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10.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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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박람회 기차역에서 ‘인상주의 박물관’으로

황금색 시계가 걸린 유리창 사이로 쏟아지는 환상적인 햇살이 오르세 미술관에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황금색 시계가 걸린 유리창 사이로 쏟아지는 환상적인 햇살이 오르세 미술관에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프랑스 파리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프랑스가 지난 100년간 이룬 경제적, 문화적 업적을 보여주자는 게 행사 목적이었다. 박람회를 위해 만든 시설 중 가장 유명한 게 에펠탑이다. 그런데 박람회는 뜻하지 않게 에펠탑 못지않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하나 더 남기게 됐다. 바로 오르세 미술관이다.


1900년 박람회 때 기차역으로 완공

유리+철근 ‘아름다운 설계’ 감탄 일색

세월 흘러 역 가치 떨어져 변신 모색

리모델링 후 1986년 이색 미술관 변신

그림·조각 등 19세기 작품 2500점 전시


■만국박람회의 기차역

프랑스 정부는 4월 14일~11월 12일에 열리는 박람회 기간에 파리를 찾는 방문객이 5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서 새로운 기차역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만국박람회 장소 가까운 곳에 역을 만들어 관람객이 손쉽게 행사장에 갈 수 있게 하자는 뜻이었다.

새 기차역 장소로 선택한 곳은 센강 건너 루브르박물관 맞은편이었다. 박람회장인 그랑팔레에서 1㎞ 남짓, 걸어서 15분 걸리는 곳이었다. 원래 이곳엔 오르세 가문의 저택인 오르세 궁전이 있었다. 궁전이 프랑스 대혁명 뒤 파리 코뮌 기간 중 방화로 사라진 탓에 19세기 말에는 빈 땅이었다.

정부는 오르세 역을 설계할 건축가를 세 명 골랐다. 뤼시엥 마니, 에밀 베나르, 빅터 랄루였다. 오르세 역 공사는 1898년에 시작됐다. 완공식은 파리만국박람회가 진행 중이던 1900년 5월 28일에야 거행됐다. 당초 예정보다 조금 늦었지만, 불과 2년 만에 역 하나를 만드는 놀라운 일이 이뤄진 셈이었다.

오르세 역 길이는 175m ,폭은 75m였다. 중앙 홀은 140m, 폭은 40m, 높이는 32m였다. 유리만 3만 5000㎥를 사용했다. 이렇게 많은 유리를 쓴 것은 역 내부를 밝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오르세 역은 완공하자마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상 최초의 전기도시철도 역이었던데다 기차역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역을 일부러 찾아간 화가가 있었다. 바로 에두아르드 데타이유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야! 정말 대단한데! 기차역보다는 미술관으로 바꾸는 게 더 낫겠는 걸!”

오르세 역은 100% 철근 건축물이었다. 에펠탑을 지을 때보다 더 많은 철근을 투입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외관이 흉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건축 총책임자였던 랄루는 이 점을 감안해 호텔을 지어 역을 가리기로 했다. 그는 역 남서쪽에 객실 370개 규모의 호텔을 건설했다. 하지만 호텔은 영업 부진 탓에 1973년 문을 닫아야 했다.


오르세 미술관 밖에 세워진 세계 여섯 대륙을 상징하는 조각상. 오르세 미술관 밖에 세워진 세계 여섯 대륙을 상징하는 조각상.

■미술관으로의 운명적 변신

오르세 역이 생기고 40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역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철도 기술의 급격한 발전 때문이었다. 첨단기술을 갖춘 철도를 운행하기에는 역 플랫폼이 너무 짧은 게 문제였다.

결국 오르세 역은 기차역의 역할을 중단하고 말았다. 파리 시청은 역을 어떻게 재활용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다양한 제안이 접수됐다. 주차장으로 사용하자거나, 사격장으로 활용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극장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나왔다. 파리 시청은 1970년 오랜 논의 끝에 결론을 내렸다.

“역을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이곳에 초대형 호텔을 짓겠습니다.”

파리 시청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당시 자크 뒤아멜 문화부 장관이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오르세 역은 귀중한 자산입니다. 정부의 역사적 기념물 예비 리스트에 올려 보존해야 합니다. 다른 활용 방안을 찾도록 합시다.”

사실 뒤아멜 장관도 오르세 역을 어떻게 재활용할지 마땅한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이 때문에 역을 호텔로 바꾸는 안을 놓고 파리 시청과 뒤아멜 장관은 물론 모든 프랑스 국민이 편을 갈라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때 오르세 역의 운명을 바꿀 기막힌 일이 생겼다.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 센터, 주드폼 국립미술관이 넘쳐나는 전시품과 협소한 공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세 박물관과 미술관에 보관하고 있는 19세기 후반 예술작품을 전시할 박물관을 새로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르세 역을 철거하지 않고 리모델링해 미술관으로 활용하겠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978년 오르세 역 리모델링 공모전을 열었다. 6개 업체에서 제안서를 냈다. 그중 ACT 아키텍처라는 곳에서 낸 설계안이 받아들여졌다. 르노 바르동 등 젊은 건축가 3명이 공동 운영하는 회사였다. 공사는 이듬해 시작됐다.

1981년에는 실내 장식, 가구 배치 등을 담당할 건축가가 선정됐다. 이탈리아의 가에 아울렌티였다. 그녀의 디자인은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마치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은 이런 비난 기사를 실었다. ‘오르세 미술관은 장례식장, 무덤, 영묘, 공동묘지에 비유할 수 있다.’

여러 논란 속에 오르세 미술관 리모델링 공사는 1986년 6월 마무리됐다. 개장식 날짜는 12월로 예정됐다. 남은 시간은 불과 여섯 달이었다. 다른 박물관, 미술관에서 인수받아 설치해야 할 작품은 그림, 조각 등 무려 2500여 점이었다. 곳곳에서 우려가 쏟아졌다. 이전 작업에 필요한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6개월 만에 모든 작업은 완벽하게 정리됐다. 오르세 미술관 개장식은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2월 1일 예정대로 열렸다. 프랑스 국민은 이색적이면서도 정말 아름다운 새 미술관을 보고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오르세 미술관이 대중에게 개방된 것은 그로부터 8일 뒤인 12월 9일이었다. 이날 하루 동안 새 미술관을 보러 몰린 사람은 무려 2만 명이나 됐다.


바론 하우스만의 ‘천구를 들고 있는 세계의 네 부분’. 바론 하우스만의 ‘천구를 들고 있는 세계의 네 부분’.

■인상주의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그림을 많이 보유한 곳으로 유명하다. 각각 500점, 1100점이나 된다. 유명한 화가를 나열해보면 모네, 르누아르, 고흐, 고갱, 쿠르베, 세잔, 피사로, 마네 등이다. 그래서 이곳은 ‘인상주의 박물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00년대만 하더라도 손목시계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큰 건물을 지을 때 벽에 대형시계를 설치하는 게 유행이었다. 오르세 역에도 대형시계가 세 개나 설치됐다. 두 개는 북쪽 외벽에 설치됐다. 마지막 하나는 역 안에 설치됐다. 지금도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입구 쪽 높은 벽에 걸려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대형시계를 볼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주변에는 구리로 만든 조각상 6개를 볼 수 있다. 유럽, 아시아, 남미, 북미, 대양주 아프리카 등 지구의 여섯 대륙을 상징하는 조각상이다. 원래 1878년에 열렸던 파리만국박람회 기간 중 트로카데로 궁전에 설치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만국박람회가 끝나고 시간이 흐르자 모든 사람이 조각상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됐다. 트로카데로 궁전 측은 조각상을 낭트에 버리다시피 가져다 놓았다. 이 사실을 오르세 미술관 측이 우연히 알게 됐다. 그들은 조각상 6개를 가져오기로 했다. 대신 알프레드 시슬리의 그림 한 점을 주기로 했다. 지금은 많은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는 인기 촬영장소가 됐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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