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다시, 대화와 협치의 정신으로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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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청혼〉이라는 단편 희곡이 있다. 어느 젊은 지주가 이웃에 사는 지주의 딸에게 청혼하러 갔다 벌어지는 희극적 상황을 다룬 작품이다. 청혼 얘기가 제대로 나눠지기 전에 난데없이 말씨름이 벌어진다. 두 집 사이에 위치한 목초지가 자기네 땅이라는 주장이고 강변이다. “정신병자 같으니라고.” “독살스러운 음모자.” 급기야 모욕적이고 험악한 언사까지 오간다. 원래 목적이었던 청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나중에는 자신들이 키우는 개의 품종을 놓고 어느 집 개가 더 우수한지 다툰다. 최근 이 작품을 접하고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19세기 러시아 귀족의 탐욕과 과시욕, 이중성을 풍자한 작품 속에서 문득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았기 때문이다. 당초의 취지나 목적은 사라지고 지엽적인 것에 목을 매는 모습. 묘한 우연이다.

한국의 정치는 지금 사태의 본질보다 곁가지에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이른바 ‘쪽수’와 힘으로 밀어붙이는 여권, 국정 발목 잡기에 혈안이 된 야권. 그 사이에 대화와 타협은 없다. 1년을 끌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아이들의 유치한 감정싸움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부여당의 거친 행보를 보면 검찰 개혁이라는 애초의 대의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단 한 사람을 ‘찍어 내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윤 총장도 마찬가지다. 정부여당은 물론 임명권자인 대통령한테도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독기가 느껴진다. ‘정치적 중립성’ ‘성역 없는 수사’ 같은 명분 뒤에 자신을 지키고 조직을 보호하려는 이기주의가 숨어 있다. 윤 총장을 편드는 야당 역시 이 사안을 정권 탈환의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속셈이 역력하다.


사태의 본질 외면하는 한국 정치

지엽적인 것에 매달린 채 극한 갈등

정치가 분쟁 조정자 역할 못 하니

사법적 판단에 모든 걸 떠맡기는 꼴

새해엔 정치·사회적 공감대 넓혀

한국적 ‘협치 모델’ 찾아 나가야


가장 큰 문제는, 싸움의 끝에는 늘 사법부가 있다는 사실이다. 윤 총장은 자신에 대한 법무부 징계 처분을 법원으로 끌고 갔다. 집행정지 신청이 일부 수용되면서 윤 총장은 업무에 복귀했다. 행정기관 내부 다툼을 판사가 결정해 주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사법적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국가와 사회의 모든 쟁점을 죄다 법원에 맡기는 것이 온당한가.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사법’의 과도한 개입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가적 사안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곧장 법원으로 달려가는 일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여야 간 각종 고소·고발이 넘쳐나는 이유다. 최근에도 국민의힘은 공수처장 후보 의결이 이뤄지면 행정법원에 무효확인 소송을 벌일 태세다. ‘정치’는 하지 않고 대신 ‘사법’에 모든 것을 떠맡기는 행위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얼마 전 “대한민국이 사법의 과잉 지배를 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우려를 여권이 독차지할 처지는 못 된다. 법원 판결에 따라 윤 총장이 업무에 복귀하자 여권 내부에 ‘윤 총장 탄핵론’이 고개를 들었다. 특히 김두관 의원은 국회에서 힘으로 처리해야 한다며 연일 발언 수위를 높이는 중이다. 하지만 탄핵안 역시 헌법재판소까지 갈 공산이 크다. ‘정치의 사법화’에 관한 한, 여와 야가 ‘초록동색’이라는 얘기다.

사회를 움직이는 토대는 구성원에 내면화된 사회적 가치, 도덕, 규범 같은 것이다. 법의 적용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건 상식에 속한다. 이는 법치주의 원리와는 다른 문제다. 사법의 과잉은 민주주의의 위기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한국 정치가 못난 탓이다. 정치가 더 이상 갈등과 분쟁의 조정자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다. 꼬이고 막힌 정국은 통 큰 정치적 합의로 출구를 찾았다. 지금 우리 정치판엔 협치의 정신이 없고 ‘극단의 정치’만 횡행한다.

스웨덴이라는 나라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헌정 중단 없이 평화적 방식으로 각종 제도 개혁과 민주주의를 실현해 왔는데, 그 원동력이 공감과 합의를 끌어내는 협치 모델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을 모두 만족시키기란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조금씩 양보해 더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정책을 만드는 방식. 이게 스웨덴의 저력이다. 그렇게 자유와 평등, 소유와 분배 같은 대립적 가치들을 아우르는 제도를 발달시켜 왔다. 한 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으니 사회 분열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는 대화와 협의, 타협의 문화를 내면화한 정치인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코로나19 재난 앞에서 우리 국민들의 삶이 말이 아니다. 정치가 제 기능을 회복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새해는 정치 영역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 대화와 합의의 정신이 깃드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kswoo333@busan.com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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