천박사는 바로 대대로 마을을 지켜 온 당주집 장손이었다. 게다가 그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무당이었지만, 강력한 악귀를 봉인하다 원인 모를 죽음에 이르렀다. 이후 천박사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홀로 그 악귀를 찾고 있었다.
추석 연휴를 노린 영화에 걸맞게 가족이 함께 보기 좋다. 그런데 이 영화는 천박사 혼자 극을 이끌어 가기는 다소 부족하다. 특히 오컬트 영화를 지향하고 있기에 악의 요소도 뚜렷하게 드러나야 하는데, 만약 악귀 ‘범천’이 없었다면 영화는 천박사 매력에만 치우친 영화가 됐을지 모른다. 범천은 천박사의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쳐놓은 결계에 갇혀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신세다. 그렇다고 범천은 가만히 묶여 있지 않다.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영력을 모으며, 강력한 악귀로 진화하기 위해 유경을 필사적으로 뒤쫓는 면모를 보인다.
범천은 인간의 몸을 옮겨 다니며 영력을 쓰는 악귀다. 신출귀몰하고 위협적인 능력으로 ‘천박사’ 일행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특히 그가 부리는 악에 씐 사람들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해 마치 한 편의 좀비물을 보는 것도 같다. 이처럼 영화는 신점과 무당, 귀신을 가두는 부적인 ‘설경’부터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 칠성검, 귀신을 감지하는 놋쇠방울, 악귀를 뒤흔드는 북소리 등 한국적 설정을 가미한 오컬트와 액션, 코미디와 판타지, 미스터리물까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어 무겁지 않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오락물이다.
웹툰 ‘빙의’가 원작인 ‘천박사’는 연출보다는 다른 데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볼 수 있게 된 강동원의 매력, 강력한 카리스마를 선보이는 허준호, 최근 독보적인 연기력으로 시선을 모으는 김종수가 눈길을 끈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이동휘와 이솜, 짧지만 굵은 연기로 웃음을 주는 박정민까지. ‘기생충’을 본 관객이라면 단번에 웃음을 주는 배우들 조합도 볼 수 있다. 그들의 연기 앙상블이 더해져 한층 신명 나는 굿판이 펼쳐진다.
2023-09-27 [1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