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의 타초경사(打草驚蛇)] 나훈아를 본받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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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 자유전공학부 특임교수

경제학자 김기원이 오래전에 쓴 칼럼이 떠오른다. 제목은 ‘나훈아를 본받자’. 다음은 인용이다.

삼성 총수의 집안 연회에선 가끔 연예인을 불렀다고 한다. 가수는 대개 두세 곡 뽑아 주면 3000만 원을 받았다. 그런데 나훈아 씨는 이런 초청을 거절했다. “나는 대중예술가다. 공연 티켓을 사서 입장한 관객 앞에서만 노래를 부른다”고 한 것이다. 필자는 그와 일면식도 없고 사생활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이런 자존심은 얼마나 멋진가. 그가 궁정 예술가로서의 자리를 거부했을 때 이미 황제는 황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삼성 총수 일가 “연회에 와서 노래 불러라”

이를 거절한 대중예술가의 ‘멋진 자존심’

지금 불법 행위 처벌 피하려는 삼성의 발버둥

먹물들 파렴치한 ‘막장 변호’ 개탄스러워


비슷한 예는 또 있다. 삼성 총수의 신변에 관해 예언을 한 지방의 역술가가 있다. 그의 존재가 삼성 쪽에도 알려져 서울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삼성 총수가 재계에선 일인자이겠지만 이 바닥은 다르다. 나를 만나려면 삼성 총수가 직접 나한테 오라”고 했다 한다.

여러 해 전 김준연 검사는 삼성 총수의 사돈인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비자금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임 회장을 체포해서 조사하려 하니 윗선에서 계속 미적미적했다. 그러자 김 검사는 그냥 말로 하지 않고 체포에 대한 건의문을 정식으로 제출해 어쩔 수 없이 체포영장을 발부하게 했다. 또한 전수안 판사는 임 회장 부하들의 판결문에다 임 회장의 범죄 사실을 일부러 적시해 결국 임 회장이 징역 살게 만들었다.

이처럼 드물긴 하지만 삼성에 오염되지 않은 유력 인사도 우리 사회엔 있다. 자신의 직업과 인격에 대한 자존심을 가진 분들이다. 아무리 황제라 하지만 노래 안 불러 준다고, 점 안 쳐 준다고 잡아넣을 순 없다. 삼성에 밉보인 판검사나 관료는 혹시 출세가 힘들진 모르지만 그렇다고 ‘백이숙제’처럼 굶어 죽진 않는다. 떡값, 공짜 골프, 공짜 술 같은 쏠쏠한 재미쯤 포기하면 어떤가. 또 삼성 돈 안 받는다고 학회가 문 닫는 건 아니며, 삼성이 교수들에게 보내주는 해외여행 안 간다고 인생이 비참해지지도 않는다.

물론 삼성과 불가피하게 타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납품업자나 광고에 의존하는 언론사가 그렇다. 하지만 나훈아 씨처럼 사는 길도 있다. 원칙을 위해 생존을 걸고도 삼성 사태를 보도한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은 곳도 있는데, 생존을 걸지 않아도 될 땐 최소한 자존심을 지키자.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인사나 단체라면 거창한 일도 해야겠지만 이런 작다면 작은 일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모두가 황제처럼 받드니까 황제지 황제처럼 모시지 않으면 삼성 총수도 남들처럼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할 일개 시민일 뿐이다. 이리 돼야 삼성도 나라도 거듭난다. (한겨레 2009년 1월 29일 치 발췌)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황제는 의식이 없고 글쓴이는 죽고 없다. 변치 않은 것이 있다면 그 자식이 재판을 면하려고 온갖 짓을 벌이고 흰손을 가진 먹물들이 떼를 지어 목청을 돋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간교한 입들은 나서서 “이로써 그간 삼성의 불법 행위는 없었음이 밝혀졌고, 이제야 긴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다”(동아일보)며 너스레를 떨고, 재판을 맡았던 판사는 ‘준법감시위원회’를 마련하라며 “심리기간에도 당당히 기업 총수로서 일하라”고 근엄을 떨었다. 저간의 내력은 지난달 29일, 천주교 정의사회구현 사제단에서 발표한 ‘이재용 구속 촉구 성명’에 다 나온다.

먹어야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개나 사람이나 매일반이다. 다른 점은, 개는 먹지 말아야 할 것과 먹어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하지만(파블로프의 실험), 사람은 땅에 떨어진 엿을 주워 먹으면 부끄러워한다는 데 있다. 유독 흰손을 가진 먹물들 가운데 부끄럼을 잃은 자들이 많다. 2000여 년 전 맹자는 이렇게 일갈했다. “한 그릇의 밥을 먹으면 살고 못 먹으면 죽을 형편에도 욕을 하며 주는 밥은 나그네도 먹지 않고, 발로 차서 주면 거지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한데 수만금의 녹봉은 의와 불의를 분간하지 않고 받으니 그 수만금이 내게 무엇을 더해준단 말인가!”

비싼 뷔페도 두 번 연달아 먹으면 느끼하고, 재벌도 하루 다섯 끼 먹지 않는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사람들이 나라를 버티는 중에도, 손에 흙 한 번 묻히지 않은 먹물들의 기갈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재담꾼은 제 말을 믿어주길 바라지만 말은 그 자체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사람들은 그 말과 말 사이 틈새를 보고 있고, 그자의 옹송그린 뒷등도 다 보고 있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죽은 이를 추모해야 할 까닭도 늘었다. 아직도 학교에서 밥을 먹는 나는 김기원 교수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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