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소아시아 기행] 기게스의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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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 내서재 대표

일전에 본 칼럼에서 언급한 바 있는 ‘에게해의 동편 스미르나’(지금의 터키 이즈미르)에서 또다시 동쪽으로 70여 킬로미터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면 사르트라고 하는 조그마한 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주변으로 경작지만 넓게 펼쳐져 있어서 여기가 옛날에 리디아(Lydia)라고 하는 대제국의 수도 사르데이스였다는 사실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마을 초입에 동전 주조 장면을 묘사한 청동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서 이곳이 과거에는 부유한 곳이었을 거라고 유추할 만한 단서를 제공한다.

소아시아, 곧 오늘날의 터키 땅에는 지금과 같은 봄철에 피고 지는 무수한 들꽃만큼이나 생겼다가 사라진 무수한 나라들이 있었던 바, 리디아도 그중 하나다. 필자는 8년 전쯤 터키 서남쪽 끝에 있는 도시 셀축에서 이즈미르로 가는 기차를 타고 다시 이즈미르에서 낡은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힘들게 찾아가 본 경험이 있다. 그때 방문객은 필자와, 아마도 고대 로마의 목욕탕으로 기억되는 유적지에서 밀어를 속삭이던 한 쌍의 터키인 연인뿐이었다.


손에 낀 반지를 손바닥 쪽으로 돌리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신비한 마력

보이지 않는 힘으로 권좌 오른 양치기

이번 선거 후보·검찰·언론 행태와 유사


옛날 옛적, 이 리디아 왕국에 기게스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가 전해진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1권에서는 이 인물이 리디아 왕국의 왕 칸다울레스의 경호원으로 나오고, 플라톤의 〈국가〉 제2권에서는 왕에게 고용된 양치기로 등장한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헤로도토스의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나, 오늘의 주제를 위해서는 더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 플라톤 판본을 택하기로 하겠다. 〈국가〉 제7권에서 선의 이데아를 실감 나게 설명하기 위해 있을 법하지 않은 장소(동굴)를 로케이션해낸 그답게, 같은 책 제2권에서는 정의를 제대로 정의 내리기 위해 ‘기게스의 반지’라고 하는 기발한 장치를 꾸며낸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동굴의 우화를 통해 세계 최초의 영화 이론을 제시하고,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서는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의 선구자가 되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기게스는 리디아의 왕에게 고용된 양치기였는데, 하루는 그가 양 떼를 치던 곳에 큰비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나더니 땅이 갈라졌다.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땅이 갈라진 틈으로 내려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다. 속이 빈 청동 말이 있고, 그 청동 말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거인의 시신 한 구가 누워 있는데, 손가락에 금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그가 이 반지를 빼 들고 밖으로 빠져나간 것은 당연지사.

그런 뒤 왕에게 보고하기 위한 정례 양치기 모임에 이 반지를 끼고 참석한 기게스는 우연히 반지의 보석을 손바닥 쪽으로 돌려봤다가 자신의 모습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깜짝 놀란 그는 반지의 보석을 도로 바깥쪽으로 돌렸는데, 그러자마자 자신이 다시 보이는 것이었다. 반지의 신비한 힘을 확인한 기게스는 그 즉시 왕에게 보고하러 왕궁에 들어가는 전령의 한 명이 되도록 일을 꾸며 왕궁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왕비와 잠자리를 같이 한 다음, 그녀의 도움으로 왕을 죽이고 리디아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글에 흥미와 생동감을 높이기 위해 기게스의 반지와 함께 이 반지를 소개하는 인물로 자신의 친형 글라우콘을 끌어들인다. 당대의 소피스트였던 글라우콘은 대화 상대인 소크라테스 선생에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준 다음 각자의 욕구가 각자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지켜보자고 제안하는 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장치로 기게스의 반지를 떠올린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훌륭한 감시자가 아니므로, 기게스의 반지를 손가락에 낀 사람은 평소에 정의로운 사람이었건 불의를 일삼던 자였건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고 결국은 같은 곳으로 인도될 것이다.

이번 보궐선거를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 사실 중 하나는 많은 유권자가 기게스의 반지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이 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무수하게 써먹은 사람들이나 세력들도 있다. 선거에 후보로 나온, 그리고 이 글이 발표되는 시점에 당선의 영예마저 거머쥐었을지도 모르는 후보들은 이미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무수하게 반지의 보석을 돌려댔을 것이다.

일부 수구 언론과 검찰 세력 역시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바, 자신들의 비행과 범죄 행위가 남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양 살아온 데다가 이제 권력마저 확실하게 손에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틀과 절차 안에서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더할 나위 없이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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