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문맹이 된 순간, 인간은 원숭이와 다름없더라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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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백승주

외국인이 되어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유려하고 재치 있는 문체로 역설한 책이 나왔다.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는 대학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온 사회언어학자가 1년간 중국에서 순도 100%의 외국인으로 살면서 겪은 경험에 자신의 사유를 녹여낸 인문 에세이다.

저자는 낯선 땅 상하이 푸단대학교에 교환교수로 파견되자, 중국어를 배우지 않은 채 자발적 ‘문맹’이 되어 언어학자로서 자신의 디폴트값을 내려놓는 ‘문맹 되기’를 실천한다. 디폴트값(default value)은 컴퓨터에서 사용자가 따로 지정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주어지는 상태의 기본값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파견된 저자

중국어 배우지 않은 채 자발적 ‘문맹’ 선택

사람과 사회 사이의 관계·문화 등 탐구

저자는 이 같은 삶의 실험을 통해 언어를 매개로 타인과 세상에 연결되던 한 사람이 언어를 잃고 난 뒤 새롭게 시작된 세계에서 자신과 사회, 삶의 의미 속으로 사유를 확장해 가는 과정을 16편의 에피소드로 소개한다.

첫 번째 글 ‘변신, 또는 외국인 되기’는 상하이 푸둥공항에 도착한 순간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아메리카노라는 흔한 단어가 스타벅스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저자는 한 영장류학자의 원숭이 실험을 떠올린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원숭이를 만난 붉은원숭이는 어색함을 무마하고 공격 의사가 없다는 유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며 모자란 웃음을 짓는데, 낯선 나라에서 외국인이 된 순간 우리 모두는 결국 자신이 털 없는 영장류임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낯선 땅에서 낯선 리듬에 몸을 맞춰가는 사연들을 들려준다. ‘가리키기는 일종의 초능력’, ‘물 좀 주소’, ‘마오의 나라에서 햄버거를 먹다’ 까지 각 에피소드를 통해 세상에 고정된 절댓값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저자가 언어학자인 만큼 책에는 언어-사회-사람의 고리를 잇는 신선하고도 유쾌한 시선이 곳곳에 드러난다. ‘버스가 가진 수많은 풍경들’에서 저자는 타야 할 버스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긴박한 사건으로부터 ‘버스’라는 단어의 기원인 ‘옴니버스’를 도출해 내고, 끼니로 때울 달걀을 삶으면서 인간의 입에 대한 명상으로 확대되는 ‘인간의 입이란 보잘것없습니다’에서는 먹는 행위에 말이 어떻게 개입되는지를 티라노사우루스와 마녀, 셰프, 사냥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와 줄줄이 엮어 고찰한다.

책을 읽다보면 어떤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라는 큰 풍경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문화’라는 것도 사실은 다양한 디폴트 값들의 묶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백승주 지음/은행나무/252쪽/1만 4000원. 백태현 선임기자 hyun@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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