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부끄러움, 부채의식, 불매운동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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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섭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시인 정지용이었다. 당시 정지용은 〈경향신문〉 주간으로 일하고 있었다. 1947년 초, 〈경향신문〉 기자이자 윤동주와 연희전문 동기였던 강처중이 정지용을 찾아왔다. 2년 전 후쿠시마형무소에서 옥사한 친구의 육필 원고를 건네며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윤동주 시를 세상에 알린 정지용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다”

불매운동, 역사 청산으로 이어져야

같은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정지용이 무작정 강처중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리는 없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정지용은 이미 문단의 원로로 대접받고 있었지만 윤동주를 아는 사람은 지인 몇에 불과했다. 처음 접하는 무명 시인의 작품을 함부로 신문에 실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꼼꼼하게 작품을 검토한 끝에 정지용은 1947년 2월 13일 ‘쉽게 씌어진 시’라는 작품을 신문에 싣고 직접 소개 글을 썼다. 윤동주의 생애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나서 정지용은 이렇게 덧붙였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 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 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

정지용은 왜 무명에 불과했던 윤동주의 시가 자랑스럽다고 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짐작하려면 1948년 1월 발간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펼쳐보아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접해 보았을 테지만, 이 시집의 서문을 읽어본 이는 드물 것이다. 그 서문을 정지용이 썼다. 서문에서 정지용은 윤동주 시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附日) 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 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정서가 부끄러움인데, 오히려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야말로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다.

정지용은 일제 말기에 절필을 선택했다. 윤동주의 시집 서문을 쓰고 몇 달이 지난 후에 발표한 ‘조선시의 반성’이라는 글에서 정지용은 일제 말기 무력하게 지냈던 자신의 행적을 이렇게 고백했다. “친일도 배일(排日)도 못한 나는 산수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 일제에 협력하는 글을 쓰거나 절필하는 것, 당시 조선의 작가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많은 작가가 일제에 협력했고, 그나마 결기가 있던 소수의 작가들은 창작을 중단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친일 작품을 써내고 청년들에게 전쟁터에 나가라고 선동했던 작가들에 비하면 양심을 지킨 편이었지만, 정지용 역시 윤동주의 시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윤동주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우리말로 시를 썼고, 더구나 식민지인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그 안에 담았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알았기에 그의 시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고 다른 시인을 부끄럽게 할 수 있었다.

정지용이 윤동주를 통해 느낀 부끄러움의 다른 이름은 부채의식일 것이다. 부채의식이란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이 과거의 누군가가 희생한 결과이며, 따라서 그 누군가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의식이다. 부채의식은 인간이 도덕을 따르고 타인을 돌보게 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3·1운동과 4·19를 기념하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은 모두 부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지용 역시 윤동주에게 부채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조금이나마 그 빚을 갚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의 경제 도발로 촉발된 불매운동이 식을 줄 모른다.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라는 구호에 담겨 있는 강력한 부채의식이 불매운동의 동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토착왜구’라 불리는 친일 세력들의 커밍아웃까지 이루어지면서 불매운동은 역사 청산에 대한 요구로도 나아가고 있다. 정지용은 ‘민족반역자 숙청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온상이고 또 그들의 최후까지의 보루이었던 8·15 이전의 그들의 기구-이 기구와 제도를 근본적으로 타도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오. 혁명을 거부하고 친일 민반도(民叛徒) 숙청을 할 도리가 있거든 하여 보소.” 정지용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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