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거짓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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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거짓의 대가는 얼마나 될까요?”

최근 제작된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에 나오는 첫 대사이자 마지막 대사다. ‘체르노빌’은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당시 소비에트연방) 지역의 체르노빌에서 있었던 사상 초유의 원전 폭발사고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재난 드라마다. 한밤 폭발의 섬광 그리고 들려온 폭발음과 진동, 하늘로 하염없이 올라가던 초록 형광, 강 건너 불구경하던 시민들에게 속절없이 흩날리던 죽음의 재, 가까이 다가가 불 끄기에만 열심이던 소방관들, 화염도 없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원자로. 한계치를 넘어선 방사선 계측기의 최댓값으로 보고되는 관료 행정, 실제 방사선량은 이의 수만 배.


막연한 두려움 탈피 현실 직시해야

솔직함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덕목

진실의 시대로 돌아가려 노력해야


“우라늄 원자 하나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뚫을 수 있는 총알입니다. 철, 콘크리트, 사람, 그 어떤 것도 다 뚫고 지나갑니다. 그런 총알이 저 현장에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100년 이상, 상당수는 최소 5만 년 이상 살아남습니다. 이것은 지구상에 한 번도 없었던 재앙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방사선 재앙에 무심한 관료들 앞에서 절규하던 한 핵 과학자의 팩트 폭격. 기어이 현장을 확인하겠다며 폭발 원자로 상공으로 비행을 명령하는 관료와 이를 만류하는 과학자, 헬기 조종사의 겁에 질린 눈빛, 앞서가던 헬기의 추락을 목도하는 일행, 원전 폭발의 원인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일단의 핵 과학자들과 추적의 실마리마다 마주하는 모르쇠와 거짓말, 당장의 책임을 면하려는 일선 종사자들의 은폐, 몰라서 혹은 알고 저지르는 확신에 찬 거짓말.

우연히도, 나는 독일 유학 시절 체르노빌에서 사고 이후 경작된 찻잎의 위험도를 직접 측정한 적이 있었다. 육중한 납으로 된 벽돌들 사이로 들어선 실험실에서, 찻잎과 말린 찻잎 가루, 그리고 더운물로 우려낸 차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측정했다. 측정 방사선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방사선에 피폭되거나 흡입할 경우 우리의 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결론적으로 체르노빌에서 재배된 찻잎을 달인 차를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판단이 우리들의 숙제였다. 마침내 최대 오차를 감안하고도 마셔도 괜찮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 차를 담당 교수님과 함께 나누어 마셨다.

우리를 겁주던 납 벽돌들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내 몸과 환경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측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차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방사선은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나의 일부였고 우리 주위의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에너지의 한 형태로 그 효과는 아주 다양하며,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거나 암을 죽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모든 계측기는 무조건 믿을 수 없으며 효율과 오차가 있어서 계측치는 추가적인 분석과 교정을 거쳐야 할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과학적 핸들링을 통해, 더도 덜도 말고 딱 있는 그대로의 위험과 오차의 한계 내에서, 우리는 정직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 배움의 과정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어떻게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직시하고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게 된 깊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새삼 나이가 들면서 솔직함이 그 무엇보다도 귀한 덕목임을 절감하게 된다. 의도적인 거짓은 말할 나위 없겠지만,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서 시작된 거짓이 뜻하지 않은 폐해로 굳어지는 경우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다소 어렵더라도 사심 없이 사실을 직시하는 솔직함이 궁극적으로 많은 것들을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는 일들을 보게 된다. 아직 정체조차 잘 모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비말을 통해 천지사방으로 퍼져나가 줄줄이 확진자를 만들고 사망에까지 이르게 하는 이 엄중한 과학적 사실을 두고도, 적반하장으로 펼쳐지는 거짓을 어찌해야 할까. 무엇이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조심이든 극복이든 함께 해결해 가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일까. 그렇게 벌어지는 거짓의 대가는 과연 얼마나 될까.

‘포스트 시대’라는 말이 있다 한다. 포스트 코로나도 아니고 포스트 모던도 아닌, 무엇 이후를 이야기하는 포스트 무엇이 아니라 ‘포스트 시대’라니! 우편(post) 시대도 아니고, 난 무슨 잘못된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특정할 수조차 없는 무엇인가의 ‘이후’ 혹은 시간적 선후조차 뛰어넘는 ‘너머-시대’를 뜻한다. 심지어 온갖 가짜 뉴스가 팽배하여 진실조차 모호해진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시대’라는 말까지 있다 하니, 진실의 시대로 다시 ‘돌아갈’ 때는 이제 요원한 것인가. 어렸을 적, 거짓말하지 않기는 착한 일 축에도 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새삼 나를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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