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공부, 기쁘지 아니한가] '어떻게 살까'로 시작된 청년들 공부, '더 나은 세상'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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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 토론만 하던 학생들이 정세청세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오는 16일 '함께 결정하기' 토론회 준비 상황을 점검하는 조해진·박경민·유진재·민병일 씨(왼쪽부터).

'배우고(學而) 때에 맞춰 실천하니(時習之)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不亦說乎).' 배움과 익힘의 차이를 모르던 학창시절, 논어 학이(學而)편 이 구절은 학생은 죽도록 공부만 해야 한다는 예언처럼 뇌리에 박혔다. 익힘이 결국 몸을 움직여 체화하는 실천이라는 것을 안 뒤로 공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혼밥 혼술이 유행인 시대를 거슬러 '함께하는 공부'를 선택한 사람들을 만나봤다. 책 읽기 모임에서 시작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운동으로 나아가는 젊은이들, 독서와 시 읽기, 미술 활동을 통해 삶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해 가는 여성들이다. 한목소리로 그들은 말했다. '기쁘지 아니한가!'

1. 정의로운 세상 꿈꾸는 인디고 청년들

부산을 대표하는 청소년 인문학 서점 인디고서원이 독서와 토론에서 한 걸음 나아가 소통을 통해 나와 세계의 관계를 일깨우는 요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2012년 7월 출범한 공익법인 정세청세(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가 그 현장이다. 이 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부산 청소년 인문학서점 '인디고'
강연·토론 모임 '정세청세' 발족

"나의 작은 변화가 세상을 바꾼다"
후배 청소년에 영감 주는 멘토로

■학업과 인문학 공부, 다르지 않다


청소년을 자녀로 둔 부모들은 자녀가 인문학을 접하게 하고 싶어도 교과성적이 떨어질까 조바심이 난다. 한정된 시간을 학교와 학원 공부에만 매달려도 경쟁에 뒤처지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아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교와 학원, 부모와 교사의 가르침에서는 삶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칠 여가도 없다.

고교 시절 인디고서원에서 독서토론을 하다 대학 진학 후 정세청세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유진재(청소년교육팀장)·박경민(공부팀장) 씨, 그리고 각각 울산과 창원에서 정세청세 활동에 합류한 민병일(총괄기획팀장)·조해진(남부권역팀장) 씨. 이 청년 넷은 인문학 공부가 오히려 삶의 목표를 정하고 더 진취적인 학교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조 씨는 "고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내가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공부인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 하는 고민을 했다"며 "국어 선생님 소개로 홈스쿨링을 하는 친구를 만나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친구 소개로 정세청세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특목고에 다녔다는 박 씨는 인디고를 통해 삶의 진로를 확정한 경우다. "엄마 권유로 인디고 토론 모임에 들어와 처음으로 같이 읽은 책이 <이회영 평전>이었어요. 선생의 삶이 던진 질문 '한 번뿐인 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또래 친구들이 발제하는 것을 보고는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이후에 '고통의 기원을 찾아서'라는 주제에서 세계 각지에서 고통받는 어린이들의 삶을 보고는 소수자와 약자가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런 일에 내가 뭔가 역할과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막연히 좋은 대학, 취업 잘되는 학과만 생각하던 박 씨는 국제개발협력학과에 입학했다. '답이 정해지지 않은 세계의 모순점을 나의 책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아직 대학 2학년인 박 씨 스스로가 점검한 현재 자신의 위치다.

유진재 씨는 매주 한 번 있는 토론 모임이 답답한 학교생활의 숨통을 틔워 주는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하고 토론한 결과 내면의 힘을 가짐으로써 학교생활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얼 쇼리스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죄수와 도시 빈민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클레멘트 코스)를 열자고 제안한 것을 보며 영혼의 빈곤이 심각한 한국의 중·고교에도 그런 강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좋은 직업과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자각이 생긴 겁니다. 청소년교육팀장을 맡게 된 것도 현재 중·고교생들에게 인문학이 절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지난해 5월 인디고서원의 월례 세미나인 '주제와 변주'에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를 쓴 김영란 전 대법관이 초청돼 청소년들과 진지한 토론이 이뤄졌다.
■더 길고 넓은 안목을 갖는 길

민병일 씨는 중학교 때 스스로 오후 11시까지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울산 정세청세 활동을 시작하며 시사와 사회 이슈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역사와 철학 같은 인문학 서적을 스스로 찾아 읽었다. "자유를 주제로 토론한 일이 있는데 내 삶 속에서 어떻게 자유를 실현할 것인지 고민해 봤지만 막막하더라고요. 정세청세 토론에서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는 내가 읽은 인문학책과 시사 이슈들을 삶 속에 연결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겁니다. 충격이었죠. 그때부터 현실과의 괴리나 모순에 용기를 내 부딪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세청세 활동을 더 열심히 하고 있지요." 민 씨는 활동이 뜸했던 대구 정세청세 조직을 다시 세우는 일에 열심이다. 이 모임에서 후배들에게 민 씨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충분하지 않다는 데 공감한다면 하나씩 문제를 발견하고 풀어가는 일을 청년으로서 함께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인문학은 인간과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운다. 넓고 깊어진 눈은 세상의 불합리와 모순을 바꿔 갈 근육을 필요로 한다. 국민의 투표로 권력을 창출하는 민주국가에서 물리력은 곧 시민이다. 따라서 각성한 소수가 다수의 시민으로 확산되는 것이 곧 인문학의 근육일 터. 자칫 '되바라졌다'는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는 정세청세 청년들의 전략은 무엇일까.

조해진 씨는 누군가를 깨우친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각자의 길을 발견하고 걸어가도록 응원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함께 고민하고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며 이야기를 오래 나누다 보면 스스로 뭔가를 깨닫고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병일 씨도 조금 먼저 깨달았을 뿐, 자신과 후배들은 똑같은 입장에서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해법을 함께 찾아가는 청년세대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했다.

박경민 씨는 "내가 바뀌려고 노력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바뀐다면 세상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나아진 '나'들이 모여 바뀌리라 믿는다.

정세청세는 청소년들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의 현실을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접하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으로, 2007년 시작해 2012년 같은 이름의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태어났다.

매년 하나의 주제를 잡아 부산을 비롯한 전국 22개 지역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주제로 6~8회 토론회를 연다. 올해 주제는 '살아 있는 민주주의'이며, 16일 열리는 네 번째 토론회 소주제는 '함께 결정하기'다. 참가 신청을 비롯한 정세청세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공식 카페(cafe.naver.com/jscs)를 참조하면 된다.

2. 원북원부산 독서토론회 '숲'
이 시대 대부분의 여성이 겪는 차별과 배제를 다룬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독서동아리 숲 회원들이 토론을 마친 뒤 포즈를 취했다. 새로운 '김지영'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여서인지 표정이 밝다. 김병집 기자 bjk@
지난 7일 부산시민공원 북카페 '숲'. 부산시민도서관이 지원하는 104개 '원북원부산 독서토론동아리' 중 하나인 '숲'이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토론하는 월례 모임 현장에 다녀왔다.

주부와 워킹맘 등 7명이 참여한 이 날 토론회는 70년대에 태어난 '김지영'들이 각자의 과거와 현재를 책 속의 김지영에 투영해 여성으로서의 삶을 이야기 하는 장이었다.

숲 

70년대 태어난 주부·워킹맘 7명
<82년생 김지영> 읽고 난상토론 
결혼·육아·가사 등 고민 털어놔
"달라진 '김지영'도 출간됐으면…"

책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76년생 김지영 씨는 "딸 셋 중 맏딸이어서 아들과의 차별은 못 느끼고 자랐지만, 내가 첫 아들을 낳았을 때 어머니가 '이제 내 한이 풀렸다'고 하는 것을 보고는 딸들에게 표현하지는 않았어도 어머니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지 가슴 아프게 여겨졌다"고 말했다. 김 씨는 "순전히 내 입장에서만 보면 크게 공감되지 않지만 내 딸 입장에서는 책 속 지영이의 삶에 더 가깝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남편과 자녀를 둘러싼 시댁과의 갈등, 일에 지친 워킹맘의 가사·육아 부담 등에도 공감이 많았다. 김윤정 씨는 "70년대 생 한 사람으로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시대는 지났지만 부푼 꿈을 안고 진출한 직장에서 유리 천장을 경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결혼 후 부산에 정착해 출산을 하면서 엄마 역할에 만족하는 과거 방식을 답습할 것인지, 새로운 시대에 맞는 미래 여성상을 실현해 나갈지 하는 갈림길에서 주변과의 갈등과 고통이 예상되는 미래의 길 대신 편안한 과거 모델에 안주한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요즘 든다고 김 씨는 말했다.

이날 참가 회원 중 유일한 워킹맘이었던 성화신 씨는 "200쪽도 안 되는 이 소설책을 읽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며 "94학번으로 대학 때 당시 남학생들도 페미니즘과 여성학을 배웠지만 육아와 가사를 부담하는 데는 많은 남성들이 '도와준다'는 시혜적 입장을 갖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78년생인 김유민 씨는 "대기업에 다닐 때 법적으로 3개월 사용할 1수 있는 출산휴가를 처음엔 한 달만 받고, 사정을 설명해 겨우 두 달 쉬고 복귀했을 때 엉뚱한 곳으로 인사가 난 것을 보고 '왜 나를 잃어가며 아이를 키워야 하나'하는 생각을 했다"며 "결국 6개월을 못 버티고 회사를 그만뒀고, 더 큰 대기업에 다니던 언니도 마찬가지로 출산 후 회사를 그만뒀다"고 했다. 대학생 딸과 중1 아들을 키우는 김현정 씨는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즈음에는 전혀 다른 '92년생 김지영'이 쓰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달라진 <김지영>이 출간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화신 회원이 제안한 결혼과 육아, 가사 등에 대한 '부모학' 교육의 필요성에 모든 회원이 공감했다. 청소년기 교과과정에 이런 공부가 꼭 포함돼야 한다는 데도 의견이 모였다. 또 부모와 애착 관계가 형성돼야 할 영아기에는 일자리 걱정 없이 육아에 매진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에도 공감을 이뤘다. 시설 보육과 탁아만으로는 아이의 인성과 정서에 결핍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이런 시스템 개선은 사회적 논의를 통해 이뤄질 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내린 결론은 결국 읽고 토론하고 생각한 것을 실천하는 일로 모아졌다.

숲 회원들의 공통점은 올해 중학교 1학년생 자녀를 한 명씩 두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부터 자녀들끼리 독서토론 모임도 매달 한 차례 열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 봉사활동도 벌인다는 얘기를 들으니 작은 나무 몇 그루가 점점 숲을 이뤄가는 듯한 변화로 느껴졌다.

3. 나락한알 시 읽기·드로잉 모임

나락한알 시 읽기 모임 회원들이 각자 장석남의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를 읽은 느낌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모습. 이호진 기자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의 시 읽기 모임을 참관했다. 나락한알 시 읽기 모임은 2015년 9월 시작됐다. 모임을 진행하는 이용수 씨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는데 시가 제일 이해하기 어려워서 같이 공부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모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강사도 학생도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다 보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시 읽기 모임을 찾아간 날은 장석남 시인의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시집 전체를 읽고 각자의 느낌을 나누는 자리였다. 2년 넘게 모임에 참여하는 추송례 씨의 혜안은 모호한 표현에 숨은 작가의 심연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추 씨는 시를 읽으면서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볼 수 없도록 막았던 단단한 껍데기를 깨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자신의 속살을 들여다봄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이 한층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

나락한알

'시 읽고 함께 공부' 목표로 모임 
이해 폭 넓히며 세상 보는 눈 바꿔 
예술강좌 열어 지역 주민도 참여

이용수 씨는 맞장구를 쳤다. "시의 효용이 바로 그겁니다. 단단해지면서 부드러워지는 것 말입니다. 사소한 도발에 얼굴 붉히는 남자답지 못함이 아니라, 사소한 도발은 담대하게 무시하되 작고 가녀리고 부드러운 것을 예민하게 느끼는 감각적 깨어남을 경험하는 것이죠."

나락한알은 동래구 수안인정시장에 있는 희망정류소에서도 예술 강좌를 연다. 회화(목요일), 영화(월요일), 사진(토요일) 등 강좌에 지역 주민들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문지영 작가가 진행하는 회화 모임은 주부 수강생이 생활 속에서 회화를 친근하게 느끼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희망정류소를 찾아간 날은 연필이나 붓이 아닌 지우개로 그림을 그리는 강좌가 진행됐다. 수강생들은 문 작가의 시연에 이어 흑연과 목탄을 도화지 위에 문질러 짙은 회색으로 만든 뒤 지우개로 원하는 그림을 그려냈다.

나락한알 회화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지우개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말끔히 지우면 짙은 선이 드러나고, 연하게 지우면 도화지에 음영이 나타났다. 문 작가는 "색깔을 많이 쓰지 않더라도 단순한 흑백으로도 색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번에 만든 주부들의 작품을 에코백과 파우치 등으로 제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드로잉 강좌가 끝난 뒤 문 작가와 주부들은 동래부 동헌과 송공단 답사에 나섰다. 인상적인 장소를 사진으로 찍었다 다음 주 강좌에서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북적이는 시장 옆 유서 깊은 유적은 한낮에도 고즈넉했고, 작품을 구상하는 주부들의 눈빛은 빛났다.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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