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세상을 바꾸다! - 미국 시카고 공공미술] ② 시민을 품에 안은 거리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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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샤갈 작품도 부담없이 다가가 감상

지난달 31일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미국 시카고 시내 '리처드 덜레이 시빅센터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핼러윈데이를 맞아 열리는 곡예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를 축제로 즐기려는 것이다. 시빅센터 광장은 그 같은 시민축제나 시위가 자주 일어나는, 시카고 시민들이 애용하는 명소다. 왜 그럴까? 넓은 공간이 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유명한 '더 피카소'(The Picasso)가 있기 때문이다.

'더 피카소'는 파블로 피카소가 1967년 제작한 높이 16m에 이르는 거대한 철조각이다. 당시 피카소는 이 작품에 별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들 사이에 '더 피카소'라는 애칭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1960년대 들어 미국에서는 '건축 속의 미술'(Art in Architecture) 또는 '공공장소 속의 미술'(Art in Public place) 프로그램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더 피카소'는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미술관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 볼 수 있기를 원한다'는 시카고 시민의 염원에 따라 맥코믹재단 등 여러 기업체와 기관이 나서 기금을 모아 제작케 한 후 시카고시에 기증한 작품이다. 조각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피카소의 작품이라 값어치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것일 테지만, 그 흔한 차단시설 하나 없이 고스란히 시민에게 '허용'돼 있다.

'더 피카소'를 시작으로 시카고 시내 공공장소에는 대형 작가들의 작품이 잇따라 설치됐다. 1974년 마르크 샤갈이 시내 체이스타워 광장에 '사계절'이라는 제목의 길이 20여m에 이르는 대형 타일벽화작품을 남겼으며, 같은 해 페더럴센터 광장에는 알렉산더 칼더가 대형 철조각 '플라밍고'를 선보였다.

그런가 하면 현대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작품으로 유명한 장 드뷔페는 1984년 제임스톰슨센터 광장에 'Monument with Standing Beast'를 제작해 거대 도시문명을 조롱했다. 근작으로는 막달레나 아마카노비츠가 2006년 시카고 그랜트공원에 설치한 '아고라'가 있다. 목이 없는 인간 형상의 철 조각 106개로 구성된 작품인데, 공원을 산책하는 이들은 그 속을 거닐며 자연스레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이런 공공의 장소에 설치된 미술작품들은 범죄의 도시라는 삭막했던 시카고의 이미지를 바꿔 놓았다. 거장들의 작품이 거리 곳곳에 널려 있어 언제나 그 예술적 향취를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된 것이다.

밀레니엄 파크는 그 절정이다. 'The Bean', 즉 '콩'이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불리는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가 있어 그렇다. 클라우드 게이트는 오늘날 시카고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인도 출신의 세계적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가 2004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지름 20m의 초대형 조형물로, 거대한 물방울이 지구상에 뚝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거울처럼 반들거려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담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이 시카고를 대표하는 공공미술 작품이 된 것은 그 미적 가치도 가치지만, 그를 대하는 시민들의 반응 때문이다. 사람들은 손으로 두드려 보고, 그 앞에서 드러누워 포즈를 취해보고, 작품에 비쳐진 자기 모습을 사진찍어 보며 신기해한다.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밀레니엄 파크 내 또 다른 작품인 스페인 조각가 호메 플렌사의 '크라운 파운틴'(The Crown Fountain)도 그렇다. 석탑처럼 거대한 쌍둥이 조형물이 마주보고 세워져 있어, 거기에 LED전광시설로 거대한 사람 얼굴이 갖가지 표정으로 비쳐진다. 여름철에는 비쳐지는 사람의 입 부분에서 분수처럼 물이 쏟아져 나와 시민들이 물장난도 하며 즐기는 작품이다.

소위 '1% 미술' 작품이 대부분 시민의 것이 아닌 개별 기업체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는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는 보지 못하는 모습이다. 시카고를 함께 찾은 이광재 서울시 도시갤러리 책임큐레이터는 부럽다고 했다.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적가치는 어느 정도인지 따위 알지도 못할 고민에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단지 공원에 와서 놀면서 작품을 느끼는 것, 공공미술은 그래야 하지 않냐"는 이유에서다.

시카고시 문화국 나단 메이슨 큐레이터는 가장 성공적인 시카고 공공미술 작품으로 '더 피카소'와 '클라우드 게이트'를 들었다. "피카소 작품은 난해한 추상으로 시카고 시민들로 곤혹케 함으로써 미술에 대한 공공의 담론을 가능케 했다. 클라우드 게이트는 시민들이 고민에서 나아가 추상 작품을 즐길 수 있게 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공공미술이란 사람들이 언제나 쉽게 접근해 몸과 마음으로 즐거워하게 만드는 미술인 게다. 시카고=임광명 기자 kmyim@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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