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태현의 '문화 터치'] 20. 만추(晩秋)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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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가슴에 묻어야 하는 비밀 이야기… 그것도 사랑

아무리 가슴 저미고 힘들어도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일 것이다. 백승환 사진가 제공 아무리 가슴 저미고 힘들어도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일 것이다. 백승환 사진가 제공

누구나 가슴 한켠에는 아련한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잊지 못할 첫사랑의 경험일 수도 있고, 관포지교의 우정일 수도 있겠지요. 또는 운명적인 내 삶의 어떤 만남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사랑의 언어를 속삭여주는 빛나는 기억들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미소짓게 합니다. 왠지 모를 쓸쓸함이 감도는 이 깊어가는 가을에 그런 기억들을 불러 일으키는 영화 세 편이 떠오릅니다.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끝내 표출하지 못한, 이루지 못한 사랑

‘가을의 전설’

어긋나고 빗나간 사랑, 운명적 사랑

현실 속에서 붙들 수 없어서 더 애잔

‘만추’

오래 여운이 남는 짧고도 강렬한 연가

“좋은 시절 금방 갑니다. 사랑하세요”

먼저 이룰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의 감정을 간결한 대사와 절제된 화면의 전개를 통해 보여주는 ‘화양연화’(2000)입니다. 왕자웨이 감독의 이 영화는 서로의 배우자끼리 바람이 난 것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된 두 남녀, 초모완(량차오웨이 분)과 수리첸(장만위 분)의 조심스러운 만남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별의 과정이 아련한 슬픔으로 와닿습니다.

량차오웨이의 그윽하고 깊은 눈빛과 치파오를 입은 장만위의 억제된 감정과 욕망이 영상미를 고조시키며 감상자의 마음을 압도해 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이르는 말인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제목으로 단 이 영화가 절제와 망설임, 주저하는 만남과 쓸쓸한 이별, 사회적 의무와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해 미완성으로 그려지는 것이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내 표출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인지, 또 그런 사랑은 소심하고 덜떨어진 사랑으로 취급받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개할 또 한 편의 영화는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가을의 전설’(1994)입니다. 이 영화는 야생마처럼 종잡을 수 없는 남자 트리스탄(브래드 피트 분)과 그를 사랑하는 수잔나(줄리아 오몬드 분) 사이의 어긋간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트리스탄의 순수하면서도 거칠고 야성적인 매력에 빠져들지만 방황하는 그를 붙잡지 못한 채 그의 형인 알프레드와 결혼하고, 끝내 그를 향한 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자살하고마는 수잔나의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미국 서부 산악지대 몬타나의 광활하고 아름자운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잘 알려진 트리스탄 이야기는 켈트족의 전설로 내려오다가 문학화한 중세 유럽의 최대 연애담으로, 지상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한 비련의 서사시입니다. 영화에서 러드로우 대령(안소니 홉킨스 분)의 세 아들인 알프레드, 트리스탄, 새뮤얼 모두가 한 여자 수잔나를 사랑하며 벌어지는 어긋나고 빗나간 사랑,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의 비극적인 사연이 트리스탄의 전설을 연상케 합니다. 분명 사랑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붙들 수 없고 이룰 수도 없는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면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가슴 죄어오는 기구하고 절절한 인연의 사랑을 그린 영화도 있습니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晩秋)’(2010)는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짧고도 강렬한 사랑의 연가입니다. 이 영화는 이만희 감독이 연출하고 신성일·문정숙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서로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가슴시린 사랑의 얘기를 들려줍니다.

남편 살해범으로 수감 중인 애나(탕 웨이 분)는 어머니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사흘간의 휴가를 받아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를 탑니다. 이 버스에 쫓기듯 ‘연애 직업남’ 훈(현빈 분)이 올라타고 애나에게 차비를 빌리면서 그들의 불꽃갗은 사랑은 시작됩니다.

애나는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가 다시 찾아온 옛사랑의 남자와 함께 도주하려다 남편에게 발각돼 구타당하던 중 남편 살해범이 된 것입니다. 애나는 훈을 만나 살가운 이해와 배려를 받으면서 식었던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남을 실감합니다. 훈 역시 애나에게 직업정신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느낍니다. 하지만 훈은 애나에게 “출소하는 날 여기서 다시 보자”는 말과 절절한 키스의 추억만 남긴 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경찰에 잡혀갑니다. 2년 후 출소한 애나는 그 휴게소 카페를 찾아 훈을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애나 역을 맡은 탕웨이의 농축된 연기와 늦가을의 쓸쓸한 분위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또 수륙양용 시애틀 관광버스 기사의 안내 멘트도 인상적입니다. “햇빛을 즐기세요. 안개가 다시 끼기 전에.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금방 갑니다. 즐기세요, 마음을 열고. 지금 사랑하자구요.”

소개한 영화 세 편의 사연들은 분명 평범한 사랑의 얘기는 아닙니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이해와 납득을 구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가을에 그런 사연들을 ‘그냥 사랑으로 남겨놓자’는 심정입니다. 사랑함의 후회와 아쉬움과 치기조차도 “사랑해요, 사랑해요, 세상의 말 다 지우니 이 말 하나 남네요”라는 노래 가사의 여운으로 가슴에 담아두었으면 합니다.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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