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알리는 ‘은빛 눈꽃’의 파도… 밀양시 재약산 사자평 억새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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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객들이 햇볕이 따스한 날 억새꽃이 화사하게 피어난 경남 밀양시 단장면 재약산 사자평 산책로를 느긋하게 걷고 있다. 산행객들이 햇볕이 따스한 날 억새꽃이 화사하게 피어난 경남 밀양시 단장면 재약산 사자평 산책로를 느긋하게 걷고 있다.

산 중턱 너른 평원의 푸른 풀밭에 때아닌 ‘은빛 눈꽃’이 탐스럽게 피어났다. 햇볕이 따스한 가을에 은빛 눈꽃이 무슨 말이냐고. 그럼, 파란 하늘을 느긋하게 떠다니는 양털 구름이 땅에 비친 하얀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경남 밀양시 단장면 재약산 사자평 가을 풍경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지나는 바람이 빙긋이 웃으며 권한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죠.”


얼음골 케이블카 이용 1시간 30분이면 도착

화전민 생계를 위해 억새밭 태워 땅 개간

2010년 밀양시 억새군락지 복원 사업 벌여

참나무 군락·억새밭 곳곳 황토 깔린 산책로


■사자평 억새밭 가는 길

재약산 사자평 억새를 보러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밀양시 산내면 얼음골에서 ‘영남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뒤 사자평으로 내려가는 길이 첫 번째다. 반대로 사명대사의 정기가 서린 표충사 뒷길을 타고 고사리분교 터를 지나 올라가는 길이 두 번째다.

얼음골 케이블카 상부승강장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어가면 샘물산장이 나온다.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샘물산장 앞은 사거리다. 왼쪽으로 가면 울산으로 넘어가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천황산 사자봉에 이른다. 가운데 길을 택하면 사자평 억새밭으로 직행할 수 있다. 빨리 걸으면 1시간, 넉넉하게 잡아도 1시간 30분 거리다. 천황산 사자봉에 가서 사자평으로 향할 수도 있다. 시간은 조금 더 걸린다.

사거리에서 내려가다 보면 사자평만큼은 아니지만, 곳곳에 억새가 피어 있다. 파란 줄기 위에 하얗게 때로는 은빛으로 눈꽃이 피어 있다. 역광에 반사된 꽃은 찬란한 금빛으로 변한다. 해가 질 무렵이면 수줍은 뺨처럼 붉어진다. 달빛이 환한 밤이면 투명한 은빛으로 변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표충사 뒷길로 올라가면 2시간 정도 걸린다. 표충사에서 약간 벗어나 이른바 ‘작전도로’를 따라 걸으면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편안하게 올라갈 수 있다. 산책하는 동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단장면 전경과 바위산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사자평 안내판. 사자평 안내판.

■화전민의 삶, 애환이 서린 풀

재약산 사자평은 신라시대 삼국통일의 주역 화랑도가 수련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여기서 승병을 훈련시켰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많은 학자가 심신을 수련하며 학문을 닦았다. 해방 이후 여순반란사건 때는 빨치산의 집결지였다.

사자평에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렀다. 한때는 20여 가구가 살 정도였다. 당연히 학교도 있었다. 산동초등학교 분교였다. 학교가 정말 작아서 고사리분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별명은 ‘하늘 아래 첫 학교’였다. ‘하늘 아래 첫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화전민이었다.

‘밀양사자평습지와재약산생태관광협의회’ 최태수 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사자평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들어와 살았다. 그들은 이곳에 목장을 만들었고 스키도 즐겼다. 해방 이후에는 각종 농작물을 재배하려는 사람들과 화전민이 모여들었다. 1960년대는 전국 화전민을 모아 관리하려는 정부 방침에 따라 화전민 마을이 생겼다.

최 회장은 “화전민은 생계를 위해 억새밭을 태워 땅을 개간했다. 억새로 광주리를 만드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억새가 자라는 영역이 넓어졌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들어 등산객이 늘어나자 화전민은 민박과 음식 장사를 했다. 화전민이 살던 땅의 주인인 표충사는 소송을 제기해 화전민을 모두 쫓아냈다. 고사리분교도 문을 닫았다. 이후 억새밭에는 잡목만 우거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참나무가 사자평을 잠식해 억새는 흔적만 남게 됐다. 결국 사자평 억새는 화전민의 삶과 한이 서린 풀인 셈이다.

사자평은 2007년에 꼭 보전해야 할 한국의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억새는 2010년대 들어 되살아났다. 밀양시가 2010년부터 약 40ha(12만 평) 면적에서 억새군락지 복원 사업을 벌인 덕분이었다. 사자평의 가을 억새 풍경은 ‘광평추파(廣坪秋波)’라고 한다. ‘광활한 평원의 가을 파도 같다’는 뜻이다.


억새 사이에 외롭게 서 있는 푸른 소나무. 억새 사이에 외롭게 서 있는 푸른 소나무.

■산 중턱에서 펼쳐진 가을 향연

드문드문 피어 있는 억새를 보면서 내려가길 1시간. 바람에 휩쓸린 억새는 은빛 또는 하얀 물결을 이루며 춤을 춘다. 산행객에게 어서 오라 손짓하며 환하게 웃는다. 얼마나 사람이 반가웠던지 온몸을 흔들며 어쩔 줄 모른다. 가을 햇빛은 그런 억새를 보며 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낯선 사람이 두려워 억새 사이에 숨어 눈치를 보던 바람은 그제야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억새밭을 누비고 다닌다.

왼쪽 산 정상 방향은 참나무 군락이다. 오른쪽은 그야말로 키 작은 억새 천국이다. 드문드문 소나무, 참나무가 보이기는 하지만 눈은 시원하고 편안하다. 참나무 군락과 억새 사이에는 황토가 깔린 산책로가 펼쳐져 있다.

억새밭 전망대에 서본다. 약간 써늘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사르르! 억새 흔들리는 소리는 귀를 스친다. 찌르르~ 찌르르! 낯선 새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듯 조용히 노래를 부른다. 억새 사이에 앉아 하늘을 본다. 억새가 하늘을 향해 손을 쭉 뻗고 있다. 다섯 손가락에는 투명한 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다. 푸른 하늘의 하얀 구름이 억새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지나간다.

“깔깔! 까르르르!”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사자평 평원은 고사리분교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봄에는 고사리분교 운동장은 물론 평원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수선화를 보며, 가을에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를 보며 함께 놀이를 즐겼다. 부모가 산에 불을 질러 만든 밭에 일하러 나갔거나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을 때 집에 남은 어린이들은 사자평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사자평 억새밭 곳곳에는 나무 데크 산책로는 물론 흙길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억새밭 사이로 누가 들어간 흔적도 보인다. 햇빛과 바람과 억새 눈꽃에 파묻혀 산책로를 돌아다니다 활짝 웃으며 손짓하는 고사리분교 어린이들을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자평 아래로 걸어간다. 사방에는 억새뿐이다. 가을 햇볕이 따뜻하다. 마치 두툼한 억새 이불을 덮은 듯 몸이 훈훈하다. 땀이 나려고 한다. ‘Y’자 모양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주변을 억새가 둘러싸고 있다. 초록색 소나무 잎과 하얀 억새 눈꽃의 대화가 이채롭다. 고사리분교 어린이들은 저 소나무를 타고 놀았을까.

이곳에서 다시 돌아가 케이블카를 타고 출발지로 돌아갈 수도 있다. 아니면 표충사 방면으로 내려가도 된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고사리분교 터가 나온다. 지금은 고산습지센터로 이용하고 있다. 더 내려가면 표충사다. 뒤를 잠시 돌아본다. 억새들이 잘 가라는 듯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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