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기요·부산요 궤적을 쫓다] 2. 일본은 언제부터 우리 사발 좋아했을까-<1부>일본에서 찾은 조선 도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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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자연미’ 조선 사발의 미학에 푹 빠져

고쇼마루의 정면 모습. 높이 8.7㎝, 지름 13.2 -13.5㎝. 일본 유키미술관 소장. 신한균 제공 고쇼마루의 정면 모습. 높이 8.7㎝, 지름 13.2 -13.5㎝. 일본 유키미술관 소장. 신한균 제공
고쇼마루의 뒤집어놓은 모습. 고쇼마루의 뒤집어놓은 모습.

일본에서 고려다완(高麗茶碗)으로 불리는 찻사발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에서 제작된 것이다. 고려다완은 경상도에서 탄생한 이도다완(필자는 황도라 부름), 전라도의 고비키(粉引, 덤벙분청)다완, 충청도의 하케메(刷毛目, 분청귀얄)다완, 함경도의 고모가이(熊川)다완, 그리고 미시마(三島)다완이라 부르는 분청다완 등 여러 종류의 조선 사발을 통칭한다.

일본은 언제부터 고려다완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일본 차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나라 유학승들 차 마시는 법 전수

무로마치 시대 말 차(茶) 문화 유행

투박한 조선 사발에 매료된 센노 리큐

‘와비차’라 부르는 일본 다도 완성


부산왜관 통해 조선 찻사발 일본행

고가로 거래되는 명물 ‘고쇼마루다완’

일본이 조선서 ‘주문한 다완’ 확실시


일본은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 유학승들이 중국 송나라에서 차를 마시는 방법을 배워온다. 귀국한 유학생들은 ‘차를 끓이는 방법과 다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일본에 알리게 된다. 그때부터 일본에는 차 마시는 인구가 늘어난다.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무로마치(室町) 시대에는 투차(鬪茶)가 성행했고 그때 사용하던 다구들은 중국 송나라에서 고가에 수입된 것들이었다. 일본은 송나라 때 수입한 다구들을 중국 당나라 물건이란 뜻으로 당물(唐物)이라 불렀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다완도 조선에서 만들었지만, 당물처럼 고려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 말에는 차 마시는 행위가 다도(茶道)로 발전해 차 문화가 더욱 유행하게 되며, 그 결과 화려한 다도를 추구하는 ‘서원차(書院茶) 다도’가 생겨난다. 그 후 무라타 주코(村田珠光)에 의해 불교의 선(禪)을 더한 다도가 도입되며, 이어 다케노 조오(武野紹鷗)에 의해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일본 다도의 완성자는 센노 리큐(千利休)로 보고 있다. 그 법통은 제자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가 잇게 된다.

현재 일본에서는 센노 리큐가 완성한 다도를 와비차(侘び茶)라 부른다. 와비차는 다완에 와비사비의 아름다움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와비사비의 미학은 ‘젊은 청춘 남녀의 사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면, 노부부의 석양 빛 아래의 다정한 미소도 아름답다’ 정도로 풀이된다.

즉, 젊은 청춘 남녀의 사랑이 화려하고 예쁜 사발이라면 노부부의 다정한 미소는 소박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미를 풍기는 순박한 사발을 뜻한다. 사실 일본인이 고려다완이라 부르는 사발들 중 대명물(大名物)은 조선시대 지방의 사기장, 일본식 표현으론 ‘도공’이 무위적으로 만든 사발들이 대부분이다.

센노 리큐는 조선의 투박한 지방 사발을 보고 와비차를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선 사발의 소박미 속에 녹아 있는 미학(美學)을 알아차린 사람이 센노 리큐였고 그 조선 사발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람이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후에 센노 리큐는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을 반대하다 도요토미에게 죽음을 당한다.

조선 사발은 어디서 어떻게 일본에 건너갔을까?

답은 왜관에 있다. 1407년에 조선은 부산포(현 자성대와 부산진시장 일대)와 제포(진해, 웅천)에 왜관을 설치해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했다. 그 뒤 울산 염포(방어진)에도 왜관을 설치한다. 왜관 설치를 허가한 이유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서였다. 왜관은 상황에 따라 폐쇄와 재설치를 반복하다가 1547년부터는 부산왜관만 존재하게 된다. 이때 부산왜관의 행정적 담당은 동래부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산왜관마저 폐쇄된다. 당시 왜관을 통한 한·일 양국의 주된 무역품은 한국은 면포, 쌀, 콩, 약재, 불경 등이었으며 일본은 동, 유황, 소목, 향료, 염료와 동남아 지역의 산물 등이었다.

일본은 조선이 왜관을 열어 무역을 허가하기 전부터 중국으로부터 당물이라 부르는 도자기를 엄청나게 수입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조선에 왜관이 생겼는데도 왜 도자기를 수입하지 않았을까? 일본의 중세 무역과 다도에 관한 논문을 분석해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다도 연구자이자 노무라 미술관 관장인 다니 아키라(谷晃)는 일본 차회기 연구를 통해 고려다완이 일본인에게 관심을 끌기 시작한 시점을 1555년이라 한다. 그 전에는 조선 도자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1555년, 센노 리큐의 와비차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당시 조선과 일본이 무역을 할 수 있는 장소는 1547년부터 단일 왜관이었던 부산왜관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유추해 보면 임진왜란 전에 일본에 들어간 유명 찻사발은 대부분 부산왜관을 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부산왜관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가마(요)가 없었다. 때문에 부산왜관을 통해 일본이 필요로 하는 다완은 부산 근교에서 구했으리라고 추정한다.

임진왜란 후 부산왜관이 재개항하고, 1644년에 왜관 안에 왜관요가 생긴다. 고려다완에는 일본인이 그림을 그려와 왜관요의 조선 사기장에게 의뢰해 만들어간 어본다완(御本茶碗)도 포함되어 있다. 어본다완은 ‘주문한 다완’이란 뜻이다. 그런데 어본다완이라 불리지 않으면서 일본의 주문 다완이 확실한 찻사발이 있다. 고쇼마루다완(御所丸茶碗)이다. 이 사발은 센노 리큐의 제자 후루타 오리베가 디자인을 했기에 ‘오리베 취향’이라 부른다. 고쇼마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끝낸 뒤 조선 땅을 밟을 때 타고 갈 배 이름이었다. 하지만 도요토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에 대한 도요토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이 사발에 붙인 분류명이라 여겨진다. 현재 고쇼마루다완은 10개 정도가 전해오는데 엄청난 고가(高價)로 거래된다.

1996년 일본 오사카의 유키(湯木)미술관에서 고쇼마루다완을 직접 봤다. 그때 ‘이 명물은 조선의 어디서 누구의 의해 만들어 졌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다음 순서에서는 임진왜란이 일본에서 ‘찻사발 전쟁’으로 불리는 까닭에 대해 살펴보겠다.


신한균








NPO법기도자 이사장 사기장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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