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선의 해양 TALK] 해운의 시간은 누가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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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양수산개발원 선임연구위원

그 시절이 본래 그랬던가? 1980년대 초·중반 시기의 대한민국은 유독 다사다난했다. 1982년 5월, 건국 이후 최대의 금융사기 사건으로 불린 장영자·이철희 사건이 터졌다. 6000억 원이 넘는 돈이 어음 사기로 증발했다. 1983년엔 김철호 회장이 주도한 명성그룹 사건이 발생했다. 기업가, 은행원, 공무원 등이 개입한 조직범죄였다. 2년 뒤엔 부산의 대표 기업인 국제그룹이 부도로 무너졌다. 정권에 밉보여 망했다는 소문이 은밀히 나돌았다. 세상은 혼미했고, 민심은 흩어졌다.

그런 와중에 1983년 말부터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가 단행됐다. 우리 해운사에서 처음 일어난 대규모 해운회사 통폐합 작업이었다. 70여 개에 달했던 해운회사는 17개 선사 그룹으로 쪼그라들었다.


1980년대 해운산업 합리화 실패

2016년 대형 원양선사 파산 비극

현 정부 들어 다시 ‘재조 해양’ 기치

대통령이 직접 나서 육성 의지 천명

극초대형 선박 건조·금융 지원 박차

업계의 새로운 성장 전략 마련 중요


해운산업 합리화는 제2차 석유 파동이 도화선이 됐다. 석유수출국기구의 감산과 이란의 팔레비 왕조 붕괴로 원유 가격이 3배 이상 폭등했다. 배럴당 30달러가 넘는 고유가 시대와 장기 불황이 찾아왔다. 은행 대출로 중고 노후 선박을 매입한 해운회사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1983년 기준으로 70개 해운회사의 선대 규모는 680만 톤이었다. 어느덧 세계 13위의 해운 강국에 올라 있었다. 해운산업 진흥 정책과 선사의 공격적인 선박 확보전략이 이뤄낸 합작품이었다.

문제는 그게 속 빈 강정이라는 데 있었다. 선박이 넘쳐 운임이 떨어지고, 선박 연료유 가격마저 치솟으면서 해운회사들은 속절없이 넘어졌다. 1985년까지 매듭짓기로 한 해운산업 합리화는 정책 판단 실수와 선사들의 반대로 추진력을 잃었다. 1987년엔 범양상선 사주가 투신자살까지 했다. 3년 동안 이어진 해운산업 합리화는 사실상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30여 년 전 사태는 그 후에도 해운업계의 교훈이 되지 못했다. 2016년에는 우리나라 물류 시장에 한진해운 파산과 현대상선 법정관리라는 폭탄이 떨어졌다. 글로벌 선사 상위에 있던 두 회사의 이름도 지워졌다. 한진해운은 SM상선으로, 현대상선은 사실상 국영선사가 되면서 최근에 HMM으로 문패를 바꿨다.

여기서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 있다. 문제 해결 방식이 이전과는 판이해졌다는 점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해운산업 재건에 대한 정책 의지가 매우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출발점은 2017년 5월 ‘바다의 날’ 기념식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바다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자는 ‘재조 해양’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해양산업의 판을 다시 만든다는 메시지를 천명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 정부에서 해양수산 하면 대통령이 직접 챙긴다는 말을 듣도록 하겠다”라고 맹세했다. 그 첫 약속은 한국해양진흥공사를 부산에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해운 컨트롤타워를 부산에 둔 것은 1407년 부산이 자주적으로 개항한 이후 처음이다. 현재 한국해양진흥공사는 해운산업 재건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박인 알헤시라스호 명명식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도 예삿일은 아니다. 정부는 해운산업 재건 대책의 하나로 HMM이 운항할 초대형 컨테이너선 20척을 건조하고 있다. 2만 4000개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극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과 1만 6000 TEU 급 컨테이너를 건조해 내년까지 잇달아 항로에 투입한다.

극초대형 컨테이너선을 12척이나 만드는 것도 의미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운용했던 선박 숫자와 같아서다. 지난 4월 23일 경남 거제도에서 열린 명명식에서 문 대통령은 “400여 년 전 충무공께서 열두 척의 배로 국난을 극복했듯이, 열두 척의 극초대형 컨테이너선은 우리 해운산업의 위상을 되살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최근 정부는 코로나19로 해운업계가 위기를 맞자 1조 250억 원 규모의 해운 분야 지원 방안을 재빠르게 내놓았다. 해운회사의 금융 지원과 회사채 매입 등 유동성 지원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1980년대 초의 해운산업 통폐합과 2016년의 원양선사 파산과 같은 비극을 더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정부의 신속한 대처는 그동안 성 밖에서 소외당하던 해운회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와 보호받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관건은 이 같은 정부의 의지를 업계가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 이전의 세상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업 모델과 성장 전략이 중요하다.

해운산업 합리화에서 살아남은 동남아해운은 오늘날 장금상선의 모태가 됐다. 장금은 자산 규모 5조 원이 넘는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했다. 환난 고초를 성공의 시간으로 만든 셈이다. 그게 해운의 시간이다. 깜깜한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어둠 속에서 빛을 만드는 지혜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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