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주의 맛있는 인터뷰]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 송기인 신부

윤현주 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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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은 유신 종식시킨 열쇠, 국가기념일 지정 확신”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인 송기인 신부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동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하며 “항쟁 날짜는 10월 16일로 결정됐으며, 국회 차원의 국가기념일 지정은 무난히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종회 기자 jjh@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인 송기인 신부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동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하며 “항쟁 날짜는 10월 16일로 결정됐으며, 국회 차원의 국가기념일 지정은 무난히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종회 기자 jjh@

올해는 유신체제 몰락의 불씨를 당긴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무엇보다 부마민주항쟁 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될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8월에는 항쟁의 정신을 기리고 역사적

의미를 조명할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이 설립됐고 ‘국가기념일 지정 범국민추진위원회’도 출범했다.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 운동이 재단 주도하에 진행 중이다.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송기인(81) 신부를 만나 재단의 활동과 기념일 지정 상황 등을 들어봤다. 또 ‘문재인의 멘토’로 알려진 그에게서 문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평가를 물어봤다.


부산·마산 간 날짜 문제 정리

기념회관 위치도 곧 합의 될 것

시민들 항쟁 정확한 인식 필요

정치인·관료·언론이 협조해야

문 대통령 변호사 시보 때 만나

전두환 시절 같이 뒹군 사이

지지도 떨어졌지만 걱정 안 해

공약 꼭 지킬 사람이라고 믿어

좋아하는 성경 구절 ‘일어나 가자’

유신독재 때 나설 용기 심어 줘

요즘은 친구와 소주 한잔이 취미

시민들도 좀 더 여유로워졌으면…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동 그의 자택(사제관)을 찾아갔다. 2005년 은퇴 후 줄곧 이곳에 머물고 있는 신부는 팔순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건강했으며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한옥 양식인 송기인 신부의 자택. 한옥 양식인 송기인 신부의 자택.

-재단이 출범한 지 5개월째인데, 그동안 무슨 일을 했습니까?

“아직 특별히 진행된 건 없어요.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채비를 한 거지. 인력을 모으고, 새해 계획도 짜고…”

신부는 고령에 초대 재단 이사장을 맡은 게 부담이 되는지, 부산과 마산 관계자들의 ‘삼고초려’에 어쩔 수 없이 떠맡았음을 재차 강조했다.

-국가기념일 지정은 순조롭게 되겠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봐요. 그 당시 주역들 상당수가 국회의원들이잖아. 여야 막론하고.”

-부산과 마산 간에 알력이 있다면서요?

“기념일 날짜 문제는 10월 16일(마산은 18일로 주장했음)로 정리가 됐고요. 기념회관을 부산에 두느냐 창원에 두느냐 하는 문제는 있죠. 마산 측은 부산에 민주공원이 있으니 구태여 회관이 필요하냐는 입장이에요. 일리가 있어요. 화기애애하게 합의가 될 것으로 봐요. 또 부산의 경우 부산대 내에 10·16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부마항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낮은데.

“맞아요. 올해 3·1만세운동 100주년이고 부마항쟁 40주년인데, 이걸 시민들이 공감하게 하려면, 확실하게 숙지시켜야 합니다. 만약에 역사를 비뚤어지게 알게 되면 사회가 비뚤어져 가게 됩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사회를 바르게 만들어 가게 되는 건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게 정확한 인식이죠.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재단도 책임이 있는 거지만, 사회하고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 기관이 협조해야 합니다. 행정부는 물론이고 언론도. 특히 시민들 스스로 참여할 수 있도록 재단에서 여러 가지 이벤트를 제공해야겠죠.”

송 신부는 자신이 주도한 부산민주공원 조성과 마산 3·15기념관 조성 당시의 여러 비화를 길게 예로 들면서 부산의 정치인과 관료들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이 마산에 비해 낮다고 지적했다. 그것이 부산시민들의 부마항쟁에 대한 인식 저하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요약한다면?

“대단히 중요한 항쟁이죠. 지금도 유신 얘기만 들어면 오싹해져요. 거기에 항거한다는 건 불가능한 시기였어요. 그런데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에서 ‘펑’ 터졌지. 겉으로 조용하던 부산에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놀라운 일이었죠. 다음날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항쟁으로 변했고, 이는 유신체제를 종식시킨 결정적 열쇠였다고 생각해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광복동 시청 앞 육교에서 데모 광경을 보고 이게 학생들 데모가 아니라 시민 항거다, 이제 민심은 갔다,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서 결국 (거사를) 결행하게 된 거지.”

부산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송 신부는 사제의 길을 유신과 함께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2년 사제품을 받은 뒤 줄곧 민주화·인권 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그간 경찰과 중앙정보부, 검찰에 연행된 게 모두 48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 얘기 좀 하겠습니다. ‘송기인은 노무현의 정신적 지주, 문재인의 멘토’라는 세간의 인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친구죠. 시민운동 동지들이잖아.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데, 괜찮아요. 노무현의 경우 실제 마음으로 많이 기댔어요. 내가 의견도 줬고.”

지난해 8월 초 문재인 대통령 휴가 때 대통령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한 송기인 신부. 지난해 8월 초 문재인 대통령 휴가 때 대통령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한 송기인 신부.

-문 대통령의 지지도가 많이 떨어졌는데.

“나는 하나도 걱정 안 해요. 그 양반이 공약을 꼭 지킬 사람이라고 믿거든. 사람들은 공약 보고 찍은 거잖아. 물론 반대하는 국민도 있지만, 그럴 수 있지. 다 찬성하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지. 지금 반대하는 측도 투표할 때를 생각해보면 ‘아, 그렇지 않았지’라며 되돌아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최저임금이라든가 당초 공약에서 후퇴하고 있는 측면이 있잖아요.

“그것은 꼭 말하고 싶어요. 말하자면 자영업자들 문제인데. 지금 1만 원을 줘야겠다고 할 때,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잖아. 그런데 자영업자들이 여력이 없단 말이지. 그러면 자영업자들을 먼저 도와줬어야지. 이들이 살 길을 터준 뒤 시행했어야지. 지금이라도 대통령을 만나면 ‘시간 가지고 하라’고 말하고 싶어. 그런 착오가 있었다는 거지 원칙이 틀린 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속도를 조절하는 건 아주 잘했어. 국민들도 인내심을 갖고 좀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있죠.”

-문재인 정권더러 벌써부터 ‘노무현 시즌 2’를 보는 듯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노무현의 경우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고 싶었는데, 너무 심한 태클이 걸렸잖아요. 발목 잡은 부류 중에 정치권도 있지만 언론이 더 컸다고 생각해요. 언론은 잘못된 관행에 대해 고쳐야겠다고 한 번도 반성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점이 섭섭하죠.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할 언론이 오히려 방해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 조금 더 성숙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문 대통령 취임 후 가장 최근 만난 것은 언제죠?

“지난해 8월 초쯤 대통령 휴가 때 저녁을 같이 먹은 적이 있지. 대통령이 ‘하실 말씀이 많죠?’라고 하길래 ‘없어’라고 했어요. 공약 지키려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믿고 지켜보는 거지.”

-문 대통령과의 인연은 언제부터?

“문 대통령 어머니(강한옥 여사)가 제 성당(영도 신선동) 신도였어요. 문 대통령과는 변호사 시보일 때 처음 봤죠.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가 일할 때부터 잘 알게 됐고. 그 뒤 시민운동을 같이 했지.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만들 때 함께 들어가 같이 했고. 민주화운동 하던 젊은이들이 경찰에 끌려가면 내가 변호를 부탁했지. 전두환 시절, 같이 뒹군 사이라고 할 수 있죠 뭐.”

-왜 신부가 됐죠?

“신부는 좋은 일을 한다고 봤지. 또 신부는 자기가 계획한 일을 장애 받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원예고등학교를 나오셨던데.

“그런 쪽에 너무 취미가 있었어요. 그것만으론 부족해 신학교에 갔지만….”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신부가 될 때 받은 게 있어. ‘일어나 가자’(마태복음 26장 46절). 일어나 어디로 가는가 하면, 예수님이 죽으러 가는 거야. 다시 말하면 진리를 지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기 몸까지 다 바쳐버리는 거야. 유신 때 나라꼴이 말이 아닌데 나서야 하지 않았겠나, 그런 용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했지. 그 때 품은 구절이 ‘일어나 가자’예요.”

-취미생활은 없나요?

“별로 없어. 옛날엔 등산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어려워. 요즘은 친구들과 소주나 마시는 거지 뭐. 친구들은 주로 80대야. 송정제, 이태일, 배다지, 강만길…. 다 알 만한 사람들이지.”

-일반 시민들의 삶이 참 버겁잖아요. 사제로서 위안의 말을 한 마디 한다면.

“시민들이 조금 더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너무 쫓기는 것 같아요. 이것은 돈이 많거나 적거나 하는 외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걸 초월해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인터뷰를 마치고…


‘공항 갑질’로 물의를 빚은 김정호(민주당) 의원이 송 신부 집을 찾아왔다. 음모론을 제기하며 버티던 그는 이날 오후 서울로 가서 사과 회견을 했다. 이 과정에 송 신부의 조언이 작용했으리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가 여전히 지역의 어른으로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제관인 그의 집은 한옥 양식인데, 앞에는 수목이 우거진 널찍한 뜰이 있고, 한쪽에는 아담한 정자가 서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생전에 봉하마을의 사저와 바꾸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조용하고 운치가 있는 집이다. 사람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대문은 늘 열려 있다. 담장 가의 모과나무와 감나무는 손을 타지 않아 열매들이 고스란히 한겨울 삭풍과 햇살에 풍장(風葬)되고 있었다. 세월이 스쳐간 노사제의 하얀 머리카락처럼….


윤현주 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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