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세상 속으로] 집배원 잡는 ‘겸배(兼配)’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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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논설위원

1994년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일 포스티노’의 여운이 짙게 남는 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함께 언덕을 내달리는 집배원과 시인의 자전거 탄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주인공 마리오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망명지로 머문 나폴리 작은 섬에 쇄도하는 팬레터를 배달하던 임시직 집배원이었다. 집배원이 죽고 나서야 뒤늦게 둘의 우정을 담은 가장 아름다운 사연을 전할 수 있었던 장면의 여운은 길다. ‘러빙 빈센트’에서 집배원은 죽기 전에 반 고흐가 남긴 마지막 편지 한 통을 아들에게 기어코 대신 전하게 했다. 집배원이 국가의 부활을 알리는 희망의 메신저가 된 ‘포스트맨’의 SF적인 영웅담을 빼면 영화 속 집배원의 이미지는 대개 책임감 넘치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할머니를 구하거나, 산골 어르신의 시장을 대신 봐주거나, 급류에 떠내려가면서도 동료에게 우편물을 전한 사연이 가끔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대개는 느림의 미학과 아날로그적 감성을 떠올리게 하는 낭만적인 직업이었다.

결원으로 생긴 배달까지 책임지는

집배원의 독특한 직장문화 ‘겸배’

동료에게 업무 떠넘긴다는 부채감

아파도 쉬지 못하고 과로 부추겨

올 들어서만 벌써 집배원 9명 숨져

고질적인 인력난부터 해결해야

현실은 달랐다. 격무에 시달리는 직업이란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로 가혹한 노동 조건인지는 몰랐다. 집배원들이 92.87%라는 높은 찬성률로 파업을 결의하고서야 그들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겸배(兼配)’라는 집배원의 독특한 직장 문화가 과로의 악순환을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됐다. 겸배는 길흉사가 생기거나 병가나 휴가로 자리를 비우면 그 빈 구역을 동료 집배원이 나눠 배달하는 거다. 일손이 모자랄 땐 겸배를 두 배로 해야 하는 ‘쌍겸배’도 감당해야 한다. 내가 쉬면 동료가 더 고생한다는 지독한 부채감이 결국엔 과로로 이어지는 구조다. 자신의 휴식이 고스란히 동료의 업무량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 휴가나 병가를 쉬 내지도 못한다. 집배원 사이에 ‘여름휴가 안 가기 운동’이란 게 있을 정도다. 자기 혼자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히지 않으려면, 아파도 참고 일할 수밖에 없다.

겸배를 하다 보면 낯선 곳에 배달을 나가야 해서 사고 위험도 커진다. 2년 전 대구에서 40대 집배원이 숨진 것도 겸배를 위해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다 사고를 당해서였다. 집배원들이 겸배를 없애야 한다고 입을 모은 이유다. 그런데도 겸배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건 장시간 노동을 부추기는 고질적인 인력난 탓이다.

집배원들의 살려달라는 외침은 은유가 아니라 직유다. 올해만 벌써 9명이 과로사 등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집배원 하면 떠오르는 낭만적인 이미지와 달리 집배원은 ‘위험한 직업’이었다. 2017년 7월 경기도 안양에선 21년 차 집배원이 자신이 근무하던 우체국 앞에서 몸에 불을 붙여 결국 숨졌다. 두 달 뒤 전라도 광주에선 15년 차 집배원이 “이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하라네”라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집배원의 죽음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그해 노사정이 참여하는 ‘집배원 노동조건 개선 기획추진단’이 꾸려졌다. 추진단의 조사 결과 집배원의 평균 노동시간은 2017년 기준 2745시간이었다. 장시간 노동으로 악명 높은 한국 평균 노동시간 2052시간보다도 693시간이나 많다. 3000시간 넘게 일한다는 집배원도 1400여 명이나 됐다. 살인적인 업무 강도에 더해 집배원을 더 힘들게 하는 건 스트레스다. 추진단 조사로는 집배원의 직무 스트레스가 소방관(48.8점)보다 높은 54.6점이었다.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지난해 5월 우정노사협의회에서 2019년 7월 1일부터 토요 배달을 폐지하기로 했고, 그해 10월엔 추진단에서 2000명의 집배원을 정규직으로 증원하라고 했다. 집배원들은 그 약속을 지키라고 파업을 결의한 것이다.

파업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집배원 1000명 인력 증원을 위한 예산이 2019년 예산안 논의 과정에서 국회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까지 통과했다가 마지막 소소위에서 감쪽같이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국회뿐만 아니다. 우체국 금융사업에서 내는 수천억 원의 흑자를 고스란히 가져가면서 공공성이 강해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우편사업은 우정사업본부에서 알아서 하라고 뒷짐 진 정부도 책임이 크다.

그래서인지 집배원의 파업엔 여론도 이례적으로 호의적이다. “가장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로 투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는 댓글이 파업을 예고하는 기사 뒤에 달렸다. 파업이 당연한 권리인데도 파업이 초래하는 불편함만 유독 강조해 파업에 부정적인 여론의 흐름과는 결이 다르다. 파업을 하더라도 필수인력으로 일을 해야 하는 75%의 집배원이 과로사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댓글도 보인다. 무엇보다 “더 이상의 죽음이 없기를 바란다”는 댓글이 눈에 밟혔다. 인력 충원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그렇다고 집배원의 부음(訃音)을 계속 듣고 있을 수는 없다.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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