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부산이 배우지 못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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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상임대표

2020년은 훗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바이러스가 지구를 덮친 한 해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과 안전을 위협한 것은 코로나만이 아니다. 거대한 팬데믹의 장막을 들추어 보면 겹겹의 재난이 쌓여 있고, 이는 고스란히 2021년의 과제로 넘어왔다. 부산은 지난해의 위기를 통해 과연 무엇을 배웠을까. 2020년을 돌아보며 지금 부산에 남겨진 교훈을 묻는다.

지난해 초 ‘n번방’ 사건이 터졌다. 여성과 아동을 SNS 대화방에서 노예처럼 다루며 능멸하고 고문하고, 성적 행위들을 강요하는 온라인 성착취 범죄였다. ‘박사방’을 비롯한 유사 범죄가 줄을 이었고 운영자들은 수십억 원을 벌어들였으며, 입장료를 지불하고 대화방에 참여한 이들은 어림잡아 26만 명이 넘었다. 2010년대에 이미 단톡방 내 성희롱 사건이 공론화되었지만 온라인 성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의 가벼움은 입에 담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코로나 창궐에다 시장 공석 부산

성폭력·성평등 대책 여전히 미흡

‘완월동’엔 성 구매 남성 발길 여전

전주·대구와 달리 해법 찾지 못해

2020년 ‘코로나 교훈’ 되새기고

시장 후보들 성평등 의제 관심을


국회는 온라인 성범죄에 대응하는 입법안을 통과시켰고 사법기관의 양형 기준도 재정비되었다. 전국의 지자체 대응도 이어졌다. 인천은 디지털 성범죄 예방 온라인 청년 감시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고, 대전, 창원, 경기도 등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아직도 온라인 성착취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지자체 차원에서의 뚜렷한 대응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4월에는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성폭력을 저질러 사퇴했다.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 전 영역에 걸친 성차별적 구조를 드러냈다. 정부와 지자체는 실질적인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성평등 추진 체계와 성폭력 대응 체계를 약속했다. 서울은 물론 경기도, 대전, 제주, 광주 등에서는 행정기구를 개편해 성인지 정책 담당관 혹은 성평등 정책관, 여성정책담당관을 별도로 마련했다. 광역단체장의 잇따른 성폭력 사건은 여성들이 일터와 일상에서 겪는 성차별, 성폭력이 생각보다 훨씬 더 뿌리 깊고 심각하다는 것을 방증했다.

미투 운동 이후에도 부산은 문화예술계 성폭력 대응센터 예산을 삭감하려 하거나 성폭력 대응 기구를 만드는 데도 늑장을 부렸다. 결국 부산시장의 성폭력 사건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뒤늦게 공공기관 성희롱 성폭력 근절 추진단이 마련되었지만, 그마저도 인원이 축소된 규모였다. 행정 체계 개편을 통한 성평등 추진 체계 마련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지자체에서 하는 일을 앞다투어 성급하게 정책으로 내놓으라는 말은 아니지만, 실질적 성평등이 매우 느리게 그 성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고려할 때 부산은 또다시 기회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지난해 12월에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매매 집결지 부산 ‘완월동’이 국토부의 도시재생 사업 선정에서 탈락했다. 성착취로 영업 이득을 본 포주를 비롯한 집단들이 재개발을 요구하며 민원을 넣는데도 속수무책이며, 완월동 성착취 집결지에 대한 부산시 차원에서의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난해 10월 전주는 제5회 대한민국 범죄 예방 대상을 수상했다. 전주의 대표적인 성매매 집결지였던 ‘선미촌’ 도시재생사업을 2014년부터 추진해 오면서 성착취 업소의 숫자를 감소시킨 것은 물론, 112 신고 건수도 줄어들면서 범죄율을 낮춘 공적이 높게 평가된 것이다. 현재 전주는 성매매 집결지 한가운데 성평등 전주를 개소하고 인권과 예술의 공간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다. 대구 ‘자갈마당’도 110년 만에 폐쇄된 뒤 2019년 시민들이 선정한 대구시정 베스트 1위에 올랐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집합금지 명령이 유흥업소까지 떨어진 가운데 부산 완월동 밤거리에는 성 구매를 하러 온 남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오는 4월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 후보가 잇따라 내놓는 정책과 비전을 살펴본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직장 내 성폭력을 비롯한 성차별 구조에 대한 해결을 변화의 1순위로 삼고 선거에 뛰어든 후보도, 성평등 의제를 실천하기 위해 근본적인 해결과 대책을 내놓는 선거 캠프도 보이지 않는다. 당헌까지 개정하며 후보를 내고자 하는 더불어민주당의 반성 없는 태도도, 유력 후보의 공약 어디에도 성평등에 관한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는 국민의힘의 시대착오적인 태도도 부산의 전망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코로나19로 드러난 돌봄 노동의 위기, 일터와 일상에서 성차별과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위기 앞에 부산은 계속 무능할 것인가. 120년째 성업 중인 부산의 성매매 집결지를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한단 말인가. 부산이 이 엄혹한 재난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 같아 두렵다. 지금이라도 부산은 2020년으로부터 얻었어야 할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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