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조선시대 성벽에 지어진 집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

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 동래구 한 민가에 조선시대 성벽이 있다는 제보입니다.

무려 300년 된 동래읍성 성벽 돌 위에 민가가 지어져 있다는 겁니다.

실제 도심 한가운데 동래읍성 흔적이 남아 있는지, 그 성벽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해보겠습니다.


민가는 동래구청 신청사 부지~부산기상청 사이 골목에 있었습니다.

잡초가 지저분하게 자란 나대지 옆에 담장이 섰습니다. 그 위에는 한눈에 봐도 연식이 오래된 허름한 주택이 지어졌습니다.

동래읍성 성벽으로 보이는 돌은 담장 아래에 박혔습니다. 성인 팔 만한 길이의 큰 바위부터 모난 작은 돌들까지 다양합니다. 보통 담벼락과 달리 돌에 그늘이 진 듯 스산하고 어둡습니다.


민가 아래 담벼락은 조선 후기 때 축조된 동래읍성 성벽이었습니다. 영조 7년(1731년)에 쌓은 그 돌입니다.

실제 이곳과 50m가량 떨어진 곳에는 동래읍성 6개 문 중 하나인 '야문'터가 있습니다. 야문은 평상시에는 닫혀 있다가 비상시 출입하는 성문.

이곳에서 시작해 동래향교~서장대~북문 등으로 성곽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동래향교로 가는 '미로 골목'도 옛 구조 그대로라고.

성벽은 일제강점기이던 1920년대, 일본인의 계획적인 시가지 개발사업으로 부서지거나 훼손됐답니다. 성벽이 조선의 권위를 상징할 수 있고, 민족 감정을 불러일으켜 저항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를 없애려 일부러 성벽 쪽으로 길을 냈다는 겁니다.

30여 년 동래읍성 등 향토사학을 연구해 온 이상길 씨는 "사실 그 이전부터 자연적으로 훼손되거나 성벽 돌로 주택을 짓는 등 방치가 돼 왔었다"면서 "이렇게라도 흔적이 남아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곳에 남은 동래읍성 흔적은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

야문터에서 복천현대아파트를 지나 서장대가 있는 산지를 오르자, 복원된 성벽이 줄지어 섰습니다.

성벽 아래에는 색 바랜 기초석이 박혔습니다. 옛 조선 후기 동래읍성 성벽의 돌입니다. 서장대, 북문에 이르기까지 잔잔하게 이어졌습니다.

지난해 11월에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다고 합니다. 성벽 윗돌이 아랫돌 앞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관측돼 우려를 낳았다고. 2015년 9월에는 복원된 지 10년 만에 동래읍성 인생문 주변 성곽이 붕괴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600년 된 조선 전기 성벽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동래읍성은 최초 조선 세종 28년인 1446년 때 동래현령 김시로가 축조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 우왕 13년인 1387년에 박위 장군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남문이었던 현 수안역을 비롯해 내성초, 복산동 행정복지센터 등의 경로로 세워졌다고.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전투로 성벽이 무너졌고, 이후 조선 후기 때인 영조 7년(1731년)에 6배가량 큰 범위로 다시 쌓았습니다.

조선 전기 성벽 흔적이 목격된 곳은 동래시장 근처 한 아파트입니다.

2002년 복천동 A아파트 기초공사 도중 동래읍성 터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에 당시 유적을 일반 시민이 볼 수 있도록 1㎡ 면적의 강화 유리를 설치했답니다.


2002년 부산 동래구 복천동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조선 전기 동래읍성 성벽 모습. 부산일보DB 2002년 부산 동래구 복천동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조선 전기 동래읍성 성벽 모습. 부산일보DB

그러나 취재팀이 현장을 갔을 땐, 성벽터를 볼 수 없었습니다. 유리 내부가 습기로 가득 차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날 아파트 관리인은 "재시공을 하려 했는데, 건물을 지지하는 기둥을 건드릴까 봐 일시 중단한 상태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강화 유리가 퍼져 있는 면적을 봤을 때 조선 전기 읍성의 폭은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옛 성곽 경로를 봤을 때 A 아파트뿐 아니라 주변 건물 아래 광범위하게 묻혀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동래읍성에 얽힌 조선 전기의 유물은 또 있었습니다.

2005년 4월 부산교통공사가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를 위해 땅을 파던 중 돌담이 발견됐습니다. 수안역은 조선 전기 동래읍성의 남문 위치입니다.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돌담이 있던 곳은 동래읍성의 '해자'로 밝혀졌습니다. 해자는 성 외곽에 판 도랑으로, 적군의 진격을 늦추는 방어시설입니다.

당시 조사에서는 동래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약 100명 안팎의 유골, 무기류 등도 발견됐습니다.

취재팀은 이날 유골이 전시된 수안역 동래읍성 임진왜란역사관을 찾았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동래읍성의 흔적은 계속 발굴되고 있습니다. 동래구 신청사 부지에서도 2019년 10월 시작된 조사에서 성벽터가 발견됐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제대로 보존되기보다 방치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성벽 위에 집이 지어져, 주민 협조가 없이는 손 쓰기가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기존 주택을 철거하거나 매입해야 하는데, 워낙 넓은 구간에 분포돼 있어 이에 따른 예산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현황 파악이 필요합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추후 장기 복원 플랜이 세워질 때까지 무분별한 개발을 경계해야 합니다.

“동래읍성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송상현 동래부사를 비롯한 군·관·민이 일치단결해 저항한 역사적인 산물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외교와 국방, 경제의 중심지로서 동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입니다."(나동욱 복천박물관 관장)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제작=정수원·이재화 PD / 홍성진 대학생인턴

※영상은 유튜브 채널 '다비줌'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