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예(禮) / 전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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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에 일어나 세수를 한다

손톱을 깎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화장지에 곱게 싸 불사른다

엉킨 숨을 풀며

씻은 발을 다시 씻고

손바닥을 펼쳐

손금들이 어디로 가고 있나, 살펴본다

아직은 부름이 없구나

더 기다려야겠구나, 고립을 신처럼 모시면서

침묵도 아껴야겠구나

흰 그릇을 머리맡에 올려둔다

찌륵 찌르륵 물이 우는 소리 들리면

문을 조금 열어두고 흩어진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불을 끄고 앉아

나는 나를 망자처럼 바라본다

초록이 오시는 동안은

-전동균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중에서-



유난한 추위에 발목이 잡히는 이번 겨울이다. 창밖의 거리는 한산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두꺼운 방한복에 총총걸음이다. 날씨가 추울수록 세상은 고요해진다. 침묵마저 아끼는 곳이라면 겨울 산. 나무들은 오십여 년 만의 추위에 어떻게 지내시나. 잎들마저 모두 털어 낸 앙상한 겨울나무들은 존재 자체가 울림통이 큰 기도일 것이다. 추위가 깊을수록, 봄을 모시기 위해 깨어나 세수를 하고 몸을 정갈히 하고 가지 끝을 살핀다. 그런 모심 끝에 찾아오는 것이 봄이다. 내게도 내가 나를 망자처럼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만남이 당연한가? 예를 다하여 기다릴 때 그 사람은 귀하기만 하다. 김종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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