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북극 한파와 배우들의 겨울나기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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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배우·경성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한겨울에도 따스함을 간직한 도시, 부산에도 한파가 찾아왔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얼음장같이 차가운 공기가 무서워 외출이 두려울 정도이다. 이런 추운 날씨가 찾아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추억은 뜨끈한 어묵 국물도 아닌, 모락모락 연기 나는 군고구마도 아닌, 바로 드라마 야외촬영장이다. 무더위 속에서 일하다 사망사고가 날 정도의 폭염이거나 심하게 눈이 내려 차들이 미끄러지고 여기저기 사고로 뒤엉켜있는 폭설일지라도 드라마 촬영은 어김없이 계속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정해진 시간에는 방송이 되어야 하기에 날씨와 상관없이 야외 촬영이 이루어진다.


입 얼고, 코 빨개지는 곤란한 상황

배역, 배우별로 방한 아이템 제각각

가녀린 여성 이미지 왕비, 추위에 취약

군대용 깔깔이 핫팩 스키복까지 등장

폭설 한파로 교통대란 농가피해 속출

고개 숙인 사과보다 신속한 대처 필요


그래서 배우들은 제각기 자신만의 날씨 대비용 촬영 노하우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겨울에 찍는 사극 촬영에서는 배역별로 다양한 아이템들을 장착하고 나타난다. 짚신을 신어야 하는 평민과 노비 역할의 배우들은 발 시릴 상황을 대비하여 얇은 실내화를 신고 그 위에 큰 버선을 신은 다음 짚신으로 마무리하여 동상의 위험에서 벗어난다. 짚신을 신고 다니다가 땅에 버선이 닿아 젖는 경우가 많다 보니 버선 속에 두꺼운 수면 양말을 여러 겹 신고 비닐로 발을 감싼 후 버선과 짚신을 신는 경우도 있다. 장군들은 갑옷으로 커버가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배역들에 비해 비교적 두툼하게 의상을 껴입을 수 있다. 방한복으로 최고라는 일명 군대용 ‘깔깔이’를 상·하의 세트로 든든하게 입고 장화 속에는 핫팩을 깔아 온기 가득한 신발로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반면, 옛 시대에 최고의 권력층이었던 왕과 왕비가 지금에서는 가장 추위에 많이 떨어야 하는 안쓰러운 역할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비단 소재로 만들어진 의상 때문에 여러 겹으로 옷을 입으면 금세 티가 나기 일쑤다. 혹여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껴입었다가는 자칫 우둔한 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왕비는 어깨가 좁고 가녀린 여성의 이미지를 나타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저고리 안에 그 어떤 옷도 덧대어 입기 힘들다. 브이넥으로 깊게 파인 저고리 디자인의 특성상 휑하게 목을 내놔야 하는 데다가 어깨 실루엣이 드러날 정도로 타이트하게 의상을 제작하기 때문에 다른 옷을 껴입기엔 어려움이 많다.

필자 또한 엄친딸이라는 이미지 덕에 어렸을 때부터 대하드라마에서 왕후 역을 자주 맡았다. 왕비 책봉식을 거행하면서 실제 궁에서 입었던 화려한 의상들과 머리 장식을 경험해 보고 가마, 말, 산해진미 등 그 시대의 호사스러움은 모두 만끽하곤 했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왕비 역할을 하면서 최상의 것들을 누려 봐서 좋겠다며 좋은 이미지에 감사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다.

그러나 물 위에서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백조의 물 밑 다리 움직임을 본 적이 있는가? 혹독한 추위로 치마 속에서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면서 얼굴로는 왕후의 우아함을 표현해야 하는 숨은 고생은 몰랐을 것이다. 처음 왕비 역할을 맡았을 때는 날씨 대비를 생각하지 못한 채 연기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 갔다가 추위에 호되게 당하곤 했었다. 촬영 한두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입은 금세 얼어 발음이 안 돼 대사 NG가 나기 시작하고 코는 술이 잔뜩 취한 아저씨처럼 새빨개지곤 했다. 추위에 잔뜩 얼어 버린 얼굴이 경직된 연기로 화면에 비치는 아쉬운 상황도 일어났다.

지난 경험을 통해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왕후 역으로 출연할 때는 한파 대비용 채비를 단단히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보온성이 뛰어난 얇은 캐시미어 니트를 브이넥으로 과감히 잘라 저고리 속에 티 안 나게 입고 화면에 잘 안 보이는 목 뒤쪽과 등 전반에 핫팩을 고루 붙여 상체 체온을 최대한 유지하도록 했다. 하의는 왕비 의상의 강점인 풍성한 치마 디자인을 활용해 내복, 기모바지, 스키복 3단으로 착용했다. 발은 꽃신 때문에 두꺼운 양말을 신을 수 없어 발가락이 얼지 않도록 촬영 중간에 수시로 갈아 신을 수 있는 털부츠를 구비했다. 휴대용 난로로 얼굴을 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낱 촬영 추위에도 이렇게 대비하는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난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새해부터 시작된 북극발 한파로 농작물 냉해, 양식어류 및 가축 폐사 등 피해 농가가 속출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폭설로 서울에서는 각종 교통대란과 동파 등 혼란스럽고 불편한 상황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주도 폭설 피해를 비롯해 부산 또한 낙동강 결빙 등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이 일어나는 건 마찬가지이다. 늑장 대처로 고개 숙인 모습보다는 꼼꼼한 사전 준비와 신속한 대처가 필요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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