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極秘 외교문서 공개 6·25眞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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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장마철 피해 6月 開戰결정 "南侵정보 누설" 전초전 없이 全面戰 개시



스틸린과 毛澤東의 지원

▲1949년 12월 16일~1950년 2월 17일=모택동이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 1956년 3월 31일 모택동은 당시 북경주재 대사였던 유진과의 대화에서 당시 스탈린과의 회담 시 남한 점령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고 회고하고 단지 중국 의군사력 강화문제에 대해서만 토의가 있었다고 하였음.

▲1950년 1월 19일=슈티코프는 1월 17일에 朴憲永 관저에서 개최된 리셉션 시 북한지도부 대화내용을 보고. 金日成은 먼저 중국주재 북한대사인 이두연과 즐겁게 담소했으며 모택동이 자신의 친구이자 항상 자신을 도와줄 것이므로 주재대사가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함을 강조. 金日成은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완료되었으므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언급. 그는 남한인민이 자신을 신임하고 있으며 남한인민은 통일을 원하고 또한 북한이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강조. 金日成은 인민의 열망을 저버리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온다고 언급. 金日成은 통일이 늦어지면 남한 인민은 대단히 실망할 것이라고 언급.

▲1950년 1월 30일=스탈린이 서명한 전보가 평양으로 타전됨. 동 전문에는 金日成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북한의 지도자는 남한에 대하여 하려고 하는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됨. 스탈린은 金日成을 접견,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

金日成과 스탈린, 毛澤東과 연쇄회담

▲1950년 4월=모스크바 회담 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 이와 함께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 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

▲1950년 5월 12일=슈티코프는 金日成및 朴憲永과 면담. 金日成은 소련에서 귀임한 후 이두연 대사로부터 毛澤東과 면담결과를 보고 받았다고 통보. 金日成에 의하면 毛澤東은 한국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 대전을 시작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함.

▲1950년 5월 13일=金日成과 朴憲永은 북경에 도착, 저녁 늦게 毛澤東과 면담. 북 지도자들은 필러포프 동무(스탈린)가 모스크바 회담 시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毛澤東과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음을 설명. 이와 관련, 毛澤東은 소련정부에 대해 스탈린 자신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싶다고 요청.

▲1950년 5월 15일=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후 모택동은 金日成 및 朴憲永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

金日成은 북한이 3단계 계획을 수립했다고 언급. 제 1단계는 군사력을 준비하고 이를 증강함. 제 2단계에서는 평화 통일에 관한 對南제의를 하고 제 3단계로 남한 측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후 전투행위를 개시함. 毛澤東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 毛澤東은 일본군이 남한 내 분쟁에 개입할 가능성에 대해 문의. 이에 대해 金日成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

毛澤東도 2만~3만명의 일본군이 참전하는 경우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으나 현 단계에서 일본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언급.

毛澤東은 만일 미군이 참전 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하여 북한을 돕겠다고 함. 毛澤東에 의하면 소련은 미국측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러한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가 있다고 함.

▲1950년 5월 29일=金日成의 지시에 의해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남침공격 계획을 수립한 바 북한지도부는 이를 승인. 군 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완료키로 함. 북한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됨. 金日成은 6월말에 전투행위를 개시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함. 그 이후는 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고 언급한 바 그 이유로 첫째,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둘째,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듬. 이와 관련,6월 8~10일께 집결 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임.

▲1950년 6월 20일=모스크바 시간으로 오후 10시 슈티코프는 모스크바로 전화를 걸어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후 11시께 남한정부가 북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첩보가 북한측에 오후 8시께 입수되었다고 보고. 슈티코프는 동 첩보가 공개문서로 되어 있어 의심스럽다고 평가.

▲1950년 6월 21일=슈티코프는 스탈린에게 金日成의 메시지를 전달. 이 메시지에는 북한측이 입수한 각종 첩보에 의하면 북한군 침공에 관한 정보가 남한측에 알려졌으며 이와 관련하여 남한이 전투준비 태세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음. 이와 관련,金日成은 전에 구상했던 옹진반도에서의 전초전을 수행치 않고 6월 25일 全전선에 걸쳐 전투행위를 시작하는 것이 목적에 부합한다고 언급.

▲1950년 6월 22일=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에 암호전문의 해독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향후 일체의 암호전문을 해독치 말라는 모스크바의 지시가 시달됨. 이후 1950년 말까지 平壤과 외무성간에는 전보 교신이 중단됨.

전쟁발발 후 中·蘇의 지원

▲1950년 7월 1일=중국 주재 소련대사는 周恩來와의 면담내용을 보고, 주은래는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남한 괴뢰정부가 완전히 궤멸상태에 처해 있으며 북한 군사력은 미국의 예상을 넘는 것이었다고 언급. 또한 한국전 개입에 관한 트루먼의 결정은 현명한 미국정부의 결단이 아니며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라고 평가.

▲1950년 7월 2일=로신 중국주재대사는 주은래의 요청으로 주은래를 방문. 주은래는 파니카르 중국주재 인도대사가 중국 외무차관에게 인도정부는 한국사태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이를 국지분쟁화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키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통보했음을 언급.

동시에 주은래는 만일 미군이 38선을 다시 넘어 온다면 중국군은 북한군으로 가장해 전투에 참가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위해 중국지도부는 이미 묵덴지역에 12만명에 이르는 3개군 병력을 집결시켜 놓았다고 언급. 주은래는 소련공군이 이들 병력을 엄호해 줄 수 있는지를 문의하면서 모택동이 이미 1949년 5월과 1950년 5월에 미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경고했음에도 불구, 북한은 그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고 언급.

▲1950년 7월 7일=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임을 받은 그로미코는 유엔을 통한 한반도 분쟁 해결에 관한 소련의 입장을 평양에 타전. 동 암호전문에 의하면 그로미코는 이에 대해 문제해결의 가장 좋은 방법은 중국이 참가하고 조선민족대표가 출석한 가운데 유엔안보리 회원국이 토의하는 것이라는 등 소련의 입장을 표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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