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으로 세상 읽기] 23. 인류의 교사, 지혜의 농부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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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의식할 때 진실한 삶의 길 열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인간이 죽음을 의식할 때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사진은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중 한 장면. 부산일보DB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인간이 죽음을 의식할 때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사진은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중 한 장면. 부산일보DB

‘여우는 많은 것을 안다. 그러나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안다’ 라트비아 출신의 학자 아이자이아 벌린은 철학자와 문학가를 고슴도치 유형과 여우 유형으로 대별한다. 많은 것을 두루 아는 여우형은 셰익스피어, 아리스토텔레스, 괴테가 대표적이다. 플라톤, 단테, 헤겔은 단일한 이론을 파고드는 고슴도치형이다. 그런데 레프 톨스토이(1828-1910)가 말썽이다. 인간과 사회의 거대한 주제에 천착한 전문가(Specialist)이자 박학다식(Generalist)의 ‘끝판왕’이 톨스토이다. 벌린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자신을 고슴도치라고 생각하는 여우다. 욕망이 들끓는 존재지만 자신을 금욕주의자로 규정했다. 본부인과 13명의 자녀를 낳고도 혼외자를 둘 만큼 정력과 체력이 넘쳐났다. 14세에 사창가를 출입하고, 군 장교 시절 1만 5000루블의 노름빚을 졌다(소위 연봉이 200루블인 시절에!). 여성과 도박, 그리고 인정받고 싶다는 허영욕으로 똘똘 뭉친 그에게 중년의 위기가 닥쳐왔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고 난 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온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두 시, 생이 모두 무(無)로 끝난다는 사실을 공포와 고통 속에 깨닫고 그는 새 삶을 향한 실존적 결단을 내렸다. 50세는 톨스토이의 삶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반환점이다. 귀족의 신분과 막대한 부를 누리던 대지주에서 사유재산을 공격하고 농부를 사랑하는 무정부주의자로 급선회했다. 누군가는 성경에 나오는 욥의 비유를 들기도 한다. 안일한 일상에 닥쳐온 고통 속에서 정신적으로 거듭나면서 자신과 인류의 진리를 얻는 삶의 구도자가 됐다는 지적이다.

무(無)에 대한 공포로 새 인생 결단

죽음과 대화 통해 삶의 구도자 지향

‘생자필멸’… 인간에 절대적 평등 보장

타인 위하는 순간 ‘내면의 선’ 찾게 돼

죽음,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

톨스토이가 집착한 죽음에 관한 생각은 뒤집어 말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그는 〈참회록〉에서 불교의 안수정등(岸樹井藤)우화를 인용하면서 죽음의 확실성에 눈뜬 이상 어제와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다고 토로한다. 사실 그의 모든 소설은 죽음과의 대화라는 것이 노문학자 석영중의 통찰이다. 그중에서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층 특별하다.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못하고 죽음의 화두에만 몰두하던 그가 나름의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판사로 잘 나가던 이반 일리치가 45세에 불치병을 얻고 몇 달간 고통에 시달리다 자신의 평생을 되돌아보면서 임종의 순간 깨달음을 얻고 숨을 거둔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소설의 첫 부분은 일리치의 부고를 접한 판사들의 반응이다. 망자의 빈자리에 뒤따른 인사이동과 연봉 인상만이 관심사다. 인간 일리치에 대한 절절한 추모와 동정은 없다. 죽음은 피하고 싶은 소재이기 때문에 아예 언급조차 않는 것이 상책이다. 대체로 사람들이 채택하는 현실적인 죽음관이다. 고인이 살아있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남은 사람들은 항변한다. 때문에 “이반 일리치의 삶은 대단히 단순하고 평범했고 그래서 대단히 끔찍했다.” 사람이 죽었지만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잊는 일이다. 그가 어떤 생각과 일을 했는지, 얼마나 좋은 추억을 나눴는지 아무도 돌이켜보지 않는다.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도피하면서 생기는 폐습이다.

‘메멘토 모리’는 삶의 본령

하지만 죽음은 마음에 두어야 한다. 삶의 의미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을 자각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인간에게만 고유하다. 게다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절대적 평등을 보장한다. 모두가 죽었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마음을 열게 해준다. 무엇보다 죽음을 의식할 때 인간은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다. 금방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직 착한 삶에만 초점을 모으게 된다. 영원히 산다고 착각하니 비교와 경쟁, 시기와 질투에서 허우적대는 것이다.

출세 가도를 달려왔던 이반 일리치는 병석에서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지만, 술과 도박, 승진과 연봉 같은 것들이 죽음을 가린 속임수에 불과했다고 깨닫는다. 몸도 괴롭지만 자신과 주변의 삶이 모두 거짓이고 사기라는 생각에 마음은 가일층 고통스럽다. 게다가 죽음을 터부시하는 사람들 탓에 진정한 소통도 할 수 없어 고독감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을 삶과 한 몸으로 바라보는 하인 게라심은 그를 연민하고, 어린 아들의 울음은 눈을 감으려는 그에게 오도송(悟道頌)처럼 닥쳐든다. 운명 직전에 지금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아집들이 껍데기를 깨면서 타인을 위하는 도덕적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모두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자는 내면의 선을 찾아낸 순간 일리치는 기쁨을 느끼면서 기꺼이 죽음을 수락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의식하라)는 ‘인류의 스승’ 톨스토이가 삶의 본령을 외면하지 말라며 나태한 일상을 내려치는 죽비소리다. 그러니 다들 착하게 살자!


정승민


교양 팟캐스트 ‘일당백’ 운영자


※이번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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