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날고 바다에 앉고 마음 닿는 곳에 불상 있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경남 고성 문수암·보현암

문수암에서 내려다본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남해 바다 전경. 희미한 바다와 산은 인생의 고해를, 숲 사이 산길은 깨달음으로 가는 여로를 상징하는 듯하다. 문수암에서 내려다본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남해 바다 전경. 희미한 바다와 산은 인생의 고해를, 숲 사이 산길은 깨달음으로 가는 여로를 상징하는 듯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야수마냥 제법 사납다. 경남 고성군 무이산 중턱에 마련된 주차장 겸 휴게실에 잠시 내렸는데 손발이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다. ‘문수암 보현식당’ 간판에 붙은 산채음식 메뉴에 눈길이 갔지만 서둘러 차로 돌아갔다. 이렇게 싸늘한 날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암자를 찾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전설 깃든 사찰

종일 햇살 받고 바다 내려보는 문수암

바위 벽감 속 부처상 반겨주는 보현암

13m 약사여래불은 보는 곳마다 달라


■문수암,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

화장실에 잠시 다녀온 뒤 차를 몰고 다시 올라간다. 문수암은 오른쪽, 보현암은 왼쪽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차를 돌려 조금 더 올라가자 문수암 주차장이 보인다.

차에서 내리니 동자승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담긴 화장실 벽화와 그 뒤로 광대무변하게 펼쳐진 남해 바다가 보인다. 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붙은 나무 숲, 그 뒤를 병풍처럼 가리고 선 푸른 산, 그리고 많은 섬이 점점이 뿌려진 다도해가 잊을 수 없는 풍경화를 이루고 있다. 산과 바다를 잠시 내려다보는 사이 눈이 맑아지면서 가슴은 상쾌해진다.

이곳은 정남향이어서 구름이 심술을 부리지 않는 한 해가 하루 종일 포근한 미소를 멈추지 않는다. 오늘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다.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 언덕에 드러누워 잠든 동자승을 담은 화장실 벽화는 이곳이 얼마나 푸근한 곳인지를 잘 보여준다.

문수암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쪽에 파란 풀들이 겨울을 잊고 있다. 여러 가지 채소가 작은 텃밭에서 자라고 있다. 뒤쪽은 언덕이, 오른쪽은 큰 바위가 가로막은 좁은 공간에 마련된 손바닥만한 땅이다. 언덕과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고 정면에서는 하루 종일 뜨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기막힌 공간 배치 덕분이다.

고성군 상리면 무선리 무이산 중턱에 자리잡은 문수암은 신라시대인 668년에 창건한 절이다. 절을 만들 때의 전설이 지금까지 내려온다.


약사전에서 올려다본 문수암 약사전에서 올려다본 문수암
보현암 벽감의 부처들 보현암 벽감의 부처들
청담스님 사리탑 세워진 전망대 청담스님 사리탑 세워진 전망대
화장실에 그려진 동자 벽화 화장실에 그려진 동자 벽화

‘의상조사는 남해 금산으로 수행하러 가는 길에 무선리의 한 민가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 잠이 든 의상조사의 꿈에 노승이 나타났다.

“내일 아침 귀인을 만날 것이오. 그들을 따라 산에 가시오.”

다음날 행색이 남루한 두 걸인이 그를 찾아왔다. 당혹스러워하며 그들을 따라간 의상은 청량산(무이산)에 오르던 도중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비단에 촘촘히 수놓은 듯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다도해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가 섬에 매혹된 사이 두 걸인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바위 틈 사이로 사라졌다. 의상조사가 따라가 보니 문수보살 조각상이 안연한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두 걸인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임을 깨닫고 문수암을 창건했다.’

문수암은 삼국시대 때부터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화랑들은 이곳에서 무예를 익히며 기개를 키웠다. ‘무예를 수련하는 화랑들의 모습이 마치 신선 같다’고 해서 무이산이 있는 마을은 무선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수암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곳은 청담스님 사리탑이 세워져 있는 전망대다. 천불전 약수터를 지나 법당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오르면 된다. 도무지 눈길을 돌리고 싶지 않은 세 가지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왼쪽에는 무선저수지를 중심으로 무선리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산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게 글자 그대로 산해(山海)다. 여러 산 사이에 자리 잡은 누런 들판은 아늑하고 평화롭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청자빛 남해 바다가 수평선 안쪽에 편안하게 드러누워 암자를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 옆으로는 큰 불전과 부처상이 바다를 등지고 앉아 있다. 약사전과 약사여래불상이다. 어느 방향을 보더라도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수채화이자 눈부신 풍경 사진이다.

법당 앞마당에는 참배객의 소망이 적힌 기와가 쌓여 있고, 다양한 글을 적은 풍등이 달려 있다. 문수보살은 최고의 지혜를 관장하는 보살이어서 합격을 기원하려는 수험생이 전국에서 이곳을 찾아온다.

문수전 법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석벽이 있다. 석벽 틈에서 부처의 얼굴을 발견하면 서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아무에게나 보이는 건 아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에게만 나타난다.


■보현암, 온화한 미소 부처 만나

보현암으로 가려면 약사전을 지나야 한다. 보현암 약사전은 약사여래불상을 모신 곳이다. 약사여래는 질병을 고쳐주고, 고통을 없애주며, 목숨을 연장시켜주는 부처다. 약사전 3층에 올라가면 13m 높이의 약사여래불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불상 뒤쪽에는 수십 개의 작은 종이 달려 있다. 종을 만지면서 지나가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마음은 약해서 흔들리는 게 인지상정이고, 종교시설에 이를 위무해주려는 장치가 흘러넘치는 건 당연지사다.

약사전에서 좁은 산길로 접어들어 2~3분만 더 가면 보현암이 나타난다. 코로나19 탓일까. 인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절을 관리하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다. 추위에 꼭꼭 숨었는지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바람조차 서둘러 집에 돌아가려고 나그네를 스쳐 지나간다.

이곳에서도 약사전과 약사여래불상이 보인다. 문수암에서 보는 장면과는 확연히 다르다. 문수암에서 불상을 본 사람은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고 할 것이고, 여기서 기도를 드린 사람은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사람은 믿는 대로 보는 법이다.

보현암도 정남향이어서 문수암 못지않게 따뜻하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대웅전 뒤에 기세가 심상치 않은 큰 바위가 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신성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바위 안으로 움푹 들어간 벽감이 마련돼 있다. 바위에는 오래 된 부처가 등을 기대 앉아 있고,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다른 부처와 두 보살 조각상이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같은 바다라도 보는 장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보현암에서 보는 남해 바다와 문수암에서 보는 남해 바다도 마찬가지다. 보현암이 훨씬 낮은 곳이어서 바다는 가까이 다가와 있다. 곧장 달려가면 바다에 발을 담글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차다.

대웅전 옆에 벤치가 여러 개 놓인 작은 공간이 보인다.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벤치에 잠시 앉으니 햇볕 덕분에 졸리는 느낌이다. 해가 질 때까지 이대로 벽에 기대 앉아 있고 싶을 뿐이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