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 석탑으로 남은 백제 부흥의 꿈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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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이 천도하면서 지은 왕궁이 있었다는 익산 왕궁리 유적. 궁전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석탑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준다. 백제 무왕이 천도하면서 지은 왕궁이 있었다는 익산 왕궁리 유적. 궁전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석탑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준다.

백제 무왕은 불행한 임금이었다.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화 공주와 결혼했지만, 고구려, 신라와의 잦은 전쟁에 시달려 국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아들 의자왕은 나라를 망하게 했다. 사가들은 백제 패망은 무왕에서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 무왕의 역사와 전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은 도시가 있다. 전북 익산이다. 그곳으로 무왕을 찾아 떠난다.

왕궁리 유적 ‘무왕 익산 천도설’ 근거

왕궁 헐고 만들었다는 오층석탑

벚나무 사이로 보이는 풍경 장관

미륵보살 계시 받고 지은 미륵사지

1000년 역사 석탑 올해 보수 마쳐

3500개 독 묻힌 ‘독 무덤’ 고스락

교도소 세트장에선 이색 죄수복 체험

■왕궁리 유적

“왕궁을 금마(金馬·오늘날 익산)로 옮기겠소이다. 이곳에서 백제는 새 출발을 할 것이오.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신라를 적극 공략해 부흥을 이끌어 낼 것이외다.”

‘서동’으로 널리 알려진 백제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뒤 천도를 결정했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부여에서 벗어나 도읍을 옮겨 새 정치를 열기로 했다. 그가 가기로 한 곳은 예로부터 금이 많이 난다고 해서 금마라고 불린 지역이었다.

무왕은 금마에 새 왕궁을 지었다. 규모는 동서 240m, 남북 490m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을 기반으로 신라와 열두 차례 전쟁을 치렀으며, 백제의 부흥과 삼국통일이라는 꿈을 키웠다.

익산에는 왕궁리 유적이 있다. 현지인들과 상당수 학자는 무왕이 천도한 흔적이라고 주장한다. 왕궁리는 예전에는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학자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익산은 무왕의 별도(別都)였다. 그는 성을 쌓고 별도를 두어 금마저라고 불렀다’라고 적었다.

왕궁리 유적에는 높이 9m인 오층석탑이 있다. ‘왕궁터에 웬 석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익산문화재단의 한 문화해설사는 “무왕이 지은 왕궁 건물 일부를 헐어내고 사찰을 하나 만들었다. 무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탑을 세웠다. 원래는 목탑이었다가 화재로 소실된 뒤 통일신라 때 석탑으로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무왕의 익산 천도설은 학계에서 아직 정설은 아니다. 무왕 천도설 외에 기준 도읍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엇갈린다. 왕궁리 유적은 1965년부터 발굴 작업을 시작했고, 아직도 발굴하고 있다. 사업이 끝나면 백제 역사를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초겨울에 찾은 왕궁리 유적은 스산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말라 노랗게 변한 잔디와 수백 년 세월의 때를 뒤집어써 까매진 오층석탑뿐이었다. 온종일 가랑비가 내려 분위기를 더욱 처연하게 만들었다. 고려말 유학자 길재의 시조 한 수가 문득 생각났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왕궁터 입구에는 큰 벚나무들이 여러 그루 서 있다. 잎은 다 떨어져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오층석탑은 더욱 처연하다. 하지만 해마다 봄이 되면 나무들에서 피어나는 벚꽃과 그 틈새로 보이는 오층석탑의 풍경이 장관이라고 한다. 그때는 절경을 담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그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미륵사지

백제 무왕이 미륵보살 꿈을 꾼 뒤 지었다는 미륵사지 석탑 백제 무왕이 미륵보살 꿈을 꾼 뒤 지었다는 미륵사지 석탑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이 고을에서 숙박하고 가도록 하자.”

무왕은 금마 용화산(미륵산의 옛 이름)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고구려, 신라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탓에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을 방도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출발했지만 길이 너무 멀어 하루 만에 도착하지 못하고 그만 산 아래에서 날이 저물고 말았다.

무왕은 신하들이 정한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그날 밤 그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인근 연못에서 미륵보살 세 분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은 무왕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곳에 우리들을 위한 사찰을 짓도록 하시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무왕은 미륵보살들의 지시대로 절을 짓기 시작했다. 사찰 이름은 미륵사라고 정했다. 그는 절이 완공되던 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륵보살은 중생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분이다. 여기에 지은 절에서 모든 백성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면 우리나라는 평온을 되찾게 될 것이다.”

미륵사는 무왕이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는 미래의 꿈을 상징하는 절을 지어 권력을 강화하면서 백성에게는 희망을 안겨주려 했다. 원래 미륵사에는 대웅전 세 곳과 탑 3개가 만들어졌다. 이를 ‘삼금당삼탑’이라고 한다. 지금은 대웅전은 다 사라지고 탑 하나만 남아 있다.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10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석탑은 일제가 콘크리트로 보수하는 바람에 붕괴 위기에 몰렸다. 결국 1999년 해체해 보수를 시작, 20년 만인 올해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원래 자리에 우뚝 섰다. 미륵사지 석탑 맞은편에는 완벽한 형태로 깔끔한 석탑이 서 있다. 미륵사지 석탑의 원래 모습을 재현해 복원한 것이다.

내년 1월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개장한다. 특이하게도 지하 박물관이다. 내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고스락, 교도소 세트장

각종 장이 들어 있는 고스락의 독. 각종 장이 들어 있는 고스락의 독.

커다란 독 3500개가 넓은 부지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일부는 뚜껑만 남기고 땅에 묻혀 있다. 그래서 ‘독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은 전통 방식으로 유기농 간장, 된장, 고추장, 식초를 생산하는 ‘고스락’이다.

공원 같은 2만 평 부지를 돌아보며 산책을 즐길 수도 있고, 유기농 식초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식당에서 식사하거나 카페에서 다양한 차를 마실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유기농 제품을 구매할 수도 있다.

교도소 세트장에서 죄수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관람객 교도소 세트장에서 죄수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관람객

교도소 세트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2005년에 만든 곳이다. ‘내부자들’ ‘신과 함께’ ‘7번 방의 선물’ 등 영화 50여 편을 촬영하기도 했다. 죄수복 체험, 교도소 시설 견학 등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영화를 수시로 찍기 때문에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상황을 미리 알아보고 찾아가야 한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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