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지방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수석논설위원

책상 앞에 붙은 앙상한 달력 한 장이 마지막 잎새처럼 느껴진다. 올해의 10대 뉴스도 곧 쏟아질 것이다. 올 한 해 부산에서는 가덕신공항이 최고의 뉴스였다. 최근에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부산 시민들은 가덕신공항을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부산 현안으로 꼽고 있다. 그런데 부산 시민 절반 가까이는 여전히 가덕신공항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검증위원회가 김해신공항을 사실상 백지화하는 결론을 내렸는데도 왜 못 믿는 것일까.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에 속은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권 대부분의 언론과 일부 야당 인사도 반대한다.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에 이어 변창흠 차기 장관 내정자까지 가덕신공항을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으니 미심쩍을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에 가덕신공항 공사라는 삽을 떠야만 믿을 수 있다”는 한 기업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국토부 김해신공항 고집 뒤집어

2020년 ‘지역의 반란’ 원년 기록

 

32년 만의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

부울경 메가시티 가는 발판 마련

 

연방제 수준 지방분권 공약 향해

부산 미래 책임질 인물 관찰해야


돌이켜 보면 2020년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지방’의 원년이었다. 가덕신공항이 그 증거이자 상징이다. “어디 일개 지자체가 국가권력에 맞서려고 하나.” 부울경 검증단의 한 분이 국토부 관계자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라고 했다. 국토부는 부울경 800만의 가덕신공항 요구를 중앙 정부에 대한 도전이자 저항이라고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이게 바로 중앙의 갑질이다. 골백번도 넘게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김해공항을 아무리 확장해도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어서 가덕신공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2002년 김해공항에 착륙하려던 중국 민항기가 돗대산에 추락해 승객 130명이 사망한 사건이 시작이었다. 항공기 기장들은 김해공항에 착륙할 때 목숨을 거는 기분이라니, 당연히 요구할만한 일이다. 부산을 비롯한 지방은 서울이 잘되는 데 기여해 왔다. 사람도, 기업도, 돈도 모두 서울에 빼앗겼지만 순종했다. 그만큼 했으면 지방 사람들 목숨도 똑같이 소중하게 생각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서울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서울이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착각하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2008년에 “서울은 어떤 의미에서 대한민국보다 중요하다”라는 용납하기 힘든 말까지 했다. 서울이 사람으로 쳐서 머리라고 해도 손발이 있어야 산다. 지방이 있어야 한국도 있을 수 있다. 현실은 부산항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찬반을 묻는 주민 투표조차 국가사무여서 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시민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인데, 국가사무라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 부산 시민단체가 총궐기해 행정소송을 하기로 한 결정은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32년 만의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이 반갑다. 그동안 지방의회에서는 동물보호법에 길고양이 보호를 조례로 넣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상위법이 없으면 조례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으로 상위법령에서 금지하지 않는다면 지방정부가 관련 조례 제정을 적극적으로 시도해 볼 여지가 생겨 기대가 크다.

개정안은 ‘특별지방자치단체’의 설치·운영 등을 위한 근거도 명문화했다. 이로 인해 부울경 메가시티가 법적 근거를 마련해 한층 탄력을 받게 되었다. 가덕도는 부산에서 보면 서쪽으로 치우치지만, 부울경 메가시티로 크게 보면 부산·창원·거제를 잇는 삼각형의 한가운데에 있다. 안전 문제에서 시작된 가덕신공항이 부산 메가시티 구상과 겹치면서 국가균형발전 문제로 도약한 과정은 꼼꼼하게 새길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재정분권까지 제대로 이루는 연방제 수준의 분권국가를 만들어 지방분권이 본격화되는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라고 했던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아직 아쉬운 점이 많지만 지자체장이 대통령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중앙지방협력회의 신설 같은 진전도 있는 게 사실이다.

내년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나설 것으로 보이는 한 후보가 얼마 전 “부산 지도자들은 어떻게 중앙정부 예산 지원을 많이 확보할지만 생각했지, 독자적 성장 전략과 미래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부산시장은 물론 국회의원들도 가장 내세우는 것이 예산확보다. 중앙에서 돈 많이 타 왔다고 서로 자랑하는 사이에 부산이라는 배는 가라앉고 젊은이는 떠나버렸다. 중앙이 돈줄이라고 옛날처럼 지방이 복종만 해서는 안 된다. 지방의 고혈을 뽑아 찔끔 예산을 내려주면서 행세는 가당치 않다. 중앙에 대하여 필요하면 NO라고 말하고, 독자적 판단으로 움직여야 한다. 부산이 가만히 있는데 중앙이 알아서 부산월드엑스포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는다. 부산의 미래를 책임질 인물이 누구인지 지금부터 잘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nleader@busan.com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