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말과 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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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사람’이라는 존재에 붙여진 이름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무척 다양하고 재미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사람을 신분에 따라 인(人)과 민(民)으로 구분했다. 인(人)은 사람이 서 있는 옆 모습을 본뜬 글자이며, 민(民)은 꼬챙이에 눈이 찔린 사람의 모습에서 유래했지만 돋아나는 초목의 싹처럼 임금에게 순종하는 백성이라는 이야기가 더해졌다. 인민(人民)은 두 신분을 포함하는 보편적 사람이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본래 인생세간(人生世間)에서 줄어든 말로 사람이 사는 ‘세상’이란 뜻이었지만, 일본식 한자어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람’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말의 변화 과정도 이야기다.

사람을 뜻하는 서양 말 ‘human, homo’는 본래 남자를 지칭했지만, 지금은 남녀를 포괄하는 말이 되었다. 서양 사람들은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사람의 특성을 가려 인간의 이름으로 삼곤 한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속성이 ‘생각’이어서 인간종의 공식 명칭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되었다. 그 밖에도 도구의 제작(Homo faber), 놀이(Homo ludens), 말(Homo lingua) 등 생물학적 특성을 사람의 이름으로 삼기도 한다. 사람에 대한 견해가 이름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속성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이기적 속성이 본질이라고 한다. 공감인(Homo emphaticus)과 경제인(Homo economicus)은 그렇게 달리 파악된 본질을 사람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삶의 현실 말로 표현한 게 ‘사람’

몸은 경험을 담은 예언 같은 것

의학은 몸의 서사를 읽는 문학


‘사람’이란 말속에도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 말의 15세기 형태는 ‘사람’이었는데, ‘살다’라는 동사 어간에 명사를 만드는 어미 ‘-암’이 결합된 것이라 한다. 중국의 인민(人民)이 신분제 사회의 질서를, 서양의 휴먼이 성차별적 질서와 생물학적 특성을 담고 있다면, ‘사람’은 그저 평범한 삶의 현실이 말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말에는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아니 어쩌면 삶 자체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아닌 삶이 있을 수 있을까? 원시인이 모닥불 주위에서 했을 사냥 이야기와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옛날이야기는 라디오와 TV에서 나오는 연속극과 드라마로 겉모습을 바꿨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삶의 일부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그 이야기를 조금씩 바꾸면서 살아간다.

이야기는 내가 평생을 이끌고 살아온 몸에도 새겨져 있다. 내 가슴을 찍은 방사선 사진에 보이는 희끗희끗한 석회화의 흔적은, 폐결핵을 앓던 아버지와 함께 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불러낸다. 그 기억은 한 움큼이나 되는 약을 삼키던 삐쩍 마르고 창백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정성스럽게 보살피던 어머니,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몇몇 장면과 함께 떠오른다. 내 허파에 남은 흔적은 폐결핵이라는 질병과 대응하는 ‘점’이라기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낱말’이다.

몸은 지금 세대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예언을 담고 있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겨울, 네덜란드 국민 450만 명이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다 구조되었는데, 이 경험은 직접 기아를 경험하지 않은 후손에게까지 막대한 건강 문제를 일으켰다. 그 기간 임신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비만, 당뇨, 조현병 등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엄마의 뱃속에서 생존한 아이의 몸이 엄마의 영양 상태를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해 더 많은 영양을 몸속에 축적하도록 유전자를 변경했을 것이라는 설명 또는 이야기가 유력하다. 이런 이야기가 가설이 되고 검증을 거쳐 사실이 된다. 과학적 설명도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의학은 몸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쓰는 문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질병을 몸이라는 기계의 고장이 아닌 몸이 겪는 연속적 사건의 경험으로 여긴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정말로 몸의 비정상이 아니라 몸이 앓는 질병의 경험을 중심으로 환자를 돕는 일군의 의사들이 나타났다. 과거의 의학이 몸을 고문해 진실을 캐내는 것이었다면, 이들의 서사(이야기) 의학은 몸의 이야기에 참여해 환자와 함께 그 이야기를 완성해 간다.

20세기까지의 과학은 말과 몸을 구성 요소로 나누고 논리 구조에 따라 분석하여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 냈다. 이제 우리는 말과 몸에 담긴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 이해하려 한다. 내 허파 속 폐결핵의 흔적과 기아를 견뎌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녀의 유전자는 그런 경험을 담고 있는 말과 몸의 낱말이다. 그것을 문장으로 엮고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우리의 앎이고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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