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세상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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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국 사회부 경찰팀장

법원 기자실은 볕이 들지 않아 쿰쿰합니다. 그날도 환기할 겸 창문을 열고 판결문을 체크하러 종종걸음 했죠.

어라? 공사 비리 관련 판결문을 읽고 있는데 ‘한 전직 구청장이 아파트 인허가를 대가로 수천만 원대 뇌물을 받아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문장이 그 안에 들어앉아 있더군요. 기자는 배를 긁다 말고 놀라서 선고기일을 알아보러 뛰어갔습니다. 그의 법정구속 기사를 놓치지 않았던 건 그저 요행이었다고나 할까요.

가정을 한 번 해봅니다. 기자가 그날 마침 다른 취재가 있어 판결문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과연 이 선출직 공무원이 뇌물수수 혐의로 선고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졌을까? 수사에서 기소까지 모든 피의사실이 철저한 비밀에 부쳐지고 있는 재미난 세상 아닙니까.

시대의 흐름을 정통으로 얻어맞아 몸살을 앓는 곳 중에는 경찰서도 있습니다. 절도범과 사기범이 ‘내가 죄지은 건 맞는데, 왜 내 죄가 신문에 나오느냐’고 되레 호통을 치고 있다고 하네요. 수사기관이 피의자에게 코가 꿰이지 않으려 되레 이들을 감싸고 쉬쉬해야 하는 게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습니다.

형법 126조에 ‘피의사실공표죄’라는 게 있답니다. 범죄를 수사하거나 이를 감독하는 자가 수사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을 여러 사람에게 알릴 경우 성립되는 죄입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어긋나니까요.

그러나 수십 년간 검찰과 경찰은 범죄로 인한 피해 확산이나 추측성 보도를 막고, 공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공보 규칙을 세우고 피의사실을 공개해 왔습니다. 사건 전말을 알려주는 수사관 인터뷰나 브리핑이 그 예입니다.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피의사실공표죄를 꺼내서 먼지를 턴 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입니다. 2019년 장관 취임 일성으로 공보 준칙을 폐기하고 ‘형사사건 공개금지’ 규정을 내세웠습니다. 조 전 장관은 ‘가족 수사가 마무리된 후에 시행하겠다’고 입장을 밝혔고, 결국 피의사실공표 금지는 법무부 훈령으로 남았습니다.

시간은 흘러 조 전 장관의 후임으로 추미애 전 장관이 임명됐습니다. 추 전 장관은 이번에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겠다’며 대뜸 공소장 공개를 금지한답니다. 경찰 조사도, 검찰 공소장도 들여다볼 생각을 말라는 거지요.

신임 박범계 법무부장관 후보자는 최근 부동산 허위거래 의혹으로 홍역을 치르셨다니 조만간 선출직 대상 등기부 열람도 금지될지 모르겠네요.

언론에 이토록 재갈을 물려 뭘 얻고 싶어 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재갈 때문에 또 얼마나 많은 지도층의 비위가 묻혀서 넘어가게 될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파 속에서 구린내가 나면 ‘어?’ 하고 고개가 돌아가는 게 당연지사입니다. 누구 소행인지 궁금해지는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헌데, 이제는 ‘누구 소행인지 왜 알려고 하느냐’는 역정이 쏟아지고 ‘생리현상인데 코를 쥐고 두리번거리는 건 감수성 떨어지는 행동’이라며 질책이 이어집니다. ‘성 내는 놈이 결국 방귀 뀐 놈’이라며 우리 부친은 칠십 평생을 그리 믿고 살아오셨는데 말이지요. 참 알 수 없는 요지경 세상입니다. ksk@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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