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 이야기 - 마지막 1세대 강경남 할머니 "새집 이사도 싫어, 나는 여 살다가 그냥 죽었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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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자뿟다!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를 입버릇처럼 내뱉으면서도 고향 경남 사천을 떠나온 이야기며, 27년간 계속된 '우토로 땅 소송' 이야기를 자분자분 들려주시는 강경남 할머니. 이야기 틈틈이 들려주신 노랫가락은 또 왜 그리 슬프던지. 오히려 할머니가 더 꿋꿋하셨다.

"오데서 왔노?"

실버 보행차, 일명 '할머니 유모차'를 끌고 집에서 나오시는 강경남(92) 할머니를 뵙자마자 달려갔더니 대뜸 하신 말씀이다. 강 할머니는 이제 우토로에 한 분밖에 남지 않은 1세대. 우토로의 상징 같은 존재다.

"할매요, 저랑 얘기 좀 하문 안 될까요?" 친근감을 내보이려 어설픈 서부 경남 사투리를 흉내내 본다. 강 할머니는 경남 사천 출신이다. "내는 동네 산보해야 한다. 곧 가꾸마~. 회관에 가 있어라."

"사천서 여덟 살에 일본에 와
비행장서 일하면 안 잡혀가
남편 따라서 우토로에 정착

힘들게 일해서 지은 내 집
강제 퇴거에 투쟁으로 지켜
1세대 사람들 다 세상 떠나
예전 추억 생각하면 쓸쓸해"


아흔이 넘으신 할머니께서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산보를 마친 강 할머니께서 한 손에는 재떨이, 다른 한 손에는 담뱃갑을 들고 마을회관 '에루화'로 들어오셨다.

할머니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말했다. "할매는 기억 안 난다, 다 이자뿟다!"고 하시면서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신다.

"일본에 와서 아부지 얼굴 첨 봤다. 아부지가 먼저 오고, 오라바시(오빠)가 오고, 언니가 오고, 엄마하고 내는 일본에 사는 어떤 여성이 데리러 와서 왔다 아이가."

그때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고향은 80년이 넘도록 다시 갈 수 없는 망향의 땅이 되어 버렸다. 5년 전인가 큰아들 보고 사천 용현면 고향에 한 번 데려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만 잠깐 다녀올 수 있었다. 일본에 오고 난 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한국 땅이었다.

-우토로에 사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열여덟인가에 시집을 갔제. 서양 놈하고 일본 사람하고 싸움이 났어. 전쟁이 난 기라. 큰 비행기가 하늘에 떠 댕기고, 사이렌이 울리는데 절대 밖에 나오만 안 되는 기라. 걸어 댕기기만 해도 소이탄이 붕붕 떨어졌응깨. 내는 시어마시(시어머니)랑 오사카에 있었고, 일이 없던 남편은 우토로로 갔어. 비행장(교토비행장)에서 일하문 안 잡아간다 캐서 오라바시랑 아부지가 우토로에 있었거든."

그러다 폭격이 더 심해졌고, 시어머니와 강 할머니는 할 수 없이 피난길에 오른다.

"그때 소문이 돌았어. 교토는 유명한 곳이어서 서양 비행기도 폭격 못할 끼라고.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걸어왔어. 흰옷 입으마 하늘에서 잘 보인다 캐서 옷도 까만 거 입고 말야. 한번은 시커먼 옷 입은 남자들이 걸어오는데 여자도 한 명 끼어 있더라고. 근데, 그 여자 얼굴이 홀랑 다 벗겨졌어. 소이탄에 화상을 입은 기라. 정말 끔찍했어."

그때 강 할머니 나이 스무 살이었다.

"우토로에 오니까 지금 살고 있는 이런 집 말고 나즈막한 데서 사람들이 살고 있데. 집 한 채가 비어서 거서 살다가 열사흘 만에 전쟁이 끝났어. 저 앞에 다 쓰러져 가는 집 봤제. 그게 함바야 함바. 전쟁 때 일꾼들 데리다가 먹고 재우고 하던 데 말야. 하나씩 누워 자는 것도 아이고, 혼숙이야 혼숙. 목간(목욕탕)이 어딨어. 몇 명인지도 모르겠어. 몇 십 명 될라나?"

전쟁이 끝이 났다.

"아가 한 명 있었어. 남편은 일이 없고, 작은 집이 하나 비길래 할 수 없이 우토로에서 살았어. 사람들이 이사갈 때마다 더 큰 곳으로 옮기다가 우리 집을 지었어. 오빠도 살고, 올케도 있고, 언니도 있응게 그냥 산 거지."

그래도 당시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서 혹시 생각나는 순간이 있으면 들려 달라고 했다. 뜻밖에도 서일본식산에서 한 개인(자이니치)으로 명의가 잠시 넘어가면서 우토로 소유권 반환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땅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탁배기 만들어 파는 아줌마가 있었어. '나쁜 일 한 인간' 그 집이야. 탁배기 판 돈으로 자식들 대학 공부 시켰고, 마을 사람들은 공부 좀 했다고 그 아들을 책임자로 맹글어 줬는데 책임을 다 못 한 거지. 탁배기 만들면 경찰이 잡아갈 때도 이웃사람들은 아무 말 안 했는데…그게 바로 허창구 일이제."

사실, 이 일은 우토로 사람들 사이에서도 쉬쉬 하는 안타까운 대목이다. 우토로를 전매한 뒤 야반도주하다시피 그곳을 떠난 허창구의 집은 현재 폐가로 남아 있다.

할머니는 강제 퇴거 반대 투쟁의 추억도 들려준다.

"다들 오만데 일하러 댕기느라 바빴지만 사이렌이 울리면 모여들었제. 한 번은 집을 뿌수러 온다 캐서 빈집에 드러누웠어. '집을 뿌술라마 날 갈아서 쥑이라!'라고 소리쳤지. 트럭이 들어오다가 빠꾸해서 돌아가대. 세빠지게(혀가 빠질 정도로 힘들게) 일해서 이 집 지었는데 어떻게 나가냐 말이야."

강 할머니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경남 사투리를 썼다가 일본어도 번갈아 썼다. 식사를 하겠다면서 집에도 다녀왔다.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지루하다 싶으면 노래를 불렀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이젠 기억도 안 난다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또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할머니를 만나 들은 노래만도 10곡이 넘었다. 글을 쓸 줄 모르는 할머니는 모든 걸 기억으로 해결했다.

"할매는 학교 안 댕?뎬?. 옛날에는 여성은 공부하몬 건방스럽다고 공부 안 시켜 줬다. 니는 사투리도 알아 듣고, 일본말도 할 줄 알아서 좋네."

하지만 그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가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단지 말을 알아들었기 때문일까? 할머니는 현재 장남과 살고 있다.

"맞다. 쓸쓸하다. 이런 데가 있으니까 노래도 부르고 그라지. 어디 가서 부를꼬. 옛날에는 1년에 두 번 여럿이 모여서 술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았다. 이제는 그런 것 안 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다 죽고 없다. 요새 사람들은 바깥에도 안 나온다."

-할머니,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새집으로 이사 가야 하잖아요. 기분이 어떠세요?

"할매는, 아파트 들어가고 싶지 않다! 일하러 댕기면서 아파트 같은 데 마이 가 봤다. 말하자면, 3층, 4층, 5층이 있제. 올라가는 소리도 싫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도 싫고, 위층에 사는 사람들이 쓰레기 봉투 던져서 터지는 것도 싫고…. 그냥 싫다. 나는 여 살다가 그냥 죽었뿔란다. 우리 어무이, 아부지, 오빠, 언니, 형부도 다 여기서 죽었다."

에루화 앞마당에 모여서 다 같이 단체 사진을 찍기로 했다.

"인자, 가는 기가?" 환하게 웃던 할머니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 올랐다. 강 할머니마저 안 계시는 그날이 오면 어쩌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도 강 할머니가 계셔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토로 마을을 찾는데 말이다. 교토 우토로(일본)/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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