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나’를 깨고 진짜 ‘나’를 찾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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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경의 작품 ‘남자’와 ‘나’(위). 갤러리아트숲 제공 정보경의 작품 ‘남자’와 ‘나’(위). 갤러리아트숲 제공

화난 얼굴의 자화상.

강력한 인상의 인물화로 ‘왜?’라는 질문을 갖게 하는 정보경 작가. 그의 개인전 ‘사람들’이 부산 해운대구 중동 갤러리아트숲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기간은 오는 31일까지.

정보경은 실내 풍경 작업으로 상당히 인기를 끌었던 작가다. “전시를 하면 솔드 아웃, 주문 전화까지 오는 상황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았지만 ‘실내 풍경 전시를 더는 안 한다’고 결정했다. 회사원으로 치면 앞으로 뭘 하겠다는 것도 없이 사표부터 던진 꼴이다.” 10점 정도 남은 실내 풍경 그림 위에 철조망, 해골, 깨진 유리창 등을 그려 넣으며 결심을 다졌다.


정보경 개인전 ‘사람들’

31일까지 갤러리아트숲


실내 풍경화 인기 끌었지만

사회 아픔 보듬는 예술 고민

정 작가 변화에는 아이라는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세상의 부조리가 크게 다가왔다. 넉넉한 집안이 아니어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았는데 개인적으로도 내 밑바닥을 보는 일이 생겼다.” 자신의 그림도 돌아봤다. “예술이 내 전부가 아닌 나를 뽐내기 위한 액세서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것 같으면 아이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지 그림은 뭐하러 그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큰 빌딩을 보며 저기서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정 작가의 눈에 건물 그림자가 들어왔다. “빌딩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 폐지를 줍는 할머니 같은 사람이 있더라. 사람들이 예술가를 존경하는 이유는 어둠, 아픔 등 싫고 불편한 것을 드러내고 보듬기 때문이다.” 아픔에 연대할 때 자신의 아이를 포함해 인간이 조금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수많은 사회 문제가 반성과 성찰의 부재에서 온다고 봤다.

“나도 똑같더라. 주류 사회나 제도권 안에서 반항하지 않고 길들어 있더라. 진짜 나는 뭘까,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뭘까를 고민하는데 나에게 화가 났다.” 연필과 먹으로 그려진 자화상이 화나고 일그러진 눈빛이나 멍한 표정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0장, 300장 드로잉을 하며 미술이 내 삶의 안에 갇혀 있구나. 습관적으로 생각 없이 열심히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밝고 화려한 색을 다 뺀 ‘나’를 치열하게 찾던 정 작가는 외할머니 장례식에 가게 됐다. “나의 뿌리를 돌아봤다. 외가는 나의 아킬레스건이더라. 가난하고 못 배운 삶을 사는 외가 쪽 친척의 존재는 감추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데 10여 년 만에 만난 그들 속에 내가 있었다. 그들을 캔버스에 복붙(복사해서 붙이기)해서 옮기자 생각하니 몸이 찌릿했다.”

어둡고 고통스럽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 될 것을 알았다. 서울 친척들을 춘천 작업실까지 모셔 와야 하고 설득 작업도 필요했다. 우선 사촌 오빠를 그렸는데 마음의 뜨겁기에 비해 인물화가 익숙하지 않아 잘 안 풀렸다. “주변 사람들부터 그리기로 했다. 처음 만난 사람도 그리고, 단골 가게 사장님도 그렸다. 마음이 조금씩 편해짐을 느꼈다.”

정 작가는 모델을 직접 보면서 그림을 그린다. 작업할 때 공기, 서로 나눈 대화, 같이 먹은 음식, 작가와 모델의 컨디션도 캔버스에 함께 옮기고 싶어서다. 그는 “모델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고해 성사하듯 인생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족·친구에게도 못 하는 이야기를 하고 난 뒤 고맙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정 작가의 인물화를 보면 신체 비율이 묘하다. “동양 사람을 그리고 싶어서 일부로 얼굴을 크게 그렸다.” 그림이 확 바뀐 정 작가에게 ‘인물 말고 실내 풍경 그리자’고 말하는 갤러리도 있다. ‘한국에서 인물화는 안 팔린다’며 전시 연기 통보를 받기도 했다. 정 작가는 “한동안은 옷을 입고 다녀도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면 설렌다”고 말했다.

“아이가 그림 그리는 엄마 옆에서 놀다가 잠이 들어요. 새벽 3시에 깨워서 위층 집으로 올라갈 때 ‘엄마 수고했어’라고 말해 주죠. 아이를 쪽잠을 재울 만큼 내 작업이 가치 있는 일인가를 생각해 보죠. 나중에 아이가 스무 살이 되면 같이 소주잔 기울이며 엄마가 인간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점 하나 찍으려고 노력했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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