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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생명 다루는 의사들이 그럴 리 없다
대동강물이 풀린다는 우수가 한참 지났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천지만물이 기운생동하는 절기. 동토를 견딘 풀과 나무들이 볕 좋은 뒷산 언덕에서 싹 틔우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봄이 한창 몸 풀 채비에 분주하니, 온 세상은 이내 울긋불긋 꽃 천지로 흐드러질 테다.
봄 기지개가 이리 반가운 이들이 한둘이겠냐만, 겨우내 병을 앓은 사람들만 할까. 만물이 깨어나는 이즈음은 육신의 고통으로 서러웠던 환자들이 회복과 치유의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시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의료 현장은 꽁꽁 얼어붙어 아직도 차갑고 혹독한 겨울이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의료 공백이 장기화할 우려가 커지면서 국민의 건강권이 위기에 처했다는 답답한 소식이 봄의 길목을 가로막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찾아본다. 의료인이 지켜야 할 이 윤리강령은 고대로부터 전승돼 오다 1948년 세계의사협회의 ‘제네바 선언’으로 확립된 이래 여러 차례 수정돼 지금에 이른다. 그중 가장 눈길 끄는 대목.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이런 내용도 있다. ‘나는 인종·종교·국적·정당·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해 오직 환자에 대한 의무를 지키겠노라.’ 의사의 본분은 생명을 최우선시하는 고귀한 뜻에 있다는 것. 이는 의료가 돈이나 명예를 넘어선 초월적 숭고함의 영역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의사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의료 현장을 떠나는 집단행동에는 그럴 만한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례로부터 그것을 살필 수 있다. 의약분업 정책에 맞선 2000년, 원격 의료에 반대한 2014년, 코로나19 사태 때 의대 정원 확대를 막은 2020년. 그때마다 의료계는 단체적으로 저항했는데, 국민들은 그 연유를 따져 묻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그것이다. 의사들은 그렇게 의료계 내부 모순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국민들에게 각성의 계기를 제공했다. 소중한 공로다.
현재 전국에 번진 의료 공백 사태는 전공의들이 앞장선 4년 전과 많이 닮았다. 당장 3월에는 전임의와 교수들마저 병원을 떠날 가능성이 점쳐진다. 환자들의 피해 확산과 의료 대란의 격화는 예정된 수순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번 사태 속에서도 역설의 진리를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2024년 의대 정원은 35년 전과 비슷한 규모인데 그 기간 한국의 인구는 21.9% 증가했다는 점, 노인 인구가 5배 늘어나는 동안 의사 인력은 동결됐다는 점,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한국은 2.6명으로 일본(2.6명)이나 미국(2.7명)과 비슷하다는 의사단체의 설명은 알고 보면 한의사까지 포함한 것으로, 한의사를 제외하면 의사 수는 2.1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제일 적다는 점 등등. 의사들이 집단행동으로 강경하게 이슈화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들이다.
시간이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깨닫게 해 준 기여도 있다. 우리나라 응급·필수 의료체계를 떠받치는 전공의 체제가 그것이다. 전공의는 집단행동 때마다 반복되는 의료 공백의 장본인이다. 극심한 노동 강도에 시달리면서도 의대 정원 확대에 앞장서서 반대하는 모순적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나중에 전문의가 돼 개원하면 고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형적 의료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사태의 근본적 해결은 난망하다. 이렇게 한국 의료의 민낯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전공의들이 근무지 이탈을 통해 직접 몸으로 증명한 덕분이다.
의사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다. 생각 없이 집단행동에 나설 리가 없다. 끝내 파국의 길을 걷고자 원할 리도 없다.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고, 국민들에게 그 심각성을 각인하려는 큰 뜻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일부는 소중한 일터까지 과감히 포기했으니 그야말로 ‘살신성인’이다. 의료인들의 숭고한 의지, 헌신과 공로를 잊어선 안 되겠다.
한 가지 부연하고자 한다. 집단행동 같은 극단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의사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의료 현장을 떠나지 않는 의사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생명과 목숨을 최우선 가치로 받들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묵묵히 실천하는 의사들. 이들이 의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의사들의 의중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넓히는 방향으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 때다. 현장을 떠난 의사들은 더 늦기 전에 복귀하는 게 옳다. 집단행동으로 보여준 의사들의 참뜻은 이미 국민에게 다 전달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2024-02-2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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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행복한 대통령의 길
2020년 출간된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은 우리나라에서 박수받고 퇴임하는 대통령이 드문 이유를 살핀 책이다. 역대 대통령들을 국내 정책·외교·언론·리더십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 결과가 그 근거다. ‘대권’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대통령제는 ‘제왕적’인데, 최고 통치권자가 무소불위의 힘으로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행태야말로 불행의 주된 원인이라는 게 책의 요지다.
이 책의 화두가 지금 눈길을 끄는 이유는 22대 총선이 불과 두 달 반 앞으로 바싹 다가와서다. 한국의 정치 구조상 대통령과 총선의 역학관계는 정권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대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대통령실과 정부·여당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즈음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는 두 개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법률안 거부권’과 ‘선심성 정책’이 그것이다. 그런데 거부권은 정치 공세에 대한 정당한 행사로 인식되고, 선심성 정책은 ‘민생’을 위한 것으로 포장된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지금까지 여덟 차례를 기록 중이다. 양곡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과 이른바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특검법·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이 그 목록이다. 현재 고심 중인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거부까지 더해지면 9회가 된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역대 대통령(이승만 43회, 박정희 7회, 노태우 7회, 노무현 6회, 이명박·박근혜 각 1회)의 사례와 비교해도 한참 과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단연 최다다. 아직 대통령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거부권은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고유 권한이지만 위헌 혹은 국익 침해 등 헌법적으로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거부권이 ‘전가의 보도’가 된 이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지 의문이다.
특히 ‘김건희 특검법’ 반대는 거부권 논란의 핵심을 이룬다. 모든 의혹을 털어낼 기회를 대통령 스스로 저버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엇보다 국민 70% 이상이 이 법안을 찬성하고 65% 이상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반대한다. ‘김건희 리스크’는 최근 명품 가방 수수 의혹까지 겹쳐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정면충돌로 번진 상황이다.
결국 거부권 남용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단’의 의미로 읽힐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국민 여론이나 민심의 자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의미다.
거부권 행사의 반대쪽에 ‘선심성 정책’이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지난 한 달여 사이 쏟아진 감세·현금성 지원 관련 정책이 20여 건에 이른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증권거래세 인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비과세 한도 대폭 상향, 상장기업의 기업 승계를 돕는 상속세 완화 시사 등등. 이전에 수시로 발표한 세금·전기요금·은행 이자 인하 등 대책까지 합치면 단순 나열하기에도 숨이 벅차다.
문제는 ‘민생 안정’이라는 당위만 있지 치밀한 준비 끝에 나온 정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체계적이고 일관된 정책 결정 과정보다는 일시적 성격의 행사에서 즉흥적으로 발표되는 일이 잦다. 대통령실에서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총리를 비롯한 각 부처 장관은 하달된 정책의 집행 기구에 불과하다는 의혹이 여기서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주무 부처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정책 혹은 갑자기 기조가 바뀌는 정책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길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선심성 정책 안에 아무런 재원 대책이 없다는 데 있다. 세수 규모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대목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대부분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라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결국 총선을 앞둔 ‘포퓰리즘’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책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규정된 임기 안에서 한시적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업적을 이어받아 좋은 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 잘못된 점은 시정하는 것이 원칙이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 대통령의 말로가 불행했던 건 저 원칙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대개 자기편 잘못은 감싸고 상대편은 악(惡)으로 여겨 타격했다. 그 틈새로 측근들의 호가호위, 계파 정치, 연고·학벌주의가 판을 쳤다. 윤 대통령과 현 정부의 잦은 거부권 행사와 설익은 선심성 정책이 이런 폐해를 가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길 바란다. 대통령의 불행은 나라와 국민의 불행이다. 불행은 겪을 만큼 겪었다. 민심과 국정을 외면한 채 불행의 길로 들어서는 대통령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4-01-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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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자식을 먼저 보내는 슬픔
한 해를 돌아보는 계묘년의 끝자락이다. 늘 그렇듯, 만족과 성취감보다는 반성과 후회가 더 수북한 높이로 쌓이는 시간이다. 밀실(개인)에서도 그렇고, 광장(사회)에서도 그렇다. 올해도 이 땅에는 무수한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극한의 고통이다. 왜 그런가. 망자는 우리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면식도 없는 이의 죽음 앞에서 상실감 혹은 통증을 느끼는 건 그런 이유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일본 소설가는 말했다. 인간에게는 여러 종류의 ‘나’가 있다고.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나’, 즉 ‘분인(分人·dividual)’들로 존재한다고. 분인은 수많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각각 특별하게 작동하는 ‘나’ 중의 하나다. ‘나’는 그런 분인의 집합체인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로 탄생한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인이란 말이 어색하다면 분신으로 읽어도 된다.
사람을 잃는 일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관계는 사라진다. 나의 분신, 곧 나의 일부를 잃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 삶에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 죽는 경우라면, 나 중 가장 중요한 나도 죽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그토록 고통스럽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자식의 죽음일 것이다. ‘천붕지통(天崩之痛)’으로 불리는 부모의 죽음이 있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동료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이 슬픔이 제일 크다. ‘참척(慘慽)’이라 했다. 죽음을 어찌 등급 지을 수 있으랴만,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참혹한 슬픔’보다 큰 것은 없다.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은 아들 면의 전사 소식에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 보인다”고 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도,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 정지용도,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턴도, 현대문학의 거목 박완서 소설가도 참척의 고통으로 통곡했다. 그런 부모는 죽지 못해 산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식을 앞세운 부모들이 의외로 많다.
다시 돌아본 올해 한국 사회는 참척의 아픔으로 그늘졌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의 죽음이 여전했다. 지난 7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 20대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권 추락이라는 현실에 더해 과중한 업무, 학교의 무관심, 학부모의 폭언이 뒤섞여 젊은 교사를 사지로 내몰았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는데, 왜 국가는 우리 가족을 지켜주지 못하나.” 유가족은 오열했다. 지난 9월 대전에서도 초등학교 교사가 수년간 학부모 민원과 괴롭힘에 시달리다 유명을 달리했다.
군대가 젊은이들의 무덤인 것도 여전했다. 지금은 군사정권 시절이 아닌데도 의문사나 사고사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 5년간 군인 자살 사고만 320건에 달한다. 불과 얼마 전에도 최전방 부대 소속 육군 소대장의 자살 정황이 뉴스에 보도됐다. 지난 7월에는 채 모 상병이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 중 순직했다. 발생해서는 안 될 이른바 ‘인재(人災)’였으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후진적 군대 문화, 지금도 별반 나아진 게 없는 것이다.
젊은 노동자들의 일터인 산업 현장도 다르지 않았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사망한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 이후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경영자의 책임을 말단 실무자에게 전가하는 관행과 악습은 반복되고 있다. 노동자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법률 적용은 또다시 미뤄질 조짐이다.
이태원 참사가 불과 1년 2개월 전이었다. 이런 사회적 참척 이후에도 이 땅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군부대와 산업 현장, 학교 일선 등 도처에서. 이뿐만 아니다. 정신건강은 우리 사회의 잠재적 불안 요소다. 특히 10·20대 청소년·청년들이 마음의 병이 깊어간다. 우울증·조울증·강박증 같은 정신질환 환자군에서 청년층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통계 자료는 가리킨다.
인구절벽 시대를 맞아 저출산 대책이 비명처럼 쏟아지고 있다. 암울한 현실과 부정적 전망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 옆에 있는 젊은이들부터 지키는 것이 먼저다. 저 모든 ‘사회적 타살’로부터 지금 당장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우리 곁의 젊은 생명들이 꺼지지 않도록 손을 내미는 게 급선무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주변으로 무수히 뻗은 분신 사이의 연결을 파괴한다. 젊은이의 죽음이라면 ‘나’가 또 다른 ‘나’와 만날 그 무한한 가능성까지 없앤다는 걸 의미한다. 젊은이의 죽음은 그래서 막아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인간이 인간인 이유다.
2023-12-2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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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통합의 정책? 분열의 정치!
파장이 거세다. 여당발 ‘김포시 서울 편입’ 이슈를 말하는 것이다.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 시끄럽다. 그래서 알 수 있다. 저 논의가 겉으론 통합의 언어지만 사실은 분열의 언어라는 걸.
정부와 여당의 엇박자가 우선 이해 안 된다. ‘김포 서울 편입론’이 제기된 시기는 정부가 제1차 지방시대 종합계획을 발표한 때와 겹친다. ‘지방자치 및 균형발전의 날 기념식’을 열어 지방정책의 방향을 밝히고 중요성을 강조한 게 그 다음날이다. 한쪽에서는 진정한 지방시대를 열겠다는데, 한쪽에선 수도권을 더 확장하겠다 한다. 양쪽의 교감이 있었다면 국민에 대한 기만, 소통이 없었다면 당정의 깊은 분열을 의미한다. 이 중차대한 사안을 두고 당정이 따로 놀다니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설익은 아마추어적 발상이라는 사실이다. 김포 시민의 61.9%가 서울 편입을 반대하고 있다. 당내에서조차 의견이 충돌한다. 반발하는 여당 소속 수도권 지자체장들이 적지 않다. 그렇거나 말거나, 김포 서울 편입론은 한술 더 떠 ‘메가시티 서울’로 확장할 태세다. 서울은 이미 세계적 메트로폴리스이고 거대도시인데 또 ‘메가 서울’이라니! 반대 여론을 의식한 여당 대표는 ‘당근’ 정책까지 흘렸다. 비수도권에도 메가시티 조성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부울경 지역의 아픈 과거를 돌이켜본다. 메가시티 논의가 한창일 때, 수도권과 정치권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멸 위기에 빠진 지방 처지에서 메가시티는 생사의 문제였다. 힘을 합쳐서 난관을 극복해 보려는 지역의 발버둥이었다. 부울경 메가시티 논의는 그 중요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수도권 언론은 대부분 단신으로 처리했다. 그렇게 홀대받았고 곡절 끝에 좌초한 부울경 메가시티가 9개월 만에 다시 거론된다. 기쁜 일인가? 그럴 리가 없다. 지방이 죽고 사는 문제마저 수도권 의제를 기폭제 삼아야 겨우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 지역으로서는 실로 서글픈 일이다.
이것만 봐도 김포 서울 편입론은 참 나쁜 정책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할 논리는 무수히 많다. 가장 심각한 해악을 꼽으라면, 분열과 갈등의 조장이다. 김포가 서울과 맞닿은 곳은 아주 일부다. 생활권역을 따져 서울 편입이 필요하다면 구리·하남·광명·과천 등이 더 급하다. 결국 다른 도시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의도가 불순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체 도시계획이나 주민 의견수렴 등의 절차는 뒷전으로 밀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사안이 결정되는 이것이 정상인가.
수도권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전국의 도시들이 덩달아 들썩이고 있다. 부울경 메가시티는 지금 좌초 책임을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책임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수도권 확장론이 쳐놓은 분열의 그물망에 지역이 걸려드는 게 두려운 것이다. 이 역시 부울경만의 일은 아닐 테다. 분열의 불꽃이 타 지역으로 옮겨붙을 수 있다. 지역 갈등의 또 다른 불씨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이번 이슈의 두 번째 폐해는 수도권 확장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노림수다. 나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망국적 수도권 일극주의는 지역에서 줄기차게 비판해 온 타깃이다. 이번 이슈가 전국에 메가시티를 던져주고 더 큰 ‘메가 서울’이라는 큰 그림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메가 서울과 전국의 메가시티가 같이 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일단 차치하자. 문제는 수도권 확장에 대한 비판 논리가 무화되거나 최소한 암묵적 동조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일부 언론들은 ‘메가 서울을 오히려 지역에서 더 환영한다’는 식으로 보도한다. 수도 없이 강조해 왔듯이, 지역 메가시티의 핵심은 수도권 확장을 억제하고 국토를 균형 개발하는 데 있다. 이런 본질을 놓친다면 그것은 수도권 확장의 ‘들러리’일 뿐이다.
이번 이슈의 또 다른 나쁜 점은 지역 이기주의를 부추긴다는 데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지역에 ‘특별한’ 혜택이 주어진다는데…” 같은 말들이 자꾸 들린다. ‘우리만 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욕망을 이용하는 정책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역으로서는 수도권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논리가 또 다른 지역 패권주의로 빠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 지역 균형발전의 진정한 의미는 다 함께 잘살자는 것이다. 수도권 일극주의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는 사실. 이는 균형발전의 기본 원칙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집권 세력은 우리 국민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국민들은 집권 세력이 내놓은 정책들을 또 어떻게 보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과 질문이 교차하는 요즘이다. 총선에서 시민들이, 국민들이 지혜롭게 응답하리라 믿는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3-11-1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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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이·팔 분쟁, 멀고 먼 평화의 길
중동이 다시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지난 7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무장 정파 하마스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수천 발의 로켓에 피폭된 이스라엘은 즉각 대규모 보복 공격에 나섰다. 여기에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의 무장 세력 헤즈볼라가 가세했다. 이스라엘은 지상군 투입을 준비 중이고, 미국은 항모전단을 전진 배치해 군사 지원에 뛰어들었다. 양쪽 사망자 수가 벌써 2500명을 넘었다는 소식.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이·팔 분쟁은 80년 가까운 세월 이어지고 있는 중동의 눈물이다. 원죄는 서구 열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때 비극의 씨앗이 잉태됐다. 당시 중동 지역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 땅이었다. 제국을 와해시켜 영토를 차지하려고 애쓴 나라가 영국이다. 당시 전쟁 내각의 외무장관이던 아서 밸푸어는 시온주의 지도자 월터 로스차일드 가문을 필두로 한 유대계 금융권에 접근해 전쟁 자금을 지원해 주면 유대인의 독립국 건립을 돕겠다고 약속했다(밸푸어 선언). 유대인이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에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시온 민족주의 운동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영국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은 약조를 했다.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게 도와주면 아랍 민족의 통일 국가를 세우도록 해주겠다는 것(후사인·맥마흔 협정). 또 한 편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 지역을 분할 점령하기로 한 밀약(사이크스·피코 협정)이 따로 있었다. 거짓 약속, 이중·삼중 계약이었던 셈인데, 유대계·아랍계에 대한 독립 약속은 그렇게 무시됐다.
2차 대전 이후 이 문제는 유엔 소관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팔 영토 분리안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예루살렘을 수도로 건설해 나갔다. 결국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이 터지고 아랍 연맹에 승리한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다. 그때 팔레스타인은 영토의 78%를 잃었다.
이후로도 팔레스타인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했다. 팔레스타인 땅은 지금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로 크게 축소된 상태다. 1993년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가 미국 백악관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계획대로 실천되면 좋았겠으나 역사의 여신은 중동 평화를 거부했다. 라빈이 군중집회에서 극우파에 살해됐기 때문이다.
분쟁의 속을 들여다보면 대단히 복잡한 실타래로 얽혀 있다. 서안 지구는 팔레스타인의 집권 세력인 파타가, 가자 지구는 하마스가 통치 실권을 쥐고 있는데 무장 투쟁에 대해 견해가 서로 달라 갈등을 빚었다. 이번 충돌을 주도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교 움직임에 반발해 온 강경파다. 중동 전체로는 이란·이라크를 비롯한 시아파,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는 사우디 중심의 수니파가 대결하는 구도가 엮여 있다. 최근 중동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움직임도 변수다.
국제 질서는 여전히 냉혹한 힘의 논리가 좌우하는 국익의 각축장이다. 우리는 식민 지배의 설움을 겪은 바 있고 한반도의 허리를 분할 당한 뼈아픈 기억이 있다. 먼 이국땅에서 벌어지는 이·팔 분쟁을 주시하는 이유는 이런 국제 정치 역학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여, 어쩔 수 없이 남북·북미 관계가 오버랩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2000년, 2007년, 2018년 남북정상회담 때처럼 관계 개선과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신과 적대를 키우는 정치 역학이 늘 발목을 잡았다. 긴장과 위기의 반복 끝에 지금은 대화 통로가 끊겨 무력 대결로 치닫고 있다.
이번 이·하마스 충돌 때 일부 국내 언론은 한반도 전쟁 상황을 대입해 긴장을 조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이 초기 대응에 실패한 걸 보건대 북한 장사정포 같은 재래식 무기에 우리 방어 체계는 더 취약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평화를 모색하기에도 부족할 시간에 대놓고 한반도 위기를 강조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다. 고통과 비극 앞에서 인간이 해야 할 도리는 평화를 찾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미약한 힘이나마 모으는 것이다.
악화일로인 북미 관계는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에 따라 언제 파국으로 치달을지 모른다. 그때 평화는 길을 잃고 한반도는 다시 눈물의 땅으로 변할 것이다. 남북이 이번 기회에 불신과 적대를 해소하기 위한 깨달음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대화의 통로를 여는 것이 무엇보다 급하다. 힘들고 복잡한 과정을 하나씩 되밟아야 하겠으나 다른 길이 없다. 평화와 인권의 감수성을 회복해 무너진 신뢰, 막힌 소통의 물길을 다시 뚫어야 할 때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3-10-1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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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1부두 도서관 ‘꼼수 행정’ 뭘 노리나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는 말이 딱 맞다. 일본의 원전 오염수 본격 방류에 이어 최근에는 역사 논쟁, 이념 공방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이 나라 국정에 어이없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는데, 많은 국민이 여기서 ‘독단’과 ‘편견’의 냄새를 맡는다.
지역으로 눈을 돌려도 다르지 않다. 최근 부산시가 부산항 1부두에 한 재력가의 이름을 단 도서관 건립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일파만파다. 1부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피란수도 부산 유산’의 핵심 장소다. 부산의 역사성과 한국 근현대의 상징성을 인정받아 현재 문화재 등록이 추진 중인 곳이다.
여기에 한 재력가가 도서관을 기부하겠다고 한다. 그는 올해 4월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 발표 기준으로 개인 자산이 국내 50대 부호 중 1위를 차지한 자산가다. 200억 원을 줄 테니 1부두에 건물을 짓고 자신의 이름을 달아 달라는 게 기부 조건이다. 사적 장소가 아닌 공적 공간에 이름을 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버스정류장 이름 하나, 도로 명칭 하나 정하는 데에도 숱한 의견수렴 절차를 거친다. 그렇게 힘을 모아도 최종 합의에 도달하기 힘든 것이 공공장소의 명칭이다. 아무리 위대한 공인이라도 그 이름을 공적 장소에 쓸 때는 철저한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 이름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법. 이게 인류 역사의 오랜 가르침이다.
1부두 내 기부 도서관 건립안은 석연찮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지자체의 기부금품 접수 여부에 대해서는 기부심사위원회의 심의를 받도록 돼 있다.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 제5조가 그 근거다. 그런데 이번 기부 금액 200억 원에 대한 기부심사 결과는 전혀 공개돼 있지 않다. 부산시가 기부자 측과 기부금 약정식을 체결하기로 계획한 시기는 9월 10일께로 알려졌다. 약정식이 바로 코앞인데 기부심사조차 없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사실이라면 명백한 절차상의 하자다.
그런데 기부심사위원회는 6월에 열려 이미 가결이 이뤄진 상태라고 한다. 기부심사에 관련된 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기부자가 제출한 지정기탁서 양식에는 애초 도서관 위치가 ‘1부두’가 아니라 ‘북항’으로만 기재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심의가 통과됐다면 이는 한참 더 심각한 문제다. 부산시가 이를 숨기고 모두를 속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1부두를 포함한 도서관 건립 후보지 3곳을 추려 기부자 측에 제안한 때가 올해 3월이었고, 기부자 측이 1부두를 최종 낙점한 것은 5월이었다. 만약 기부심사 때 도서관 위치가 ‘1부두’ 아닌 ‘북항’으로 하는 내용으로 가결된 것이라면, 이는 반대 여론을 의식한 ‘꼼수 행정’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부산시는 이와 관련된 사실 여부를 명확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부산시의회의 역할에도 아쉬운 데가 없지 않다. 기부 도서관이라고 하지만 건물 짓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건립비용 말고도 이후의 도서관 운영비는 누가 부담하는가. 부산시 조례에 따르면, 시장은 업무협약 체결 때 시의회에 보고해야 하는데 시의 재정적 부담이 발생할 경우엔 특히 시의회의 사전 의결을 받도록 돼 있다. 기부금 200억 원을 도서관 건립비용으로 본다면 향후 운영비는 부산시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사전 의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부산시의회는 시민의 의사를 대표하면서 부산시정을 견제하는 기관이다. 적법한 절차 이행 없이 협약 체결이 가시화되고 있는데 손을 놓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시의회를 거치지 않는 시의 독단적 행정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고 잘못된 행정을 바로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납득하기 힘든 건 부산시의 조급함이다. 애초 부산시·부산항만공사(BPA)·해양수산부가 합의했던 것처럼 ‘1부두 보존’이라는 원칙대로 가는 게 순리다. 한때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는 북항의 다른 곳에 짓는 것으로 결론이 난 상태다. 1부두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대상으로 삼고 그 일대를 등록문화재로 보존하기로 결정하면서다. 이는 2021년 12월 체결된 ‘부산항 북항 1단계 재개발사업 업무협약서’에 다 나와 있다. 부산시가 소유권자인 BPA를 설득한 것도, 소유·관리권을 이양받기로 한 것도 이런 조건에서다.
기부심사 때 제출된 도서관 위치가 1부두가 아닌 북항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도서관이 필요하면 북항의 1부두가 아닌 적당한 곳에 지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세계유산 훼손 논란이 불거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제 와서 부산시가 약속을 어기는 것은 결국 부산시장과 시정 업무 수장들의 일방적, 독단적 행태로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3-09-0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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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치수(治水)의 지혜를 다하라
요순시절 중국은 7년 가뭄이 들고 9년 홍수가 지는 땅이었다. 황하를 막고 있는 허난성(河南省) 용문산(龍門山)을 도끼로 갈라 물길을 낸 이가 우(禹)다.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나라(夏)를 물려받았다.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 신화의 시대라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사람들 뭇 목숨이 걸린 ‘치수(治水)’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 그 상징으로 부족함이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우 임금이 요순을 잇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것도 그런 이유다.
중국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나라 임금들도 물을 다스리는 데 지성을 다했다. 물은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문제다. 고대로부터 가뭄과 홍수는 하늘의 경고로 여겨졌다. 이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것이 곧 치세(治世)의 핵심이었다.
과학기술과 문명이 발달한 현대라고 해서 다른가. 그렇지 않다. 자연재해는 여전히 불가항력이고, 지금도 물난리는 계속되고 있으며, 사람은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중이다. 참담한 재난 앞에서 인간은 미미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눈에 보이는 수해만 물난리가 아니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는 더 큰 물난리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항시 주시해야 할 대상이다. 전자가 ‘수면 위’로 드러난 물난리라면, 후자는 ‘수면 아래’의 물 문제랄까. 오염수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다 보니 ‘과학’이냐 아니냐, 갑론을박과 설왕설래가 만발한다.
과학은 흔히 인간의 인식과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사실이나 진리를 얻어 내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다른 시각도 있다. 과학의 목표는 진리를 얻는 게 아니라 그저 실험과 관찰의 결과를 통해 현 단계에서의 유용한 지식을 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과학계 내부의 이런 철학적 견해 차이는 어쩌면 과학이 추구하는 가치중립 자체가 불가능한 일임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치중립을 표방한 연구라 하더라도 그 결과물이 향후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학문은 없는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역시 순수한 과학의 영역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참과 거짓을 검증할 만한 축적된 실험 자료 없이, 취사 선택된 몇몇 데이터에만 의존하고 있어서다. 과학적 엄밀성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는 얘기다. 원전 폭발로 발생한 오염수의 해양 투기는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일이다. 여기서 과학이 취해야 할 자세는 자만이 아니라 겸손이다.
오염수 문제가 ‘과학’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과거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2021년 6월 야당이었던 국민의힘은 국회에서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결정을 규탄하면서 오염수 안전성 확보를 위한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국민의힘은 여당이 되면서 지금 정반대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문 정부 역시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암묵적으로 동조했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어쨌든 오염수 문제는 처음부터 과학이 아니라 정치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현 정부와 여당이 더 큰 지탄을 받는 건 당연하다. 당장 국정과 민생을 책임지고 있는 집권 세력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국민의 안위와 생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는 국민 80% 이상이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민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윤 대통령은 12일 리투아니아에서 가진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오염수 방류 계획을 사실상 승인했다.
지금 정부는 왜 이렇게 일본 정부에 선의를 베푸는 것도 모자라 날개까지 달아 주려 애쓰는 걸까. 짐작되는 바가 없지 않다. 총선 승리와 집권 연장이라는 장대한 목표가 먼저 떠오른다. 한미일을 묶어 외교·안보 협력의 견고한 울타리를 치고 대신 중국·러시아는 대립의 대상으로 떠미는 이른바 ‘신냉전’ 구도에 올라타는 것이 보수층을 결집하고 표를 얻는 데 유리하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러려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서둘러 매조지는 게 급선무다.
정치세력이 집권을 꿈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목표로 결코 비판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주객의 전도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 것이고 국정 운영은 국민을 위해 일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국정을 맡은 세력이 이를 망각하고 민생은 외면한 채 눈앞의 사사로운 이익에만 매몰돼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국민이 스스로를 구제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원시적 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눈에 보이는 물난리(수해)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물난리(오염수 방류)이든 이를 바라보는 국정 책임자의 눈은 철저히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맞춰져야 한다. 치수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지도자의 덕목이다. 진정한 권력은 거기서 나온다.
2023-07-1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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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아바나와 부산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생각한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 아름다움 뒤에 사무친 역사가 서린 곳이다. 원래는 원주민의 땅이었다. 그 흔적이 이름에 남아 있다. ‘아바구아넥스’라는 추장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바나다. 타이노족이 살던 이 땅에 1492년 탐험가 콜럼버스가 도착했다. 그는 외쳤다고 한다. “이제까지 본 곳 중 가장 아름다운 땅.” 곧이어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점령한 건 세계사에 알려진 대로다. 아바나의 굴곡진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아바나는 신대륙 진출의 전진기지였다. 아메리카와 유럽을 잇고 아프리카를 연결했다. 아메리카 안에선 식민지 항구 사이의 거점이었다. 북대서양 해류를 낀 환경적 요인도 컸다. 대륙을 왕복하는 시간이 짧아 수많은 선박이 모이고 흩어졌다. 요컨대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쿠바는 1898년 독립한다. 아바나가 쿠바공화국 수도가 된 건 바로 그때였다. 미국 기업과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술과 향락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1959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쿠바는 또 다른 변곡점을 맞는다. 이후 아바나의 물질적 성장은 제동이 걸렸다.
아바나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소식은 6년 전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관광업의 부활이었다. 옛 시가지와 요새 등 오래된 유적지가 남아 있어 가능했다. 번성의 계기는 198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그 이후 전 세계 관광객이 몰리는 ‘핫 플레이스’로 떴다. 그 일대가 이른바 ‘올드 아바나’다.
쿠바인은 자존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압박 앞에서도 혁명의 기품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물론 지금의 아바나는 과거의 명성에 기대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그렇다 해도 문화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자 했던 노력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아픔의 역사는 삶이 되고 문화가 되었다. 쿠바 특유의 낙천성, 모든 걸 품고 섞는 융합의 지혜가 힘을 보탰다. 그 대가가 관광 수입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아바나를 떠올릴 때 부산을 겹쳐서 본다면 너무 엉뚱한가? 100여 년 전 부산은 일제 대륙 침탈의 출발점이었다. 이후에는 한국전쟁 시기 피란수도로, 산업화 시기 수출입 물류 거점으로 기능했다. 우리나라 바닷길의 관문 ‘1부두’가 한국 근현대사의 살아 있는 증거다. 숱한 눈물, 피와 땀이 밴 곡절의 역사를 품은 장소가 피란수도 유산 9곳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부산의 정신적, 문화적 자긍심을 상징한다.
이런 와중에 최근 의미 있는 소식이 더해졌다. 우리나라 가야 고분군이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심사 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로부터 ‘등재 권고’ 판단을 받은 것이다. 그동안의 관례로 볼 때 사실상 등재 결정과 다를 바 없는 쾌거로 받아들여진다.
가야 고분군이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현존하거나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유일한 또는 적어도 독보적인 증거’라는 세계유산 등재 기준 중 하나를 충족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대표적인 가야 고분군으로 꼽히는 부산의 복천동 고분군이 제외된 점이다. 개발과 방치에 따른 부정적 영향 탓에 신청 단계에서부터 빠지고 말았다. 이 대목을 우리는 깊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세계인들이 아바나에 가는 것은 매혹적인 노래나 춤 때문만은 아니다. 파도 위로 흩어지는 부신 햇살과 강렬한 석양도 다는 아니다. 그런 건 황홀감을 선사하지만 이내 증발한다. 아바나는 마음을 흔드는 정신적 경험을 제공한다. “아픔 없는 사랑은 없다는 것. 그런 깨달음이 없다면 아바나의 기행도 헛된 동경일 뿐이다.” 오늘날 쿠바의 문학 현실이 이런 고백담을 담고 있더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폐허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일어선 피란수도 부산의 저력과 에너지도 이와 유사하다고 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물질의 영역을 넘어 인간의 정신세계까지 포괄한다.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 보편적 의미를 지니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국내 최초의 근대 유산, 도심에 입지한 유산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고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세계유산이 지역 활성화에 방해가 된다는 오해가 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세계의 수많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의 훼손이나 파괴가 없도록 유산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찾는 데 지역사회의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관광의 목적은 단순한 상업적 행위에 있지 않다. 관광객들은 한국을, 부산을 알고 싶어서 방문한다. 국제 관광도시로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부산이라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세계 문화유산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자부심이 그 출발점이다.
2023-05-1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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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부산 월드엑스포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산항 북항은 그 자체가 부산의 상징이다. 미래 비전을 보여 주는 부산월드엑스포의 심장인 동시에 오늘의 부산을 만들어 낸 역사적, 상징적 공간이다. 북항의 근원은 제1부두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수탈의 입구, 한국전쟁 때 유엔군 투입과 유엔 원조의 통로, 갈 곳 없었던 피란민들의 삶터, 광복 후엔 전쟁과 가난을 극복하고 산업화의 길을 연 수출길의 출발점. 대한민국의 아픔과 희망이 녹아 있는 근현대사의 묵직한 현장이 1부두다. 지금은 북항재개발을 통해 원도심 부활을 꿈꾸는 거점이다.
일부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1부두는 문화재청으로부터 이미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지난해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결정이 그것이다. 잠정목록에는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9점이 포함돼 있는데 그중 핵심이 1부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최종 등재는 사실 엑스포 유치에 비견될 만한 업적이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1부두의 문화재 등록이 선행돼야 하는데 현재 소유권자인 부산항만공사(BPA)가 여기 동의한 상태다. 소재지 관할 구청인 중구에 ‘1부두 등록문화재 신청 건’에 대한 검토 의견 제출을 요청한 게 지난해 10월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몇 달째 일의 진척이 없다. 알고 보니 중구청은 1부두의 문화재 등록을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핵심적인 이유다. 중구의 입장은 지난달 17일 지역방송에서도 명확하게 확인됐다. 중구청장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은 이렇다. “유네스코 등재가 중구 발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화회관이나 구민 체육시설 건립 같은 중구 발전에 도움이 되는 답을 부산시가 내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원도심 침체가 워낙 심각하고 경기 활성화가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문화재 등록이 지역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시각은 너무 일면적이다. 세계유산 등재는 향후 이 지역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어쩌면 중구 번영의 일등 공신이 될지도 모른다. 존재하지도 않는 1부두 일대의 상권을 미리 상정해 경기침체 우려를 말했는데 논리의 비약이다. 특정 지역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그것만 보는 근시안적 관점은 ‘지역 이기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좀 더 멀리 내다보는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주민을 위한 시설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면 다른 장소를 물색하는 방법도 있다.
이미 1부두는 원형을 보존해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조성하기로 돼 있다. 부산항 북항 1단계 재개발 10차 사업 계획 내용이 그렇다. 이에 따라 1부두의 소유·관리권은 올 상반기 중 BPA에서 부산시로 넘어간다. BPA는 최근 “이른 시일 안에 부산시에 재산권 이관 신청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공원은 문화유산의 현상 유지 및 보호가 가장 중요하다. 도시공원·녹지 세부기준 지침을 담은 국토교통부 훈령에 엄연히 명시돼 있다.
그런데도 체육회관 건립 등을 요구하는 중구청장 발언의 배경은 무엇일까. 결국 부산시가 1부두 보존에 대한 입장을 바꾼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토 의견 제출이라는 간단한 후속 절차가 몇 달째 제자리걸음인 이유를 찾기 힘들다. 역사공원이 예정된 대로 조성되지 않는다면 세계유산 등재는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취지에 안 맞는 시설물이 1부두에 들어서면 아예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부산시가 피란수도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오랫동안 기울인 노력을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이다.
유네스코는 전쟁이나 난개발 등으로 보편적 가치가 손상될 경우 이미 등재된 세계유산도 해제한다. 영국 해양도시 리버풀이 대표적 사례다. 항만 시설과 건축물의 보존을 인정받아 세계유산에 등재됐지만 이후 축구장 건설 등 재개발이 경관을 크게 훼손했다는 판단을 받아 등재가 해제됐다. 하물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부산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부두 역사공원은 부산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열린 공간으로 두는 게 올바른 방향이다.
지속 가능한 부산의 성장을 떠받치는 두 개의 축이 있다. 그 하나가 월드엑스포 유치라면 또 다른 하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다. 엑스포의 무대인 북항 일대가 인류의 비전을 비추는 미래 개척의 공간이라면, 역사성과 장소성을 상징하는 1부두는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서 최소한 남겨둬야 할 보존의 공간이다. 엑스포 유치와 동일한 수준의 힘을 세계유산 등재에 쏟아야 하는 이유다. 국제도시 부산의 역량은 명실상부 월드엑스포를 유치할 수준이다. 세계에 부끄럽지 않은 문화적 안목과 배포도 함께 갖춰야 한다.
2023-04-06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