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없는 미술관’ 고흥
겨울이 시작되자마자 동장군이 기승이다. 찬바람 속에 마음까지 얼어붙는 추위를 겪다 보면 절로 따뜻한 햇볕이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겨울에 떠나기 좋은 곳이 전라남도 고흥이다. 우리나라의 남쪽 끝, 고흥은 항상 볕으로 가득하다. 유자 향기가 그윽하고 슬픈 사슴의 전설이 전해온다. 부산에서는 자동차로 순천을 지나 벌교까지 세 시간, 다시 남쪽 고흥반도로 접어들어 1시간 이상 가야 하는 먼 곳이다. 그리운 것은 멀리 있다. 아니 멀리 있어서 오히려 그리운 것일 지도 모르겠다.
연홍도 섬 전체에 널린 조형물·아기자기한 마을 길
작품 즐비한 골목길, 사진박물관·섬 미술관까지…
아름다움 뒤에 깃들인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 소록도
오스트리아 ‘할매 천사’ 두 수녀의 사랑 곳곳에
팔영산 정상서 바라보는 한려해상의 빼어난 경치
우주발사전망대서 마시는 고흥産 커피와 유자
■섬 전체가 미술관인 연홍도
고흥은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 불릴 만큼 산과 바다, 섬이 한 폭의 그림이자 예술이다. 고흥을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만든 곳이 바로 연홍도다.
고흥반도 남서쪽 끝 녹동항에서 소록대교, 거금대교를 차례로 건너 거금도 신양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5분쯤 떨어진 곳에 작은 섬 연홍도가 있다. 도선을 타고 5분 만에 마을 선착장에 도착하면 일명 ‘소라 부부’로 불리는 두 개의 소라 조형물이 여행객을 맞는다. 방파제 위에는 아이들의 놀이 모습을 담은 빨간색 철제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다.
연홍도의 매력은 아기자기한 골목길에 있다. 주민들의 옛날 사진을 모아놓은 ‘연홍 사진 박물관’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골목길 전체가 미술관이다. 버려진 어구나 폐품 등을 소재로 한 벽화나 정크아트 하나하나가 정겹고 재치가 넘친다.
연홍도에는 마을회관에서 섬 가장자리까지 이어진 아르끝 숲길(1.76㎞), 마을회관에서 연홍교회를 지나 연홍미술관까지 걷는 연홍도 담장바닥길(1.16㎞), 해변길을 거쳐 북쪽 끝 능선까지 가는 좀바끝 둘레길(940m) 등 세 갈래의 산책길이 나 있다.
넉넉히 시간을 두고 숲길, 둘레길을 따라 섬 양쪽 끝까지 천천히 걸어보자.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조형물들을 감상하면서 ‘싸목싸목’(천천히의 전라도 사투리) 걷다 보면 일상에 지친 심신이 절로 힐링 되는 느낌이다.
연홍미술관은 연홍도에서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정식명칭은 ‘섬 in 섬 연홍미술관’으로 큰 섬(거금도)에 딸린 작은 섬(연홍도)의 미술관이라는 뜻이다. 폐교된 연홍분교를 리모델링한 전국에서 유일한 섬마을 미술관으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앞바다는 놓치기 아까운 절경이다.
■너무 아름다워 슬픈 섬 소록도
소록도는 한센병(나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닮았다고 하여 소록도라고 불리는데, 고흥반도의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소록대교로 연결된다.
녹동항에서 보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있는 소록도는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섬이지만,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과 상처가 깃들어 있는 슬픈 섬이기도 하다. 나병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은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전라도길)며 소록도로 향하는 아픔을 노래하기도 했다.
소록대교를 건너 우회전해 해안 쪽으로 내려가면 소록도 주차장이다. 관광객은 주차장에서 산책로, 중앙공원, 한센병박물관까지만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주차장을 지나 병동까지 이어지는 길은 ‘근심과 탄식이 흘렀다’고 해서 수탄장(愁嘆場)으로 불린다. 예전에 한센인들은 자식을 낳더라도 따로 떨어져 살아야 했으며, 아이와 부모는 한 달에 한 차례만 도로 양편으로 갈라서서 눈길로만 만날 수 있었다.
환자들의 아픔을 사랑으로 끌어안았던 오스트리아 출신 ‘할매 천사’ 마리안느와 마거릿 수녀의 숭고한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소록도 곳곳에 남아있다.
두 수녀는 40년간 고락을 함께한 소록도의 삶을 뒤로 한 채 “늙어서 폐를 끼치기 싫다”며 2005년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고국으로 돌아갔다. 지난달에는 두 수녀를 노벨상 수상 후보자로 추천하는 서명자가 100만 명을 돌파해 세계적인 이목을 끌기도 했다.
소록도와 이어지는 녹동항은 남해안의 대표 항구 중 하나로 인근 각 섬 지역을 연결하는 기항지이자, 해산물의 집산지로 유명하다. 녹동항에 새로 조성된 바다정원에는 소록도를 마주 보는 방향으로는 은빛 사슴 두 마리가 슬픈 눈망울로 들어서 있다.
■치유의 숲, 능가사 품은 팔영산
고흥에서 제일 아름다운 절경을 꼽는다면 팔영산 정상에서 본 한려해상의 풍경이다. 팔영산의 여덟 봉우리에 올라서면 굽이굽이 곡선으로 이루어진 고흥만의 섬들이 눈앞에 마치 신기루처럼 펼쳐진다.
멀리서 바라보는 팔영산은 시간과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그 자태를 현란하게 바꿔 천개의 얼굴을 가진 천면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팔영산의 여덟 봉우리를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능가사다.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천년 고찰로 특히 해 질 녘 노을에 비친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지난해 새로 조성된 팔영산 ‘편백 치유의 숲’도 가 볼 만하다.
10.5㎞에 달하는 치유의 숲길(노르딕 워킹 코스)과 기채움 타워, 전망대 쉼터 등 다양한 산림 치유시설이 조성돼 방문객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노르딕워킹에 필요한 폴은 센터에서 빌릴 수 있으며 초급부터 고급까지, 소요되는 시간별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워킹 후에는 치유센터에서 노곤한 몸을 풀어 보자. 유자와 편백, 석류탕으로 나뉜 수 치유실, 명상실이 있는 치유컨설팅실, 유기농 식이요법을 체험할 수 있는 식이요법 치유실 등이 마련돼 있어 팔영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힐링하기 좋다.
팔영산에서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나로도로 가는 길목에는 고흥의 랜드마크인 고흥우주발사전망대가 있다.
절벽 끝에 우뚝 솟아 있는 고흥우주발사전망대는 드넓은 다도해를 배경으로 나로호 발사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 근처에는 다랑논과 몽돌 해안, 일출이 아름다운 남열 해돋이해수욕장이 자리한다.
■고흥 커피, 유자 모히토, 그리고 삼치
고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눈에 띄는 문구는 ‘커피 향 가득한 고흥’이다. 모르는 사람은 ‘고흥에 웬 커피?’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커피 재배지는 고흥이다.
고흥에서 생산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과역면의 고흥커피사관학교는 커피 재배부터 로스팅,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다. 고흥우주발사전망대의 7층 카페에서도 고흥 커피를 맛볼 수 있다.
후식으로는 유자차와 유자 모히토가 제격이다. 겨울이 제철인 유자는 거제, 남해 등에서도 재배되지만 고흥이 우리나라 최대 재배지다. 유자 생산량의 50% 이상이 고흥 유자다. 예부터 유자나무 한 그루면 자식을 대학까지 공부시킨다고 할 정도로 고흥의 주요 소득원이기도 하다.
고흥 유자는 향과 당도가 다른 곳과 확연히 다르며 그 맛도 깊고 풍부하다. 유자청, 유자빵, 유자떡, 유자향주(막걸리) 등 다양한 상품으로 가공되며 카페에는 유자 모히토가 인기 메뉴다.
고흥읍에서 녹동항으로 가는 옛길에는 유자 공원이 여행객을 반긴다. 유자 재배단지와 고흥 유자 체험관, 유자 마을에서는 유자 향기를 맡으며 느긋하게 산책과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고흥에서 꼭 맛봐야 할 별미는 삼치다. 예전부터 나로도 근해에서 잡아 올린 삼치를 최고로 친다. 맛이 부드럽고 영양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건강식으로 인기인 삼치는 겨울에 더욱더 부드럽고 고소한 식감을 낸다.
싱싱한 회와 유자삼치구이, 삼치고추장조림 등 다양한 요리가 입맛을 유혹하지만 생김에 특제양념장과 삼치, 김치를 함께 싸 먹으면 그 맛이 그만이다. 2020년 고흥방문의 해를 맞아 나로도항 근처에 삼치요리 거리가 조성될 예정이다. 글·사진=정상섭 선임기자 verst@busan.com
정상섭 선임기자 vers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