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고대 로마에 등돌린 캄피돌리오 광장의 비밀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유럽인문학기행-이탈리아] 카피톨리노 언덕(3)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뒤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자 유피테르 신은 마침내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로마의 신은 로마를 재앙에서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유피테르는 간통범입니다.”

『신의 도시』를 쓴 3~4세기 기독교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 것은 유피테르 몰락의 선언이었다.

유피테르의 몰락을 공식적으로 실천한 사람은 4세기 중‧후반 공동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와 테오도시우스였다.

신전에 앞서 먼저 사라진 것은 제도였다. 그라티아누스는 대제사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 겸임을 거부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이어져오던 관례를 폐지한 것이었다.

“기독교 황제가 로마 이교도의 제관 역할을 맡을 수는 없다.”

그라티아누스는 또 베스타 신전을 모시는 베스탈 신녀 제도를 폐지하기로 하고 거기에 드는 비용을 국고에서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이교도 신을 모시는 신전 비용을 충당하던 포도밭 등은 몰수해버렸다. 공화정 시대부터 원로원 회의장에 세워져 있던 승리의 여신상은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거했다.

테오도시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의 모든 전통 신앙을 박멸하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로마에서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이교도 제의 거행을 금지한다. 이 조치를 어기는 사람은 목을 자르겠다. 신전에 들어가거나 주변을 지나갈 수도 없다. 모든 이교도 신전은 교회로 바꾸라. 그게 어려우면 신전을 파괴해도 좋다.”

테오도시우스는 종국적으로는 고대로부터 로마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유피테르를 내쫓기로 결심했다. 18세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테오도시우스가 로마를 방문해 유피테르를 로마에서 쫓아낸 이야기를 기록했다.


로마에 간 테오도시우스는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 뒤 의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로마의 종교를 유피테르로 할 것이오? 그리스도로 할 것이오?”

테오도시우스는 로마에 혼자 간 게 아니었다. 수많은 병사가 원로원 안팎은 물론 로마 안팎에 진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피테르를 고집할 원로원 의원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원로원은 유피테르를 로마의 주신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는 결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피테르는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고 누마가 종교를 정비한 이래 지켜온 주신 자리를 잃고 말았다.


테오도시우스는 폰티펙스라는 용어를 로마 주교의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380년 기독교를 로마 제국 공식 종교로 선포하면서 로마와 다마스쿠스 주교를 폰티펙스로, 알렉산드리아 주교를 이페스코푸스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나중에 로마 주교가 교황으로 불리게 된 이후 폰티펙스는 자연스럽게 교황을 일컫는 호칭이 돼 버렸다.

유피테르가 로마의 주신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유피테르 신전의 중요성도, 보호할 필요성도 사라져버렸다. 당연히 이 신전에서는 수시로 약탈이 자행됐다. 5세기 초 호노리우스 황제의 측근이었던 스틸리코 장군은 유피테르 신전의 황금 문을 뜯어갔다. 스페인을 거쳐 아프리카로 건너간 반달족은 로마에 침입해 신전에 큰 피해를 입혔다.

15세기 중엽까지는 그래도 형편이 괜찮았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였던 포기오 브라키올리니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상당히 파괴됐지만 여전히 신전 모양을 그런대로 갖춘 유피테르 신전’이 남아있었다.

신전을 완전히 없애버린 사람은 귀족인 지오바니 피에트로 카파렐리였다. 그는 16세기 캄피돌리오 광장에 카파렐리 궁전을 건설하는 데 사용하려고 신전에서 각종 석재를 떼어냈다. 결국 유피테르 신전은 결국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목동이 소나 양을 몰고 매일 들르는 곳이 됐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이곳을 ‘양의 산’이라는 뜻인 ‘몬테 카프’라고 불렀다.


■포로 로마노에 등을 돌리다


로마인의 삶에서 사라졌던 카피톨리노 언덕이 다시 각광받게 된 것은 엉뚱한 이유에서였다. 1538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에 오기로 돼 있었다. 그를 초빙한 사람은 교황 바오로 3세였다.

교황은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에게 카피톨리노 언덕 재생 사업을 맡겼다.

“로마의 새로운 모습을 황제에게 보여주고 싶소. 카피톨리노 언덕을 다시 단장하시오.”

미켈란젤로가 생각한 재단장의 핵심은 방향 전환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유피테르 신전 등 카피톨리노 언덕의 모든 건축물은 포로 로마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방향을 180도 틀어 모든 건물을 로마 시내와 성 베드로 대성당을 향하도록 만들기로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먼저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교황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무너진 고대 로마 대신 새롭게 발전하는 로마의 미래를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캄피돌리오 광장에는 건물이 세 개 서 있다. 가운데 건물은 콘세르바토리 궁전이다. 고대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이 서 있던 곳이면서 카파렐리 궁전이 만들어진 장소다. 이 궁전 지하에 가면 유피테르 신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캄피돌리오 광장 한복판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이 서 있다. 원래 구리로 만든 높이 3.5m 동상이었다. 대기 오염 때문에 훼손 우려가 커지자 원본은 카피톨리노 박물관 안으로 옮겼다. 광장에 있는 기마상은 1981년에 만든 복제품이다.


기마상은 175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포로 로마노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가 있는 비아 코르소(코르소 거리)의 콜로니아 광장에 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세기 무렵에는 라테라노 대성당 앞으로 옮겨져 있었지만, 미켈란젤로가 캄피돌리오 광장을 만들 때 다시 이전했다.

과거 로마에서는 구리로 황제 기마상을 많이 만들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제정 시대 후기에 각종 기마상을 녹여 동전을 만드는 데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기마상은 중세 시대에 이교도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교회에 의해 대부분 파괴됐다. 지금 완벽한 모양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뿐이다. 교회가 이 기마상을 콘스탄티누스로 오해해 부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정말 유명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있다. 이를 라틴어로 ‘아들로쿠티오’라고 한다. 로마 황제나 장군은 전쟁에 나가기 전이나 전쟁에서 이긴 뒤에 군사들에게 연설할 때 항상 손을 들었다. 병사들도 황제나 장군에게 인사할 때 오른손을 들고 “임페라토르”라고 외쳤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파시즘을 이끈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연하겠다며 각종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로마의 경례도 도입했다. 독일의 나치가 이를 벤치마킹해 ‘하일 히틀러’로 유명한 독일식 경례를 만들어냈다.

유피테르의 몰락을 생각하면서 캄피돌리오 광장을 둘러본다. 로마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지 가운데 가장 깔끔하게 잘 단장돼 있는 곳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만큼 전체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균형감을 갖춘 광장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고대 로마의 향기를 맡거나 유피테르의 목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다. 콘세르바토리 궁전 지하로 내려가면 볼 수 있는 고대 신전의 잔해와 계단 주변에 흩어진 고대 성벽 흔적이 고작이다. 대다수 관광객은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거나, 성벽 흔적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주 날씨 맑은 봄날이나 선선한 가을날 결혼사진을 찍는 신혼부부의 밝은 표정이 언덕과 광장을 가득 채울 뿐이다.

유피테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