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협력 협동조합 빙고 대표 권기정] “왜 못 도와줘요” 울먹이던 소년이 평생의 트라우마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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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고 권기정 대표가 남수단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던 시절 현지 어린이들과 함께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빙고 권기정 대표가 남수단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던 시절 현지 어린이들과 함께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습니다. 뉴욕 시민이든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든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국내에서도 무분별한 테러와 복수전에 대해 나쁜 여론이 일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너무 먼 곳의 일이었죠. 그래서 직접 아프가니스탄을 찾기로 했습니다. 죽음의 경계로 내몰린 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내밀고 싶었고, 젊었을 때 좀 더 값진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는 20대의 ‘무모함’도 작동했습니다.”

당시 평범했던 경영학도 권기정 씨는 수십 곳 구호단체 문을 두드려, 겨우 굿네이버스 직원 3명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평범한 경영학도서

세계 구호활동가로

파키스탄·네팔 등서

많은 생명 살렸지만

떨치기 힘든 기억은

구하지 못한 생명들

‘빈곤’ 근본 해결 위해

협동조합 설립해

공정무역·여행 추진

기근과 병마에 시달리는 피난민이 끝없이 밀려왔다. 밤잠을 설치며 구호품을 전달하고 환자를 이송하고 다친 어린이들을 돌봤지만, 상황은 개선되는 것 같지 않았다. 작은 보람과 큰 무력감이 교차하는 날이 반복되는 사이, 직원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졸지에 대학생 봉사자만 홀로 남아 현지 구호 책임자가 됐다.

8개월 만에 돌아왔다. 몸과 마음이 지쳤고, 이제 졸업하고 취업해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3개월 뒤 이번엔 구호단체에서 먼저 내전 후유증을 겪고 있는 르완다 현장에 사람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짐을 쌌다.

피할 수 없었던 가시밭길

지난달 개발협력협동조합 ‘빙고’ 권기정(44) 대표는 부산사람이태석기념사업회의 ‘제8회 이태석 봉사상’을 수상했다. 부산 배정고 출신의 권 대표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구호 활동에 발을 디뎌 13년을 넘겨 전쟁과 재난 등에 시달리는 세계 현장 곳곳을 누볐다.

권 대표는 수상 소감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감사한 마음과 평범한 길을 걷고 있지 않기에 미안함을 갖고 있다”며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많은 동료 특히, 아내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현지 구호 활동을 기록한 사진이나 영상은 거의 없다고 한다. 기록을 남길 만큼 여유로운 날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사람이태석기념사업회 제공 현지 구호 활동을 기록한 사진이나 영상은 거의 없다고 한다. 기록을 남길 만큼 여유로운 날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사람이태석기념사업회 제공

아내는 두 번째 구호 활동지였던 르완다에서 만났다. 그래서 살육과 공포의 르완다를 그는 “아름답고 고마운 곳”으로 기억한다. 내전 현장에서 꽃핀 사랑은 영화처럼 꽤 낭만적이었을 듯하다. 당시 르완다 전체를 통틀어 한국인은 권 대표 부부를 포함해 4명뿐이었다.

그러나 구호 현장에서의 삶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권 대표는 “현장 도처에 총과 칼, 포탄이 가득하고, 며칠을 굶주린 이들이 먹을 것을 기다리고 있다”며 “식품 배급도 폭력과 소요 없이 하려면 섬세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질서가 파괴된 공간에서 식량과 의료품을 나눠주고, 학생을 가르치고, 병원을 짓는 건 혼란의 연속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죽어가는 현장에선 짧은 수면을 청하기도 쉽지 않다. 위험도 뒤따른다. 권 대표 역시 내전 현장에서 3~4일 억류됐다가 피난민으로 속여 탈출한 적도 있다. 전문성에다 인도주의적인 의지와 용기가 겸비되어야 버틸 수 있는 일이다.

권 대표는 1년여간 르완다 구호 활동 뒤 2004년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결혼식도 올렸고, 평범한 삶을 위해 취업 준비도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쓰나미가 동남아를 덮쳤고, 방송국에서 급히 권 대표를 연결해 생방송을 진행했다. 구호 활동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던 기자가 ‘쓰나미 현장에 또 가시겠군요’라고 물었다. 얼떨결에 ‘네’라고 답했다.

생방송 중 한 약속을 명분 삼아 다시 스리랑카로 떠났다. 그 길에 그는 구호활동가의 삶이 자신의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학창시절 슈바이처를 존경했다는 권 대표는 가장 어려운 이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네’라는 답도 실수가 아니라 마음 속 진심이었던 셈이다. 이후에도 그는 2015년까지 파키스탄, 네팔. 에티오피아, 이집트, 아이티, 남수단 등의 현장을 누비며 많은 생명을 구하고 그들이 빈곤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놓아 주었다.

생명을 구하는 시작

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정작 떨치기 어려운 기억은 구하지 못한 생명들이다. 권 대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던 아이가 왔는데, 8살 남짓이었다”며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 소년이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면서 왜 못 도와줘요’라고 울먹이던 모습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됐다”고 말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의료활동을 펼치면 지역 의료계가 원망하고, 교육 활동도 현지인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때가 많다. 처음에 구호품에 고마워하던 이들도 어느새 구호품의 품질을 따지며 불평을 시작한다. 권 대표는 “극한 상황이다 보니, 활동가나 현지인이나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때가 많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이태석 신부가 구호활동을 펼쳤던 남수단에서 3년여간의 활동을 끝으로 2015년 귀국해, 개발협력 협동조합 빙고(www.facebook.com/bingokorea, 02-2268-8150)를 설립했다. 언제가부터 제3 세계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해소하는 것이 빈곤 문제를 완화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신념이 생겼다고 한다. 권 대표는 “일례로 스마트폰의 핵심 광물은 콩고에서 생산되는데, 하루 1달러를 벌기 위해 수만 명의 어린이가 광산에서 사선을 넘나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빙고는 조합원을 모집해 공정무역 제품 유통과 공정여행 등을 추진하고 있다. 청소년과 시니어 그룹 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세계 구호와 빈곤 문제와 관련 교육을 하며, 미래의 활동가도 키우고 있다. 위기의 현장에 식량과 의료품을 보내는 것을 넘어, 세계빈곤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구조적인 변화를 꾀하기 위한 활동이다.

권 대표는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의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걸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한다”며 “생명을 구하는 일을 꼭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가 없다. 정당한 대가를 치른 공정무역 제품을 이용하는 것도 많은 생명을 구하는 길이다”고 말했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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