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카불 엑소더스, 부산과 난민의 추억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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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수송기에 깔려 죽고, 비행기에 올라타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는 아프간 난민들. 연일 보도되는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의 탈출 소식은 ‘부산과 베트남 난민의 추억’을 소환한다.


“베트남 분들이 한국 라면을 정말 좋아하셔서 아침 식사로 라면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1993년 부산 월남난민보호소 구호 담당 조호규 씨 회고)


■사이공 함락과 부산으로 난민 수용


귀국지시 긴급전문. 베트남에서 작전 중이던 한국 해군 수송분대는 1975년 4월 25일 오전 해군본부로부터 ‘본전 수령 즉시 구호물자 하역 중지하고 교포탑승 귀국하라’는 긴급전문을 수신했다. 대한민국 해군 귀국지시 긴급전문. 베트남에서 작전 중이던 한국 해군 수송분대는 1975년 4월 25일 오전 해군본부로부터 ‘본전 수령 즉시 구호물자 하역 중지하고 교포탑승 귀국하라’는 긴급전문을 수신했다. 대한민국 해군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이 함락된 1975년 5월 13일 아침. 베트남에 파병됐던 한국 해군 백구부대 소속 상륙함정인 LST 북한함, 계봉함 두 척이 메콩강 일대에서 한국 교민과 베트남 난민 1335명을 싣고 부산항으로 귀환했다. 남베트남의 강력한 저항과 북베트남군의 저지를 뚫은 대한민국 최대 최초의 해외 민간인 수송 작전이었다. 이 중 988명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구조해 온 패전국 ‘정치 난민’들이었다. 이들은 공산 치하에서 살기 싫어 조국을 등진 채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베트탐 탈출에 성공한 한국 해군 LST 계봉호 갑판에 설치된 베트남 난민 천막 모습. 대한민국 해군 베트탐 탈출에 성공한 한국 해군 LST 계봉호 갑판에 설치된 베트남 난민 천막 모습. 대한민국 해군

10일 뒤에는 화물선 쌍용호가 난민 216명을 구조해 23일 부산항에 입항했다. 1975년 5월 2일 사이공 남쪽 해상에서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던 남베트남 해군 소속의 상륙정 옆을 지나던 쌍용호가 구조한 난민들이었다. 상륙정에는 군인, 군무원과 그 가족 등 216명이 있었다. 쌍용호는 이후 태평양 미군기지, 대만, 태국 등의 항구에 기항해 이들을 인계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한국 정부가 귀국을 허용해 극적으로 부산항으로 수송됐다.

‘보트피플’은 이후 계속 유입됐다. 10년 뒤인 1985년 11월 14일. 인도양에서 참치 조업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항하던 ‘광명 87호’가 남중국 공해에서 부서질 듯한 목선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베트남 난민 10여 명을 발견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탈출한 베트남 ‘경제 난민’들이었다. 이미 배에 물이 차 침몰 중이어서, 그날 밤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사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에서도 구조하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으나 전제용 선장은 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료 선원을 설득해 배를 돌려 이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갑판 아래에서 탈진한 어린아이와 임산부 등 무려 96명이 나타났다. 부산 외항까지 도착하는 12일간 참치잡이배는 ‘적십자사 구호선박’으로 바뀌었다. 광명 87호 선장으로 귀국 이후 고향 경남 통영에서 멍게 양식업을 하다가 부산으로 이주한 전제용 씨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베트남 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면서 “당국 지시를 거부한 괘씸죄로 귀국 이후 선장 면허가 정지되고, 실업자 신세까지 됐지만, 지금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구조했을 것이다.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공산화된 조국 베트남을 탈출해 해상에서 표류하다 전제용 선장에게 구조됐던 피터 누엔 씨(Peter Nguyen)가 21년 만에 한국을 방문, 자신을 구조해 준 전제용 씨를 만나 포옹을 하며 감회의 눈물을 흘렸다. 부산일보DB 공산화된 조국 베트남을 탈출해 해상에서 표류하다 전제용 선장에게 구조됐던 피터 누엔 씨(Peter Nguyen)가 21년 만에 한국을 방문, 자신을 구조해 준 전제용 씨를 만나 포옹을 하며 감회의 눈물을 흘렸다. 부산일보DB

구조된 난민들은 난민보호소에서 대기하다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다. 임산부가 부산에서 새 생명을 낳으면서 그가 구한 목숨은 97명으로 늘어났다. 70여 년 전 6·25전쟁으로 인한 피난민으로 이뤄진 ‘피난 도시’ 부산은 36년 뒤 이렇게 보트피플 베트남 난민들과 인연을 맺었다.


■부산에 첫 난민보호소 설립


부산 월남난민보호소에서 월남 패망 6주년 추념식을 갖고 있는 베트남인들. 부산일보DB 부산 월남난민보호소에서 월남 패망 6주년 추념식을 갖고 있는 베트남인들. 부산일보DB

그 97번째 생명이 태어난 곳이 부산 ‘월남난민보호소’다. 1975년 해군 LST에 타고 온 난민들의 부산항 제3부두 도착과 함께 한국 정부는 부산 서구 서대신동 옛 부산여고 건물에 임시체류지를 만들면서 역사상 첫 ‘난민보호소’를 열었다. 쌍용호 보트피플이 합류하면서 난민 수가 1573명으로 늘고, 베트남 보트피플이 계속 증가하면서 정부와 대한적십자사는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1008에 1983㎡ 규모의 월남난민보호소를 운영했다. 조립식 건물 12채, 식당, 세면장 등 편의시설을 갖춘 난민보호소는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당시 갓 수습기자로 입사했던 기자의 기억으로는 그곳은 군 수영비행장 담장 너머 나대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센텀시티 아파트촌 바로 맞은편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수영구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수영 팔도시장 일대로 쇼핑 나온 이들과 맞닥뜨리는 것 자체가 문화충격이기도 했다. 18년간 운영됐던 보호소는 1993년 2월 8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난민 110명이 뉴질랜드로 이주한 뒤 문을 닫았다.

당시 한국적십자사 베트남 난민보호소 구호 및 종결 업무를 담당했던 조호규(현 제주적십자혈액원 원장)씨는 “93년 2월 마지막 남은 난민들을 제3국으로 성공적으로 다 보낼 때, 난민들이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적십자사기 하강식을 하는 장면을 전 세계 언론이 취재했다”면서 “한 시대를 마감하는 행사였다”고 회고한다. 조 씨는 “유엔난민기구(UNHCR)에서 급식비 등 최소 운영비를 지원했지만, 식사 마련 등 대부분의 일은 적십자사 부녀봉사원의 자원봉사로 진행했다”고 술회한다. 제3국으로 정착한 난민들은 이후에도 한참이나 부녀봉사단과 안부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전한다.


부산 수영구 재송동 '월남난민수용소'에 입주한 베트남 어린이들이 명랑하게 뛰놀고 있다. 부산일보 DB 부산 수영구 재송동 '월남난민수용소'에 입주한 베트남 어린이들이 명랑하게 뛰놀고 있다. 부산일보 DB

1975년부터 유입된 베트남 난민들은 한국 현대사 최초로 대규모 난민을 구조하고, 우리 사회가 수용한 경험을 주었다. 베트남 난민 수용을 우리나라가 다문화사회로 진입하는 신호탄으로 평가할 정도다. 또 한편으로는 절박한 냉전체제와 북한의 남침 위협 아래서 정부는 베트남 난민과 공산화의 비극을 함께 다루면서 국가안보와 반공 의식 등을 고무시키는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93년 시설 폐쇄 직전까지 전국에서 안보 궐기대회에 베트남 난민이 동원되기도 했다고 한다. 각종 언론, 대회 등에서 이들은 남베트남 패망의 배경과 원인을 설명했고, ‘자국의 보위는 자국의 힘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을 표현하는 훌륭한 수단이 됐다. 이를 통해 자유, 민주, 인도주의 실현의 주체로서의 한국과 자주국방이나 안보체제의 강화와 사회질서 확보 필요성을 강조하는 역할도 했다는게 역사학자들의 평가다.


■아프간 난민의 대탈출 시작

아시아에서 베트남 패망과 보트피플이 발생한 지 정확하게 46년 만에 아프간 시민들의 ‘카불 엑소더스(대탈출)’가 시작됐다. 아프간에서 20년간 주둔했던 미군의 철수 3개월 만에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다. 소련을 몰아내고 1996년 집권했으나, 9·11 테러의 배후 오사마 빈라덴을 내놓지 않아 2001년 미국에 의해 쫓겨났던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탈레반이 카불을 함락한 뒤 부르카를 쓰지 않은 여성을 총살하고, 채찍으로 시민을 죽이는 사태가 잇따르자 대량 난민 발생이 현실화되고 있다.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이 대거 유입되는 혼란을 겪었던 파키스탄, 터키, 이란 등 주변국과 유럽연합(EU)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각국 정부는 대응에 부산하다. 아프간과 서쪽 국경을 가장 넓게 맞댄 파키스탄엔 이미 300만 명이 넘는 아프간 난민이 거주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아프간 동쪽 이란 역시 국경을 넘어오는 아프간 난민을 위한 임시수용소 마련을 선언했다. 터키도 이란을 통한 아프간 이민자 유입 상황에 직면해 있다. 미국과 독일, 영국 등은 아프간 난민 수용을 뒤늦게 진행 중이다. EU 집행위는 회원국 간 협의를 통한 난민을 분산해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미 아프간 난민은 2000년대 들어 수백만 명이 국경 서쪽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해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 그리스 레스보스섬 난민캠프의 난민(1만 3000명) 중 80%(1만 명)가 아프간 출신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여러 달 동안 파키스탄, 이란, 터키 등 4700km를 이동해 그리스에 도착했다.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분리·독립 운동을 탄압하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는 91㎞ 양국 국경을 통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협력 위험성에 긴장하고 있다.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의 총격에서 살아남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가 주도적으로 아프간 난민들에게 국경을 열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국제적인 여론도 들끓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난민

난민 이주 역사는 인류 문명의 오랜 스토리다. 한반도에 유래된 조상,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도래한 고구려, 백제 유민들 모두 난민의 역사에 포함될 수 있다. 우리도 난민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중국 국공내전을 피해, 중국 국민당 일부도 한국으로 왔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의 베트남, 예멘 난민은 우리가 역사상 최초로 난데없이 맞닥뜨린 난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의 이집트 탈출, 고대 트로이 난민 세력이 중심이 된 로마 건국, 히타이트, 바빌론, 아시리아 및 고대 이집트 등 거대 제국의 역사적 기록에서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국외 탈출을 위해 주민들이 담을 넘어 공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결국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고 공항은 마비됐다. 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국외 탈출을 위해 주민들이 담을 넘어 공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결국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고 공항은 마비됐다. 연합뉴스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특정 사회단체 참여 등의 이유로 인한 박해의 공포를 피해 조국을 떠난 뒤 귀환하지 못하거나 귀환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나라 밖에 있는 자들이다. 무장분쟁이나 종종 자국정부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적 또는 기타 박해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로, 때로는 마을이나 공동체 전체가 되기도 한다. 조국으로 돌아가기에는 위험이 커서 다른 곳에서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유 때문에 난민으로 인정받는다. 유엔은 1951년 총회에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결국, 그 삶은 고달프고, 힘들 수밖에 없다.

난민은 시대가 흐르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추세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하는 경제 난민에서부터, 심각해진 자연환경을 못 이기고 고향을 등지는 기후난민까지 줄을 잇고 있다. 지금 지중해에서 아비규환처럼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 엑소더스’는 난민 역사의 그 자체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봐야 하느냐”고 질타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프간 난민에 대해 “평화적 방법을 통해서만, 아프간의 고통 받는 국민들, 남성과 여성, 노인과 아이들이 그들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상호 존중을 받으며 평화와 안전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고 강론했다. 죽어 가는 이들을 내팽개치고 있는 국제 사회에 대한 따끔한 지적이다.


■대한민국은 난민으로부터 자유로울까?

1975년 부산의 베트남 난민에 이어, 2018년 제주도에서 예멘 난민 문제로 한바탕 법석을 겪었지만, 한반도에서 가장 큰 우려는 북한 탈북 난민 가능성이다. 김미경 전 일본 히로시마시립대 교수(사회학 박사)는 “그 이유가 실정에 의한 내파이건, 외압이건 상관없이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대량으로 이주할 북한 동포들을 염두에 두고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아픈 과거의 문제이자, 당장 현실이며, 조만간 닥칠 운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이탈 난민은 21세기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북한에 자칫 혼란이 발생할 경우 급격하게 쏟아질 탈북민 수용은 대안을 가져야 할 문제라는 지적이다. 만약 북한의 남과 북쪽 국경을 통해 인구가 남한과 중국, 러시아로 쏟아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회 혼란의 발생은 불 보듯 뻔하다. 미·중 경제전쟁과 견제, 동북아시아의 위태위태한 갈등 구조에서 비상시 북한 난민들을 협력적으로 수용 처리 포용할 수 있는 논의나 제도, 외교적 수단은 현재까지 찾기 어렵다. 인류의 수천 년 역사를 되돌아볼 때 난민 문제는 풀기 어려운 문제로 전락했다. 이들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수용하고, 포용하는 길고 어려운 과정을 걸어가야 할 뿐이다. 과거 한국이 베트남 난민을 받아들여 우리 사회에 포용했듯이, 지금은 더욱더 열린 마음으로 난민을 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993년 당시 베트남 난민을 마지막으로 뉴질랜드로 떠나보냈던 조호규 제주혈액원 원장은 “자기 나라가 패망해 모든 것을 잃고, 몸만 빠져나온 그들은 아픔이 많았다”면서 “그 아픔을 국민 성금이나 위로 물품과 함께, 자원봉사자들이 정서적인 위로를 해주고, 온정을 베풀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고, 그들을 행복하게 했다”고 회고한다. 아프간 대량 난민 사태는 나라 잃은 서러움, 국가에 대한 소중함. 이념 갈등으로 인한 삶의 피폐 등 2021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좀 더 성찰하고, 행동하는 계기가 될 듯하다.


1993년 1월 29일 문을 닫게 된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베트남난민보호소에서 태극기와 적십자기를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1993년 1월 29일 문을 닫게 된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베트남난민보호소에서 태극기와 적십자기를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참고: 베트남 난민 동아시아 수용 역사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1975~1995년 20년간 약 140만 명이 베트남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이 베트남 난민을 수용했다. 사이공이 함락된 1975년 4월부터 1992년까지 한국은 3000여 명을 임시 수용했으며 그중에서 600여 명이 한국 국적을 받았다. 일본은 1만 8000여 명을 받아서 8600여 명이 일본에 남았다. 중국은 26만여 명을 수용하여 대다수인 25만여 명 정도가 정착했다. 홍콩은 20만 명이 넘는 난민을 임시 수용했으며, 1500여 명을 정착시켰다. 결국, 동아시아 3국과 홍콩은 18년간 베트남 난민 48만 1000명을 구호하고 그중 54%인 26만 700여 명을 자기 나라에 정착시켰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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