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도마와 침대 사이/조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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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등을 돌리고

옷을 홀랑 벗기거나

마구 주물럭대거나

속을 확 뒤집거나

오독오독 쥐어뜯거나

잘근잘근 난도질하거나

달달 볶거나

펄펄 끓는 물속에 집어넣거나

꼬챙이를 쑤셔 박거나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도마와 침대 사이

-조은길 시집 〈입으로 쓴 서정시〉 중에서-


마음대로 칼질을 하기 위한 단단한 도마와 깨끗하고 포근한 침구가 펼쳐져 있는 침대 사이에 이런 상관관계가 있었던가. 입가에 ‘아하’하는 미소가 번진다. 맛있는 요리란 요리사와 식재료의 교감 없이는 탄생이 불가능하지 않는가. 고기의 붉은 핏물을 잡거나 팔딱거리는 생선의 목을 치거나 채소를 곱게 채 썰 때 거칠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한 칼질의 리듬이 묘하게 느껴진다. 상대방의 성감대를 정확히 아는 것, 거기에 사랑이 있다. 이 시의 또 하나의 묘미는 첫 연의 ‘조용히 등을 돌리고’에 있다. 칼을 잡기 전의 고요함에 느껴지는 긴장감. 근데 오늘 저녁에는 무슨 요릴 해 먹지? 김종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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