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월동 이젠 '홍등'을 끄자] 2. 공창제에서 폐쇄 논의까지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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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밝힌 완월동 홍등, 100년 넘게 켜져 있다

1910년대 서구 충무동 일대 미도리마치(綠町·녹정) 전경. 부산 중구청 제공 1910년대 서구 충무동 일대 미도리마치(綠町·녹정) 전경. 부산 중구청 제공

완월동은 우리나라 최초로 ‘공창제’가 도입된 곳이다. 일제는 성매매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며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관리했다. 이를 두고 여성단체들은 우리나라의 성매매산업은 일제 잔재라 지적한다. 이전부터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해방 후 성매매는 불법으로 규정됐지만 여전히 성행하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을 계기로 성매매 집결지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1916년 일제가 만든 공창 완월동

당시 ‘녹정’에 유곽 모아 관리

“성매매 집결지 일본이 들여온 것”

1948년 공창제 폐지, 사창 전환

60년대 매춘관광 외화벌이 수단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에도

여전히 37곳 업소 200여 명 남아

번번이 무산된 폐쇄 움직임 재개

1905년 부산항 전경. 동그라미 안 건물은 당시 매춘업소 ‘안락정’으로, 일대에서 가장 높은 3층이었다. 1905년 부산항 전경. 동그라미 안 건물은 당시 매춘업소 ‘안락정’으로, 일대에서 가장 높은 3층이었다.

■공창의 시작, 미도리마치(녹정)

개항 이후인 1902년 한 일본인은 현재 부산 중구 부평동 족발골목 인근에 요리정 형식의 매춘업소인 ‘안락정(安樂亭)’을 세웠다. 일본 영사관의 정식 허가를 받아 운영한 조선 최초의 유곽이었다. 유곽의 조성과정을 논문으로 쓴 양미숙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안락정이라는 최초의 유곽이 부산에 들어서면서 성매매 집결지 형태의 성매매가 시작됐는데 바로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여온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논문 〈개항기~1910년대 부산의 유곽 도입과 정착과정〉에 따르면 개항 당시 82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은 개항 2년 만에 1400명으로 늘어났다. 목수나 미장이 등 단순 노동자에서부터 무역상, 잡화상, 세탁업, 숙박업 등에 종사하는 일본인 남성들이 부산으로 건너왔다. 여기에는 이들을 상대로 성을 파는 일본인 여성들도 함께 이주해 왔다. 점차 안락정 이외에도 부산 곳곳에서 요리점 형식의 윤락 업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요리점이 17곳으로 늘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28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일본인 거류지까지도 요리점이 속속 들어서면서 일본은 풍기단속을 명목으로 1916년 부산 곳곳의 유곽을 한데 모아 현재 서구 충무동 성매매 집결지에 ‘공창’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곳을 ‘미도리마치(綠町·녹정)’라 불렀다. 원래 목마장이 있던 곳이라 억새와 갈대가 무성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곽을 한데 모아 관리하는 ‘녹정’의 등장은 성매매의 합법적 운영을 뜻했다.

2014년 발간된 부산연구원의 ‘완월동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1916년 매춘관리법을 발표해 조선 각지마다 다른 매춘관리법, 용어 등을 통일해 효율적으로 성병을 예방하고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관리, 통제했다.

■완월동에서 충무동으로

1947년 미군정하에 공창제가 폐지됐다. 1948년부터는 녹정이라는 이름 대신 완월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녹정 유곽은 광복 이후 조선인들이 윤락 업소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가 1948년 공창제도 폐지령에 따라 사창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미군이 이곳을 이용하면서 녹정의 영어식 표현인 그린스트리트(Green Street)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는 사회기강확립이라는 명목으로 1961년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제정해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여성인권단체 살림 상담소 최수연 소장은 “당시 정부는 아예 여성들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생각했으며 이 여성들을 등록해 관리·통제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살림 보고서에 따르면 1979년 완월동에는 124개 업소에서 여성 1250명이 성병 진료병원에 등록돼 있었고, 미등록 여성 500여 명이 성매매를 하고 있었다. 당시 만들어졌던 ‘의료보호 1차 지정의료기관 성병대용진료소’의 간판이 아직도 완월동 일대에 남아있다. 부산시에 따르면 완월동이 집창촌 이미지가 강하다는 주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1982년 ‘충무동’으로 동명을 변경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일대에서는 지속적으로 불법 성매매가 이뤄졌다. 그러다 2000년대 군산 개복동과 대명동, 부산 완월동 화재로 20여 명이 사망하면서 성매매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특별법은 기존 성 구매자뿐만 아니라 알선자, 포주, 건물주를 강력히 처벌하는 법이다. 1961년 윤락행위 등 방지법으로 성 구매자에 대한 처벌이 가능했으나 직접 현장을 잡거나 증거를 잡기 어려운 점을 보완한 것이다. 정부는 당시 특별법까지 제정하며 성매매 근절 의지를 보였지만 단속의 어려움과 솜방망이 처벌로 37곳의 업소에 200여 명의 여성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완월동 붉은 등도 꺼질까

2004년 성매매 특별법 시행 이후 성매매산업이 음성화되면서 전국의 홍등가들이 점차 하나둘씩 불을 끄기 시작했다. 홍등가 지역들은 재개발 등을 거쳐 문화공간, 주거단지로 재탄생하고 있다. 부산만 하더라도 부산 ‘범전동 300번지’는 2013년 재개발을 통해 주상복합아파트로 바뀌었으며, 감전동 ‘포푸라마치’도 주거환경관리사업을 통해 일반주택가로 바뀌었다. ‘해운대 609’에는 대규모 생활형숙박시설 건립이 추진 중이다.

완월동 역시 앞서 지난 2005년과 2013년에도 재개발과 도시재생 등의 사업이 추진됐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수년간 답을 찾지 못했던 완월동에도 다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완월동 상인회 ‘충초친목회’가 이 일대를 도시재생활성화지역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등 완월동 폐쇄에 뜻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완월동 개발 혜택이 불법 성매매를 통해 재산을 쌓아 온 일부 업자들에게 갈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이 일대를 ‘공공 개발’할 것을 시와 구청에 요구하고 있다.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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