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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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이 시시각각 몰려오고 있던 그때,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러게, 우린 상황을 잘 모르니까 가만히 있으라면 그래야지.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혹시 내가 소란을 피우면 더 많은 이들이 위험에 빠질까 봐, 가만히 있으라니 그래야 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그러라면 그래야 했다. 이유도 모르고 그래야 했다.

사용후핵연료 저장 기한 임박

준비 없이 손 놓고 있던 원자력계

4년 전 중간 저장고 ‘미봉책’ 급급

현 정부도 ‘절차적 명분’에 매달려

정보 공개 않고 국민 소통 외면

5년 전 세월호 아픔 되풀이할 건가

어른들은 학생들에게 객실에 있어야 한다고 지시해 놓고, 자기네들은 가장 먼저 탈출했다. 그렇게 말 잘 듣는 우리 아이들만 희생됐다. 구조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구조할 수 있는 기회들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구조하지 않았다. 재난 상황의 총책임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구조 중이라고, 모두 구조됐다고, 아니 이제 구조할 것이라고, 구조 준비 중이라고, 구조장비가 곧 투입될 예정이니 섣불리 개별적인 구조에 나서지 말라고, 다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배는 끝내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에어포켓이 남아 있다고, 곧 생존자들을 구해내겠다고, 그렇게 못하면 모두 옷 벗을 거라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말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언론은 피해자 가족들을 외면하고 정부를 감쌌다. 정부는 자신의 무책임함을 감추기 위해 언론 장악에 나섰다. 5년 전 4월, 생각하면 할수록 견디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원전 폐기물 처리에 관한 얘기다. 십여 년 전 중저준위 핵폐기물 저장시설을 두고 민란 수준의 거센 저항이 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위험도로 따지면, 중저준위 핵폐기물(원전시설에서 사용됐던 옷과 장갑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이 위험한 고준위 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의 저장고가 이미 그 용량을 넘어섰다. 사용후핵연료는 최소 수만 년 이상의 반감기를 갖는 다양한 방사성동위원소들의 덩어리로서, 그 처리는 진작 원전 건설 때부터 연구하고 대비했어야 할 문제다. 1970년대 고효율의 발전시설이 다급했던 상황을 백번 이해한다고 해도, 2016년부터 저장 용량을 넘어서리라는 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원전별로 저장 용량이 꽉 차는 시점은 2019년, 2021년, 2022년이다.

이를 목전에 둔 2015년, 권고안이 공표된다. 당장은 기다릴 여유가 없으므로 각 원전이 임시로 저장하고 있는 사용후핵연료들을 한 번 더 임시로 저장할 중간저장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각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저장의 만기 시한이 몇 년씩 미뤄졌다. 2015년 권고안에 의하면, 중수로는 2019년 이전에, 경수로는 2024년 이전에 중간저장고를 만들어 이전하도록 돼 있다. 또한 2020년까지 영구저장고 부지 선정을 마치고 실증 연구와 궁극적인 영구 저장시설 건설을 추진하는 것도 권고안에 포함됐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는 이 권고안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한다. 충분한 여론 수렴 절차가 없었다는 이유였다. 재검토위원회를 준비하는 위원회가 작년 11월 6개월간의 활동을 끝냈고, 이달 초에 재검토위원회 구성안이 마침내 발표됐다. 인문·사회, 법률·과학, 소통·갈등 관리, 조사·통계 등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하되 남녀 구성 비율을 균형 있게 배치하고 미래 세대를 대표할 20~30대 인사를 포함한 중립 인사 15인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정작 원전 지역 관계자를 비롯해 환경단체나 원자력계의 대표기관 및 단체 관련자는 배제되었다. 이 와중에 연구를 위해 옮겨갔던 사용후핵연료를 “다시 가져가라” “받을 수 없다”는 실랑이까지 점입가경의 상황이 이어졌다.

도대체 그동안 원자력계는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장 시한이 예정돼 있는 사용후핵연료 문제에 대해 아무 준비 없이 손을 놓고 있다가 시한이 코앞에 닥쳐서야 또 다른 중간 저장시설이 필요하다고 국민을 겁박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속셈인가. 돌이켜 보면 원전 논의는 늘 그래 왔다. 수십 년 동안 아무것도 제때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식이었다. 국민의 불안과 실질적인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성한 잡음 끝에 시한이 임박해서야 에둘러 막다른 선택으로 몰아가는 형국. 정녕,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간이 흐르고 우리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 앞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때를 기다리라는 것인가.

이것은 온당치 않다. 정부가 형식적 중립을 통한 절차적 명분에만 급급해할 일이 아니다. 상호 불신의 근원인 정보 독점과 오남용을 없애고 원자력계의 무책임함과 현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려 국민 전체가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원전이 밀집된 지역 당사자들의 현실적 요청에 듣는 귀를 더 크게 열어야 옳다. 정해진 대답을 감내하며 팽목항에서 광화문으로 기약 없이 떠밀린, 말 잘 듣는 국민들의 가슴을 더 이상 아프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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