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레즈비언의 사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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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성들은 왜 그렇게 시각적 충동에 매혹되는가? 그것을 단정하고 설명하는 인식의 틀은 얼마나 견고한가. 우리는 삶이나 타자를 바라보는 관점이 관습이나 전통에 고착된 경우가 많다. 우리의 의식이나 감각에 침투된 사유는 때로는 차별이란 감정을 동반한다. 최근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 사태로 촉발된 인종 차별의 문제를 보면, 시각이라는 감각은 과연 온당한 것인가 의문이 생긴다. 무심코 지각하는 눈, 코, 입, 귀, 혀의 감각에 우리는 속고 있지는 않은가.

며칠 전 ‘차별 금지법’에 서명한 어느 정치인을 비난하는 글을 카톡으로 전달받았다. 그 가운데 동성애 차별 금지가 부당하다는 원색적인 비난도 담겨 있었다. 미국의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1929~2012)는 급진적 레즈비언으로 시와 평론에서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 시인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그녀의 두꺼운 시 전집 책등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본다. 사실, 다른 시인들의 두꺼운 시 전집을 보면 부담스러웠다. 서정주, 김춘수를 비롯해 세이머스 히니 등의 시 전집을 보면서 시집을 많이 출판하는 것이 그리 멋지게 보이지는 않았다. 리치의 시와 산문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 나도 시집을 좀 더 자주 출간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사실 시와 평론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버거웠고,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 자괴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리치는 내게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미국에서 촉발된 인종차별 사태 보면서

관습화된 인식이 온당한 것인지 의문

여성 간의 사랑은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

애욕이 아닌 진정한 평등과 이해 제공


오래전 브래드 피트가 주연으로 나온 ‘가을의 전설’이란 영화를 보았다. 인상적인 것은 세 아들의 어머니가 어느 날 문득 남편과 아들을 떠나 도시로 가버리는 장면이었다. 왜 그럴까. 영화 스토리는 어머니가 왜 떠나는지 설명도 없고 복선도 깔리지 않아서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고, 남자들의 끈끈한 형제애가 각인되는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오래 남은 장면은 성인이 된 아들과 남편을 훌쩍 떠나는 어머니였다. 그때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선택에 공감이 가기도 한다.

리치 역시 젊었을 때는 이성을 사랑해 결혼하고 아이도 세 명을 낳아 길렀는데, 나중에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레즈비언임을 공개하고 동성 파트너와 살아가게 된다. 그 당시 교수였던 남편은 그녀의 커밍아웃에 충격을 받아 자살한다. 그때 그녀가 견뎌내야 했을 사회적 비난과 멸시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심지어 1960년대 미국에서는 레즈비언임을 밝힌 후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되는 사례가 있었고, 커밍아웃 이후에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일도 많았다. 현재 한국 시단에서 동성애를 표방한 남성 시인들은 몇 명 있지만 레즈비언임을 공개한 여성 시인은 아직 없다. 그래서 여성 간의 사랑을 표현한 시도 발표되지 않고 있다.

리치의 시는 어조가 선명한 것이 매력적이다. 애매모호하거나 관념적이지 않고 현실에 토대를 둔 선명한 시어가 당당하게 전해진다. 그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끈 시는 여성의 육체적 사랑을 구체적인 시어로 표현한 측면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나 ‘캐롤’ 같은 레즈비언 영화에서 전달되는 여성 간의 사랑은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준다. 리치가 가부장적 사회가 이성애를 강제로 주입해온 역사라는 논의를 펼칠 때, 그 치밀한 사유에 놀라게 된다. 남녀 간의 사랑과 다르게, 레즈비언 연인들의 사랑이나 삶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진정한 평등과 이해에 토대를 둔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개인의 생물학적 차이로 인한 특이한 감각 기관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겠지만, 진정한 소통이나 이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는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레즈비언의 사랑을 다룬 작품에서는 파트너의 성적 매력을 발견하는 지점에서 차이가 난다. 남성들이 그토록 매혹되고, 시각적 욕망에 추동되는 여성의 성기나 성감대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차이가 있다. 그것에 대해 리치는 〈공동 언어를 향한 소망〉에 수록한 ‘스물한 편의 사랑시(Twenty-One Love Poems)’ 연작시 중 ‘떠다니는 시, 번호를 붙이지 않는’에서 ‘내 혀가 찾아낸 그곳의 순수와 지혜-/ 내 입속에서 너의 젖꼭지는 살아나 갈증에 목마른 듯 춤을 추고/ 강하게, 상처 입지 않게, 나의 성감대를 찾아가는/ 너의 손길’로 묘사하고 있다. 남성 시적 화자가 표현하는 것과 차별되는 지점은 여성의 성감대에서 지혜와 배려를 찾아내는 것이다. 애욕의 대상으로 한정되지 않는 다른 감각이 나타난다. 고백하기 힘든 시적 진술을 통해, 시나 예술 혹은 철학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온 존재를 걸어야 하나의 세계가 창조됨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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