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673. 우암 장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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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장 가는 길에 이웃 안부 묻고 교감 나누던 곳

문현동 방면의 우암 장고개 모습. 박정화 사진가 제공 문현동 방면의 우암 장고개 모습. 박정화 사진가 제공

그동안 게재해온 ‘작가와 함께하는 산과 길’은 ‘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로 이어갑니다. 고개는 지역의 원형입니다. 평지가 귀하던 시절엔 다들 고개를 넘어 다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지역이 원형을 상실했거나 상실하고 있습니다. 부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역 대도시라서 상실의 속도는 더 빨랐습니다. 부산이 원형을 더 상실하기 전에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넘고 어머니의 어머니가 넘던 가파른 고갯길, 부산의 고개를 조명합니다. ‘부산의 길’이 더욱 다양해지기를 바랍니다.

고개는 가파르다. 넘으려면 진이 다 빠진다. 가팔라도 고개를 넘었던 건 길이 그거뿐이거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고 고개를 넘을 만한 가치가 고개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고개를 넘으면 학교가 있었고 친정이 있었고 시장이 있었다. 고개를 넘으며 누구는 여기보다 나은 저기를 소망했고 누구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소망했다.


우암동과 문현동 잇는 좁은 오솔길

부산장 가려면 마지막으로 맞닥뜨려


지칠 대로 지친 우리 아버지·어머니들

샘물로 목 축이고 허리춤 추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넘나들던 길

고개 넘어서 마주할 확 트인 풍광은

오르느라 고단했던 몸을 잊게 했으리…


30년 전 도로 나면서 원형 사라졌지만

이름과 돌담 등 당시 흔적 일부 남아


장고개는 시장 고개다. 시장 가려고 넘던 고개가 장고개다. 그러므로 전국 곳곳에 있었다. 부산 곳곳에도 있었다. 해운대 장고개, 기장 장고개, 강서 장고개 등등이었다. 남구에는 장고개가 두 군데였다. 용당 장고개와 우암 장고개였다. 용당 장고개는 용당에서 시작해 감만동, 우암 장고개로 이어지던 산길이었다. 일부가 1983년 부산 개방대 부지로 편입되면서 고갯길은 점차 흐릿해졌다. 개방대는 1996년 부산 수산대와 통합해 부경대가 됐다. 개방대 자리엔 현재 부경대 용당캠퍼스가 들어섰다.

‘이 고갯길은 우암동, 감만동, 용호동 사람들이 부산장에 장 보러 갈 때 넘던 고개였다.’ 우암 장고개는 지금도 남아 있다. 우암동과 문현동을 잇는다. 고개 넘어서 가려고 했던 시장은 어딜까. 고개 꼭대기 고갯마루에 세운 안내판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부산장이었다. 부산장은 규모가 대단했다. 자성대 범일동에서 좌천동 일신여학교 코앞까지 장이 섰다. 장고개를 넘으면 문현동 동천이 나왔고 동천 건너편이 장터였다. 안내판은 높다란 상경전원맨션 입구에 있어 찾기 쉽다.

“두어 명 지나는 좁은 오솔길이었지. 길 한쪽은 초가집 예닐곱 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돌담이 있었고.” 고갯마루엔 안내판 말고도 눈여겨볼 게 있다. 안내판 맞은편 돌담이다. 장고개에 도로가 난 때는 30여 년 전. 도로가 나면서 돌담은 죄다 허물어졌지만 고갯마루에 좀 남아 있다는 귀 번쩍 틔는 얘기를 들려준 이는 일흔다섯 최 선생이었다. 함경도 흥남 피난민 최 선생은 이름 밝히기를 한사코 꺼렸지만, ‘60년은 더’ 우암동에 살았고 허구한 날 다녀서 장고개라면 모르는 게 없다.


고지도는 18세기 중엽 조선 지도 ‘지승’에 표시된 장고개. 박정화 사진가 제공 고지도는 18세기 중엽 조선 지도 ‘지승’에 표시된 장고개. 박정화 사진가 제공

최 선생을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암동에서 장고개를 오르다가 ‘수출 소 검역소 옛터’란 네모반듯한 표지석에 걸음을 멈추었고, 옛터 자리 들어선 ‘우암동어르신행복일터 공동작업장’에 무턱대고 들어가 장고개가 어디냐고 여쭈었고, 그렇게 해서 말문을 텄다. 장고개 오솔길은 도로가 나면서 원형을 잃었다. 초가집 끼고 졸졸 흐르던 개울은 덮였고 돌담마저 허물어져서 남은 담벼락은 달랑 삼사십 미터. 그래도 그때 그 돌담 그대로여서 오며 가며 옛 기억을 반추한다. 장고개로, 장고개흑염소, 장고개보리밥. 오솔길은 마을버스가 다닐 정도로 훤해졌다. 퍼질러 앉아 땀을 식혔을 고갯마루엔 슈퍼며 식당이며 점포가 널렸다. 여기가 구불구불 고갯길이었던가 싶게 정경은 바뀌었어도 장고개는 도로명으로, 점포 상호로 새겨져서 그 시절을 증언한다. 근동의 지인이 이리로 모여들어 안부 묻고 소식 전하던 그 시절, 우암 장고개는 교류의 고개였고 교감의 고개였다.

“한 20분 걸었지.” 이북 실향민 최 선생이 오솔길 장고개를 넘어 문현동 큰길에 닿던 시간은 20분 남짓. 고개 초입 내호냉면 아낙은 ‘5분이면 간다’고 큰소리 탕탕 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암동에서 출발한 덕분이다. 용당이나 안내판에 쓰인 대로 용호동 사람에겐 굽이굽이 고갯길 넘고서 마지막 맞닥뜨리는 오르막이 우암 장고개였다. 진은 빠졌어도 이 고개 하나만 넘으면 장터였기에 고갯길 어딘가 있었다는 샘물로 목을 축이며, 느슨해진 허리춤을 추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지칠 대로 지쳐도 나아가야 할 길이 있고 지칠 대로 지쳐도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굽이굽이 고갯길 넘고서 마지막 한 고개 우암 장고개는 지친 이를 불끈대게 하는 장딴지 알통이었고 장딴지 희망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파른 길의 끝자락에 섰을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확 트인 풍광은 얼마나 시원했을 것이며 민물과 짠물 어우러진 동천 바람은 또 얼마나 시원했을 것인가.


장고개 안내판. 박정화 사진가 제공 장고개 안내판. 박정화 사진가 제공

우암 장고개는 조선시대 지도에 또렷하게 나온다. 해동지도와 대동여지도, 지승 같은 18세기 지도다. 지도에는 길이 붉은 실선으로 표시돼 있다. 동래에서 부산진으로 가는 길은 둘뿐. 하나는 온천천 세병교를 지나 양정을 거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온천천 이섭교를 지나 배산, 수영, 그리고 우암과 용당을 아우르는 우룡산에 난 고갯길, 지금의 우암 장고개를 넘는 길이다.

지도는 모두 18세기 지도. 지금이 21세기니 300년 전 이미 우룡산 고갯길은 있었다. 지도가 그려지기 훨씬 이전에도 길은 나 있었을 것이다. 부산진에 장터가 생기면서 장고개란 이름을 얻었고 고갯길 구불구불 넘어서 여기보다 나은 저기,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갔다. 그 오랜 세월, 대를 이어 밟고 다니느라 장고개 고갯길은 지금도 딴딴하다. 걸음걸음 장딴지에 힘줄이 불끈불끈 선다.

가는 길. 시내버스 23, 26, 68, 134, 168, 138-1번을 타고 우암2동 남부중앙새마을금고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우편취급국 옆 오르막길이 장고개 시작이다. 반대편인 도시철도 2호선 지게골역쯤에서 가도 되지만 장을 보러 넘던 고개인 만큼 우암동 쪽에서 걸어야 실감이 난다. 대연동 못골시장과 도시철도 범일역을 오가는 남구 3번 마을버스는 장고개를 경유한다.

동길산 시인 dgs1116@hanmail.net


동길산 시인은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모두 부산에서 나왔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 등 시집 여섯 권과 〈길에게 묻다〉 등 산문집 다섯 권, 그리고 한국 신발 100년사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와 경남 고성시장 스토리텔링 북 〈고성시장, 시장사람들〉을 냈다. 부산시 ‘길 위원’을 지냈다.











〈부산장 역사〉 범일·좌천동 일대에 선 부산 최대 규모 오일장


‘골목골목 부산장 길 못 찾아 못 보고.’ 부산시장 장타령의 한 구절이다. 하단장은 추워서 못 보고 명지장은 포구가 없어 못 보고 구포장은 허리가 아파서 못 보고 부산장(釜山場)은 길을 못 찾아 못 본다고 타령한다. 부산장이 그만큼 넓었다는 이야기다. 범일동과 좌천동 일대에 서던 오일장이 부산장이었다. 4일, 9일 섰다. 동구청 홈페이지에 게재된 ‘1907년경 부산장’ 모습(사진)은 당시 장터 풍경이 어땠는지 보여준다.


부창(釜倉). 18세기 조선시대 지도에 나오는 지명이다. 부창은 나라가 관리하던 곡식 창고였다. 왜관 일본인에게 제공하는 공작미(公作米)를 주로 보관했다. 자연스럽게 부창 주위로 상인이 모여들었고 장터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지도에는 부창과 부산진성이 나란히 있다. 옛 시장은 열에 아홉 관공서를 끼고 섰다. 유동인구가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도난과 분쟁, 싸움 같은 불상사 대처에 수월했다. 동래시장은 동래부 동헌을 꼈고 부산장은 수군 부대인 부산진성을 꼈다.

부산이 개항하면서 부산장은 확 바뀌었다. 곡물과 수공업품 장터에서 분(粉)·거울·가위 같은 신상 각축장으로 변신했다. 채소·과일·어물 가게도 끼어들었다. 중국 비단이 들어오면서 오늘날 혼수 전문시장의 싹이 텄다. 지척에 들어선 당대 조선 최대의 공장 조선방직은 결혼 적령기 여공이 넘쳐났다. 혼수 시장으로 승승장구한 비결이리라.

일제강점기엔 일본인 거주지역 부평시장이 잘 나가면서 주춤했으나 고개를 넘고 넘어 찾아가는 조선의 시장, 부산의 시장은 부산장이었다.

동길산 시인은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모두 부산에서 나왔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 등 시집 여섯 권과 〈길에게 묻다〉 등 산문집 다섯 권, 그리고 한국 신발 100년사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와 경남 고성시장 스토리텔링 북 〈고성시장, 시장사람들〉을 냈다. 부산시 ‘길 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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