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주의 맛있는 인터뷰] 피아니스트·작곡가·화가·서예가·시인·소설가 ‘만능 예술인’ 연세영(데이드림)

윤현주 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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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비전공자라, 하루 10시간씩 손등 붓도록 피아노 쳤죠”

만능 예술인 연세영이 ‘스페이스 움’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하루 4시간 자고 부지런히 연습하는 게 예술인으로 살아 남은 비결이다”고 말했다. 김경현 기자 view@ 만능 예술인 연세영이 ‘스페이스 움’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하루 4시간 자고 부지런히 연습하는 게 예술인으로 살아 남은 비결이다”고 말했다. 김경현 기자 view@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연세영(54). 예명은 데이드림. 그는 드라마 ‘겨울연가’의 테마곡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까지만 알고 있다면 그를 부분밖에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이 외에 화가, 서예가, 시인, 소설가로도 예술혼을 불사르고 있다. 한 파워 블로거는 그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뼛속까지 아트의 피가 흐르는 종합 예술인이요, 시와 그림과 음악으로 영혼을 낚는 뉴에이지의 음유시인.”

심지어 그를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격찬하는 이도 있다. TV에는 잘 출연하지 않아 대중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연세영은 폭넓은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만능 예술인이다.

원래 중·고·대학까지 전공은 미술

가정형편 탓 피아노 알바하며 실력 다져

1991년 MBC 신인가요제 등서 수상도

드라마 ‘겨울연가’ 테마곡으로 스타덤

2004년부터 본격적인 작곡·연주 활동

다시 붓 잡기 시작한 건 졸업 10년 후

개인전 28회에 국전서 우수상도 받아

고교 이후 습작, 시집 13권·소설 7편 써

최근엔 조선의열단원 김상옥 소설 펴내

새벽 4시 일과 시작하며 시·소설 쓰고

낮엔 피아노 연습·저녁엔 그림 그려

공연 잡혀 있을 때면 연주에만 ‘몰두’

온몸과 영혼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그를 부산 동래구 ‘스페이스 움’에서 만났다. 움은 부산에 유달리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그가 부산에 오면 즐겨 찾는 문화공간이다.

-최근 장편소설 <조선의열단 쌍권총-김상옥>을 펴냈는데 어떤 내용인가?

“일제강점기 조선의열단 단원이자 독립투사였던 김상옥 선생의 일대기를 사실과 픽션으로 버무린 소설이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회장 김원웅)로부터 출판 지원을 받았다.”

그는 자료 조사에서 출판까지 3년 정도 걸렸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

-영화화 계획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인물 자체가 매우 드라마틱한 분이라 영화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이다. 의열단기념사업회에서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쯤 예고편을 내고, 하반기에 개봉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영화의 음악은 내가 직접 만들 계획이다.”

연세영은 김상옥 선생을 조사하는 과정에 국립현충원의 공훈록에 쓰인 김 선생의 한자 이름(尙沃→相玉)과 부인의 이름(정진수→정진주)이 오기임을 밝혀내고 바로잡은 일이 보람있었다고 말했다. 연세영은 2016년 <계간문예> 신인상 수상으로 소설가로 등단했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소설을 써 왔다. 5편의 단편소설과 1편의 중편소설(<허난설헌-몽유일기>), 1권의 장편소설(<다산 정약용-차왕(상·하)>)을 선보였다.

지난 6월 말레이시아 공연 장면. 지난 6월 말레이시아 공연 장면.

-최근 말레이시아 공연을 다녀왔지 않나?

“6월 말 4박 5일로 갔다왔다.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 등 귀빈들이 참석한 ‘My Voice My Nation’ 공연이었다. 3만 객석이 꽉 찼고, 1억 명이 생중계로 시청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너는 환희’와 ‘아리랑’ 등 창작곡과 ‘겨울연가’ 테마곡을 메들리로 연주했다.”

이번 방문은 ‘국빈급’이었다고 한다. 체류하는 5일 내내 롤스로이스 승용차와 운전기사, 그리고 경호원과 비서가 제공됐다. 또 이 행사에서 그는 올리비아 뉴턴 존, 리오넬 메시, 무하마드 알리, 성용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탄 ‘브랜드 로리어트 어워즈’를 수상했다.

-‘겨울연가’ OST로 유명해졌는데,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2001년 ‘Dreaming’이라는 피아노 솔로 음반을 냈다. 그 음반을 각 방송사에 돌렸는데, KBS PD가 그 음악을 듣고 좋아서 ‘겨울연가’ 테마곡으로 삽입한 것이다. 10곡 중 6곡이 테마곡으로 쓰였다. 2002년 ‘겨울연가’가 일본에 상륙하면서 나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2004년부터 드라마가 동남아로 퍼지면서 공연 요청이 많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연세영은 원래 기자였다. 1993년부터 주간지, 일간지 등 기자생활을 하며 틈틈이 작곡을 했는데, ‘겨울연가’로 이름이 나면서 2004년 기자생활을 접고 본격적인 작곡·연주 활동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낸 정규 앨범만 11장이나 되며 편집 앨범까지 합치면 25장쯤 된다. 그는 그동안 케빈 컨, 이사오 사사키, 마이클 호페, 나카무라 유리코 등 세계적인 거장들과 합동공연도 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을 높여 왔다.

2013년 일본에서 열린 ‘겨울연가 10주년 기념 콘서트’ 장면. 연세영과 더불어 윤석호 감독과 최지우 등 ‘겨울연가’ 배우들 모습. 2013년 일본에서 열린 ‘겨울연가 10주년 기념 콘서트’ 장면. 연세영과 더불어 윤석호 감독과 최지우 등 ‘겨울연가’ 배우들 모습.

-대학에선 미술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음악으로 방향을 틀었나?

“군 제대 후인 1991년 MBC 신인 가요제와 KBS 창작가요제에서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가 음악을 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사정이 얽혀 있다. 대학에 다닐 당시 가정 형편이 워낙 어려웠던 탓에 저녁에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피아노 실력을 다졌다. 연세영이 고3 때 불의의 사고로 작고한 작은형도 그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형의 꿈이 음악도였다. 연세영은 “형 장례 때 들어온 부의금으로 내 대학 입학금을 냈다. 그래서 형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피아노는 누구에게 배웠나?

“어머니에게서다. 어머니는 무명의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나는 6남매 중 피아노에 가장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찌감치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도 미술을 권유했다.”

그는 선화예중, 계원예고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며 대학(중앙대) 전공도 미술이었다. 하지만 고3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우는 바람에 피아노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녀야 했고, 이 바람에 미술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는 휴학과 복학을 거듭한 끝에 10년 만에야 졸업장을 받았다.

-음악 비전공자로서 어려움은 없었나?

“오로지 연습뿐이었다. 40대 중반 이후 하루 10시간씩, 손등이 복어처럼 붓도록 피아노 연습을 했다. 이제는 기력이 달려 그렇게는 못한다.(웃음) 그래도 5,6시간은 연습하려고 노력한다.”

학벌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음악 비전공자의 서러움은 컸다. 예컨대 2011년 프라하 필 오케스트라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세영의 창작 교향곡 ‘Stepping On The Rainy Street-Allegro’를 이틀간 연주했다.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그러나 국내 유수 오케스트라는 한 군데도 그의 곡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음악을 전공했는지부터 따졌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 스승은 어머니였다. 그리고 종교(기독교)와 자연이 씨줄 날줄로 엮여 연세영 음악의 무늬를 이루고 있다.

-미술은 언제부터 재개했나?

“1994년 졸업 뒤 10년가량 붓을 잡지 않았다. 그런데 철이 들면서 다시 미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미술을 내팽개친 잘못에 대한 반성문을 쓴다는 기분으로 붓을 잡았다.”

‘겨울연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인 2003년부터 붓을 잡은 연세영은 재회한 첫사랑처럼 그림에 빠져들었다. 지난해까지 28차례나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단체전에도 참여했다. 연세영은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국전에 입선이라도 하는 것을 보고 싶다”라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늦은 나이에 대한민국미술대전에 도전했으며 2018년 우수상, 2019년 특선(비구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나온 음반들. 지금까지 나온 음반들.

-소설과 시는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

“고교 때부터 습작을 했다. 이후 글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해 왔다.”

그에게 등단은 하나의 관문에 불과했다. 등단 훨씬 전인 1988년 <너에게로 향한 작별>이란 첫 시집을 낸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3권의 시집을 냈다. 그의 노트북에는 2500여 편의 미 발표 시가 활자화를 기다리며 숨을 쉬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비결은?

“하루에 4시간 잔다. 새벽 4시부터 일과를 시작한다. 새벽에는 시, 소설 등 글쓰기를 한다. 낮에는 피아노 연습을 하고 저녁에는 그림을 그린다. 연주가 있을 때에는 연주에만 몰두한다.”

그는 한 달에 두세 번의 작은 연주가 있다고 했다. 1만~2만 석의 큰 공연은 2년에 한 번, 동남아·중국 등 해외 공연은 1년에 한두 번꼴로 하고 있다고.

-궁극적으로 예술이란 뭐라고 생각하나?

“예술은 ‘사람 되기’ 위한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인격과 인성을 갖추기 위한 과정이 예술이다.”

회사후소(繪事後素)라고 했던가.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에 대해 연세영은 다음과 같은 포부를 밝혔다. “지금껏 배웠던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 후학 양성에 힘쓰는 한편 문화예술인 권익 보호를 위한 문화행정을 펼치고 싶다.” 그는 시종일관 겸손하면서도 진지하고, 그러면서 유쾌했다. 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어머니와 작고한 두 형을 위한 ‘멀티 아티스트’ 꿈

연세영은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멀티 아티스트이다. 남들은 한 가지도 하기 어려운 일들을 그는 어떻게 다 해 낼 수 있을까?

그는 일찍 작고한 큰형과 작은형 애기를 꺼냈다. “나에 대한 두 형의 기대가 컸다. 두 분이 못 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위해 기도한 것을 늘 생각한다. 어머니는 내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머리카락을 자르신 분이다.”

음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문예창착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며, 미대에 다니며 미술 공부를 게을리한 연세영. 자신이 비주류라는 일종의 열등의식이 그로 하여금 열정을 불사르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맘껏 발휘함으로써 자기 안의 어두운 면을 치유하기도 하지만 자기처럼 전공을 하지 않았지만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많은 예술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도 전해주고 싶다는 게 연세영의 속내이다.


윤현주 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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