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여름날의 태양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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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올해는 장마가 6월이 아닌 7월에 찾아왔다. 장마가 시작되면 창문에 맺히는 빗방울에 시선이 간다. 며칠 전 울주군의 영남 알프스 9봉 가운데 언양에 있는 고헌산에 올랐다. 영남 알프스 주변 산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거나 가까이 있는데 고헌산만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런 탓인지 옛날에는 가뭄이 심할 때 고헌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산 정상에 가까이 가니 빗방울이 나뭇잎을 적시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숲속은 안개가 번져 신비스러웠다. 초록 잎사귀와 부드러운 풀들은 비에 온몸을 맡기는 듯했다. 산속에서 비가 내리면 고립감이 밀려들고 마음 한구석에 살짝 두려움이 올라온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난 듯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미끄러운 숲길을 헤치고 조심스레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는데 여전히 장맛비가 내렸다.

우울과 분노로 내면의 아픔 앓는 시대

치유 않을 땐 육체적 고통도 찾아와

셰익스피어 읽으면 태양처럼 환한 기운

사랑과 행복의 감정 향유코자 노력을

새벽에 창문에 톡톡 부딪치는 빗소리에 잠이 깨어 〈우울한 게 아니라 화가 났을 뿐〉이라는 책을 읽었다. 심리상담가인 알무트 슈말레 리델이 저술했는데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분노의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일상에서 쌓이는 분노를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면 그 감정은 우울로 나타나거나 두통, 가슴 통증, 피부병 등의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난다. 남성은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있지만 분노 표출이 금기시되는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분노가 내면에 쌓여 우울에 사로잡히는 사례가 많다. 제대로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는 여성은 냉소나 자기 비하의 감정에 빠져 주변 사람들에게 왜곡된 방향으로 고통을 줄 수 있다. 기쁨이나 평화 같은 좋은 감정을 지녀야 한다는 부모의 교육이 오히려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 신선하다.

장마가 시작되면 우울하거나 분노의 감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한편 비가 내리면 마음이 더 평온해지는 사람도 있다. 날씨가 달라지면 우리의 마음과 감정도 변화를 겪게 마련이다. 마음의 색깔을 따라 일어나는 고통과 고민의 양상이 다양하기에 불교에서는 ‘108 번뇌’란 말을 한다. 최근의 심리 분석이나 정동 연구에서는 몸과 마음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이 압도적으로 많다. 현대인에게는 육체의 질환만큼이나 심리적 곤경과 어려움이 많기에, 일을 수행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따스하게 공감하는 자질이 필요하다.

오전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자 환한 태양이 바다를 비추고 있다. 하루의 시간 안에서도 날씨는 수시로 변화한다. 뜨거운 태양이 바다를 비추는 한낮 풍경을 보니 셰익스피어가 쓴 시가 생각난다. 16세기 영국의 극작가인 그는 희곡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소네트(Sonnet·14줄로 된 짧은 시)도 많이 남겼다. 4대 비극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런던의 극장가에서 장기 공연되어 ‘셰익스피어 산업’이라 일컬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든든한 후원 하에 그는 영국 문화 산업의 큰 축이 된 것이다.

부산시에서 부산 문화의 발전을 위해 지원하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학·출판 정책에 대해 작가들은 불만이 있다. 매년 출판 지원 신청을 받은 후 작가들을 후원하지만, 책의 출간 기한을 1년으로 한정해 다수의 작가들이 좋은 출판사를 선정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서울·경기 지역의 유명 출판사의 경우 시집이나 소설집은 이미 예약이 차 있어 1년 안에 책을 출간하는 것이 힘든 경우가 많다. 지역 출판사 역시 바쁠 때가 많아 선정한 책의 출간 기한을 2년 혹은 3년 정도로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울문화재단이나 한국연구재단의 경우에도 저서 출판은 2~3년의 기한을 둬 작가나 연구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그래야만 책의 내용과 질이 더 좋아져 부산문화재단의 정책이 진정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쓴 ‘소네트 18번’은 사랑하는 연인을 한 여름날의 태양에 비유한다. ‘당신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당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리라./ 죽음도 자랑스레 당신을 그늘의 지하세계로 끌어들여 방황하게 하지 못하리./ 불멸의 시구(詩句) 형태로 시간 속에서 자라게 되나니./ 인간이 살아 숨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이 시는 살아남아 당신에게 생명을 주리라.’ 그에게 이토록 뜨거운 연애시를 쓰게 한 여인이 궁금하다. 남녀 간의 사랑의 감정은 일종의 질병처럼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매혹이다. 저토록 찬란한 사랑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비법은 무엇일까. 한 여름날의 유혹처럼 사랑의 감정에 흠뻑 젖어 여름휴가를 떠나고 싶다. 살아 있는 동안 최고의 행복을 향유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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