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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4·19를 통해 5·18을 본다
“오월의 정신은 우리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이고, 우리가 반드시 계승해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지난해 5·18민주화운동(이하 5·18)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낭독한 기념사 한 대목이다. 윤 대통령은 이전에도 5·18에는 각별한 자세를 보였다. 국민의힘 입당 전, 대선후보 때, 당선 첫해에도 광주 5·18민주묘지를 찾아 ‘오월의 정신’을 강조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김기현 전 대표, 인요한 전 혁신위원장, 한동훈 현 비대위원장 등 역대 국민의힘 지도부도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보수로 분류되는 정권도 5·18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5·18에 대한 폄훼와 왜곡은 끊이지 않는다. 극우로 치부되는 세력만 그러는 게 아니다. 정부의 고위공직자나 여당 지도급 인사 중에서도 심심찮게 나온다.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그렇고, 김재원·김진태·김순례 전 의원 등이 5·18 폄훼 발언으로 당의 징계를 받았다. 올해 총선을 앞두고는 국민의힘이 도태우 변호사를 공천했다가 ‘5·18 북한 개입설’ 등 도 변호사의 과거 발언이 문제가 되자 공천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달에는 황상무 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의 5·18 폄훼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4·19혁명(이하 4·19)과 관련해서는 그런 행태를 목도하기 어렵다. 이유가 있다. 4·19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평가가 끝난 사실(史實)이다.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어 낸 대한민국 최초의 성공한 혁명인 것이다. 이런 평가는 국제적으로도 공인됐다. 그 결과 ‘4·19 기록물’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다. 현행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한다. 3·1운동과 함께 4·19 정신이 명시된 것이다. ‘4·19민주이념’은 1962년 개헌 때 처음 수록된 뒤, 1980년 개헌 때 삭제됐다가, 1987년 개헌 때 다시 수록됐다. 헌법 전문은 헌법 제정의 목적과 지향하는 가치가 담긴 최상위 규범이다. 4·19에 대한 여타의 논란을 불허하는 건 헌법 전문이 갖는 그런 권위 덕분이다.
5·18도 정부기관이 오랜 기간 조사와 수사를 통해 그 성격과 의미를 규정해 놓은 상태다. 1995년 제정된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법’은 1980년 광주에서의 민중 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선언했다. ‘북한 개입설’ 따위는 국방부가 10여 년 전에 이미 부인했다. “5·18내란은 국헌 문란”이라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다. 민주화운동으로서 5·18을 대한민국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공히 인정한 것이다.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5·18 기록물’은, ‘4·19 기록물’보다 12년 빠른, 2011년에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는 ‘5·18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에 큰 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의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루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져 왔고, 그런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라고 명기돼 있다. 5·18 역시 4·19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정치적·사회적 평가가 끝난 셈이고, 그렇다면 5·18 정신 또한 헌법 전문에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5·18을 왜곡·폄훼하는 발언을 두고 흔히 망언(妄言)이라고 한다.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망언을 일삼는 자는 욕을 먹기 마련이고 퇴출돼 마땅해서, 특히 정치인인 경우 예외 없이 철퇴를 맞았다. 당사자들은 대개는 반성·사과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5·18 망언’은 좀체 근절되지 않는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한다는 주장이 야권은 물론 여권에서도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과 관련해,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때부터 약속했으며 김기현 의원도 국민의힘 대표 시절 “당의 입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같은 당 유승민 전 의원은 “국민의힘에도 5·18 정신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정치인이 많다”며 “개헌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올해 1월 “5·18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과 정확히 일치한다”면서 “헌법 전문 수록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반대할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미루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다. 총선 후 새 국회에서 여야가 힘을 합쳐 개헌을 추진하면 된다. 대통령과 집권여당, 거기에 제1 야당까지 공통으로 내놓은 약속이 허언으로 끝나는 건 그 자체로 국민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결과물을 도출해 냄이 마땅하다.
2024-04-0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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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3년 차 ‘우크라 전쟁’과 미국 그리고 우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하 ‘우크라 전쟁’)이 지난 2월 24일 만 2년을 넘기고 3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동안의 참상은 말로 다 하기 어렵다. 양측 군인 사상자는 50만 명을 넘었고, 민간인 사상자도 수만 명에 이른다. 전쟁난민은 100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언급된다. 그럼에도 전쟁은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남한과 북한이 만리 밖 이 전쟁의 무기고 역할을 하고 있다. 남한은 ‘우크라 전쟁’을 계기로 방산 수출국으로 떠올랐고, 북한 역시 러시아에 무기를 대량 지원하는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사태의 심각함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크라 전쟁’은 지금 동북아 안보 지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우려되는 건 북한과 러시아의 ‘위험한 거래’다. ‘우크라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제공받는 대가로 러시아가 북한에 첨단 군사기술을 넘겨주는 것이다. 거래는 지난해 9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성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실패를 거듭하던 정찰위성 발사에 성공하고 핵잠수함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판에 최근 러시아와 중국이 ‘전략적 협조’를 강조하며 밀착하고 있어 동북아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더욱 고조될 전망이다.
이는 한반도 전쟁 위기로 직결된다. 한반도 전쟁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결이 다르다. 외국 군사 전문가들의 경고음이 잇따른다. 올해 초 미국 미들베리국제연구소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지크프리트 해커 교수가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에 보낸 기고문이 그 하나다. 두 사람은 “한반도가 1950년 6월 이후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쟁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했다”라고 단정했다.
아닌 게 아니라 북한의 최근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북한은 남한을 ‘제1의 주적’으로 헌법에 명기하고 ‘남조선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 등 전에 없이 과격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말만이 아니다. 실제로도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하며 도발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자칫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극단적인 전망까지 나온다.
북한만 그러는 게 아니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올해 상반기 한미 연합 군사훈련 횟수를 작년 대비 2배 이상 늘린다는 사실을 최근 공개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미일 합동군사훈련까지 치러질 수 있다는 추측도 제기된다. 그렇게 본다면 현재 한반도는 실제로 전시 상황인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8일 충북 괴산군 육군학생군사학교에서 열린 학군장교 임관식에서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위협에 대해 줄곧 강조한 한미동맹을 거듭 확인한 것이다. 현재 우리 안보 상황에서 한미동맹은 필수불가결하겠지만, ‘우크라 전쟁’은 우리 안보 현실이 한미동맹만으로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감행하면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자신했다. 그럴 만도 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이 고조되던 2021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수차례 확인했던 것이다. 고무된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의 길을 터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주저했다. 지난해 7월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대해 “시기상조”라며 사실상 거부 입장을 밝혔다. 실망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에 ‘이스라엘식 안보보장’이라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실질적인 진척은 없었다.
최근에는 미국의 군사지원조차 미국 의회의 반대로 급격히 축소되는 모양새다. 다급해진 젤렌스키 대통령은 세 차례나 미국을 방문하면서 지원을 호소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급기야 올해 1월 바이든 행정부의 예산안이 의회에서 부결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군사지원이 중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망은 더 어둡다. 올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기존 정책이 급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외세에만 의지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재앙이 닥치는지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처절하게 경험했다. 민초들의 궁극적 소망은 현재 발 딛고 살고 있는 이 땅에 전쟁이라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지속되는 것이다. 미국과의 동맹을 통한 안보 우산을 내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미국만 바라보는 행태는 위험하다. 묻게 된다. 지금 우리는 안전한가. 윤석열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라는 헌법상의 책무를 진정으로 다하고 있는가.
2024-02-2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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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코리아 디스카운트, 세금 깎아 줘서 해결?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한국 기업 또는 주식의 가치가 실제보다 저평가된 상태를 일컫는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증시 개장 첫날이었던 지난 2일 자본시장 규제를 과감히 혁파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혁파하겠다는 ‘규제’는 다름 아닌 세금 제도다. 이는 지난해부터 잇따라 발표된 대대적인 증시 부양책에서 거듭 확인된다.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완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와 그에 따른 증권거래세 개편 등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게 그렇다. 요컨대 주식 관련 세금은 모조리 깎아 주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결과는 윤 대통령의 바람에 훨씬 못 미치는 듯하다. 한국 증시가 좀체 회복될 기미가 없는 것이다. 지난해 마지막 거래일(12월 28일)에 2665.28로 장을 마쳤던 코스피 지수는 현재 2500 안팎에 머물고 있다. 코스닥도 부진하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950대까지 올랐던 코스닥 지수는 지금 850대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처럼 맥을 못 추는 한국 증시와는 달리 미국과 일본 등 해외 증시는 훨훨 날고 있다. 특히 미국 뉴욕 주식시장의 S&P 500 지수는 근래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장(한국 주식시장) 탈출’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국내 주식은 하는 게 아니다”라며 미국과 일본 증시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주식 전문가들도 “지금이라도 한국 주식은 팔고 미국 주식을 사라”고 부추긴다. 이런 형편에 외국인들이 한국 증시로 들어올 까닭이 없다. 2020년 초만 하더라도 국내 시총의 35%는 외국인이 보유했는데, 지금 그 비율은 30%에 못 미친다. 윤 대통령의 ‘규제 혁파’ 선언에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해소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전문가들의 시각은 윤 대통령의 선언과는 결이 다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으로는 낮은 주주환원율, 후진적인 기업지배구조, 경영 불투명성 등을 꼽는다. 주주환원율은 기업이 거둔 순이익 중 주주에게 돌려 주는 몫의 비율이다. 미국 상장사의 10년 평균 주주환원율은 90%가 넘는다. 일본이나 유럽도 70%에 근접한다. 그런데 한국은 겨우 29%에 그친다. 투자자 입장에선 한국 기업은 투자 가치가 낮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여기엔 일반 주주의 권리보다 지배주주의 이익을 중시하는 소수 재벌 일가 중심의 후진적인 기업지배구조의 영향이 크다.
이와는 별도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바로 북한과 관련된 ‘한반도 리스크’다. 이때 리스크는 다름 아닌 전쟁 위기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 고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현 정부 들어 그 정도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게 문제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대화보다는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며 북한과의 강대강 대결 자세를 취해 왔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연일 군사적 보복을 강조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이라고 규정지었다. 남과 북 두 지도자의 이 같은 결의는 말에 그치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 한미군사훈련을 비롯한 대북 군사작전 횟수는 급격히 증가했고, 일본의 자위대까지 포함하는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도 전개됐다. 북한도 9·19 남북군사합의를 파기하는 한편 포 사격과 미사일 발사를 통해 위협을 가중시켰다.
두려움과 우려는 해외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미국의 민간 군사 전문가들이 북한의 전쟁 개시 가능성을 경고한 가운데 미국 정부도 북한이 몇 달 안에 공격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심지어는 올해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고, 거기에 불안을 느낀 투자자들이 대거 한국 증시를 떠날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이다.
잘못된 진단은 치명적 처방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금융투자소득세를 폐지하고 상속세를 낮추는 등 세금 제도를 바꾼다고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주주환원 수준을 높이고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등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아니고서는 백약이 무효이며, 설사 그런 대책이 나온다 하더라도 한반도의 평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또한 무용지물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현실을 윤 대통령이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럼에도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 감세 정책을 대대적으로 밀어붙이는 건 결국은 올해 총선을 의식한 물량 공세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든다. 지금 투자자들의 얼굴은 한국의 주가지수만큼이나 파랗게 질려 있다. 민생을 책임져야 할 대통령으로서 가장 화급한 과제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4-01-3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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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이탄희’를 응원한다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과는 일면식도 없거니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지향하는지 아는 바가 없다. 그럼에도 ‘이탄희’를 응원한다. 여기서 ‘이탄희’는 일개 정치인으로서 이탄희에 그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는 ‘그의 간절한 호소’를 응원한다는 것이다.
지난 13일 이 의원은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선거법만은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이때 선거법은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이하 준연동형)다. 준연동형 고수를 주장하는 이는 이 의원 외에도 많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도 준연동형이 유지돼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의원처럼 자신의 정치적 자산과 가능성까지 내걸고 준연동형 사수에 나선 이는 아직 없다. 그래서 ‘이탄희’를 응원한다.
민주당이 준연동형을 놓고 흔들리고 있다. 이재명 대표 체제의 민주당은 당초에는 내년 총선도 준연동형으로 치른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 대표 스스로도 준연동형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병립형 비례대표제’(이하 병립형)로 입장을 정리하자 민주당 지도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년 총선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는 병립형으로의 회귀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또다시 위성정당을 만들 가능성이 큰 형편에서 현행 준연동형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의원을 비롯해 민주당 내에선 병립형 회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속출하고 있지만, 명분보다는 총선 승리라는 실리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 당 주류의 생각인 듯하다. 이는 지난 14일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내년 총선에 적용할 비례대표 배분 방식을 논의하자고 열린 의원총회였으나, 난상토론만 벌어졌을 뿐 뚜렷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병립형은 의석수와 상관없이 선거 결과 나타난 정당득표율만큼 비례대표 의석을 나눠 갖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정해진 비례대표 의석이 총 50석이고 A 정당이 5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면 25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가져가는 것이다. 이 경우 A 정당이 획득한 지역구 의석은 별도다. 따라서 거대 정당이 지역구는 물론 비례대표 의석까지 대거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연동형은 정당득표율만큼 의석을 얻지 못했을 경우 비례대표에서 득표율만큼의 의석을 보충해 준다. 준연동형은 이렇게 배분하는 비례대표 의석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한다. 지역구에서 한 석도 얻지 못하더라도 정당득표율만 어느 정도 얻으면 의석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정당의 원내 진입에 유리하다.
2016년 총선 때까지 적용되던 병립형을 2020년 현행 준연동형으로 바꾼 데는 이유가 있다. 거대 정당 위주의 승자독식 구조를 뜯어고쳐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선거제도를 만듦으로써 정치혁신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요컨대 병립형으로의 회귀는 그런 정치혁신을 향한 발걸음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가 그만큼 퇴행하는 셈이다.
현행 준연동형의 문제는 위성정당이다. 2020년 총선 때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을 만들어 비례대표 의석까지 대거 확보하는 편법을 동원했고, 민주당도 그와 다를 바 없는 행동으로 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다. 정치혁신의 취지를 거대 양당 스스로가 훼손한 것이다.
그래서 정치권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게 위성정당 방지책이다. 이 의원은 총선 이후 2년 이내에 거대 정당과 위성정당이 합당할 경우 국고보조금의 50%를 삭감하는 내용을 담은 정치자금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그게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정치혁신을 위해 정치권이 약속했던 준연동형을 지켜야 한다는 이 의원의 주장은 정당하다.
대선 후보 시절 ‘위성정당 출현 방지를 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공약했던 이재명 대표는 최근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말을 바꿨다. 그에 대해 이 의원은 “멋없게 이기면 세상을 못 바꾼다”고 응수했다. 두 사람 중 누가 옳은가. 판단은 각자 다르겠지만, ‘국민에게 약속한 정치혁신 약속을 이렇게 쉽게 폐기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은 던질 수 있겠다.
정치혁신 같은 거창한 그 무엇도 좋지만, 그에 앞서 원칙과 약속이 지켜지는 정치를 보고 싶은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 꼼수나 편법 따위에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은 속지 않을 지성을 갖고 있다. 이를 믿는 제2, 제3의 ‘이탄희’가 계속 나와 우리 정치권의 주류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3-12-1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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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이렇게 해서 물가 잡겠나
“질소를 샀는데 과자가 들어 있더라”라는 우스개가 유행한 적이 있다. 제과업체들이 포장지 안 내용물은 줄이고 대신 질소를 더 충전해 겉으로는 풍성한 것처럼 꾸민 데서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 비슷한 일이 기승을 부린다. 슈링크플레이션이 심심찮게 목격되는 것이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줄인다’는 뜻의 ‘슈링크(shrink)’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기업이 제품 가격은 그대로 두면서 용량을 줄이는 식으로 가격 인상 효과를 노리는 행위를 말한다.
슈링크플레이션의 행태는 다양하다. 캔맥주나 통조림류는 슬그머니 용량을 줄이고, 냉동만두와 핫도그 등은 봉지 속 개수를 줄이는 식이다. 과즙 함량을 줄이는 주스가 나오는가 하면, 아예 음료수 병 모양을 가운데가 쑥 들어가게 바꾸어서 용량을 줄이는 사례도 있다. 고깃집에선 1인분 양을 축소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꼼수로 가격을 인상하면서도 소비자들에게는 제대로 알리지 않고, 이를 규제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내용물의 양을 줄이거나 품질을 떨어뜨린 사실을 고지할 의무가 국내엔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13일에서야 겨우 슈링크플레이션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을 뿐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씁쓸할 따름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뒤늦은 ‘검토’ 발언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다. 정부는 지난 9일 범부처특별물가안정체계를 가동하고 각 부처 차관을 물가안정책임관으로 지정했다. 모든 부처 차관이 각자 소관 품목의 가격·수급을 점검하고 품목별 대응 방안을 마련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특히 농림축산식품부는 빵·우유 등 28개 주요 농식품 품목의 전담자를 지정했다. 해양수산부도 천일염 등 수산물 7종을 집중 관리키로 했다. 행정안전부 차관이 중심이 돼 지도·협의하는 지자체별 물가관리관도 운영하기로 했다.
이러한 방식이 물가안정에 얼마나 효과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 사업자 입장에선 설탕, 소금, 밀가루 등 원재료뿐만 아니라 전기요금, 가스요금 등 운영비까지 오르는 상황에서 정부의 가격 동결 압박이 심해지면 어쩔 수 없이 꼼수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우려가 현실이 돼 나타난 것이 바로 슈링크플레이션인 것이다.
각 부처 차관이 물가안정책임관이 돼 소관 품목의 물가를 관리토록 하는 방식은 기시감이 든다. 10여 년 전 이명박 정부 때도 물가를 잡겠다며 52개 품목을 지정관리했다. 효과는 없었다. 정책 시행 초기에는 기업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며 가격 인상을 자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가 풀어지자마자 해당 품목들의 가격이 대폭 뛰었던 것이다.
품목별 물가 관리는 일종의 가격 통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격 통제로 물가를 잡은 전례가 없다는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부의 통제로 기업들이 가격 인상을 미루다 보니 일시적으로 가격이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만 있을 뿐이며, 나중에는 기업 이윤이 감소한 만큼 급격히 가격을 올리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요컨대 물가안정책임관 지정은 결국 미봉책에 그칠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미 장기화된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종합적으로 마련하고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을 총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 비축 물량을 제때 풀거나 할당관세를 인하하는 등 공급을 확대함으로써 먹거리 물가를 잡는 한편, 경기침체 등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통화량을 정밀하게 조정하는 식의 대처가 요구된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이달 들어 물가 상승세가 소폭이나마 꺾일 것으로 내다봤지만, 실생활에서 물가 상승 체감도는 여전히 고공행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의 가격이 무섭게 치솟고 있다. 먹을거리는 물론 버스, 비누, 생리대, 심지어 아기 기저귀까지 안 오르는 게 없다. 얇아진 지갑으론 감당하지 못할 이러한 물가 폭등에 서민들은 속만 태울 뿐 어찌할 방도가 없다.
정부가 고물가 다잡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당장 급한 불부터 끄자는 생각으로는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일각에선 정부의 현재 물가 안정 대책이 내년 4월 총선을 겨냥한 땜질식 처방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고물가에 따른 국민적 불만을 누그려뜨려 정부·여당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려는 목적이 깔려 있다는 의심이다. 설마 사실일까마는, 여하튼 업체들은 야바위식 꼼수로 가격 인상을 꾀하고 정부는 정부대로 눈속임 대책으로 일관한다면 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3-11-1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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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왜 책임지는 이가 아무도 없나
근래 도로에 교통경찰이 유난히 눈에 자주 띈다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게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게도 됐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교통법규 위반 과태료 부과액이 6322억 원. 2년 전 같은 기간에 비해 59%나 급증한 수치다. 과태료 부과 건수로 봐도 1185만 건으로 2년 만에 54% 증가했다. 혹시 세수 결손 때문? 설마 사실일까 싶지만, 그래도 윤석열 정부가 역대급 세수 결손을 각종 과태료 수입으로 벌충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은 충분히 할 수 있겠다.
지난 9월 기획재정부는 올해 국세 수입 계산이 잘못됐다며 재추계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가 당초 계산한 올해 국세 수입 전망치는 400조 5000억 원. 그런데 수정 발표한 금액은 341조 4000억 원이었다. 무려 59조 1000억 원이나 낮춰 잡은 것이다. 감소율이 14.8%로 우리 정부 역사상 최대 폭이다. 항간에서 ‘세수 펑크’라 부를 만하다. 이미 국가의 정책이나 사업은 대부분 기 전망치에 맞춰 짜놓은 형편이라 이런 역대급 세수 결손은 큰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기재부는 세수 오차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며 세수 부족에 따른 민생과 거시경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는 태평스러운 해명을 내놓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런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당장 나라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지난 8월 기준 중앙정부 채무는 1110조 원을 돌파했고 재정적자는 60조 원을 넘어섰다. 세수 결손으로 국세 수입이 줄어들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돈이 없으니 딴 데서 빌릴 수밖에 없다. 정부가 세수 부족을 채우기 위해 한국은행으로부터 빌린 금액이 올해에만 113조 원이 넘는다. 관련 통계가 전산화된 2010년 이후 가장 많은 금액이다.
나라 살림만이 아니다. 세수 결손 때문에 민생 현장 곳곳에서 곡소리가 난다. 아이들 교육환경이 한 예다. 정부는 전국 유·초·중·고의 교육환경 개선 등을 위해 각 교육청에 교부금을 지원하는데, 올해에는 세수 부족 탓에 당초 편성액보다 10조 원 이상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학생 한 명당 200만 원 안팎의 결손이 발생한다는데, 그만큼 교육의 질이 떨어지게 됐다. 국가 미래를 위한 투자로 여겨지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도 크게 줄었다. 내년도 예산이 올해보다 16.7% 삭감된 25조 9000억 원 규모에 그치는 것이다. 그동안 나라 살림이 아무리 어려워도 연구개발 예산을 깎는 일은 없었는데, 세수 결손 때문에 어쩔 수 없어 대폭 삭감한 것이다. 각 지방자치단체에도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 국세 부족으로 중앙정부가 지방에 나눠 주는 교부세가 줄기 때문인데, 실제로 부산시의 경우 2600억 원이 넘는 재정 결손이 불가피한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그대로 복지 등 민생 예산의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울한 전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는 세수 부족에다 국가채무 급증을 이유로 긴축재정을 고집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정부는 해명하지만, 여하튼 그 여파로 국가 경제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우고 있다. 우선, 다른 데도 아닌 국제통화기금(IMF)이 우리 경제를 박하게 평가한다. IMF는 지난 10일 한국의 내년 성장률 전망치로 2.2%를 제시했다. 이에 정부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그다지 낮지 않은 전망치라고 둘러댔지만, 그렇게 볼 사안이 아니다. IMF는 지난해 10월만 해도 한국의 내년 성장률을 2.7%로 전망했다. 1년 사이에 0.5% 포인트(P)나 끌어내린 것이다. 문제는 이 마저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근 발발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전쟁 등 중동 위기 요인까지 반영하면 성장률 하락세가 더욱 가팔라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전문가들은 이러다가 우리나라도 과거 일본과 같은 지독한 저성장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다면 정부가 물가라도 효율적으로 안정시켜야 민생의 숨통이 어느 정도는 트일 텐데 그렇지도 못하다. “숨만 쉬는데도 돈이 들어간다”고 할 정도로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정부의 긴축재정에도 물가는 물가대로 폭등하니 서민들이 제대로 살 수가 없다.
한스러운 것은 이런 사태에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대급 세수 결손으로 나라살림과 민생이 결딴날 지경인데, 국가정책을 주도하고 나라살림을 경영하는 직무를 가진 이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대로 자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개탄할 노릇이다. 국가나 조직을 운영하는 기본원리로 흔히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말하지만, 기실 상을 공정하게 주는 일보다 벌을 엄정하게 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상에 신뢰가 없으면 불만에 그치지만 벌이 잘못에 상응하지 못하면 기강이 흐트러지고 과오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추상같은 벌이 있어야 나라가 살고 국민이 산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니 목하 나라 꼴이 참 고약하게 됐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3-10-1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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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가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무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사법부장 김병로, 체신부장 신익희…. 1945년 9월 8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면면이다. 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자생적인 건국 운동이던 건국준비위원회를 확대·개편해 조직됐다. 이를 주도한 주체는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그런데 그 인적 구성이 의아하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김병로 등 주요 부처 수장 상당수가 우익 인사다. 더구나 박헌영은 내각에서 뺐다.
미군 진주가 임박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은 다급했다. 좌익 인사만으로 정부를 구성할 경우 무엇보다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우익 인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조선공산당은 배후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전형적인 통일전선전술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여하튼 조선공산당의 시도는 실패했다. 미군의 영향도 있었고 우익 인사들의 반발도 컸지만, 무엇보다 당시 민중의 정서가 조선공산당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78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가 이념 논쟁으로 시끄럽다. 광주광역시가 열려는 정율성 음악제를 두고 정부·여당이 비난을 쏟아붓더니, 곧이어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흉상 철거(또는 이전) 여부를 놓고 온 나라가 홍역을 앓고 있다. 정율성도 홍범도도 항일투쟁의 공로는 기림을 받기에 충분하지만, 각각 ‘중공’과 ‘소련’에 연관된 이력 때문에 찬반 논란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었다. 이들을 비난하는 측은 ‘국가에 해를 끼친 인물’로 낙인찍은 채 전문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해석에는 눈과 귀를 닫는다.
작금의 이런 이념 논쟁이 전혀 뜬금없는 건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시작되면서 주요 직책에 임명된 인사들의 면면에서 이미 충분히 짐작됐다. 특히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실과 내각 책임자들 중 상당수가 자유와 반공을 유달리 강조해 왔다. 이들 중 몇몇 인사들에 대해 일각에선 극우 또는 뉴라이트라는 타이틀을 붙여 비난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런 형편이니 윤석열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 운운하며 이념 논쟁의 선두에 나서는 모습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자유와 반공을 외치는 심리의 근저에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보다 직접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이는 한국전쟁이라는 참상을 겪은 이후 어쩔 수 없이 배태된 우리 국민의 본능적 감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체제 경쟁의 승패는 확연히 드러났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나 국제적 위상 등 모든 면에서 지금 남한은 북한에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우려하던 군사력에서도 남한의 우위가 확인된다. 비정부기구인 ‘글로벌 파이어 파워’(GFP)가 올해 6월 발표한 ‘2023년 세계 군사력 지수’를 보면 남한은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영국에 이어 세계 6위다. 북한은 겨우 34위다.
이쯤이면 남한과 북한의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난 게임이다. 정율성이나 홍범도 같은 인물들을 남한 사회가 수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체제 경쟁에서 완승했다는 그런 자신감이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이제는 달라졌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윤 대통령도 지난달 15일 광복절 축사에서 반국가세력을 언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극명한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고 강조하지 않았나.
이미 끝난 게임에 호들갑은 공연한 낭비일 뿐이다. 반국가세력?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봐야 한 줌도 안 되는 그들의 주장과 행태 따위에 흔들릴 만치 우리 사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정율성이든 홍범도든 그들의 행적을 애써 숨겨 가며 미화할 필요도 없고 막연한 의심과 두려움에 내칠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다 밝혀 두면 된다. 그게 강자의 면모다. 78년 전 조선인민공화국을 거부했던 민중인데, 체제 경쟁에서 완승한 지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라고 하는데, 이미 남한의 국력은 북한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핵 도발? 원래 약한 이들이 공갈하는 법이다. 국제 사회에 “나 좀 봐 달라”며 부리는 북한의 투정일 따름이다.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고? 걱정 마시라. 우리에겐 ‘굳건한’ 한미 동맹이 있다. 올해 4월엔 윤 대통령의 방미로 미국의 핵우산을 구체화한 ‘한미 핵협의그룹(NCG)’까지 만들어졌다. 여차하면 하늘에선 미국 전략폭격기가, 바다에선 미국 핵 항모가 전개될 것이다. 거기다 지난달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로 3국간 안보협력체가 공고화하면서 북핵 대응력은 한층 높아졌다. 도대체 두려울 게 무엇인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3-09-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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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방산 수출, 성과도 좋지만 최대한 은밀해야
윤석열 정부의 무기 등 방산 수출 성과가 눈부시다. 지난달 27일 들려온 소식은 하나의 작은 사례다. 국내 한 방산업체가 호주로부터 대규모의 장갑차 계약을 따냈다는 게다. 2027년부터 총 129대의 장갑차를 비롯해 각종 군사설비를 납품하게 됐다는 내용인데, 그 규모가 최소 60억 호주달러(약 5조 2000억 원)에 이른다.
해당 업체는 내친김에 루마니아 등 동유럽으로 수출 전선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계약 성공은 국산 장갑차 성능의 우수성과는 별도로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두 차례(올해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의 G7 정상회의와 지난달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NATO 정상회의 때)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를 만나 방산 수출 관련 의견을 나누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정부 들어 방산 수출이 급증했음은 올해 2월 발간된 〈국방백서〉에서 확인된다. 그에 따르면 지난해 대규모 수주 계약이 잇따라 체결돼 한국의 방산 수출이 역사상 최대 규모인 173억 달러(약 22조 원)의 실적을 올렸다. 백서는 또 방산 수출 대상 지역이 중동·아시아 위주에서 유럽까지 확장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방산 수출은 돈으로 환산되는 이득이 많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으로선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대규모 고용효과도 노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역대 정부는 방산 수출에 공을 많이 들였다.
이명박 정부 때 방산업을 국방 개념에서 수출 개념으로 전환했고,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역시 같은 기조를 유지했다. 이 덕분에 2016년만 해도 세계 방산 수출 시장에서 1% 점유율에 그쳤던 한국은 5년 만인 2021년에는 2배 이상 증가한 2.8%의 점유율로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추세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해 7월 폴란드와 124억 달러(약 16조 원)에 해당하는 수출 계약을 체결한 것은 그 절정이었다. 단일 계약으로는 한국 역대 방산 수출 사상 최대 규모였던 것이다.
이는 윤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스페인에서 열린 NATO 정상회의에서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만나 방산 협력을 논의한 직후에 이루어진 성과였다.
어쩌면 윤 대통령의 최대 치적이 될 수도 있겠는데, 여하튼 정부는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2027년까지 방산 수출 시장점유율을 5%로 높여 미국, 러시아,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의 방산 수출국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돌아봐야 할 대목이 있다. 방산 수출은 살상 무기를 파는 행위인데, 이게 크게 늘었다고 해서 마냥 반길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무기를 수출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전쟁을 전제로 한다. 무기는 전쟁을 통해서만 가치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거칠게 말하면, 한국도 무기를 많이 팔기 위해서 점점 전쟁이 필요한 나라가 돼 가고 있는 셈이다.
방산 수출은 동전의 양면 같은 성격을 갖는다. 무기를 수입하는 국가는 반기겠지만, 그 수입국과 갈등 중인 상대국은 무기를 파는 당사국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폴란드와 역대 최대 방산 수출 계약을 맺었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이게 상당히 위험하게 비칠 수 있다. 폴란드가 무기를 수입하는 건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러시아를 상대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어디까지나 폴란드라는 개별 국가와의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아무리 주장해 봐야 러시아에 통하기 어렵다. 입장을 바꿔, 러시아가 북한에 대규모 무기를 수출한다면 우리 기분은 어떻겠는가.
도의적 명분으로도 방산 수출은 자랑거리가 못 된다. 수출되는 무기는 기본적으로 인명을 해치는 상품이고 그래서 당하는 쪽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문재인 정부를 비롯한 이전 정부는 겉으론 평화를 강조하면서도 뒤로는 방산 수출 확대에 주력했다. 부끄러운 이율배반이라는 비판이 나올 법도 하다. 요컨대 방산 수출은 드러내 놓고 알릴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마약 많이 팔았다고 자랑할 수 없는 것처럼.
방산 수출이 미래 성장 동력일 수는 있다. 특히 지금처럼 반도체를 비롯해 수출이 급감하는 현실에서 방산 수출 증대는 우리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국가수반과 정부가 공개적으로 나서서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 대열에 오르겠다”고 외칠 일은 아니다. 방산 수출은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2023-08-0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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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170석, 그 달콤하고 치명적인 유혹
170석!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여권 관계자들이 모인 사적인 자리에서 제시한 내년 ‘국회의원 선거’(총선)에서의 목표 의석수라고 한다. 이를 두고 왈가왈부 말들이 많다. 22대 총선 예정일이 내년 4월 10일이니 앞으로 9개월 남짓 남았다. 170석이면 ‘거대 야당’이라고 불리는 더불어민주당이 현재 보유한 의석수와 맞먹는다.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야만 가능한 의석인데, 윤 대통령의 ‘170석 목표’는 단순한 희망 사항일까 아니면 정밀한 계산의 결과일까.
공교롭게도 170석은 올해 초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당 대표 후보로 나섰던 안철수 의원이 호언장담했던 목표 수치다. 안 의원은 당시 ‘170V’라는 이름으로 캠프 출정식도 가졌다. ‘170V’는 내년 총선에서 170석 승리를 따내겠다는 의미였다. 안 의원은 자신이 수도권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다면서 “수도권 121석의 과반인 70석을 차지하면 비수도권에서 확보할 수 있는 100석에 더해 170석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의 170석 확보는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19대 총선이 있었던 2012년. 지금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까지 심기일전해 총선을 치렀다. 그렇게 해서 얻은 의석수는 152석. 그전 2008년의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53석을 얻는 데 그쳤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불과 2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도 국회 과반 의석을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170석을 얻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에서 정체 중이고, 국민의힘이 민주당에 지지율로 밀린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과 안 의원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170석을 콕 짚어 말한 걸까.
이와 관련해 정치분석가인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이 여러 언론을 통해 밝힌 내년 총선 전망이 화제가 되고 있다. 엄 소장은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 180석 압승’을 정확히 예측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금 분위기라면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170석을 얻는 반면 민주당은 120석 달성도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이런 예측치에 대해 온라인상에서는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는 엉터리 예측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엄 소장의 전망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가 있다.
엄 소장이 주목한 부분은 유권자 지형 변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지난해 6월 지방선거 세대별 투표율 자료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 성향이 강한 60대 이상은 40%로 이전 선거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4050 세대는 37%로 하락세였고, 2030 세대는 22.9%로 매우 낮았다. 2030 세대 중 특히 남성들의 정당 지지율에서 민주당은 국민의힘에 비해 열세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자에서 국민의힘 34% 민주당 19%, 30대 남자에서 국민의힘 38% 민주당 27%라는 것이다. 요컨대 2030 남성 유권자가 현재의 분석대로 투표하면 민주당의 대패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엄 소장은 그러면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와 총선에서의 표심이 꼭 일치하는 건 아니라고 지적했다.
선거가 아직 9개월 이상 남은 시점에서 이런 전망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는 무리지만, 여하튼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이 제안한 170석을 향해 이미 총진군에 나선 듯하다. 당내에선 검사 출신을 비롯한 윤 대통령 측근 공천설 등 일부 반발과 균열의 모습이 보이고 야권에선 윤 대통령의 ‘170석 목표’ 언급이 선거 개입이라는 비판을 제기하지만, 국민의힘 지도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다.
태생적으로 정권 획득이 목표일 수밖에 없는 정당으로서 선거에서의 승리, 이왕이면 압도적 승리는 더없이 중요한 가치일 테다. 윤 대통령으로서도 자신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갖는 내년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 확보는 차후 국정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윤 대통령의 170석 운운과 그에 발맞춘 여당의 총력 태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돌아봐야 할 게 있다. 170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승리에 앞서 어디까지나 원칙과 정도를 지킨다는 의지를 갖고 실천해야 한다. 이기는 데 매몰돼 편법과 꼼수를 동원하고 심지어는 국민을 편 갈라 서로 적대하게 만듦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행태는 없어야 한다. 원칙과 정도가 중요하다는 건 민주당의 현재 모습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21대 총선에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민주당의 현재 모습은 초라하다. 170석 안팎의 의석을 갖고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고 비도덕적이며 무책임하다는 비난까지 듣는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국민의힘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2023-06-2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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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윤석열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에 대해 “민생 안정을 위한 경제지표를 찾아볼 수 없고, 경제 정책이라는 게 그냥 무(無)의 상태”라고 비판했다. 지난 16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서 그리 말했다. 그래도 한때는 “별의 순간” 운운하며 윤 대통령을 한껏 치켜세우던 김 전 위원장인데, 왜 이렇게 모진 말을 했을까.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곰곰 돌아보면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싶다.
김 전 위원장의 비판이 있기 하루 전인 지난 1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꽤 흥미로운 자료를 발표했다. 윤 대통령의 취임 후 1년간 연설문 190건을 분석했더니, ‘경제’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557번) 언급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한 경제는 그의 지난 국정 운영에서 얼마나 치중됐고 또 성과를 거뒀을까.
아쉽게도 경제 전문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박한 편이다. 윤석열 정부에게서 경제가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건 한·일 관계 정상화에 따른 경제적 효과인데, 수출 등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실제 얼마나 큰 효과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현재 각종 지표에서 위기 징후가 포착된다는 점이 문제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11일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5%로 전망했다. 지난 2월 1.8%를 제시했는데, 3개월 만에 0.3% 포인트 낮췄다. 그전에 정부와 한국은행이 제시한 전망치는 1.6%였다. 여하튼 통계 작성 이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2%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 오일쇼크의 1980년, 외환위기 때인 199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코로나19가 확산하던 2020년에나 볼 수 있었던 일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의 급격한 감소세가 지목된다. 수출은 지난해부터 계속 줄고 있고 올해 들어서도 추세는 바뀔 조짐이 없다. 이달 들어서만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6.1%나 줄었다. 이 탓에 무역적자는 15개월 연속 이어지고 있다.
수출이 안 되면 내수라도 살아나야 하는데 그마저도 비관적이다. 코로나19 이후 살아나는 듯했던 소비는 작년 말 이후 계속 내리막이다. 투자나 고용 등 다른 내수 전망도 어둡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물가는 고공행진이고 금리는 내릴 줄을 모른다. 수출도 안 되고 내수도 살아나지 않으니 경기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 외부 환경에도 악재만 더해질 뿐이다.
정부는 국내 경기가 올해 하반기에는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일부 전문가들은 오히려 하반기에는 더 힘들어질 수 있다며 우리 경제가 전에 없는 혹한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국민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전기 요금, 가스 요금, 식자재 요금, 교통비 등 시쳇말로 월급 빼고는 안 오르는 게 없다. 서민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전기와 가스 요금의 경우 올해 1분기에만 1년 전보다 30.5%나 올랐다. 이는 1988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더 답답한 건 이런 사태가 지난해 이미 충분히 예상됐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지 국외 여건에 따른 형편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할 따름이다. 하지만 국민 눈에는 정부가 경제에 너무 신경을 안 쓰는 것으로 비친다. 서민들은 아우성일 수밖에 없다.
봇물처럼 이어지는 개인회생 신청이 좋은 예다. 개인회생은 경제적 파탄으로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가 최저생계비라도 확보할 수 있게 빚을 줄여 달라고 법원에 요청하는 행위다. 개인회생 신청이 증가한다는 건 그만큼 궁지에 몰린 서민이 많다는 의미다. 통계에 따르면 올해 3월 법원에 신청된 개인회생은 1만 1200여 건이다. 월간 개인회생 신청 건수가 1만 건을 웃돈 것은 2014년 7월 이후 처음이다. 같은 이유로 자영업자도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해 말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1019조 8000억 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외교·안보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로 인해 한·미 동맹의 틀에 일본까지 가세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이제는 경제, 특히 서민 경제도 돌아봐야 한다. 이는 외교·안보보다 더 근원적이고 필수적인 국정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경영의 으뜸은 경제라는 사실이 강조됐다. 경제는 곧 민생이고 민생을 살리는 일이 국정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옛말에 “나라의 근본은 국민(백성)이고, 먹는 일은 국민이 하늘로 여기는 바다”(民惟邦本 食爲民天)라고 했다. 다른 모든 가치에 앞서는 게 먹는 것, 곧 경제라는 뜻이다.
2023-05-23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