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천년의 불빛, 등대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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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가을, 프랑스 고고학 발굴팀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서 거대한 조형물을 건져 올렸다. 높이 4.5m, 무게 12t의 화강암 여신상. 수백 점의 유물과 잔해가 함께 나왔는데, 거기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알고 보니 여신상은 전체 조형물의 꼭대기 장식물이고 본체는 높이가 120~140m에 달하는 등대 건축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인류 최초의 등대로 기록된 이 파로스 등대는 기원전 280년께 세워진 뒤 14세기 초 지진으로 무너졌다. 수천 년 전에 지금의 40층 빌딩 높이만 한 구조물을 세운 것 자체가 불가사의다.

밤에 운항하는 선박에 위치를 알려주는 항로표지의 일종인 등대. 처음에 장작불을 피워 빛을 밝힌 조명은 석탄, 초, 기름으로 연료가 바뀌었고 18~19세기 들어 광학 기술의 성장에 힘입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프랑스 광학자 오귀스탱 프레넬이 발명한 굴절형 계단 렌즈가 그 신기원이었다. 굴절과 반사를 응용해 빛이 퍼지지 않고 평행으로 나아가게 하는 프레넬 렌즈는 등대 불빛의 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렸다. 1823년 프랑스가 자국 와인 수출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코르두앙 등대에 처음으로 설치한 이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세계 등대 유산을 좇으면, 해양문명의 웅숭깊은 스토리와 아름다운 이야기가 넘실댄다. 물론 어둡고 잔인한 역사도 숨어 있다. 지구촌의 거대한 식민이 시작된 15세기 이후 등대는 제국주의 DNA를 품고 전 세계로 확산했던 것이다. 한국에 등대의 불빛이 켜진 것도 타자에 의한 근대와 무관치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일제 강점 전인 1903년 인천 팔미도에 세워졌다.

등대는 단순한 항해지표의 역할만 한 건 아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 그러니까 건축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다. 등대는 끊임없이 낭만적 감흥과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어둠을 홀로 밝히며 평화를 선사하는’ 등대에 주목한 것처럼, 등대는 ‘정신성’의 무한한 샘물이기도 하다.

세계 등대의 발전사와 예술성을 한눈에 조망하는 기획 전시가 내달 2일부터 국립해양박물관에서 3개월 동안 열린다고 한다. 때마침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부산에서 열렸고 아시아 각국과의 우호·협력이 바야흐로 결실을 맺는 시점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문화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깊은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토대는 충분하다. 천년을 비춘 등대의 불빛처럼, 부산이 이제 새 시대 아시아의 미래를 밝히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길 소망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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