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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선거 후 폐현수막
선거가 끝나기를 학수고대했다. 아파트 진출입로에 선거홍보 현수막이 수없이 많이 걸려 있어서 운전할 때 지나가는 보행자와 마주 오는 자동차가 잘 안 보였기 때문이다. 선거날 아침 투표를 하고 나오며 ‘이제 내일이면 현수막이 사라지려나’ 기대했건만 어느새 당선감사 인사와 결과승복 현수막이 선거홍보 현수막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현수막을 바라보다 문득 이 많은 선거 현수막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선거 현수막의 처리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선거철에 폐현수막이 어느 정도 발생되는지를 알아보았다. 환경부에 따르면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약 260만 장, 1557톤에 달하는 현수막이 수거되었고, 2018~2022년 5년간 선거철에 발생한 폐현수막은 1만 3985톤에 이른다. 특히 올해는 정당 현수막 관리를 강화하는 옥외광고물법이 시행됨에 따라 폐현수막이 더욱 급증할 것이라고 한다.
해마다 수천 톤, 처리 땐 환경 오염
재활용도 어려워 해결책 마련 시급
입법 통해 선거홍보 현수막 규제하길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이처럼 많은 폐현수막이 발생하고 있는데 폐현수막은 과연 어떻게 처리되고 있을까. 환경부에 따르면 2022년 대선 기간 발생한 폐현수막 가운데 50.5%는 소각, 24.9%는 매립, 24.6%는 재활용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현수막을 소각하거나 매립할 때 환경이 심각하게 오염된다는 사실이다.
기후변화행동연구소에 따르면 현수막 1장을 처리할 때 온실가스 6.28kg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는 25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1년 동안 흡수하는 탄소량과 같다. 만약 이번 총선에서 발생한 폐현수막이 지난 지방선거와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선거 후 소각 과정에서 약 8164톤의 온실가스가 배출되게 된다. 매립 역시 환경을 오염시킨다. 현수막은 대체로 플라스틱 합성수지로 제작되는데 이러한 성분은 매립을 해도 분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폐현수막 재활용을 늘리기 위해 폐현수막 재활용 지원사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행정안전부는 지자체에서 수거한 현수막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총 15억 원의 사업비를 지급할 계획이며, 환경부는 폐현수막 새활용(upcycling) 기업과 폐현수막으로 제작 가능한 물품 목록, 생산 일정 등을 안내하여 지자체와 기업 간 연계를 도울 예정이다. 이를 통해 환경오염을 줄이고, 사회적 약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폐현수막 재활용의 취지는 좋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곧 환경오염을 줄이는 올바른 해법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일단 재활용 가능한 현수막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 현수막의 경우 후보자 얼굴 및 비방용 문구 등이 인쇄되어 재활용이 쉽지 않다. 그리고 거리에 오랜 시간 걸려 있어 오염이 되거나 훼손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재활용 가능한 현수막을 찾기가 힘들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재활용 가능한 폐현수막을 선별하여 재활용한다고 하더라도 현수막 원단 및 잉크가 화학제품이므로 생활용품으로 재활용할 경우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 또 재활용품의 디자인과 질이 좋지 않아 장바구니와 같은 폐현수막 재활용 제품을 무료로 제공해도 사람들이 가져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다소 거칠게 비유하자면 폐현수막 재활용은 하나의 쓰레기를 또 다른 모양의 쓰레기로 가공하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폐현수막 재활용은 이른바 ‘플라스틱 좀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재활용을 면죄부 삼아 더 많은 현수막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눈앞의 문제에 대한 근시안적 대책 마련이 아니라 문제의 발생 원인을 살펴 근본적 방지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먼저 환경오염이 문제이므로 환경오염을 발생시키지 않는 친환경 현수막을 사용한다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가령 옥수수 전분이나 사탕수수에서 실을 뽑아 만든 식물성 원단으로 현수막을 제작하면, 매립 후 6개월이면 생분해가 되어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방법은 선거홍보에서 현수막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도시미관을 해치고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현수막 대신 영구적 사용이 가능한 디지털 현수막을 도입하거나 독일과 같이 선거부스를 활용하여 홍보하면 어떨까.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선거문화 풍토에서 각 정당이 자율적으로 이러한 방안을 실행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당 스스로 입법을 통해 선거홍보 현수막 규제 방안을 만들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여야 모두 총선에서 탄소중립에 한목소리를 낸 만큼 22대 국회의 기후환경 분야 1호 법안으로 선거홍보 현수막 금지법이 발의되길 소망해 본다.
2024-04-1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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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4월에 내리는 꽃비가 우리에게 묻는다
어김없이 찾아온 봄소식에 연일 꽃구경을 가고, 꽃 사진을 찍어 올린다. 마치 조금이라도 멋진 사진을 올리기 위해 경주라도 하듯 사람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게시하는 꽃들을 보고 있으니, 진짜 꽃구경에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사진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이렇듯 봄은 우리에게 설렘과 반가움을 주는 계절이다. 4월에 피는 꽃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게 벚꽃이다. 어디에 피든 아름답고 예쁜 벚꽃은 요즘이 절정이다.
사람들이 꽃을 보며 즐거워하고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단지 눈 호강을 해주는 예쁜 식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한다. 언젠가 울긋불긋한 꽃 이파리들이 떨어져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아름다움이란 없다는 사실을 우리 인간은 ‘선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잠시 나왔다 지워지거나 멀어지는 존재에 한 번이라도 더 눈을 마주치고 싶은 것이다.
벚꽃에 부여한 여러 꽃말 가운데 ‘삶의 덧없음과 아름다움’이 있다. ‘덧없음’과 ‘아름다움’이 결합된 꽃말은 여러 생각을 안긴다. 덧없기에 아름다운 것인지, 아니면 아름답기에 덧없는 것인지 그 두 단어의 조합은 한편으로 인간 삶과 세계가 지니는 모순과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형식이 아닐 수 없다. 덧없음은 우리에게 슬픔을,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봄의 절정인 4월, 한 해를 맞이하면서 기나긴 겨울 차갑게 얼어붙었던 세계 표면 아래 숨죽여 자라던 새싹이 땅을 뚫고 우리 곁으로 보란 듯이 손짓하는 4월에 나는 생각한다.
이 푸른 4월도 지나면 1년의 허리를 거의 잡아먹어 어느덧 중순을 맞이하면서 여름이라는 더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손짓하며 설렘을 안기는 꽃들도 사그라지면서, 자연은 초록의 짙은 그늘 속으로 우리를 또다시 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4월이다. 이맘때면 사람들이 한 구절씩 읊조리곤 하는 시 구절이 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문구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TS 엘리엇의 유명한 장편시 ‘황무지’는 바로 그 문구로 시작된다.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엘리엇이 이 시를 발표한 때는 1922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극심한 허무와 황폐함을 느꼈던 서구인들의 자화상을 반영했다는 게 보통의 해석이다. 엘리엇은 시를 시작하기 전 당대 유명한 모더니즘 시인이었던 에즈라 파운드에게 바치는 헌사 형식의 ‘서시’에서 다음처럼 적었다.
‘한 번은 쿠마에의 무녀가 호리병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무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아폴로 신이 허락한 소원에 대한 응답으로 쿠마에(Cumae)의 무녀 시빌(Sibyl)은 한 줌의 모래를 들고 와서 이 모래알 숫자만큼 생명을 갖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시빌은 점점 노쇠해지지만 영원히 죽지 않고 목소리만 남아 저주받은 채로 ‘죽음’만을 갈망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신화와 역사의 혼재 속에 전승된 쿠마에 무녀 이야기는 종종 예술 작품에 형상화되는 유명한 소재다. 쿠마에의 무녀는 생명을 얻은 대신, 젊음을 빼앗긴 영원한 형벌로서 죽지 않고 점점 우글쭈글하게 쪼그라드는 살갗으로만 남은 것이다. 마지막 한 알의 모래가 떨어지면 다시 뒤집혀 새로운 시간을 견뎌야 하는 모래시계를 떠올리면 된다.
우리는 4월을 지나며 생명이 지닌 힘과 신비로움에 감탄하지만 끝내 푸르름은 잿빛으로 뒤덮일 것이다. 그 우중충한 잿빛은 언제 아름다움을 피워올렸냐는 듯 기억에서 소멸될 것이다. 생명은 영원하지 않지만 살아있는 순간만큼은 죽음이라는 이름의 사태를 애써 불러내고 싶지 않은 게 우리들 마음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지고 말 꽃이기에 마치 꽃을 보는 자신의 생명을 관조하듯 멀리서나마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에게 4월은 툭, 꺾여버린 꽃가지와 잎들이 되살아나 마치 영원한 삶을 부여받았지만 죽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던 쿠마에의 무녀에게 물음을 던지는 아이들 입처럼 우물거리는 듯하다. 제주 4·3 항쟁과 4·19 혁명, 그리고 4·16 세월호 참사 속에서 별이 된 지상의 꽃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비처럼 쏟아지는 무수한 꽃잎들이 울긋불긋한 모양새를 한 축제 속 인파들처럼 왁자지껄한 우리에게 묻는다. 미처 울지도 못하고 속울음을 간신히 막은 채로 하늘로 올라간 영혼들이 지상에 남아 영원히 살 것처럼 떵떵거리며 짖어대는 우리에게 묻는다. 모래시계 속에 갇혀 청맹과니처럼 하루하루 견뎌야 하는 우리에게 4월에 내리는 꽃비가 몰려들어 묻는다.
2024-04-1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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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한 청년이 요양 시설에 들어가 여러 노인을 총으로 살해한 후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일본의 노령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애국적 결단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일본 영화 ‘플랜 75’의 처음에 나오는 사건이다.
인구 노령화를 겪는 사회에는 서로 다른 연령 집단 사이에 의견 불일치와 긴장이 일어난다. 인구가 노령화되면 될수록 공적, 사적 자원이 건강관리, 연금, 노인 서비스 분야로 더 많이 들어간다. 이런 자원 할당 때문에 청년 세대에게 직접 이득이 되는 교육, 직업 창출, 기술 개발 등에 투자가 줄어들어 젊은 사람들은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은퇴자의 수가 증가할수록 연금과 사회복지 시스템에 기여하는 청년 세대의 부담이 증가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노령 인구를 부양하는 재정적 부담이 불만스럽다. 세대 갈등은 정치적 영역으로 확대된다. 노령 인구가 증가하면서 그들은 선거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하여 노령자에게 유익한 정책을 채택하도록 투표하는데, 그런 정책은 젊은 세대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세대 갈등을 포함한 노령 사회의 문제가 영화의 배경이다. 노령 인구의 증가가 일으키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놀라운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영화 속 가상의 제도 ‘플랜 75’는 정부가 장려하고 시행하는 안락사 프로젝트이다. 75세가 넘는 노인이 ‘플랜 75’를 신청하면 그들이 국가와 사회의 부담을 줄이고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주는 것이다.
70대 후반의 여성 ‘미치’는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여러 군데에서 직업을 구해보았지만 어떤 곳도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미치는 자신이 이 사회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인간이라는 데 절망하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플랜 75를 신청한다.
이 영화는 노령 사회와 안락사에 대한 토론을 자극하며 인간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인간은 왜 살 가치가 있는가? 여기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양적 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동양적 사고이다.
서양의 전통 철학적 시각에서 보면, 모든 사람은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가난하든 부자이든, 사회에 기여를 하든 않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내재적 가치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 칸트는 자유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은 사유하는 능력이나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자유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구비하고 있는 존엄한 역량이다. 유대교·기독교 전통에서 보면,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신처럼 존귀한 존재이다. 근대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사고의 변화가 일어난다. 경제적 성공이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요 척도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모든 인간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 존엄한 개체라는 인식은 흔들리지 않았다.
동양은 인간의 가치에 대해 서양의 개체주의적 관점과 달리 집단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가정·사회·국가와 개인 중 어느 쪽이 우선인가? 서양에서는 개인이 우위이다. 서양의 사회계약설에 따르면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된 실체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개인보다 집단이 우위이다. 개인은 가정이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지, 집단과 떨어진 고립적 실체가 아니다. 동아시아의 유가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가정이나 사회 내에서 개인의 역할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의 여자들은 아들을 낳지 못하면 가문의 존속을 위해 남편이 새로운 여자를 맞이하도록 허용했고,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 함대에 비행기 자폭 테러를 감행했다.
플랜 75의 기저에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집단주의적 관점이 깔려 있다. 정부와 청년 세대들은 노인들이 더 이상 국가에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귀찮게 여긴다. 안락사를 신청한 노인들 역시 이런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사상적 반전이 일어난다. 안락사 장비의 고장으로 미치는 죽지 않았다. 마을로 돌아온 미치는 석양 무렵 도로의 철제 난간을 잡고 마을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일 다시 만나요. 황혼에 물든 붉은 석양 서쪽으로 질 무렵에….’ 내일까지 살면 다시 내일이 있다. 죽음을 경험한 후 미치는 인간 존재는 그 자체 가치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2024-04-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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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가덕신공항은 어디에 있나
지난 3월 13일 가덕신공항 여객터미널 국제설계공모가 발표됐다. 가덕신공항 내 60개 동 건축물에 대한 설계자를 결정하는 공모다. 공모에서 2등을 하면 관제탑통합청사 등 각종 부대 건물을 설계하게 된다. 보통 설계공모에서는 1등에게만 설계권을 주는데 가덕신공항은 2등에게도 공항 내 일부를 설계할 권한을 주니 설계자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가덕신공항은 부산 시민에게 어떤 공항인가. 항만, 철도와 함께 공항 네트워크, 즉 트라이포트를 구축해 물류 중심, 관광 중심의 글로벌 부산을 완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항이다. 수도권의 모진 반대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염원해 온 바람이 드디어 가덕신공항 여객터미널 국제설계공모 발표로 스타트했다. 국제설계 공모라 국내외에 있는 건축사 모두 응모할 수 있는데 단, 외국 건축사 면허를 가진 사람은 국내 건축사 면허 소지자를 대표로 해 공동으로 참가해야 한다.
이런 경우 외국 설계업체와 국내 건축사가 컨소시엄으로 참여하는데 가덕신공항 여객터미널 국제설계공모 컨소시엄 시 4개사 이하로 응모 제한을 두었다. 외국 설계업체는 자연히 국내의 대형 설계사무소와 함께 들어오길 원하고 국내의 대형 설계사무소는 지역 설계사무소보다는 국제적으로 검증된 설계업체와 손을 잡는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컨소시엄 시 4개사 이내로 제한하다 보니 지역의 건축사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부산 지역 건축사뿐 아니라 건설사도 마찬가지다. 지역의무공동도급법(해당 지역 업체를 일정 비율 이상 의무적으로 참여시키는 제도)이 있다고 해도 현행 국가계약법상 정부는 78억 원 미만, 공기업은 235억 원 미만의 공사에 대해서만 지역의무공동도급 적용이 가능하다. 10조 원 이상 규모의 초대형 사업인 가덕신공항 건설은 지역의무공동도급 적용을 받지 않는다. 지역의무공동도급을 적용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심사 기준에 맞는 실적을 가진 업체는 극소수다. 정부의 지역 경제 살리기의 강력한 의지가 없다면 지역 업체들은 참여하기가 힘들어 근거 마련을 위한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설계나 용역에 대해서는 아예 지역의무공동도급법 같은 법적인 기준조차 없으니 지역의 건축사가 지역의 초대형 설계공모에 참여하고 싶어도 응모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역에 들어서는 건축물이니 해당 지역 업체가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지역 업계의 활성화와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사안이다. 더불어 지역의 특색도 담을 수 있다.
비단, 가덕신공항 여객터미널 설계만 놓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적인 건축가에게 부산의 각종 공모를 알리고 유명 건축가를 부산에 데려오려는 노력은 나쁘지 않다. 그것은 부산 건축가들의 성장과 함께할 때 의미를 가진다. 지역에도 좋은 건축가들은 많이 있다.
서울이 아니라 부산을 선택한 후배들이 부산에서 건축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려면 부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있어야 한다. 부산 건축에 대한 미래를 생각한다면 부산지역의 대형 설계공모에 부산 지역 건축사와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응모 조건이 더해져야 한다. 인구 소멸에 더해 청년이 떠나는 도시 부산에서 건축가를 꿈꾸는 후배들마저도 서울로 떠날까 걱정이다.
28일인 어제, 부산일보 ‘총선특별팀’이 발표한 부산 정치권이 여야를 넘어 공통으로 추진해야 할 공약의 7위에 ‘가덕신공항 건설 시 지역건설업체 분리발주’가 선정된 것도 위와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각 도시마다 도시 이름을 딴 건축상을 가지고 있지만 부산처럼 ‘부산다운 건축상’이라 이름 붙인 곳은 없다. ‘부산다운’ 안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부산의 역사, 환경, 감성, 문화 등 부산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다. 그 특별함은 아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학습된 게 아니라 살면서 체득된 것이다.
건축가 김동회는 “건축은 가장 인간다워야 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편리하고 안전해야 함은 물론 미적 조화도 필히 고려되어야 함은 이런 사유에서 일 것이다. 건축은 단지 공간을 구획하여 구축되어지는 것이라 흔히 여기지만, 지난 수십만 년을 인간과 같이 한 건축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까지 구분하여 모든 시대를 가장 확연하게 증언하는 구체적 사례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후세에 연결하는 고리로서 건축은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이 순간의 작업들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해서도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앞서 밝혔듯 가덕신공항은 부산 시민의 오랜 바람이 현실의 공간으로 세워지는 곳이다. 공항의 여객터미널은 단순히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곳이 아니라 부산이라는 공간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시대를 증언하는 구체적 사례로 남을 가덕신공항을 짓는 데 있어 부산의 건축가가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 한낱 바람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2024-03-2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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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예술과 스포츠의 향연
지금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는 오는 10월로 예정된 전국체전을 치르기 위해서 김해종합운동장과 김해시립김영원미술관 조성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얼마 전 그 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예상보다 큰 규모와 시원하게 탁 트인 시야, 높은 천장고, 어떤 전시 형태로도 활용성 높을 것으로 보이는 효율적 구조, 관람객과 작품 이동을 고려한 시설과 동선 등 그간 여러 전문가의 의견과 제안들이 잘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상주 혹은 유동 인구가 많은 아파트, 상가 등이 인접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미술관으로서는 큰 장점이다. 미술관이 큰맘 먹고 가야 하는 동떨어진 곳에 있으면 시민들과 밀도 높게 교감하기 어렵다. 이곳은 동네 사랑방처럼 어르신들의 만남의 장소로, 아이들의 방과 후 놀이터로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는 위치다. 미술관은 생애주기별 다채로운 프로그램들로 시민들의 일상 속 깊이 다가갈 수 있다.
무엇보다 신선한 것은 운동장 앞에 미술관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독특한 요소는 미술관의 중요한 콘텐츠이자 흥행 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전체 구조를 보면 미술관이 먼저 운동장에 앞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형상으로 ‘운동장 앞 미술관’이다. 그러고 보니 ‘미술관 옆 동물원’(1998년)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동물원이 있는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과 바로 옆 국립현대미술관을 촬영 장소로 삼은 이 영화는 두 남녀 주인공의 상반된 성격을 미술관과 동물원에 비유한 로맨스 영화의 전설로 회자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인근에 동물원이 있다 보니 미술관에 갈 생각 없이 동물원에 왔던 사람들도 아이들을 데리고 자연스럽게 미술관을 방문하곤 한다.
사실 미술관과 운동장, 미술과 스포츠의 결합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 제전과 인체 조각의 발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과거 올림픽 경기에서 승부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경기자들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체였다. 그래서 모든 선수들은 나체로 경기에 참여했으며 자신의 신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체의 아름다움은 가장 지고한 미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기초적 단계라고 여겨졌다. 물론 당시 선수와 관중은 모두 남성이었다. 개막식을 진행하는 여성 사제 한 명 정도는 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경기 우승자들은 이름 있는 조각가들에게 자신의 동상을 의뢰했고, 만들어진 조각들은 올림피아 신전을 둘러싸고 있었다.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기원전 450년경), 폴리클레이토스의 ‘창을 든 사람’(기원전 440년경) 등 올림픽 5종 경기를 표현하는 작품들도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올림픽과 함께 발달하게 된 것이 인체 누드 조각이다. 올림픽 제전을 통해 알게 된 인간 몸의 아름다움, 인체 움직임의 힘과 역동성, 근육을 비롯한 몸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한 인식 등은 그리스 인체 조각의 괄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왔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이상적 비례, 조화, 균형의 규칙이 연구되고 정립됨에 따라 완전한 아름다움을 재현해 낼 수 있는 탁월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스 조각의 규칙은 이후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에 이르는 거의 20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서구 조각사에서 변하지 않는 고전이자 모범으로 준수되어 왔다. 조각뿐 아니라 르네상스와 바로크 등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자세도 그리스 조각을 본뜨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로 그리스 조각은 서구 미술의 중요한 표준이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견고했던 서양 전통 조각의 규범을 깨뜨린 이가 바로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이며, 그가 현대 조각가로서 그토록 대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운동장 옆에 조성될 시립미술관을 위해 고향 김해에 작품을 기증한 김영원 조각가 역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인체를 표현함으로써 현대 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중적으로는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비롯, 대한민국 국새와 청남대 역대 대통령 동상들을 제작한 것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1970년부터 50여 년 동안 인체 조각 탐구와 실험에 전념해 온 조각가이다. 그리스 조각과 같은 이상화된 인체를 제작한 후 이를 과감하게 깨뜨려 파편화하고 다시 조합한 작품, 시간이 멈춘 듯한 무중력의 초현실을 조각으로 표현한 작품, 부조와 환조 개념을 초월해 빈 공간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 작품 등 인체 조각에 대한 독창적 해석과 다양한 조형으로 이탈리아와 미국 등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올가을 운동선수들의 힘찬 경기 모습과 함께 김영원 조각가를 비롯한 조각가, 설치예술가, 청년 예술가들이 김해에서 펼치게 될 예술과 스포츠의 가슴 뛰는 향연을 그려본다.
2024-03-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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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대한민국 예술수도 부산을 그리다
‘고령화’를 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고령사회를 넘어 ‘인구소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특히 부산은 ‘노인과 바다의 도시’라 불리며 ‘지방소멸’이라는 끔찍한 경고 앞에 서 있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감소 위기 속에서 부산은 자연적 인구감소와 수도권 집중화, 생산가능인구 유출로 급격한 초고령화가 진행되는 도시다. 여러 데이터 분석을 보면, 청년 3명 가운데 1명이 직장을 찾아 부산을 떠났거나 떠날 계획이라 한다.
2023년 기준 나라살림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국토 면적의 12%밖에 차지하지 않는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약 51%가 살고 있다. 수십 년간 외쳐온 국토 균형발전은 공허해졌다. 수도권 인구집중 현상의 주된 원인은 일자리다. 그다음 거론되는 것이 의료시설과 문화시설의 차이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순위에 큰 차이가 없다 한다. 그만큼 삶에 있어서 문화생활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지역 의료시설이나 시스템을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지는 솔직히 모른다. 하지만 문화, 그중에 특히 음악과 관련된 일을 생각한다면 방법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기초예술을 위한 제대로 된 제작극장을 만드는 일이다. 부산에 새로 생기는 오페라하우스가 명실상부한 제작극장 역할을 다한다면 최소 500여 명의 일자리가 생긴다. 동반되는 가족까지 합치면 적어도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산에 직접 거주하게 되는 셈이 된다.
1000여 명이 근무하는 미국 뉴욕 메트 오페라의 경우 파생 일자리가 4900여 개에 이른다 한다. 이처럼 제작극장은 대개 3배에서 5배 정도의 파생 고용 시장이 만들어진다. 예술가 한 명의 직접 고용이 지역 거주민의 직접적인 증가와 간접적인 일자리 창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증거다. 쿠사마 야요이의 점박이 호박으로 유명해진 일본 나오시마는 약 3000명이 사는 작은 섬이지만 연간 70만 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섬 자체가 ‘미술관’이 되어 관광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제작극장이 만들어지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음악 관련 예술가들이 살 수 있는 도시 부산이 된다. 충분히 그들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은 부산에 살며 아이도 키울 것이고, 다양한 나라에서 경험했던 노하우와 상상력으로 더 나은 부산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부산이 음악인들이 모여 사는 독일 베를린 같은 도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요하네스 라우는 독일에서 가장 큰 주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총리를 20년간 역임했고,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독일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문화 대국’ 독일을 만들었다. 그는 예술과 문화의 공적 지원을 강조하며 “예술과 문화는 반죽에 들어가는 효모”라며 “효모가 들어가지 않은 반죽은 빵 대신 돌덩어리만을 얻게 될 것”이라 했다. 예술과 문화에 공적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은 “공동체 사회를 지구 중심까지 추락시키는 일”이라 강조했다. 그가 만들어 낸 이런 환경과 분위기는 지금도 수많은 예술가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2026년 오페라하우스가 문을 열었을 때의 부산을 생각해 본다. 부산이 선도적으로 제대로 된 대한민국 최초의 제작극장을 선보인다면, 부산은 음악가가 가장 많이 몰리는 도시가 될 것이다. 머지않아 대한민국 예술의 중심도시가 될 것이다. ‘해양수도’이자 ‘예술수도’가 될 것이다.
지금 국내의 뜻있는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백 명의 음악가들이 고국에 제작극장을 요구하고 있다. 제작극장은 공공극장이 예술가를 직접 고용하고 공연을 자체 제작하여 시즌제로 운영하는 레퍼토리 시스템이다. 예술을 공부하고 예술가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 제공은 지방인구 소멸과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방안이다. 동시에 시민들에게는 더 나은 예술 향유 환경을 제공하고 극장의 문턱을 낮추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일찍이 김구 선생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라며 “높은 문화의 힘”으로 이를 이룰 수 있다 했다. 부산에 제대로 된 제작극장이 생기면 상서로운 구름이 모이듯 각지에서 흩어진 한국 예술가들이 모일 것이다. 인구도 늘 것이며, 예술의 힘으로 활력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다. 그들이 모여서 부산이란 가마솥에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게 만들자. 세계 각지에서 배웠던 그들의 경험은 부산을 발전시키는 데 충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바야흐로 봄이다. 언 땅을 뚫고 새싹이 돋고 수많은 꽃이 핀다. 부산 문화의 봄을 새로이 만들자. 풍요롭고 충만한 예술문화 덕분에 세계 각지에서 많은 예술가가 끊임없이 모여드는 역동성 넘치는 해양수도 부산, 예술수도 부산을 상상해 본다.
2024-03-1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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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인공지능의 평가, 괜찮을까
바야흐로 인공지능(AI)의 시대이다. 학생들은 종이 사전 대신 인공지능 기반의 자동번역기를 활용하고, 챗GPT와 같은 거대 언어모델 기반의 생성형 인공지능 챗봇에 모르는 것을 물어본다. 심지어 인공지능 그 자체가 교육과정 내 하나의 교육 내용으로 자리 잡았다.
인공지능을 교육의 도구 및 내용으로 다루는 데에서 나아가 최근에는 인공지능을 평가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있다. 객관식 문항은 애초 기계적 채점이 가능하므로 서술형 문항, 특히 학생들의 작문에 대한 자동채점 방안이 인공지능 활용 평가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작문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국어 관련 학문 분야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작문 자동채점에 대한 사업과 연구가 활발하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는 서술형 글쓰기의 자동채점을 위한 기초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국립국어원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글쓰기 자동채점과 첨삭이 가능한 ‘K-로봇’ 개발을 시작했다. 개발 이후 대규모 글쓰기 진단 체계를 운영하여 일반 국민의 글쓰기 능력 진단과 첨삭 지원, 공공기관과 기업체의 인재 선발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다. 또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보급을 담당하는 세종학당 역시 인공지능 기반의 자동채점을 모의 시행하고 있으며, 완전한 인공지능 기반의 평가를 목표로 삼고 있다.
이처럼 평가에 인공지능을 활용한 자동채점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이유는 그것이 갖는 경제성에 기인한다. 현행 대규모 서술형 답안 평가에서는 다수의 채점자가 많은 분량의 답안을 교차 채점해야 하므로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그러나 자동채점 시스템은 일단 구축해 놓기만 한다면 채점에 시간과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자동채점은 인간의 채점과 달리 채점자의 주관이 개입하지 않아 일관적 채점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학과 취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평가를 인공지능에 맡기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그 이유는 최근 자동채점에서 활용되는 딥러닝 기반의 자동채점 시스템의 경우 은닉층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떤 변인을 근거로, 어떤 방식으로 계산해 점수를 산출하는지 알 수 없는 이른바 ‘블랙박스’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점 과정과 결과가 타당한지 따질 수 없으며, 채점 근거가 제공되지 않아 평가 결과를 교육에 환류하는 것이 불가능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채점의 변인을 지정하는 지도학습 기반의 자동채점 시스템을 도입하면 되지 않을까. 아쉽게도 현재 자연언어 처리 기술로는 문장 길이, 단어 수, 고빈도 어휘 수 등 단순한 언어적 정보만을 통해 분석이 가능해 작문 채점에서 기대되는 논리적 적합성, 구조의 체계성, 내용의 창의성 등은 채점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재의 지도학습 기반의 자동채점 시스템이 도입될 경우 교육 현장에서는 글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는 방법을 교육하기보다는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방법, 이를테면 어려운 단어를 글 전체에 흩뿌려 쓰거나 연결어미를 사용해 문장을 늘리는 등 기술적인 방법이 교육될 공산이 크다.
근본적으로 현재의 자동채점 시스템은 알고리즘을 구성할 때 인간 채점 결과를 바탕으로 채점 모형을 설계하므로 채점 알고리즘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인간 채점 결과의 타당도와 신뢰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는 자동채점 결과는 인간 채점에 비해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오류가 있는 채점 결과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동채점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편익을 위해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된 점수를 부여하는 것이 정당한가, 채점 오류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와 같은 윤리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유럽연합은 이러한 맥락에서 학생 평가 목적의 인공지능 시스템을 고위험 인공지능 규제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인공지능이라는 시대적 유행에 편승하는 데에만 급급해 인공지능 평가 시스템의 도입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단기간에 대규모 평가에서 인공지능 평가의 도입만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채점자의 인지 부담을 줄여주는 채점 보조 수단으로, 학습자의 자기주도 학습을 도와주는 보조 도구로 인공지능 평가 시스템을 연구하고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후 기술이 더 발전해 모델이 정교화되고 타당한 채점 근거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사회적 논의를 거쳐 실제 평가에 도입해야 할 것이다.
2024-03-0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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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숭고한 영혼이 머문 자리에서
며칠 전 한 지인으로부터 한숨 섞인 푸념을 들었다. 태어난 지 30개월도 채 안 된 손자가 3층 베란다에서 떨어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했다. 발목 골절상이 심해 전신마취 수술을 했는데 눈에 가해진 충격이 커 응급치료는 했지만 후속 치료를 위해 안과 전문의에 수소문해도 여태 병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입원 중인 병원은 퇴원 수속을 종용하고 있고 후속 치료를 위한 병원은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나의 지인은 연방 한숨 소리만 내었다.
최근에 이러한 사례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수술이나 진료가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의사가 모자라 의사를 차차 늘리겠다는 정부의 계획에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전공의 및 의대 교수와 의대생들이 거세게 반대하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소아과뿐만 아니라 신경외과와 외과 등 소위 말해 ‘돈 안 되는’ 쪽을 기피하고 피부과나 성형외과 등에 쏠리는 현상을 바로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갑작스러운 의대생 증원으로 생기는 교육의 질 저하를 꼽는다. 세 번째는 우리나라 1000명당 의사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에 크게 못 미치는 최하위 수준이지만 기대수명이나 영아사망률 등의 주요 보건지표가 최상위권이기 때문에 현재 의사 수가 적정하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의대 증원을 충분한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양쪽의 논리가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피해를 보는 쪽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국민이다. 이쯤 해서 떠오르는 두 명의 의사가 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의 슈바이처’로 존경을 받았다. 이태석 신부와 장기려 박사다. 이태석 신부는 가톨릭 살레시오회의 수도자 겸 성직자와 의사로서 남수단 톤즈에 선교 사제로 파견되어 구호와 의료 및 사목 활동에 힘쓰다 2010년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열악한 수단의 환경 속에서 손수 병원을 만들었고, 한센병과 결핵 환자들을 보살피며 지속적인 예방접종 사업을 벌였다. 사망 이후 그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져 많은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이태석 신부의 사망 소식으로 톤즈를 비롯한 현지 주민들이 신부를 애도하는 가두 행진을 벌였는데, 시국이 불안한 곳이라 시위나 행진 같은 집단행동이 엄격히 금지되었는데도 군인이나 민병대원들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도 이태석 신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의술로서 평생을 헌신한 장기려 박사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외과의사로 명성을 날렸던 백인제의 제자로서 수련하다 이후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을 비롯한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료로 진료하면서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인술을 베풀었다. 장기려 본인은 작가의 상상 속 인물이라며 부인했지만, 춘원 이광수 소설 〈사랑〉의 주인공인 안빈의 모델로 회자되기도 했다. 봉사, 박애, 무소유를 기반으로 한 그의 의료 행위는 돈 없는 숱한 환자들에게 치료의 기회를 주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는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태석 신부와 장기려 박사는 2022년 부산시교육청 선정 ‘부산을 빛낸 12명’의 일원으로 송상현 장군, 안용복, 최동원 선수, 박차정 의사(義士) 등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지금의 의료대란을 보면서 이들을 떠올린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능력’과 ‘능력주의’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공부 박사’들인 의대생이 의사 면허를 따 일선 병원에 근무하면서 행하는 의료행위는 분명 값지고 존경받아 마땅하다. 타고난 능력과 재능으로 건강한 사회를 위해 힘을 쏟고 있음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능력은 때때로 능력주의로 돌변해 전문성을 명분으로 한 융통성 없는 논리를 내세우는 까닭에 국민들에게 ‘밥그릇 지키기’로 비치기도 한다. 그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비범한 능력조차 뛰어넘어 상상을 초월한 베풂과 나눔을 실천했던 이태석 신부와 장기려 박사의 고귀하고 숭고한 뜻을 지금의 의사들에게 요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문 독립운동이었던 3·1 만세운동을 맞아 이 나라 이곳, 부산을 살다 간 이태석 신부와 장기려 박사가 머문 자리에서 한 번쯤 생각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신학자로도 유명했던 슈바이처가 남겼던 말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 때 우리 삶은 더 힘들어지지만, 동시에 더 풍요롭고 행복해진다.”
2024-02-2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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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물질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부산이나 경남 통영처럼 아름다운 항구 도시를 ‘한국의 나폴리’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의 나폴리로부터 8km 떨어진 곳에 헤르쿨라네움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서기 79년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할 때 생기는 화산 쇄설류 때문에 20m 아래에 덮이어 버렸다. 그 후 1600년 동안 헤르쿨라네움은 위치조차 잊힌 채 매몰되어 있었고, 그 위에 에르콜라노라는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헤르쿨라네움의 자매 도시 폼페이도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할 때 화산재로 매몰되었다. 두 도시는 성격이 달랐다. 폼페이는 부산한 상업 도시이다. 헤르쿨라네움은 작고 조용한 항구 도시인데, 매우 아름다워서 약 250km 북쪽에 있는 로마의 귀족들이 별장을 두고 있었다. 줄리어스 시저의 장인인 유력 정치가 피소도 화려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에피쿠로스 학파를 추종하고 있었고, 필로데모스라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를 후원하고 있었다. 피소의 저택에는 큰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는데, 서기 79년 필로데모스는 여기에 상주하고 있었다.
이 도서관에는 파피루스에 기록된 에피쿠로스 학파의 저술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화산 폭발의 전조가 보이자 직원들은 파피루스의 저술들을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둘둘 말아서 항만으로 이송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전에 고온의 화산 물질이 덮쳐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숯덩이처럼 탄화되었다. 18세기 중반 터널을 뚫어 피소의 저택을 조사했을 때 약 1800개의 파피루스 스크롤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헤르쿨라네움 스크롤’ ‘헤르쿨라네움 파피루스’라고 부르고, 피소의 저택을 ‘파피루스 저택’이라고 한다.
피소 도서관의 파피루스 컬렉션은 정말 귀중하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고대 철학자의 저술은 모두 중세의 원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고대의 원전을 수도사들이 몇 세대를 걸쳐 베껴 쓴 것인데, 그사이 수정이 얼마나 벌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헤르쿨라네움 파피루스는 우리가 고대의 문헌에 직접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물에 젖은 화장실 두루마리를 펴기 힘들 듯이, 탄화된 파피루스 스크롤을 펴서 거기에 적힌 글자를 읽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칼로 스크롤을 잘라서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파피루스는 훼손되었으며, 어떤 사람은 수은 액체를 스크롤에 부어 조각들을 파괴하지 않고 분리하기를 기대하였으나 수은의 밀도 때문에 파피루스는 가루가 되었다.
파피루스 스크롤의 가치를 그 당시 사람들은 아주 낮게 평가했다. 나폴리의 왕은 파피루스 스크롤이나 조각들을 외교적 선물로 다른 나라에 제공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6개를 얻어 프랑스 학술원에 넘겨주었고, 영국 왕은 캥거루 18마리를 주고 18개를 얻었는데 옥스퍼드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스크롤은 대개 국립 나폴리박물관에 있다.
피소의 도서관은 사실상 읽을 수 없는 문헌을 소장하고 있다. 파피루스 스크롤은 파괴하지 않고는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크롤을 열기 위한 초기의 위험한 시도 이후 20세기부터는 스크롤을 열지 않고 그냥 보관만 했는데, 21세기에 돌파구가 뚫렸다. 미국 켄터키대학의 전산학과 브렌트 실즈 교수팀이 의학의 인체 스캔 기술과 인공지능, 데이터 과학을 통합하여 스크롤을 물리적으로 열지 않고 내부를 들여다보는 가상 개봉(virtual unwrapping) 방법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프랑스 학술원에서 이전에 스캔한 파피루스 스크롤의 영상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고, 글자를 해독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대회를 2023년 개최했다. 이것이 ‘베스비우스 챌린지’이다. 작년 연말에 마감된 1회 대회의 결과가 지난 2월 초에 발표되었는데, 3명의 연합팀이 대상으로 70만 달러를 수상했다. 그들이 해독한 것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필로데모스의 쾌락에 관한 저술 마지막 단락이다.
‘음식의 경우처럼, 물질의 부족이 풍족보다 우리를 반드시 더 즐겁게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것이 단락의 첫 문장이다. 이 저술에서는 부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지의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이런 주제는 현대에도 뜨거운 토론 거리이다. 물질만능주의는 물질이 행복의 핵심 요소라고 간주하는데, 필로데모스는 이런 입장에 동조하는 듯하다. 이것은 학파의 창시자 에피쿠로스의 입장과는 반대이다. 돈을 버는 데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물질을 추구하지 않아야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에피쿠로스는 생각했다.
아직 손대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 헤르쿨라네움 스크롤은 600개가 넘는다. 이것을 가상 개봉 기술로 연다면 우리는 고대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 피소의 도서관에는 아직 발굴하지 않은 방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헤르쿨라네움에 도서관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2024-02-2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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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의사만 부족한 게 아니다
정부는 의대 정원을 2025년부터 2000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대학은 무전공 입학을 확대하고 등록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도록 소득 상위 20%를 뺀 모든 대학생에게 국가장학금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장 “고등학교는 내년부터 고교학점제를 시행하는데 진로에 맞는 과목을 선택해 듣는 고교학점제와 대학 무전공 입학 정책이 말이 되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올해 고3이 되는 자식을 둔 지인을 지난 설 연휴 때 만났더니 “도대체 교육정책은 누가 만드는 건지, 생각은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응급실 의사가 모자라 정작 치료받아야 할 사람이 사망하고, 지방 보건소는 의사를 구할 수 없고, 소아과에선 ‘오픈런’을 해야 한다. 그러니 표면상으로는 의사가 부족한 게 맞다. 그런데 부산 서면이나 해운대 센텀 곳곳에 밀집해 있는 피부과와 성형외과 의원들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정작 우려해야 할 것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실천하는 의사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정부 교육정책에 대한 우려 커져
현장 목소리 이해 못 한다는 비판
형식보다 본질적 내용을 살펴야
의대 정원 확대 발표가 나오자 제일 먼저 움직인 곳은 학원가다. 대학생, 재수생, 학부모뿐만 아니라 직장인들로부터도 의대 입학 관련 문의가 쇄도한다고 한다. 지역인재 선발 비율을 확대한다고 하자 발 빠른 서울의 부모들은 벌써부터 지방으로의 이사를 생각한다.
상위권 공대나 과학 쪽 우수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안 그래도 ‘SKY’라 불리는 대학에 등록하고도 의대에 가기 위해 재수, 반수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서울대 자연계열 입학생 수보다 많은 2000명의 의대생을 더 뽑는다고 한다. 이공계 인재들의 이탈이 가속화돼 첨단 분야 인력난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 대입에서 학과나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입학한 뒤 진로를 정하는 무전공 선발 확대까지 예고하니, 기초학문은 고사하고 취업이 잘 되는 학과로 몰리는 전공 선택 양극화가 심해질까 걱정이다.
잘하자고 바꾸는 교육정책을 지지하기보다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는 것은 정부가 현장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게 숫자로 표시되는 현실에서 직업 선택은 연봉순이고 대학은 성적순이라는 법칙은 좀체 깨지지 않는다. 의대에 학생이 몰리는 이유는 정년이 없고 연봉이 높기 때문이다.
기초학문의 고사가 우려되는 무전공 선발 확대는 고교 수업과의 연결, 전공·부전공 선택 조건 등 세부지침이 부재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미국에 있는 대학들은 오래전부터 자유전공이나 무전공 선발을 했다. 전공을 선택해서 들어가도 입학만 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고등학교 때 들었던 과목 중 대학 전공과 연결된 과목은 학점으로 인정받는다. 이게 고교학점제와 이어지는 지점이다. 그러니 대학에서 ‘3년 졸업’도 가능하다. 물론 전공을 바꿀 때는 그 전공에 대한 필수 학점을 이수해야 한다. 여러 번 전공을 바꾸면 그만큼 졸업이 늦어진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그 과정에서 항상 대학의 코디네이터와 상담하고 전공을 바꾸는 이유, 계획 등을 세세히 짜면 된다. 당연히 관련 인턴십 참여도 바쁘다. 물론 취업이 잘 되는 학과는 여전히 많이 선택하지만 어렵고 적성에 안 맞아 도중에 다른 과로 옮기기도 한다.
여기서 또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게 있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라는 학부 중심의 연구대학에서는 졸업 때까지 수백 권의 고전을 읽고 토론하게 한다.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도 마찬가지다. 전공을 선택하기 전인 1학년 과정에서 읽어야 할 고전 분량은 어마어마하다. 미국의 이른바 아이비리그에서는 고전, 철학, 심리, 역사 등 인문학을 기본으로 하여 다른 학문을 융합시키려 한다. 스탠퍼드대학교에는 심지어 고전학과가 있다.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하러 들어왔다가 오히려 철학, 역사 쪽으로 전공을 바꾸는 학생도 있다. 인문학 관련 학과 중 한두 명이라도 학생이 있으면 대학원까지 적극 지원한다. 학문은 모든 사람이 다 이을 수는 없다. 학생이 적다고 과를 없앤다는 건 경제적 효용을 따지는 문제지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할 일은 아니다.
건축학과는 오래 전인 2002년부터 미국식 학제를 바탕으로 5년제로 운영되고 있다. 5년제임에도 설계와 디자인에만 집중하다 보니 인문, 철학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시공, 구조, 환경, 재료 등 건축 전반에 대한 교육도 부족하다. 교육의 제도나 형식만 따오지 말고 내용을 보자. 이제껏 우리가 외국에서 가져온 교육정책이 한두 가지였나. 전체 교육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지 않는 이상, 결국은 제로섬 게임이나 마찬가지다. 의사만 부족한 게 아니다.
2024-02-1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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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앤디 워홀을 이해하는 방법
앤디 워홀의 인기는 여전히 건재하다. 어디선가 늘 미술 전시나 콜라보(협업) 프로모션 등이 진행 중이다. 지난달에는 앤디 워홀의 작품 ‘달러 사인’이 미술품 조각투자 상품으로 국내에 선보여 7억 원 규모의 투자계약 증권 청약 모집이 마감되기도 했다.
앤디 워홀은 팝아트(pop art)를 선도한, 20세기 가장 유명한 미술가이다. ‘팝아트’는 ‘인기 있는’ ‘대중적인’이라는 의미의 ‘popular’에서 온 명칭인데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통속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로부터 소재를 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만화, 영화, 사진, 광고 등 유행하는 대중 예술에 우호적이다. 팝아트는 추상미술이 추방했던 삶과 일상을 다시 미술 속으로 끌어들였다. 우리가 늘 마시는 코카콜라, TV에서 자주 보는 스타의 모습, 만화 속 이미지, 햄버거나 아이스크림 등이 소재가 된다.
워홀은 전통 미술의 수작업이 아닌 상업 포스터를 제작하는 실크 스크린이라는 판화 형식의 기계적 공정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의 작업 철학을 드러내는 것이다. 워홀의 이러한 기계적 제작 방식과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반복적 이미지들은 1960~70년대 미국의 대량 생산·소비 사회를 상징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팝아트가 미국으로 건너가 전성기를 이룬 1960년대는 바로 서구 산업사회의 물질문명이 황금기를 구가하던 때이다. 팝아트는 미국 물질주의 문화의 반영으로서, 그에 대한 집착과 낙관을 드러낸다.
예술가로서 본격적 인생을 시작하기 이전 워홀의 경력에서 우리는 그의 팝아트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을 발견할 수 있다.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1949년 뉴욕으로 옮긴 워홀은 곧 인기 삽화가로 자리 잡았고, 10년 후 성공한 광고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의 삽화와 광고 디자인은 〈보그〉 등 유명 패션지를 뒤덮었고, 그는 고급 패션업계 홍보를 전담했다. 상업 예술가로서 절정에 선 바로 그때 워홀은 순수미술 세계로 전향한 셈이다. 그때까지 잡지, 만화, 대중매체, 패션을 수없이 접했던 뉴욕에서의 경험은 그가 독특한 20세기 미술가가 되는 자양분을 제공했다.
워홀은 진정한 자본주의 예술가로서 돈 버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주장하면서 처음부터 팔릴 만한 작품들을 제작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작품들이 워홀 자신의 광고였을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미지 홍보 전략을 통해 스스로를 상품으로 광고했다. 그러나 워홀이 위대한 천재로, 매력적인 스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가 양면성을 지닌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물질문명을 찬양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 그 모든 것의 무상함을 강조했다. 특히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모습을 담은 ‘재키II’ 시리즈나 ‘전기의자’‘총’ 같은 작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워홀은 팝아트 화가로 잘 알려져 있으나 다른 한편 아방가르드 영화 제작자이기도 했다. 그는 8시간 동안 카메라 이동도 편집도 없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밤새 찍은 ‘엠파이어’(1964)나 부조리한 상황극과 같은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러한 워홀의 영상 작업을 엿볼 수 있는 영화 두 편이 있다. 먼저 1965년을 배경으로 한 조지 하이켄루퍼 감독의 2007년 작 ‘팩토리 걸’은 워홀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뮤즈이자, 다른 한 편은 자본을 제공하는 스폰서였던 에디 세즈윅이라는 여성에 관한 영화이다.
또 다른 영화는 메리 해런 감독 1996년 작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가 있다. 워홀은 1968년 6월 3일 총을 맞았다. 폐, 지라, 위, 식도를 관통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지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앰뷸런스가 아니라 기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스타로 만드는 데 능숙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워홀은 총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죽을 때까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고, 이 사건 이후 ‘죽음’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때 워홀을 쏜 사람은 워홀 팩토리를 기웃거리던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이다. 워홀에게 넘겨주었던 자신의 희곡을 도용당했다고 생각한 솔라나스는 워홀에게 ‘영혼의 살인자’라고 외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이 두 영화에 나타난 상반된 성격의 두 여성을 비교해 보면, 워홀이 주변 사람들과 맺었던 관계와 워홀이라는 인물에 관해 좀 더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워홀 자신과 워홀 팩토리의 분위기, 그리고 그의 작업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꽤 도움이 된다. 영화 ‘팩토리 걸’에는 워홀 재단의 도움을 받아 실제 워홀의 작품들이 영화 소품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 역시 좋은 볼거리이다.
2024-02-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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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클래식 스타에게 유독 관대한 부산 관객
옛말에 “물건을 모르면 값을 더 주라”는 말이 있다. 물건을 몰라 속는다는 뜻이 아니라 잘 모르는 물건은 비싼 것이 제값을 한다는 뜻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은 공연을 선택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통한다.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많은 찬사가 따라다니는 연주자의 공연은 대개 기본 수준을 상회한다. 자연스레 신뢰하며 기꺼이 비싼 값을 치러 예매하고 시간을 내어 공연장을 찾는다.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잔뜩 기대하고 간 공연에서 엄청난 실망을 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수많은 찬사가 따라다니는 유명 연주자에 대한 기대는 공연을 선택하고 관람하러 간 관객만의 탓은 아닐 것이다. 그 기대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억측한 것일 수 있지만, 여태껏 있었던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 관객들이 바라고 있던 것이다.
세계적 대가들 무성의한 부산 공연 실망
명성만 보고 박수 치며 환호하면 곤란
수준 높은 부산 관객 ‘무서움’ 알게 해야
지난 몇 년 동안 전 세계는 듣도 보도 못한 바이러스로 자가격리와 거리 두기라는 갑갑함을 경험했다. 공연계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공연이 축소 또는 취소되었고, 예술 애호가들 또한 마음 편히 공연장을 찾을 수 없었다. 팬데믹은 작년이 되어서야 끝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공연계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갑갑함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인지 공연장은 연일 매진 또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공연을 하나씩 살펴보면 부산을 거친 자칭 타칭 ‘대가’들의 공연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로 손꼽히는 사라 장의 2022년 12월 연주에서는 새로움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콩쿠르 우승자 양인모는 마치 리허설 같은 연주를 들려주고 갔다. 새로운 음반에 수록된 곡들로 독주회를 가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 선우예권의 피아노 연주는 무성의했다. 뒷짐을 지고 나온 무대 인사는 차치하더라도, 눈에 다래끼가 났으니 반대쪽 얼굴 사진만 찍어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연주보다 쇼맨십이 더 눈에 띄었다.
음악 전공자들의 귀감이라는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는 2년 연속 공연을 펼쳤는데 거의 같은 프로그램 구성과 늘 듣던 멘트로 새로움을 기대하는 청중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완벽한 연주를 위해 개인 피아노까지 들고 다니며 무대 위나 밖에서의 컨디션 조절에 극도로 예민하여 사진 한 장 찍는 것조차 금지한다. 그는 심한 감기에 걸렸는지 공연 내내 콧물을 훔치고 기침하며 감동 없는 밋밋한 연주로 시간만 때우고 떠났다. 문제는 이 모든 공연이 부산을 대표하는 공공 공연장의 기획 공연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실황을 본 객석의 반응은 다양했다. “리허설하러 온 줄” “부산이 만만하게 보이나?” “할인 못 받고 비싼 좌석 샀으면 아까웠을 뻔” “유명 연주자가 부산만 오면 연주가 안 된다” “음악 잘 모르는 아시아에 돈 벌러 왔네” “나만 그런가? 왜 음악에 감동이 없지?” 등의 불만이 터졌다. 심지어 다시는 저들의 연주를 보러 가지 않겠다는 애호가들도 제법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되고, 오소리가 문수를 넘으면 죽어버리는 것은 모두 땅의 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정약용도 “유자가 강진 땅만 벗어나면 탱자가 되고 만다”며 통탄했다. 부산 바닷물에 절어서 그런가? 유독 연주자들이 낙동강을 넘어 부산만 오면 탱자가 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내 연주자뿐만 아니라 투어를 도는 해외 연주자 중 부산에만 오면 연주가 안 되는 연주자들이 저들 말고도 제법 있다.
어떤 까닭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혹시 그들이 부산이라는 도시의 예술 지형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묻고 싶다. 스타 예술가가 받는 개런티에는 예술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자기관리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적어도 무대에 서는 예술가라면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라 완벽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관객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십수만 원이나 되는 티켓을 사고 귀한 저녁 시간을 오롯이 그들의 공연에 할애하는 관객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다.
아티스트의 명성에만 기대서 분별없이 박수 치고 환호하면 곤란하다. 대개 슈퍼스타들의 연주가 성의 없고 부실한 것은 관객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을 따져 물어야 관객 수준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바닷가에서 회 한 접시 먹고 놀다 오자”는 말보다 “부산에 가서 대충 연주하면 안 되겠더라”라는 말이 연주자들의 입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 부산 공연 문화 수준을 더 높이는 일, 그것은 관객의 수준에서 시작한다. 유명하다고 무조건 박수갈채를 보내지 말자. 비싼 값을 치른 관객은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관객의 권리다.
2024-02-0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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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선거의 효율성과 선거의 공정성
지난 13일 대만 총통과 입법위원(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다. 대만의 선거는 2024 지구촌 첫 대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미중 갈등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끼치는 선거라는 점에서 그 결과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리고 선거 결과뿐만 아니라 대만의 독특한 선거 방식이 SNS나 국내외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화제가 되고 있다.
대만에서는 투표가 끝나면 투표소가 바로 개표소로 바뀌어 그 자리에서 개표가 이루어지는데, 개표 방식이 흡사 과거 우리의 국민학교 시절 반장 선거를 연상하게 한다. 먼저 선거관리원이 투표함에서 투표지를 한 장씩 꺼내 기표된 후보자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고 투표지를 머리 위로 들어 참관인이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러면 다른 선거관리원이 칠판에 적힌 후보자의 이름 옆에 ‘바를 정(正)’ 자로 득표수를 기록한다. 이런 방식으로 투표함의 개표가 모두 끝나면 빈 투표함을 참관인에게 보여 준다. 이런 개표 과정은 누구나 현장에서 직접 참관하고 촬영도 할 수 있다.
최근 진행된 대만 선거 수개표 관심
선거 효율성 중점 우리와 다른 모습
의혹 불식 등 위해 절차 재정립 필요
또 대만은 사전, 부재자 투표 제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투표권을 행사하려면 선거일에 자신의 호적지로 가서 투표해야 한다.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투표율은 70%가 넘는다고 한다. 대만의 이러한 선거 방식에 대해 미국 블룸버그 TV는 “대만의 수동 개표 방식은 다소 고루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공정하고 안전하다”고 말했으며, 독일의 한 시사주간지 기자는 “대만의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고 평했다.
SNS와 언론을 통해 대만의 선거 방식을 알게 된 우리나라의 많은 유권자도 대만의 투표와 개표 방식이 공정하게 생각되며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방식을 도입하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우리나라 유권자들이 대만식 선거 방식 도입을 원하는 이유는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에서 불거진 각종 불법 선거 의혹이나 소송 등으로 투표와 개표 방식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므로 대만식 선거 방식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우 부재자 투표를 없앨 경우 군인들의 참정권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토 면적과 유권자 수, 투표소 수, 접근성 등이 각기 달라 대만처럼 투표소에서 곧바로 손으로 개표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이 있다.
다만 대만 선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투표와 개표 과정에서 선거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이를 지키기 위해 발생하는 많은 불편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나라도 선거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발표한 투·개표 관리 절차 개선안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선관위는 선거 때마다 계속되는 부정선거 시비 의혹을 불식하기 위하여 오는 4월 총선부터 개표 사무원이 투표지를 일일이 확인하는 수검표 절차를 도입하고, 사전 투표함 보관 장소에 설치된 CCTV 영상을 24시간 공개하겠다고 하였다. 선관위의 개선책을 놓고 개표 방식에서는 일부 진전이 있지만 투표 방식은 사실상 그대로여서 반쪽짜리 개선책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현재 사전 투표는 투표 관리관이 현장에서 투표용지에 관인(官印)을 직접 날인하지 않고, 관인이 미리 인쇄된 투표용지를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투표용지가 조작, 도난, 분실될 경우 부정 투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 2020년 총선 이후 이루어진 선거무효 소송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비정상 투표용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사전 투표용지에 대한 여러 의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관위는 ‘실무 현실’을 고려해 현행 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여기에서 실무 현실이란 관인을 직접 날인하기 위해서는 선거 사무원을 더 투입해야 하는데 이에 따른 비용 증가의 문제, 투표 시간이 늘어나는 등의 문제를 말한다. 즉 선관위는 선거의 투명성과 공정성보다 선거의 편의와 효율성을 더 우선시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은 선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거의 공정성을 지키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정한 선거를 위해 추가 소요되는 비용이 얼마가 됐든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투표 시간이 얼마나 늘어나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투·개표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는 지금, 선거의 공정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 단 하나의 부정선거 의혹도 제기되지 않도록 제도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2024-01-2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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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성공은 죄악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구약성경〉의 ‘전도서’ 1장 9절에서 비롯되어 널리 회자되는 말이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여기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거나 입에 올렸을 것이다. 이 표현은 한편으로는 ‘시크’한 느낌을 주는 말이기도 하다. 2024년이 밝았을 때 사람들은 대체로 ‘올해만큼은 뭔가 다르겠지’ 같은 생각을 한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무렵 부산하게 새해를 맞이하곤 한다. 어떤 이는 새해라고 해서 특별할 게 없다는 식의 말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각자 기대와 희망을 품는다. 설령 달라질 환경이나 여건이 여의찮더라도 내심 ‘올해만큼은…’ 어딘가 달라지리란 믿음과 함께.
사람들이 해마다 품게 되는 그러한 희망이나 기대는 매번 ‘속을지라도’ 변함없이 작동된다. 어떤 시간의 마디나 경계를 지나고 맞이할 때면 절로 일게 되는 마음의 ‘세탁’은 오래전부터 인류 문화의 특징이었다. 이는 신화적 시간이 오늘날에도 성스러움의 위장된 형태로 남아 있다고 분석한 미르체아 엘리아데 신화론의 골자이다. 기술문명이 극도로 발전한 오늘날의 현대인이라고 하더라도 별수 없이 ‘종교적 인간’이라는 논리다. 여기서 ‘종교적’이라는 수식어는 특정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고대인의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삶의 규칙이나 태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뜻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의 기원이나 탄생에서부터 죽음과 소멸에 이르는 일련의 순환 사이클에서 숱한 신화적 요소들이 개입되거나 만들어진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왕이면 ‘사람 노릇’ 제대로 하고 가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사람 노릇이란 게 흔히 말하는 ‘성공 신화’와 밀접하게 엮여 있다.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남들만큼이나 그럭저럭 삶을 영위할 수만 있어도 그나마 실패한 삶이 아니라는 통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란 말도 있듯이, 경쟁을 해서 남들보다 좀 더 우월한 지위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이 팽배해진 요즘이다. 그 피비린내 나는 세계의 첫 마당이 되는 곳이 바로 학교다.
교육의 본래 지향점이나 목적이 실종된 지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화된 사회 여건과 시대의 요구에 발맞춰 교육정책이 조금씩 바뀌지만 여전히 잡음과 부정적인 여론이 끊이지 않는 까닭을 생각해 본다. 위정자들이나 교육 관계자들은 매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육정책의 근본적인 전환과 대책을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선 교육 현장의 훌륭한 선생님들과 사학 설립자를 비롯한 재단 이사장의 가치와 철학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정치가들의 교육정책도 단지 책상머리에서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수립된 정책이기에 우선은 믿을 수밖에 없다.
사회 여러 부문에서 변화가 가장 더딘 곳 가운데 하나가 ‘교육 문화’일 것이다. 최근 경남 양산에 있는 개운중학교와 효암고등학교의 졸업장 문구가 알려져서 화제다. 아니 ‘졸업장’이 아니라 ‘지극한 정성’이란 이름을 달았다. ‘지극한 정성’을 펼치면 이런 식의 문구가 나온다. ‘학생은 솜털 보송한 아이로 우리 학교에 왔었는데, 울고 웃으며 보낸 3년 동안 몸과 생각이 자라서 더 넓은 곳으로 보냅니다. 붙들어 안아주고 싶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출가하는 자식을 보듯 입술을 깨물며 보냅니다. 우리보다 더 좋은 선생님, 더 좋은 벗들을 만나서 멋진 삶을 가꾸시길 기원합니다.’
일반적인 ‘졸업장’을 받는 학생의 마음과, 위 ‘지극한 정성’에 담긴 문구를 읽으며 학교를 떠나는 학생의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여 이 나라 교육정책을 수립하는 방편인 톱니바퀴의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반면, 후자는 더욱 새로운 세계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을 상상하며 자신을 추스르는 주체로 거듭날 확률이 높다. 물론 절대적인 논리는 아니다. 그만큼 여태까지의 교육 관행을 깨트리는 일이 학생에게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는 뜻이다.
위 두 학교는 시대의 어른으로 조명된 적이 있는 효암학원 채현국 선생이 이사장으로 계셨던 곳이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이름을 알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거나 중요한 사람이 되려고 하거나, 그런 데 삶의 목적을 두지 않고 순하고 착하게 지낼 생각만 하면 굳이 남을 이길 이유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이런 삶의 철학이라면 흔히 말하는 ‘성공’은 이웃을 죽이는 크나큰 죄악이 될 수밖에 없다. 성공이야말로 인생의 가치 있는 수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같은 사람을 둔중하게 때리는 망치와도 같은 말씀이다.
2024-01-1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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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새해 결심에서 우리가 놓치는 한 가지
“술을 적게 마시고, 담배를 끊고, 낯선 사람에게 황당한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랍니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여자 주인공 브리짓은 신년 가족 파티에서 새해 결심을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새해의 시작과 함께 자신의 직업적 스킬을 개발하거나 나쁜 습관을 없애고자 하는 열망을 새해 결심으로 집약한다.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새해 결심에는 좌절이 흔히 따라다닌다. 좀 의지가 약한 사람은 새해가 10일만 지나면 예전의 자기로 돌아가며, 한두 달 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새해가 들면서 세웠던 목표를 포기하고 새해 결심 자체를 망각하고 만다. 이런 일이 연례행사처럼 반복하면 사람들은 자신감이 줄어들고, 아예 새해 결심 자체가 쓸데없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하지도 않게 된다. 위의 사례 외에 체중을 6㎏ 줄이고, 토익 점수를 800점 넘기겠다는 등의 목표도 새해 결심의 흔한 유형이다. 그런데 그런 목표는 장기간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새해 결심의 본질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목표는 가치를 지향한다. 매일 한 시간씩 운동하는 것은 목표이며, 이 목표는 건강의 가치를 지향한다. 토익 점수를 800점 넘기겠다는 것은 목표이며, 이 목표는 영어 능력 개발의 가치를 지향한다. 브리짓은 새해가 되면서 일기장에 매일매일 체중과 피우는 담배 개수, 그리고 마시는 술의 양을 적는다. 이렇게 자신의 생활을 제어하고자 하는 것은 목표이며, 그것은 남자로부터 관심을 받아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관계의 가치를 지향한다.
현대 사회는 목표만 지나치게 염두에 두다 보니 자주 가치와 목표를 혼동하는데, 이 둘은 다른 개념이다. 여행에 비유하면 가치는 여정의 방향이며, 목표는 여정에서 거쳐 가는 도시이다. 우리가 부산에서 서쪽으로 여행한다면 진주와 여수는 목표이며, 서쪽 방향이 가치이다. 목표는 도달할 수는 있지만, 가치는 도달할 수 없다. 모든 도시에 도달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서쪽으로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도 여전히 가치를 지향할 수 있다. 매일 한 시간씩 달리기하려는 목표를 한 달이 지나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 우리는 건강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었으며, 3일에 한 번 30분씩 운동하더라도 여전히 그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브리짓은 새해가 들며 결심한 절주와 금연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출판사에서 방송국으로 이직하는 등 다른 방식을 발견하여 매력적 여성이 되어 간다.
사람들이 각자 추구하는 가치는 다양하게 보인다. 그런데 모든 가치를 하나의 단어로 통합하면 그것은 행복이다. 무엇이 행복인지 철학사에서 크게 두 개의 입장이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이며, 다른 하나는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는데, 그것은 행복을 쾌락이라고 간주한다. 행복에 관한 이런 사상을 쾌락주의라고 부른다. 쾌락주의자는 관능적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으로부터 산속에서 고행하는 수행자에 이르기까지 정반대로 보일 정도로 다양한 형태로 살아간다. 쾌락에는 종류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적극적 쾌락은 승리나 음주에서 오는 환희나 유쾌한 상태이며, 소극적 쾌락은 불안이나 고통의 부재에서 오는 덤덤한 마음 상태이다. 우리가 새해 결심처럼 목표를 높이 설정하면 달성에 실패하기 쉽고 실패에는 좌절의 고통이 따라온다. 에피쿠로스는 적극적 쾌락을 향유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목표를 낮추고 욕망을 줄여 아타락시아 즉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인생 전략을 세웠다. 목표가 별것 없으면 실패할 일도 없고 그러면 당연히 좌절의 고통도 없을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학파는 행복을 인간적 역량의 발휘라고 간주한다.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과 다른 점은 독특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우고 탐구하며 행동과 감정을 통제하는 지성 즉 이성의 역량이다. 이 능력을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개발하지 않고 썩히며 사는데 그런 부류의 인생은 동물의 삶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은 계속 지성을 개발하고 활용하며 산다. 이런 삶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지성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수록 인생은 더욱 행복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확신한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어떻든 새해 결심은 궁극적으로는 행복의 가치를 추구하는 소망에서 나온다. 실패가 그런 노력에 자주 동반하더라도 우리가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돌아가더라도 가는 것이고, 늦더라도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2024-01-11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