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터치] 청년문화를 보는 두 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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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우 대안문화행동 재미난복수 대표

‘청년’을 떠올릴 때면 건실하지만 남루하고, 똑똑하지만 가난했던 ‘형’의 이미지가 크게 남아 있다. 1980년대 후반 초등학교 시절 친구 사촌 형은 가끔 통기타 치며 노래를 불러줬다. 기억나는 노래는 ‘바위섬’. 그리고 광주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시내 나가면 최루탄 연기가 메케했고, 멀리서 아우성이 들렸다. 내게 노래를 불러주던 형도 청바지를 입고 마스크를 끼고 거리에 나왔던 대학생 속에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가성비 좋은 상품 취급하는 기성세대

수단으로 소비되길 거부하는 청년세대

80년대와 시대적 상황은 달라졌지만

변화에 대한 희망은 청년문화의 동력

청년문화는 대학가 주변에서 대항문화(Count Culture)의 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통·블·생(통기타, 블루진, 생맥주)’의 이미지로 그려내는 문화이자, 군부 독재와 노동 탄압에 대한 저항을 분모로 만들어진 문화다. 그래도 이들을 학생운동의 주축이라 할 수는 없다. 당시 청년문화를 서구 소비문화의 영향으로 한낱 ‘빠다에 버무린 깍두기’로 비판하던 세력이 운동권의 주축을 이뤘으니 운동권 주변 문화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당시 청년문화 이미지는 그런 시대적 상황과 겹쳐지며 자조적인 쓸쓸함이 스며 있었다.

요즘 청년문화 생산자라 일컬어지는 이들은 자신의 활동을 ‘청년문화’라 규정하길 거부한다. ‘젊음’을 그저 가성비 좋은 노동력으로 상품화한다는 인상 때문이다. 쉽게 쓰이고 버림당한 경험을 넋두리처럼 나누곤 한다. 요즘 회자하는 청년문화 개념은 1970~80년대 적용됐던 의미와 다르다. 문화 생산자들이 만든 개념도 아니다. 제도권 근처에 있던 기성세대에 의해 이전의 저항문화, 대항문화의 일부로 자리했던 ‘청년문화’를 바라보던 시각과 기대가 반영된 개념이다. 굳이 설명하려면 좀 더 넓은 의미의 ‘서브컬처(Sub Culture)’라는 범주를 쓴다. 주류 문화와는 다른, 다양성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또래 문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청년문화는 이전보다 다양한 주제와 장르로 외연이 확장됐고, 네트워크도 꽤 강하게 형성됐다. “놀 데가 없으면 우리가 만들자”라는 대안문화 성향이 강했고,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은 이런 거야”라는 실험적 문화에 훨씬 열려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도시의 빈틈을 찾아 같이 놀았다. 이런 흐름을 만들어가는 주체와 대상을 민중이나 대중으로 이야기하긴 어렵다. 각자 정체성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행동하지만, 특정 사안에 동의할 때 자율적이며 유연한 집합으로 행동하는 ‘다중(多衆)’에 의한 문화다.

오늘날 청년문화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세대 특징을 사회 구조 안에서 봐야 한다. 지금 20~30대를 사는 세대들을 청춘이 담고 있는 푸르름이나 봄과 같은 생동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야 하는 세대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미래에 대한 희망, 꿈, 자유와 같이 삶을 움직이게 하는 설렘을 빼앗긴 세대다. 그런 측면에서 1970~80년대 정치적 억압 속에서 만들어진 청년문화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서 만들어지는 청년문화는 닮았다. 자유에 대한 억압, 젊은 노동력에 대한 착취 구조는 더 첨예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예술은 이들의 삶에서 사치일 뿐일까?

1974년 〈별들의 고향〉 저자인 최인호의 ‘청년문화 선언’이 어느 신문에 실렸다. 선언문 중 “그들(청년)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그들과 밤새워 보라”는 충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문화는 사람 속에 있고, 사람은 사회 속에 있다. 그 속에서 함께 변화하고 발전한다. 문화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나’의 이야기가 있으려면 ‘너’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세상에 있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른 색깔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소비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산자로 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사용되는 ‘청년문화’라는 개념도 청년세대의 고민과 삶을 들여다봐야 알 수 있다. 그리고 사회의 어떤 구조 안에 그 세대들이, 청년문화 생산자들이 살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이다. 다가올 봄은 지난해의 봄, 올해의 봄과 또 다르다. 그래도 여전히 기억해야 할 것은 푸른 봄에 대한 설렘과 변화에 대한 희망이다. 지금을 사는 젊은이와 다음 세대를 위해 푸른 봄을 함께 준비하는 청년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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